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 핸디캡
3화

김완혁; 방송에서 편집된 말들

김완혁은 한 다리로 춤을 추는 비보이다. 2013년 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은 것이 고등학생 때 포기한 비보잉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고향 강원도 원주를 떠나 서울에 정착해 7년간 10여 개의 직장에서 영상 편집, 촬영 보조, SNS 채널 관리, 디자인 등 다양한 업무를 맡았다. 2020년부터는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에서 모델 활동을 겸하며 우리금융그룹 ‘우리 동네 선한 가게’, 앱솔루트 보드카 ‘WE CELEBRATE TOGETHER’ 등의 CF에 출연한 바 있다. 현재 댄스 크루 부블리검프스(Bubbly Gumps) 소속으로 활동하며 유튜브 채널 ‘곰감동님’을 운영 중이다.

SBS 〈스타킹〉, KBS 〈사랑의 가족〉 등 다수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나 방송 때마다 ‘대단한 장애인’으로 비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꿈과 목표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예전에는 춤을 잘 추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춤추는 사람이 되려 한다.

기회의 땅 서울로


낮에는 공익 근무, 밤에는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다. 소집 해제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쯤 나는 이상하리만치 큰 자신감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조용했던 내게 스물네 살, 갑자기 찾아온 성격 변화로 이때만큼은 누군가 싸움을 걸어 와도 다 이길 수 있겠다는 무모함이 있었다. 아마 같이 일하는 동료나 친구들이 다들 나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아, 내가 잘난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오토바이는 절대 안 된다는 어머니 말은 듣지 않고 열심히 모은 돈 80만 원으로 중고 스쿠터를 사서 타고 다닌 지 일주일 정도 됐을 때였다. 새벽 늦은 시간, 아무도 없는 강원도 원주의 강변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최고 속력으로 달려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어가는 계기판과 도로를 번갈아 보던 중 직진 도로만 펼쳐지리라 생각했던 나는 예기치 못한 커브길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뒤로는 차가운 도로 바닥의 끔찍한 기억뿐이다.

오토바이 사고는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일 만큼 위험한 사고라는데, 이날 나는 인도의 경계석을 밟고 튕겨 나가 앞에 있던 전봇대에 다리를 심하게 부딪혔다. 그렇게 내겐 일어날 리 없을 것 같던 사고가 일어났고,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다리 하나를 잃었다.

제대 후 계획은 대학 생활을 잘 마친 후 회사에 들어가 평범한 사무직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애인이 되자 복학부터 걱정이었다. 학교의 높은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 막막했고, 교수님과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창피했던 것 같다.

수술 후 입원 중 다른 환자들로부터 장애인이 되면 연금도 나오고, 의족 비용의 80퍼센트를 나라에서 지원해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퇴원 후 알아보니 나는 지체 장애 3급으로 분류됐고 장애인 연금은 2급부터 나왔다. 나의 의족은 1000만 원으로 견적이 나왔지만 국가 지원금은 200만 원 정도였다. 의족 가격의 80퍼센트 국가 지원은 먼 과거의 정책이었던 것이다. 사람들 얘기만 듣고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나는 실망을 많이 했었다.

또 입원해 있을 때는 나중에 취업할 자신이 있었다. 많은 대기업에 장애인 일자리가 있다 하니 쉽게 들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애인 구직 사이트 ‘워크 투게더’에 올라온 대부분의 업무는 시설 청소나 경비 등 그때의 나로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들뿐이었다. 또 아직 거동이 불편해 내가할 수도 없는 일들이기도 했다. 두세 달간의 걱정과 고민이 계속되자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게임 캐릭터를 반듯하게, 육성법대로 키우는 것처럼 나라는 캐릭터의 능력치가 실수로 잘못 찍혀 버렸다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등학교 1학년부터 계속해 왔던 춤, 비보잉을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물다섯, 춤을 다시 시작하기엔 나이도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미 많은 걱정을 끼친 가족들에게 춤을 추겠다고 하기엔 염치가 없었다.

