우크라이나
 

2022년 여섯 번째 프라임 레터

안녕하세요. 북저널리즘 CCO 신기주입니다. 

“우크라이나인들 대부분은 하루 전까지도 전쟁이 정말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급히 대피한 한국인 취재원의 증언입니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24일 오전 5시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시민들은 이른 새벽 하늘에서 섬광이 번쩍이는 걸 목격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에 남은 가족의 안전을 우려해서 익명을 요구한 한국인 취재원에 따르면, 키예프 시민들은 바로 전날 밤까지도 다음 날 아침 출근과 등교 준비를 했습니다. 

2월 24일 이른 새벽 러시아군은 키예프를 겨냥해 160발 이상의 순항미사일과 탄도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러시아가 이스칸데르 순항미사일로 발사했다는 건 사실상 키예프 주요 시설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시도했다는 의미입니다. 순항미사일은 간단히 말하면 탄두가 달린 무인기입니다. 속도가 느린 대신 저고도 비행과 정밀 타격이 가능해서 침묵의 암살자라고 불리죠. 24일 아침 눈을 뜬 키예프 시민들이 목격한 건 자객 러시아가 조국 우크라이나를 암살하려는 장면이었습니다.

취재원은 말합니다. “침공 하루 전인 2월 23일에도 우크라이나는 평화로웠다. 일단 사재기가 없었다. 러시아가 설마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겠냐는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운 증언입니다. 지난 2월 12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2월 16일에 침공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때 이미 자국민 대피도 본격화했죠. 러시아군 20만 명이 진작에 우크라이나를 3면에서 포위한 상태였습니다. 전 세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우려하고 있었죠. 취재원에 따르면, 적어도 당시 시점에선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우크라이나가 처한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원인은 우크라이나 정치입니다. 우크라이나 정치는 21세기 내내 친서방과 친러로 갈라져서 내전에 가까운 정쟁을 벌여왔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한국과 서방에서의 평가가 극과 극을 오가고 있는 현직 젤렌스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닙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집권 한 달 만인 2019년 6월 5일 TV채널 〈1+1〉과의 인터뷰에서 “EU와 나토 가입은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노선이며 이는 헌법에 명시돼 있다”고 선언합니다. 젤렌스키 정권 스스로 사실상 반러 친서방 정부라고 선언한 셈이었죠. 치명적 실수였습니다. 

사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임자인 페트로 포로센코 전 대통령이나 라이벌인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처럼 노골적인 반러 친서방 노선까진 아니었습니다. 정치 경력이 전무한 희극 배우 출신이었으니까요. 젤렌스키 대통령이 문제의 인터뷰를 한 TV채널 〈1+1〉이 사실상 젤렌스키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줬다는 평가를 받는 드라마 〈인민의 종〉을 제작한 방송사입니다. 코미디언 출신인 건 상관 없습니다. 정치 경력이 없는 것도 상관 없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치명적 약점은 외교 경험이 전무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반면에 국민이 원하는 걸 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라는 이상적인 신념만큼은 투철한 순수한 정치인이었죠. 

어쩌면 TV모니터에서 걸어나와서 현실 정치에 투신하기로 결심했을 때 젤렌스키 대통령은 정말 인민의 종의 되겠다 결심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러시아군이 키예프를 포위한 상태에서도 미국의 탈출 제안을 뿌리치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 있는 행동만으로도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웅입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죠. “나는 평생 동안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었다. 이제 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최소한 울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그렇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울지 않게 만들려면 정치지도자가 때론 우크라이나인들이 원하는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정치의 역설을 이해하진 못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서유럽의 일부가 되기를 정말 간절히 원합니다. 또 다른 익명을 요구한 우크라이나 취재원은 이렇게까지 설명했습니다. “우크라이나 2030세대의 꿈은 우크라이나를 떠나 유럽에서 사는 것이다. 유럽은 우크라이나에선 절망뿐인 청년들에겐 하나의 꿈이자 희망이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유럽의 일부이고 싶어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열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민의 종으로서 국민의 염원을 실현시켜주겠노라 약속했던 겁니다. 
“2020년 무렵부터 우크라이나 사회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 시작했다. 일단 일상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배격했다. 우크라이나인들 상당수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 두 나라 언어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러시아어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취재원의 증언입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향은 다들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반면에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해야 한다는 의견은 묵살당하기 일쑤였다. 사석에서도 친러 성향 의견은 절대 밝혀선 안 됐다. 무언가 사회가 균형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유로마이단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유로마이단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2014년 친러정권이었던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축출했던 정치 혁명을 말합니다. 유럽광장이라는 뜻의 유로마이단이라는 이름부터가 혁명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유로마이단 혁명은 내전에 가까운 유혈 혁명이었습니다. 이때도 혁명의 발단은 친러냐 친서방이냐였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원래부터 바닥을 쳤던 경제가 지하실까지 추락하자 우크라이나는 차관이 절실해졌습니다. 

