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 핸디캡
5화

김종민; 현실을 영화처럼 만드는 법

두 시간의 마법이 펼쳐진 뒤


김종민은 영화감독이다. 세 살 때 사고로 뇌병변 편마비 판정을 받았다. 영화 한 편이 끝나면 세상이 바뀌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어릴 적부터 영화와 극장을 좋아했다.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다 영화감독의 꿈을 펼치고자 퇴사 후 장규성 감독의 〈여선생 VS 여제자〉 제작부 막내 스태프로 일을 시작했다. 2012년 단편 영화 〈다리 놓기〉를 데뷔작으로 현재까지 총 10여 편의 영화를 제작 및 감독했다.

김종민의 장애는 언뜻 보기엔 드러나지 않는다. 장애인이지만 곧잘 비장애인으로 비치는 스스로를 경계인이라 칭하며 둘을 이분하는 편견을 깨고자 한다. 김종민의 영화는 주로 장애인, 여성, 이주민 등 주로 사회적 약자의 삶을 다룬다. 대표작으로 〈하고 싶은 말〉, 〈중고 거래〉가 있으며 공저로는 《우리 조금 더 행복해져도 될 것 같은데》가 있다.

어릴 적부터 극장 가는 것을 좋아했다.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았으나 극장이란 공간 자체가 내게는 편안하고 신비로운 예배당 같았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두 시간 정도 가만히 앉아 눈앞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를 봐야 한다. 감독의 주제 의식을 꼼짝없이 보고 들어야 한다. 어찌 보면 다소 폭력적인 공간이고, 이런 극장이란 공간을 매우 답답해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나는 정반대였다. 극장은 내게 두 시간의 마법이 이뤄지는 공간이었다. 한없는 어둠이 내려앉고 온갖 영화적 상상이 펼쳐진 뒤, 극장을 나오면 세상은 마치 이전에 볼 수 없던 밝은 세계로 바뀌어 있을 것 같았다. 휴대폰을 켜면 화면이 밝아지면서 한꺼번에 울리는 알람 중 좋은 소식이 한두 개는 있을 것 같았다. 고작 두 시간, 달라진 것이 없고 아무도 변화를 못 느낀다고 하더라도 나만이 느끼는 세상의 변화가 있었다.

최근엔 이런 상상도 했다.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부작용으로 나의 뇌병변 장애가 없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도 엉뚱하지만 내겐 영화도, 극장도 이런 마법의 공간이었다. 열심히 살면 세상은 내 편이고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은 변치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 바로 그 공간. 영화와 극장을 사랑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영화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고향 서울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린 1986년으로 돌아간다. 초능력을 가진 에스퍼맨(심형래 분)이 주인공인 〈우뢰매〉 시리즈가 처음 나왔을 때였다. 당시 어머니 친구분의 남동생이 신촌 신영극장에서 일하셨다. 어머니 손을 잡고 〈우뢰매〉 시리즈를 보러 간 날 그분이 〈우뢰매〉 캐릭터들이 그려진 책받침을 무려 50장이나 선물해 주셔서 너무 행복했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집에 오는 2호선 전철 안 머리 위 선반에 책받침을 올려 두었다가 두고 내린 것이다. 그걸 알고선 버스 안에서 내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 것도 기억난다.

그즈음엔 토요 명화나 주말의 명화 같은 영화 프로그램들을 TV에서 방영했다. 큰형은 그 프로그램들을 매우 좋아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재미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편집이 많이 되고 성우가 더빙한 외국 영화에 이질감을 느꼈고 이해하기도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다 88올림픽이 끝난 뒤 1989년, 영화와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됐다. 어느 날 아버지가 ‘Gold Star’ 금성, 현 LG전자의 VHS 비디오 데크를 사오신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친한 친구 다섯 명 중 집에 비디오 데크가 있던 친구는 한 명뿐이었다. 그날 아버지가 비디오 데크를 설치하는 동안 나는 동네 ‘영비디오’ 가게로 뛰어갔다. 최신 프로그램 2박 3일 대여에 자그마치 천 원! 큰맘 먹고 빌렸다. 화려한 액션과 남자들의 의리, 거기에 일명 ‘국뽕’이라고 하는 애국심까지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땐 오후 다섯 시쯤 동네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우리 같은 아이들도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 전부 멈춰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애국가를 제창하던 시대였다.

그날 비디오 가게에서 처음 대여한 영화는 바로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이었다. 사흘 동안 다섯 번을 돌려 보고 반납했다. 이틀 뒤 두 번째로 빌려온 비디오는 장철 감독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였다.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한 손만 사용하는 주인공의 상황이 나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홍콩 영화에 빠진 계기이기도 하다. 나도 장애가 있지만 이런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이 멋진 삶을 살고 싶었고, 그렇게 되리라 다짐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시간만 나면 당시 강동구 최고의 극장 천호동 한일시네마로 향했다. 이때 본 영화들은 〈천장지구〉, 〈영웅본색〉, 〈우견아랑〉, 〈첩혈쌍웅〉 등 역시 주로 홍콩 영화였다. 주인공들은 친구와의 순수한 의리와 오직 한 여자만을 위한 사랑을 빼면 시체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사랑과 의리라고 정해 둔 것 같았고, 그것을 감독은 영상으로 너무 잘 녹여 냈다고 느꼈다. 내가 지금도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생각하는 것엔 분명 이런 영화들이 어느 정도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다 스무 살이 되는 해, 아는 누나의 소개로 서울 강서구에 있었던 ‘화면 속으로…’ 라는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해는 내가 살면서 가장 영화를 많이 본 해였다. 1년간 800여 편의 영화를 봤으니 말이다. 그중 극장에서 본 150편을 제외하면 나머지 650편은 전부 비디오테이프로 봤다.