퇴원하며 용기가 필요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 고민하다 일단 큰 캐리어에 짐을 쌌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살던 할머니 댁이 있는 강원도 원주를 떠나 서울에 가기로 결정했다. 회사 취업이든 비보잉이든 기회는 서울에 많기 때문이다. 오른발엔 의족을 차고, 왼팔에는 목발을 짚고 버스를 탔다. 함께 춤추던 형님의 잘 다녀오라는 배웅을 받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 혼자 몰래 좀 울었다. 힘들게 결심한 만큼 멋지게 살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스물여섯 살까지 난 혼자 살아 본 경험이 없었다. 온전히 내 능력으로 살아 보고자 나온 것이었기에 바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자격증 두 개를 따두었다. 컴퓨터 그래픽 기능사와 웹 디자인 기능사로 둘 다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주로 쓰는 자격증이었다. 대학에서 디자인 관련 학과를 전공했기 때문에 그나마 자신 있는 자격증이라 금방 딸 수 있었다.

내가 구직할 때 중요하게 본 두 가지는 디자인 직무를 하는 것과 일하는 시간이 적은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춤을 추기 위해 생활비를 벌고자 일하는 것이었으니 연습 시간이 보장되는 게 중요했고, 일반 회사원처럼 긴 시간 일하긴 힘들었다. 많은 월급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원하는 조건이 아니라도 합격이 되면 일단은 다니고 보는 성격이라 취업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1년을 못 넘기고 퇴사한 일도 많았다.

7년 동안 꽤 많은 취업과 퇴사를 경험했다. 나는 조용하고 미련한 편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에 애를 먹기 딱 좋은 성격이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얘기하지 못해서 혼자 속을 썩이다 갑자기 퇴사하는 일이 많았다. 공무원 학원의 강의 촬영, 작은 벽화 회사의 사무 보조, 여행사의 디자인팀 사원, 스포츠 의류 회사의 모델 겸 그래픽 디자이너, 대기업 인터넷 쇼핑몰 재택 모니터링 업무, 공연 전문 회사의 댄서 겸 그래픽 디자이너 등 여러 직장을 거쳤다. 대체로 그래픽 디자인직을 지원했지만 이렇다 할 경력이 되는 일들은 없었고, 막상 일을 시작하면 디자인 업무 외에 기타 사무 보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6년 스물일곱 살, 나는 장애인 전문 여행사를 목표로 하는 스타트업을 다니고 있었다. 당시 나는 첫 자취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서울은 아니지만 지하철로 15분 정도면 홍대입구역에 갈 수 있는 서울과 일산 사이 화전동이란 동네였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5만 원, 화장실과 싱크대가 함께 있는 작은 방이었다. 월급은 150만 원, 서울 청계천 쪽 큰 빌딩에 사무실이 있었고 깨끗한 사무실에 내 책상까지 있으니 이전 직장들과는 다르게 꼭 제대로 된 회사원이 된 것 같았다.

직원들은 일곱 명, 그중 나는 디자인팀의 사원이었다. 모두가 일에 능숙한 프로처럼 보였고 나만 어리숙한 것 같았지만 그런 티는 내지 않으려 했다. 전 직장에선 나이가 많으신 사장님과 작은 사무실에서 두 명만 일했기 때문에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 여럿이 같이 일하게 돼서 참 좋았다.

콘텐츠 디자인직으로 입사해서 주 업무는 페이스북 채널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름 성실히 일했고 다른 직원분들과도 재밌게 지냈다. 하지만 5개월 후 직장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디자인팀장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분 쪽에서 내가 작업한 결과물이 부족하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분은 어느 날 나를 따로 불러 일을 적게 하고 시간이 되면 다른 직원들보다 먼저 퇴근한다며 불만을 얘기했다. 이후로도 갈등은 깊어져 그분이 나 때문에 퇴사한다는말을 들었다. 얼마 후 대표님은 퇴근하던 나를 쫓아와 사람 구하기가 어려우니 사내 문화를 잘 좀 부탁한다는 얘기를 했다.