선택지는 2개였죠. 하나는 IMF였습니다. 하나는 러시아였습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 차관을 선택합니다. 야누코비치의 지지 기반은 러시아계가 다수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남부였습니다. 그런데 야누코비치가 러시아 차관을 선택한 건 꼭 그것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IMF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신자유주의를 요구했습니다. IMF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어떤 것인진 우리도 잘 알죠. 반면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별다른 요구를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전략적 균형을 유지해주길 원했습니다. 야누코비치가 러시아 차관을 지렛대로 우크라이나 국민의 친서방 반러 여론을 다독일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죠. 야누코비치는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외교적 지원을 등에 업고 국내정치에서 반대파 숙청에만 열을 올렸죠. 친서방 외교노선을 주장하는 정적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를 부패 혐의로 투옥시킵니다. 나중엔 살인 교사 혐의까지 덧씌우죠. 파렴치한 정치 보복이었습니다. 정치적 상징에 대한 정치적 보복은 반드시 정치적 분노와 정치적 분열의 정치적 원인이 됩니다. 

율리아 티모셴코 총리를 투옥시킨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반러 친서방을 염원하는 대중 정서와 만나서 대폭발합니다.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가 상호 작용을 하면서 국가 전체를 거대한 진동 상태로 몰아넣기 시작한 겁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경제적 속국이 되고 유럽의 일부가 되는 길이 영영 막혀버릴 거라고 우려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봉기합니다. 키예프에선 정부군과 혁명군 사이의 시가전이 벌어집니다. 탄핵당한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도망칩니다. 유로마이단 혁명은 우크라이나 국민들 스스로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일부가 되는 걸 가로막는 국내정치적 장애물을 제거해버린 사건입니다. 
정작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건 율리아 티모센코 전 총리가 아니라 페트로 포로센코 대통령이었습니다. 유로마이단 혁명을 통해 국민이 표출한 요구는 반러와 친서방이었습니다. 반러는 야누코비치를 축출해서 러시아로 쫓아내는 것으로 어느 정도 달성했습니다. 그런데 야누코비치한테 정치 보복을 당했던 율리아 티모센코는 대선에서 러시아와의 전면전을 주장하고 나섰죠. 국내 정치에서 당한 앙갚음을 국제 정치로 하겠다는 소리였습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반러를 상징하는 율리아 티모센코 대신 친서방을 상징하는 페트로 포로센코를 선택합니다. 

유로마이단 혁명이 촉발한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진자 운동이 확실히 서방쪽으로 쏠리는 순간이었죠. 포로센코 전 대통령은 키예프 시가전에서 직접 총을 들고 민병대를 이끌면서 국내외 언론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그 인물입니다. 별명이 초콜렛왕입니다. 대형 과자 회사를 소유한 기업인이거든요. 정치에 입문하고 나선 외교부 장관과 경제부 장관과 중앙은행장을 두루 거쳤습니다. 처음엔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가 교차하면서 발생한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진동을 멈출 수 있는 인물 같았습니다. 