그 후 사람들과 잘 지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고 내가 생각해도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내 모습이 많이 부자연스러웠다. 당시 나는 장애인 취업 지원 인력으로 몇 개월간 나라에서 월급을 지원해 주는 시스템으로 입사했었다. 이 일로 인해 나의 취업을 관리하는 센터에서 담당자분이 회사를 찾아오셨고, 나는 전 직원과 한 명씩 개별 상담을 해야 했다. 모두에게 참으로 불편한 상황이었다. 이때쯤 처음으로 우울증을 경험했다. 두세 달간 병원 진료를 받으며 겨우 나아졌지만 6개월간 일했던 이 회사는 그만뒀다.

2019년 서른 살, 내 여섯 번째 직장은 공연 전문 회사였다. 당시 내 집은 서울 중랑구에 위치한 보증금 300만 원, 월세27만 원의 반지하 방이었다. 당시 알고 지내던 한 공연 회사 대표님께 연락해 일자리가 있는지 여쭤봤다. 월급은 200만 원, 월급을 줄이고 적게 일하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회사의 소개 자료를 디자인하는 업무로 나는 일을 시작했다.

직원 대부분이 댄서였고 사무실이 연습실 겸용이라 업무를 마치면 춤 연습을 할 수 있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월급을 받으며 일하니 현실은 바람 같지 않았다. 단체 생활에서 개인 시간을 갖는 건 이기적인 행동이라 다른 직원들에게 신경 쓰이지 않도록 조심했고, 모두가 퇴근한 뒤 나 혼자 사무실에 남아 연습을 하는 엄청난 열정은 잘 생기지 않았다.

회사가 인천이라 출퇴근이 힘든 점 때문에 두세 달간은 월세가 40만 원인 모텔 달방에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잠, 회사, 잠, 회사의 루틴을 반복했다. 춤을 출 시간이 부족했다. 직장 동료인 동시에 비보잉 크루 멤버인 사람들과 거의 모든 생활을 함께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있었다. 같이 춤추는 형, 친구, 동생 관계는 수평적이지만 일을 할 때마저 너무 수평적이니 두 관계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꼈다.

물론 이 회사에서 1년 반 정도를 일하며 능력과 성과도 많이 보였다. 영상 편집, 촬영 보조, 유튜브 채널 관리, 홍보 디자인 등을 했으니 여러 디자인 프로그램을 두루두루 다룰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단체 생활이 힘들어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비장애인일 때 고깃집, 호프집, 편의점, 피시방 등 꽤 많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장님들께 들었던 칭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너는 일을 잘하는 거야, 윗사람을 편하게 해주니까”라는 얘기였다. 살면서 할 말 다 하고 사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내 성격은 그보다도 미련한 것 같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마땅히 말도 못하는 나 자신을 바꾸고 싶단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러다 2020년 퇴사를 결심하고 내가 바라 왔던 춤 연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단숨에 대단한 사람이 되다


비보이를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내향적이던 나는 학교 복도에서 친구들이 연습하는 비보이 동작들을 보고 집에서 몰래 연습해서 실력을 키웠다. 용기를 내서 들어간 댄스 동아리에서 방과 후 매일 친구, 선후배들과 함께 연습했다. 2000년대 후반, 한국 비보이가 엄청난 전성기일 때다.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로 가서 멋진 비보이가 되고 싶었고, 열심히 연습해서 공연도 하고 여러 비보이 대회에도 참가해 봤다.

하지만 좋은 결과는 없었다. 내 실력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우리나라 비보이들의 실력은 대단하고 벽이 참 높았다. 졸업할 때가 되자 나는 비보이의 꿈을 접고 어느새 다른 친구들과 같이 대학교 일반 전형에 지원서를 쓰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오히려 장애인이 되고 나서 다시 프로 비보이를 꿈꾸게 됐다. 사고 전엔 운동이나 러닝머신으로 땀을 흘릴 수 있었지만, 걷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니 두 다리로 활기차게 몸을 움직이며 활동했던 때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하지만 내가 비장애인일 때부터 비보이를 했었단 건 큰 행운이었다. 서울로 간 것도, 멀리 있는 연습실까지 버스와 지하철로 열심히 움직이는 동력도 비보이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 덕에 나는 다시 사회로 나오게 됐다. 의족과 함께 큰 문제 없이 걸을 수 있게 됐고 연습실에서 내 걸음걸이와 춤추는 모습도 큰 거울로 볼 수 있었다.

장애인이 된 지 1년 조금 넘었을 무렵, 의족에 적응하고 꽤 잘 걷게 됐다. 프로 비보이 팀에 들어가 매일같이 홍대입구역 부근으로 연습을 다니던 어느 날 팀 동료로부터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하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이후 나는 〈스타킹〉을 비롯해 말로만 듣던 유명 TV 방송들에 출연하게 됐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카메라들이 나를 찍었고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많은 연예인과 관객 앞에서 춤을 추고 마이크를 들고 준비된 대사를 말했다. TV에 우리 집과 가족들이 나오고, 방송이 나가면 페이스북에 친구 신청이 들어왔다. 포털 창에 내 이름을 검색하면 뉴스 기사들이 떴다. 원래 내 의족은 800만 원으로 맞춘 것이었는데 한 의족 회사의 홍보 대사로 계약하게 되면서 3000만 원이 넘는 의족을 받았다. 나는 단숨에 대단한 사람처럼 됐다.

그 후로도 많은 방송과 공연 다큐멘터리, 뉴스에 출연했지만 출연료는 내가 고생한 만큼 많지는 않았다. 적게는 20만 원에서 많게는 50만 원 정도 받았다. 언제부턴가 출연료가 없는 방송, 좋은 의미의 재능 기부형 인터뷰나 출연 제의 등은 피하게 됐다. 정말 재능을 기부할 만한 행사인지 알 수 없었고 방송 촬영에 내 시간을 어느 정도 써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장애로 힘들었던 내게 춤을 출 수 있단 건 큰 행운이었지만, 먹고살기 바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도 어디서 출연 제의를 받으면 어렵게나마 출연료와 함께 어느 정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 꼭 물어보려 한다.

솔직히 나는 방송 출연 당시 사고 전과 춤 실력은 똑같은데 다리만 외다리였다. 이전에 하던 기술들을 다시 살린 정도로 이 또한 걸음마 단계였다. 외다리인 나와 내 춤에 자신이 없었다. 방송 출연과 공연들은 물론 좋은 취지였지만 대단한 사람이 돼야 한단 생각에 부담감이 계속 쌓여 갔다. 춤을 추러 서울로 이사한 뒤 2년 정도는 매일 세 시간 정도 연습했는데, 연습을 많이 한 날에는 근육통이 심해서 자다가 화장실에 갈 때면 기어가기도 했고, 다리를 못 써서 팔 힘을 많이 쓰게 되니 팔꿈치에 퇴행성 관절염이 생겨 수술 권유도 받았다. 춤추는 것 자체를 즐기지 못했고, 내가 춤추는 영상이 방송으로 나와도 어색하고 민망해서 잘 안 봤다.

장애인이 된 후 팀과 함께하는 퍼포먼스에서 내 자리는 늘 가운데였다. 단체 군무를 따라갈 수 없는 나에 대한 팀원들의 배려이자 같은 춤을 출 수 없는 서로를 위한 자연스러운 연출이었다. 여러 동료가 인간 탑을 쌓아 주면 가운데로 멋지게 뛰어나온다거나, 관객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팀원들이 위치를 만들어 주면 내가 멋진 동작을 보여 주는 식이이었다. 축구로 예를 들자면 골을 넣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무대 위에선 주인공이 되고 싶을 것이고 나 또한 그랬다. 그래서 이 역할을 맡게 된 것이 기쁘면서도 나는 매번 그런 역할만 맡으니 중요한 연출이 있을 때마다 부담이 됐다.

2017년 부천에서 열린 세계 비보이 대회 때 특히 그랬다. 당시 나는 비보이만이 아닌 다양한 스트릿 댄스 장르의 멤버 일곱 명이 모인 부블리검프스(BubblyGumps) 크루의 멤버였다. 부블리검프스는 유쾌한 바보들이란 뜻이다. 우리 팀은 메인 비보이 배틀이 아닌 퍼포먼스 경연 부문에 참가 신청을 하고 비장한 컨셉트의 공연을 준비했다. 전 세계 비보이들이 보는 큰 대회인 만큼 잘해야 한단 욕심이 있었다.