포로센코는 극우민족주의자였습니다. 하필 스테판 반데라를 공공연하게 지지했죠. 스테판 반데라는 우크라이나 국내에선 독립 영웅일지 몰라도 우크라이나 바깥에선 인종 학살자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협력해서 우크라이나에서만 2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죠. 대신 나치 독일의 힘을 이용해서 소련을 우크라이나에서 몰아냈습니다. 포로센코는 국내 정치에선 반데라를 추앙해서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국제 정치에선 러시아와 서방 양쪽 모두로부터 고립을 자초했죠. 나토 가입을 추진해서 러시아와 갈등을 빚었고 인종학살자를 영웅시해서 서방의 공분을 샀죠. 한국인 취재원이 “우크라이나가 균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고 느끼게 만든 사회 분위기는 포로센코 집권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전 대통령이 소총을 들고 나선 장면만 보고 용감하다고 칭찬하기엔 무언가 뒷맛이 개운치 않습니다. 

포로센코 대통령은 2019년 2월 급기야 EU와 나토 가입을 명문화한 개헌안까지 통과시킵니다. 국내 정치용으론 민족주의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 있는 이슈였습니다. 국제 정치용으론 외교 협상에서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워버리는 일이었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좌절된 건 러시아의 반대 탓이 크지만 포로센코 대통령의 극우민족주의 탓도 있습니다. 나토는 한 나라가 침공당하면 다른 나라들이 자동으로 전쟁에 뛰어드는 상호방위조약입니다. 우리 민족이 우월하다고 내심 믿는 나라를 위해 함께 싸워주고 싶어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힘이 없는 나라의 민족주의가 주변국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 있다는 현실을 우크라이나 전쟁은 보여줍니다. 국제 정치에서 애국주의는 한낱 정신 승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젤렌스키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선택은 외통수에 가까웠습니다. 젤렌스키는 유대계입니다. 대통령을 극우민족주의자에서 유대계 코미디언으로 바꿔서라도 서방으로의 전진도 러시아로의 후진도 안 되는 진퇴양난 상황을 타계해보려고 했던 겁니다. 젤렌스키의 배후에 역시 유대계인 금융재벌 이고르 콜로모이스키가 있다는 게 큰 문제가 안 된 이유입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정치적 선택에 문제가 있었다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에게 투표하면서 바실 페트로비치 홀로보로드코를 뽑는다고 착각했다는 겁니다. 바실 페트로비치 홀로보로드코는 젤렌스키를 국민영웅으로 만든 드라마 〈인민의 종〉의 주인공입니다. 한국인 취재원은 〈인민의 종〉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1편만 봐도 판타지라는 걸 모를 수 없을만큼 유치했다. 그런데 주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과몰입했다.”

민주주의는 거대한 환상체일지도 모릅니다. 이상적인 정치인과 그런 정치인을 알아볼 수 있는 이상적인 유권자가 있는 민주정치는 민주주의가 발명된 아테네에서도 불가능했습니다. 민주정치의 최선은 본질적으로 최악에서 차악을 고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크라이나 민주주의는 2004년 오렌지 혁명부터 거의 20년 동안 차악과 차악의 싸움이었습니다. 오렌지 혁명은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열망이 처음으로 분출된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친서방 성향의 야당 정치인 빅토르 유셴코가 처음 대통령으로 당선됐죠. 정작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겠다고 등장했던 대통령들은 하나 같이 실망과 절망만 안겨주고 차례차례 몰락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대선은 외교 노선과 권력 다툼이 교차편집된 진영 대결이 됐고 네거티브만 난무하는 비호감 선거가 됐죠. 끝내 우크라이나 민주주의는 현실보단 환상을 선택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젤렌스키 대통령이 탄생했죠. 젤렌스키 대통령은 취임식날 집에서 대통령궁까지 걸어갑니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인민의 종〉 속 바실 대통령의 현신이었죠.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환상이 악몽으로 바뀌는 데는 3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의 현직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이 모두 우크라이나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우크라이나 스캔들의 도화선을 제공한 겁니다. 발단은 바이든 대통령의 사고뭉치 차남 헌터 바이든의 부정부패 혐의였습니다. 헌터 바이든은 2014년 5월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기업 부리스마 홀딩스의 사외이사를 맡습니다. 월급만 우리 돈으로 6000만 원이 넘는 고위직이었죠. 당시 부리스마 홀딩스는 페트로 포로셴코 정부로부터 부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부리스마 홀딩스의 창업자 미콜라 즐로체프스키는 친러 정부였던 야누코비치 정권에서 천연자연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정권이 친러에서 반러로 바뀌자 곧바로 검찰의 표적이 됐죠. 즐로체프스키는 영악하게도 헌터 바이든을 방패막이로 삼았습니다. 헌터 바이든이 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부통령이었던 아버지를 움직여서 포로셴코 정부의 검찰 수사를 저지시키게 만들었던 겁니다.