대회를 준비할 때는 모두가 맞는 시간과 장소를 잡아 연습하는 식이다. 그런데 학생인 멤버도 있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멤버도 있고 각자의 생활을 하며 준비하다 보니 연습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작전을 잘 짜고 합을 맞춰야 기대한 만큼의 퍼포먼스를 만들 수 있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이, 여러 멤버의 의견이 모이다 보니 연습보다는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결국 대회 준비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무대에 올라갔다. 그리고 아직까지 내 기억에 남을 만큼 큰 흑역사를 남겼다. 준비가 안 된 만큼 실수가 많았고, 대부분의 멤버 스스로에게도 실망스러운 퍼포먼스였다.

누구도 탓할 수 없지만,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함께하는 팀에 대한 원망까지 생겼다. 예전에 SBS 〈비디오머그〉의 인터뷰에서 “다른 비보이들이 실수하거나 넘어지면 웃을 수도 있겠는데, 제가 넘어지거나 실수하면 관객 입장에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할 것 같다”라는 얘기를 했었다. 나는 공연하는 내 모습을 보는 많은 시선들이 진지하다고 느꼈다. 외다리인 나는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 많은 박수와 관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단한 장애인이 춤을 춘다’라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외다리인 내가 춤추는 것이 대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함께 활동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비장애인인데, 나처럼 연습실이나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힘든 점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힘들거나 불편하단 말은 잘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외다리라서 춤추는 게 힘든 것은 아니다. 사실 의족을 빼는 것이 춤출 때 더 움직이기 편하다. 춤출 때 의족을 끼면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고 어색한 동작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처음부터 외다리였다면 지금보다 자연스럽게 춤출 수 있었을 것이다. 거의 모든 비보이 기술들이 비장애인의 사지에 균형이 맞춰져 있다. 나는 오른손잡이라 비장애인일 때부터 오른쪽 다리로 도약하는 기술들을 많이 썼는데 이제는 좌우 방향을 바꾸지 않는 이상 못하게 됐다. 방향을 바꿀 수도 있지만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씨를 써야 하는 것처럼 거부감이 있어서 연습을 잘 안 하게 된다.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었기 때문에 두 다리였을 때의 몸과 춤이 계속 떠오른다. 그래서 춤이 부자연스럽다고 스스로 느낀다. 꿈, 목표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었는데 예전에는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춤추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정부 지원 사업은 어려워


코로나로 인해 세상이 뒤숭숭하지만 나의 2021년은 벅찰 만큼 공연과 촬영이 많았다. 지난해 가장 많이 참여한 공연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화 예술 사업 ‘신나는 예술 여행’이었다. 전국 곳곳의 복지관, 학교, 군대 등을 찾아다니며 1년간 총 10회의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1회 500만 원의 예산이 배정됐는데 나는 이 공연 사업에서 한 회당 적게는 10만 원에서 많게는 30만 원을 받았다.

한번은 장애인 문화 예술 지원 사업에 참여했다. 항상 무대에서 춤추는 출연자 역할만 했을 뿐, 이런 공공 기관 사업에 기획안을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화 사업에 대해 잘 아는 지인들에게 물어보며 2주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내가 만들고 싶은 공연을 열심히 기획해서 제출했다. 지원 사업에 선정이 돼서 다행이지, 글을 쓰고 서류를 작성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지루한 일인지 처음 알았다.

800만 원의 예산을 배정받았다. 내가 공모한 작품은 부블리검프스 팀과 함께하는 ‘인사이드아웃’이란 제목의 공연이었다. 감독인 내게 주어진 시간은 세 달이었다. 가장 중요한 음악과 댄스 퍼포먼스 연출을 준비하고, 멤버들의 공연 의상을 찾아 구매했다. 이외에도 포스터를 제작하고 공연장을 계약하는 등 모든 공연을 총괄했다. 예산 지출 내역은 모두 사업처에 자료로 증빙해야 했는데, 이 부분이 중요하단 말을 많이 들어 왔어서 꼼꼼히 영수증을 모았다. 사업 진행에 필수였던 국고 보조금 통장을 만들 때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 카드 하나를 만들려고 은행에 네 번 정도 갔다. 그때 ‘다시는 정부 지원 사업에 신청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우여곡절 끝에 2021년 9월 26일, 내 고향 원주의 UR컬처파크에서 공연을 했다. 정말 잘 초대하지 않는 가족도 부르고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까지 오셨다. 공연 당일에 멤버가 다치고, 예상 시간보다 일정이 딜레이되는 등 예기치 못한 상황들도 있었지만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누구나 바쁜 일을 잘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가장 기분이 좋은 것처럼, 수개월을 준비한 공연이 끝나니 후련했다.