실제로 바이든 부통령은 2015년 12월 키예프를 방문했을 때 부리스마를 수사하고 있던 빅토르 쇼킨 검찰총장을 해임시킬 것으로 요구합니다. 우크라이나가 거부할 경우 미국이 제공할 10억 달러의 대출을 보류하겠다고 협박하죠. 당시 바이든 부통령은 오바마 행정부의 우크라이나 전략을 총괄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의 일부가 되려던 포로셴코 정부 입장에선 우크라이나의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나 다름 없었습니다. 절대 거슬러선 안됐죠. 결국 우크라이나 의회는 2016년 3월 빅토르 쇼킨 검찰총장을 해임시켜버립니다. 당연히 부리스마에 대한 수사는 중단됩니다. 헌터 바이든은 10억 원 이상의 임금을 챙긴 다음 2019년 부리스마 사외이사직에서 물러납니다.

이런 치명적 약점을 가진 바이든 부통령이 뜻밖에도 트럼프 대통령과 2020년 대선에선 맞붙게 되면서 문제가 꼬여버립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의 우크라이나 약점을 쟁점화시키려고 시도한 겁니다.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이용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7월 25일 오전 9시부터 9시33분까지 30분 정도 젤렌스키 대통령과 전화 정상회담을 합니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바이든과 아들에 대해 조사를 해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합니다. 그런데 젤렌스키는 전화 정상회담에서 이렇게 대답해버립니다. “다음 검찰총장은 100퍼센트 내 사람이 될 것이다. 특별히 바이든 아들이 재직했던 회사에 대해 조사할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앞으로 미국의 석유를 사겠다”고까지 약속합니다.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구매도 중단하겠다고 미국 대통령한테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셈이었습니다. 두 가지 약속은 만일 공개된다면 바이든과 푸틴 모두를 자극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 내용이었습니다. 젤렌스키는 트럼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실 지난번에 미국에 갔을 때 트럼프 타워에 머물렀었다”고 아부까지 떱니다. 자신과 트럼프는 전형적인 정치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까지 말하죠. 젤렌스키 대통령은 “당신은 우리에게 훌륭한 스승이다”고 말합니다.

역시나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통화내용은 2019년 9월 18일 백악관 내부고발자를 통해 언론게 공개됩니다. 워싱턴 외교가에 비밀이 없다는 사실을 외교 경험이 전무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몰랐습니다. 미국 정치의 박빙 구도로 볼 때 자신이 트럼프와 바이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약소국의 대통령이라는 사실도 망각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진작에 망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더 참담한 건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와의 호형호제 통화가 끝난 직후 우크라이나 원조 자금 집행을 보류시켜버렸다는 현실이었습니다. 트럼프는 처음부터 젤렌스키를 도울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원래 주려던 원조금을 오히려 묶어서 자신에게 더 매달리게 만들 궁리만 했죠. 트럼프는 사악합니다. 그런데 국제 정치판은 원래 사악합니다. 트럼프 같은 사악한 악당들만 살아남는 전쟁터죠. 현실은 드라마와 달랐습니다.

인민의 종을 종처럼 이용한 건 트럼프 대통령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 사이의 전화통화를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비화시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바이든 전 부통령의 약점을 쥐려고 권력을 남용했다고 공격하죠. 젤렌스키 대통령을 트럼프 탄핵의 지렛대로 이용합니다. 덕분에 바이든의 헌터 바이든 스캔들은 묻힙니다. 바이든은 자신이 우크라이나 검찰 총장 해임을 요구한 사실을 인정합니다. 헌트 바이든과의 관련성은 부인합니다.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사법 개혁을 요구했던 것으로 정리되죠.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에서 불편한 존재가 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탄핵소추 당했다가 2020년 2월 상원 표결에서 고작 4표 차이로 가까스로 살아남았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죠. 2020년 11월 대선에서 바이든 민주당 대통령이 당선되자 젤렌스키 대통령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트럼프를 도와서 바이든 대통령의 등에 칼을 꽂으려고 했었으니까요. 

솔직히 바이든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전략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지독하게 이해타산적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군사적으로 러시아를 막으려면 대공방어체계 구축이 필요했습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입증된 사실이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전투기와 미사일 공격에 속수무책입니다. 이걸 막은 게 오바마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입니다. 두 대통령 모두 우크라이나에 패트리어트 미사일 같은 첨단방공무기를 제공하는 걸 거부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언제 러시아로 다시 넘어갈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죠. 우크라이나 극우민족주의자들의 손에 미국산 무기가 들어가는 건 더 불안했을 겁니다.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가 교차하며 진자 운동을 거듭하는 우크라이나 특유의 파동 정치가 동맹 하나 없는 지금 우크라이나의 처지의 원인입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임자들과 달리 진심으로 미국의 동맹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젤렌스키의 선의가 우크라이나를 더욱 군사적 외교적으로 고립되게 만들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습니다. 
한국 시각으로 2월 28일 현재 한국인 취재원이 텔레그램을 통해 수신한 우크라이나 현지 분위기는 공포 그 자체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러시아의 열압력탄이다.” 진공폭탄이라고도 불리는 열압력탄은 시가지전에서 대량 인멸 살상용으로 쓰이는 무기입니다. 열압력탄은 바로 폭발하지 않습니다. 탄착지점에서 분말탄약과 가연성 액체가 혼합된 분무운을 사방으로 뿌립니다. 그리곤 폭발합니다. 분무운이 타들어가면서 수백 미터 반경으로 고열과 고압을 발생시킵니다. 그렇게 사람의 호흡기를 뭉개고 태웁니다.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 열압력탄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칸데르 미사일과는 차원이 다른 인명 살상용 무기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속도전에 실패한 건 사실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셌기 때문이죠. 문제는 러시아는 진짜 전력은 아직 내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인다면 러시아군은 진짜 충격과 공포를 무기로 사용할지도 모릅니다. 열압력탄으로 민간인들의 전의를 꺾고 특수 부대를 투입해서 우크라이나 정부를 전복시키는 작전입니다. 한국인 취재원은 텔레그램으로 전해온 소식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도 지금의 러시아 군인들이 그저 솔저에 불과하다는걸 알고 있다. 그런데 키예프 전역엔 진짜 무서운 러시아군이 올 거라는 공포가 팽배하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번 전쟁이 제발 잔인한 전쟁으로는 변모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실제로 리틀 그린맨이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에서 목격됐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리틀 그린맨은 계급도 소속도 얼굴도 없는 러시아 특수 부대를 말합니다. 2014년 크림 침공 당시에도 리틀 그린맨이 등장했었습니다. 리틀 그린맨은 미군조차 까다로워하는 러시아 전력입니다. 재래전과 공중전과 전자전이 모두 가능한 하이브리드 특수 부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각,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접경에서 열리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회담은 이번 전쟁의 고비가 될 전망입니다. 협상이 실패하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두려워하는 더 잔인한 전쟁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지금은 젤렌스키의 스파르타쿠스 모멘트다.” 〈CNN〉의 저널리스트 마이클 스메코니쉬는 지금 우크라이나의 전시 상황을 스파르타쿠스 모멘트로 정의했습니다. 개전 5일 만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글로벌한 시각이 극적으로 변했다는 걸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스파르타쿠스 모멘트란 명배우 커그 더글라스가 주연한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한 장면을 말합니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제국에 맞서 싸웠던 노예 검투사죠. 압도적인 로마군에 반란군이 모두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로마군은 누가 스파르타쿠스냐고 묻습니다. 스파르타쿠스가 나서지 않으면 모두를 차례로 죽이겠다고 협박하죠. 스파르타쿠스가 외칩니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반란군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 일어서더니 외치기 시작합니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스파르타쿠스 모멘트입니다. 