이때까지 크게 다섯 팀에서 멤버로 참여했고 그중 두 팀과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부블리검프스다. 서울에 와서 만난 귀여운 동생들과 이룬 팀이다. 다른 하나는 원주의 비보이 클라이맥스 크루다. 이 팀은 고등학교 시절 춤을 시작할 때부터 함께였는데 현재 강원도의 유일한 비보이 팀으로 남았다. 이제는 다들 각자의 직업과 가족이 생겼고 나이도 많아져서 나는 장난으로 우리 팀을 ‘조기 축구회’라 부르지만, 가족 같은 팀인 만큼 공연이 생길 때마다 꼭 원주까지 찾아가 연습한다.
©부블리검프스

지하철만 타면 신경전


나는 의족을 그대로 내보이고 다니기 때문에 많은 시선을 받는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여름엔 항상 반바지를 입고, 겨울에도 한쪽만 자른 까만 타이즈를 입고 반바지를 입는다. 사고 후 다리를 절단했을 때 병원에서는 의족을 하고 잘만 적응하면 길거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걸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해줬고, 그런 희망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만큼 굳이 장애인처럼 보이지 싶지 않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는 결국 의족을 훤히 내보이고 다니게 됐다. 긴바지를 입을 때 보통 의족 구조물 위에 살처럼 스펀지를 감싸고 살색의 천을 씌운다. 그 후 긴바지를 입으면 일반 다리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게 굉장히 답답했다. 스펀지가 감싸고 있기 때문에 의족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점이 가장 싫었고, 진짜 다리처럼 생긴 의족이 기괴했다. 로봇 다리인 채로 밖에 나가면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놀라지만 내 몸이 편하기 위해 그냥 드러내기로 결정했다.

배려에 관한 문제도 있다. 특히 지하철에서 많은 해프닝을 겪는다. 서 있는 사람들은 내가 노약자석에 앉아 있을 때 내 다리를 유심히 보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다리가 불편한지 모를 때가 많다. 옆에 앉으신 어르신께서 신사적인 말투로 “학생, 여기는 노인들이 앉는 자리야”라고 얘기하시면 맞은편 앉아 계신 다른 분이 “다리가 아픈 학생이에요”라고 대신 말해 주신다. 그럼 어르신께서 “아이고! 미안하네”라고 얘기하시고 나는 그저 “예”라고 대답한다. 어르신이 제대로 살피지 않은 잘못도 있지만 나는 가만히 있다가 어르신을 민망하게 해버린 셈이다.

또 술에 취한 아저씨 두 분이 노약자석에 앉으셨을 때 구석에 있던 나와 신경전이 엄청났다. 두 분도 노약자석에 앉을 만한 나이는 아니어서, 나에게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대화를 시끄럽게 이어 가며 나를 은근히 툭툭 치는 등 은근한 불만을 표현하셨다. 그게 불편해서 일어나 아저씨들 앞에 서자 그 사람들이 내 다리를 보고 눈이 똥그래지며 당황하고 조용해진 경험이 있다.

엘레베이터를 탈 때도 많은 사람들이 후다닥 빨리 탄다. 나는 억척스럽게 빨리 타지는 못하기 때문에 새치기도 참 많이 당한다. 엘레베이터에 사람들이 꽉 찬 상태로 올라가게 됐는데 어떤 아저씨가 한마디 하셨다. “젊은이들이 타면 안 되지.” 그래서 “장애인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양보를 받으려면 일부러 더 쩔뚝쩔뚝 걸어야 하나’라고 웃긴 생각도 했다. 또 차라리 노약자석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양보와 배려는 의무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의 노약자석이란 공간은 본래 의미와 맞지 않게 사람을 가르는 것 같다. 모두 같은 자리에 앉되 양보는 하고 싶을 때 하면 오히려 더 괜찮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튼 공공장소에서 일어나는 해프닝들은 나의 정신 건강에 매우 해롭기 때문에 이제 반바지를 입는 것은 나에게 거의 선택이 아닌 의무일 정도다.

8년 가까이 다양한 시선을 받으며 돌아다니다 보니 신경 쓰지 않는 요령도 생겼다. 내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지하철인데, 장애인이라 무료로 탈 수 있어서 일부러라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일단 나는 노인도 튼튼한 젊은이도 아닌 애매한 입장으로 지하철에 입장한다. 일반 좌석 맨 끝 혹은 노약자석에 앉는 게 편하지만 자리가 없을 때는 출입구 옆의 봉을 잡고 선다. 누군가의 앞에 서 있어도 되지만 그러면 꼭 양보해 달라고 하는 것 같고, 사실 젊어서 어느 정도 서서 가는 게 그렇게 힘들지도 않다. 그런데도 내가 서 있는 것이 보기 불편해 양보해 주는 분들이 있다.

좌석에 앉게 되면 일단 내 옆과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이 나를 한 번씩 훑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갑자기 다리를 접었다 폈다 운동을 시작하시는 분들이 자주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기분이 안 좋다. 많은 승객들 틈으로 나를 힘껏 째려보시는 아저씨를 대적해서 조용한 눈싸움해 본 적도 있고, 다리 운동을 시작하시는 할머니 앞에서 나도 보란 듯이 다리 운동을 하며 저항해 본 적도 있다. 물론 나의 피해 의식일지도 모른다. 지하철에서의 나는 억울함에 절여진 사람 같다.
 

춤이 정말 좋아서 하는 걸까


비보이를 시작한 지 15년, 외발 비보이가 된 지는 8년이 됐다. 남들 앞에서 나를 ‘비보이 김완혁’이라고 소개할 때도 있고 필요할 때는 ‘외발 비보이 김완혁’이라 소개한다. 앞에 ‘국내 유일’이 붙을 때도 있는데 뭔가 거창해서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하진 않는다.

가장 어려운 공연은 바로 마이크를 들고 스피치해야 하는 시간이 마련된 공연이다. 내가 춤을 추기만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교훈이 되는 말로 만들어야 할 때 가장 어렵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참 어색하고 답답할 때가 많다. 가끔 내가 작품을 주도할 기회가 생기면 모든 출연자들이 돋보이게 구성하려 한다. 평소 다른 작품들에서 내가 돋보이는 장면이 많다 보니, 직접 공연을 만들 땐 그걸 피하는 편이다.

춤출 때 남과 경쟁하는 게 비보이 배틀의 당연한 심리겠지만 나는 우선 내 불편한 몸과 싸울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과 경쟁할 생각을 못하는 게 경쟁력일 수 있겠다. 춤은 성격을 따라간다는데, 내 춤엔 정직한 무브들이 많지만 여유와 멋을 잘 표현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비장애인일 때도 그랬고 다른 사람의 춤을 따라 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져서, 내 안무는 모두 내가 짠 동작들이다. 필살기나 욕심이 나는 동작들을 짜는 것은 좀 미뤄 두고 있지만 올해엔 새로운 동작을 만드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

가끔 ‘춤이 정말 좋아서 하는 것인가’란 생각을 한다. 초등학생 때 어느 지방의 청소년 댄스 대회에서 비보이를 처음 봤다. 한 남자가 물구나무 자세로 무대를 가로지르는데 그 장면이 너무 멋있고 신기해서 기억에 남았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친구들이 복도에서 그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나도 집에서 물구나무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엔 친구들에게 어려운 기술을 하는 나를 보여 주고 싶어서 비보잉을 시작했던 것 같다. 내게 비보잉의 매력은 고난이도 기술들로 이뤄진 춤이라는 점이었다. 지금은 비보잉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정해진 것 없이 다양한 춤 스타일과 캐릭터가 나올 수 있는 장르란 것과 장애인인 나 또한 문제없이 함께 춤출 수 있는 장르라는 점이 좋다. 실제로 세계적인 스트릿 댄서 중 유독 비보이 장르에 지체 장애인이 많고 실력도 대단하다.