젤렌스키는 전쟁을 막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미숙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용감했기 때문입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롯한 우크라이나 정부가 수도 키예프에서 항전을 계속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도 하나둘 일어서고 있습니다. 한국인 취재원은 말했습니다. “평소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외치던 사람들은 오히려 지하 방공호에 숨어 있다고들 한다. 대신 평소엔 친러든 친서방이든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었던 중도층들이 무장을 하고 거리로 나서고 있다.” 결사항전을 하는 젤렌스키 대통령 덕분입니다. 모두가 “나는 우크라이아인이다”라고 외치기 시작한 겁니다. 이런 여론 반전 덕분에 우크라이나와는 한사코 거리를 두고 싶은 바이든 대통령마저 젤렌스키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당장 급한 대로 4200억 원 정도의 군사원조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평화를 이야기할 땐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을 불사하자 모두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을 국제 무대에서 시종일관 패싱했던 푸틴 러시아 대통령조차 어쨌든 개전 이후 처음 우크라이나와의 협상을 승인했습니다. 잔인한 전쟁을 막으려면 잔인한 전쟁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살리려면 우리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겠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소리로 들리죠. 국민과 나라를 지키려면 반드시 필요한 소리입니다. 젤렌스키의 스파르타쿠스 모멘트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도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반전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전시에 리더의 역할은 전쟁의 판도를 바꿀만큼 결정적입니다. 전시에 나라를 위해 국민에게 죽음을 각오해달라고 요구하려면 그럴 자격을 갖춘 리더가 필요합니다. 역사는 평화시엔 최악의 리더가 전시엔 최고의 리더가 되는 사례도 자주 보여줍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처칠입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평화시엔 최악의 리더였지만 전시가 되자 최고의 리더가 됐습니다. 이미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의 처칠로 불리고 있죠. 우크라이나 민주주의는 무수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전시 대통령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민주주의에 잘못된 선택만 있었던 건 아니라는 진실을 웅변합니다. 

처질 같은 리더들이 다키스트 아워에 보여주는 스파르타쿠스 모멘트는 전쟁의 성격도 바꿔놓습니다. 처칠은 2차 대전을 선악의 대결로 재정의했습니다. 젤렌스키로 인해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침략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독립 전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내내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탈러시아화가 결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라는 형태로 폭발한 셈입니다. 이런 국내 정치적 의미 말고도 국제 정치적 의미도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글로벌 맹주의 시대에서 지역 맹주의 시대로 다극화되고 있습니다. 동유럽의 러시아와 동북아의 중국이 부상하면서 예정된 전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상징되는 미국 민주주의의 쇠퇴 양상이 다른 지역 관련 위기에서도 반복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재팬 게이트나 대만 스캔들로 미국의 힘이 아시아 역내에서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시진핑의 대만 침공도 무리수만은 아닙니다. 푸틴과 시진핑이 처한 국내 정치적 상황은 유사한 점이 적잖습니다. 장기 집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푸틴이 소비에트 재건을 명분으로 삼았다면 시진핑은 대중화 재건이 핑계입니다. 청일 전쟁으로 대륙으로부터 분단된 대만을 수복하는 것이야말로 시진핑의 가시적 목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푸틴에게 일격을 가한다면 예정된 전쟁의 판도가 달라집니다. 역내 패권을 견제할 힘이 과거의 글로벌 패권인 미국이 아니라 역내 국가들한테도 어느 정도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니까요.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역내 패권국을 견제하면서 자유존립과 경제번영을 추구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 태어난 국가들을 위한 대리전이죠. 그 중엔 대한민국도 포함돼 있습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푸틴이 악마고 평화가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만의 하나 예정돼 있을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진핑의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작정이라면 먼저 한반도의 위기 수준을 높여놓아야만 합니다. 주한미군을 묶어둬야 하기 때문입니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시진핑의 대만 침공이 블랙스완일거라는 가설을 깨버렸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패권국가로서 미국의 쇠퇴가 진행 속도의 문제일 뿐 추세라는 사실도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온전히 지켜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 비스 파켐, 파라 벨룸 Si vis pacem, para bellum.” 로마의 병법가가 남긴 말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슬픈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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