요즘은 댄서 생활 이외에도 재택으로 디자인 업무도 하고,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다. 최근엔 우리금융그룹과 앱솔루트 보드카의 광고 모델로도 촬영했다. 감사하고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그에 따른 책임들이 꼭 있다. 정말 집중해야 할 공연이나 활동이 있다면 다른 일이 들어와도 그 제의를 거절해야 하지만, 나는 본디 거절에 약한 사람이다. 원래 성격도 그렇지만 어쩌면 나 또한 내 장애로 인해 더욱 선하고 바른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신경 쓰는 것일 수도 있겠다. 올해엔 그런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 일하고 싶다.

  

모든 동정이 나쁜 건 아니다


호주의 코미디언이자 장애인 권리 운동가인 스텔라 영(Stella Young)은 한 강연에서 “장애인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감이나 감동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감명 깊은 말이었지만 그 말과는 다르게 나는 지금 영감이나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 있다. 나 또한 장애인인 스스로를 엄청난 노력, 극복, 정신력 등의 키워드에 가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좀 다르게 받아들이려 한다. 춤을 추는 예술가로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좋은 영감이나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열심히 살아갈 하나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애인을 동정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너무 깊어지면 오히려 차별이 생긴다고 느꼈다. 일터에서는 당연히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열외되는 상황은 없게끔 노력한다. 예를 들어 모두 열심히 짐을 나르는 상황이면 나도 당연히 돕는다. 하지만 굳이 안 그래도 된다고 판단하면 짐을 들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불편할 수도 있다. 내가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모든 걸 따라가려 하면 지친다. 해야 하는 일과 안 해도 되는 일을 내가 먼저 정하는 게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낫다. 예를 들어 모두가 열심히 짐을 나르는 좁은 길을 내가 비켜 줘야 하는 상황이라면, 애초에 그 좁은 길에 내가 서 있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도 하고 부족한 게 있다. 마찬가지로 다리가 불편하면 안 해도 되는 일이 있다. 구태여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퇴사 이후 식사 자리에서 만난 선배에게 ‘장애인이라고 해서 봐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를 일부러 모질게 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회사에 다닐 때 이 선배의 보조 역할을 하며 혼나기도 많이 혼나고 핀잔도 많이 받았다. 나를 싫어해서 그러는 것이 아닌 걸 알아서 마음속에 크게 담아두진 않았다. 직장에서의 관계가 없어지고 당사자에게 그런 솔직한 얘기를 들으니 고마웠다. 하지만 그동안 일하며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장애인을 대한다’는 생각이 서려 있다는 내 느낌이 맞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장애가 아닌 나의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일하며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행동이나 실수를 오히려 나의 장애 때문에 한 번 더 짚고 넘어가는 등 오히려 엄격해진다고 느낀 경우들이 있다. 내가 나에게는 엄격하려고 하지만 나의 장애로 인해 남이 나에게 엄격한 것은 슬펐다.

내겐 도움받지 않고 혼자 해내고 싶어하는 고집이 있다. 배려를 해줘도 싫고 똑같이 대해도 싫다니 참 피곤한 사람이다. 동정이나 배려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나의 사고에 대한 얘기나, 내 비보이 공연을 보고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공감해 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또 모르는 분이 아프거나 불편하지 않냐고 물어보시면 많이 적응해서 괜찮다고 기분 좋게 말한다. 하지만 길을 걷다가 날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뒤에서 쯧쯧 소리를 내시는 건 싫다. 확실한 기준을 말하긴 어렵지만 같은 동정이라도 공감이나 배려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장애인을 대할 때도 그러려고 노력한다. 서로 어색함 없이 장애인도 비장애인을, 비장애인도 장애인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 이건 나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 내 장애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처럼 나도 내 장애를 넘어 내가 속한 사회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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