시작은 이렇다.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다 보면 “이 영화 어떠냐?”, “이 영화 재미있냐?”고 묻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도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던 시절이라 손님들 또한 정보가 많이 없었다. 《프리미어》나 《씨네21》 같은 영화 잡지가 있었지만, 나조차 잘 모르는 잡지들을 일반 손님들이 알 리 없었다. 아무튼 손님들이 자꾸 비디오 가게에 찾아와 내게 영화에 대한 감상을 묻자, 아르바이트생으로서 이상한 프로 의식이 생겼던 것 같다. 난 손님들에게 멋지게 리뷰를 해드리기 위해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했다. 그분들은 우리 가게 사장님께 내 칭찬을 하기 시작하고, 우리 가게에 나를 찾는 단골이 생기자 신나서 더 많은 영화를 보고 그 매력에 풍덩 빠졌다.

예술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작품성이 좋은 영화는 무조건 비디오 데크에 넣어서 재생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영화감독은 바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Andrei Tarkovsky)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영화를 잘 만드는 유명한 러시아인 감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틀어서 본 영화는 너무 졸렸다. 전개가 너무 느리고 영화적인 이야기가 없었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늘 30분을 못 넘기고 잠이 들거나 딴짓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영화의 제목은 〈희생〉이었다. ‘관객의 희생이 필요한 영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몇몇 장면들은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한밤에 물이 다 빠진 수영장 안에 어떤 남자가, 초에 불을 켜고 수영장 끝에서 끝으로 천천히 걸어가다 다시 돌아오고 다시 걸어가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기억에 남는 대사도 있었다. “끝없이 노력하면 결실을 얻는 법이지.”
남자 주인공이 한 말이었다. 멋있는 대사였으나 역시나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이후 나의 시간을 더 이상 희생하고 싶지 않아서 타르콥스키 감독의 영화는 시도를 안 했다. 안녕, 타르콥스키.
 

충무로에 발을 들이다


영화과를 나오진 않았다. 다만 영화에 진심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봤고 재미있게 본 영화는 여러 번 봤다. 허진호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열 번 이상 본 것 같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오아시스〉, 〈러스트 앤 본〉처럼 장애인이 주인공인 영화도 여러 번 봤다. 영화를 처음 이론으로 배운 건 세기말 1999년 한겨레 교육문화센터가 진행한 영화 연출 아카데미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를 배우고 싶단 막연한 동경이 있을 뿐 정말 영화판에 들어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러다 20대 초반, 여의도 소재의 한 회사에서 첫 일자리를 구했을 때였다. 처음 몇 개월은 열심히 일했으나 문득 ‘서른이 넘어서 영화가 하고 싶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난 내가 서른 살이 넘으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을 줄 알았다.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하고, 아니 못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튼 꿈을 펼치지 못한 걸 나중에 후회하거나 한 가정의 가장이 된 후 내 꿈을 위해 갑자기 영화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 같아 보였다. 그래서 ‘무조건 지금 영화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03년, 스물네 살이 되던 해 봄이었다.

영화판이라는 곳에 아무 인맥도 없던 터라 막막했다. 열심히 수소문한 끝에 인터넷 커뮤니티 ‘필름 메이커스’를 알게 됐다. 그곳의 구인란 카테고리에서 평소 내가 좋아하던 〈선생 김봉두〉 장규성 감독님의 신작을 함께 촬영할 막내 스태프 구인 공고를 발견했다. 그땐 연출부, 제작부의 개념을 몰랐다. 그냥 영화감독이라면 무조건 막내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지원했다. 자기소개서에 장애에 대해 모든 걸 솔직하게 적었다. 장애가 있어 한 손을 못 쓰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할 것이라고, 남들이 두 손으로 한 번 왔다 갔다 할 것을 나는 빠르게 두 번 왔다 갔다 해서라도 맡은 업무는 다 해낼 거라고. 영화에 대한 열정과 각오를 쏟아부어서 지원서를 적은 결과, 충무로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나라 영화 1번지, 바로 그 서울의 충무로! 면접 장소는 ‘시네마 서비스’ 빌딩 2층에 위치한 ‘좋은 영화사’였다. 좋은 영화사는 현 싸이더스FNH의 전신이자 당시 한국 최고의 영화사였기에 떨릴 수밖에 없었다. 뇌병변 장애 때문에 춥거나 긴장하면 마비가 오고 강직이 생기는 탓에 사무실이 가까워질수록 왼쪽 팔다리는 부자연스러워졌다. 건물 앞에서 기도하고 심호흡을 크게 하고 왼팔과 왼다리를 주무른 후 올라갔다.

면접관은 영화 제작팀 실장급에 해당하는 라인 프로듀서님이었다. 그런데 영화나 장애에 관한 질문은 전혀 하지 않고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질문하셨다. ‘좋아하는 영화나 내가 가진 장애에 관해 물어보실 줄 알고 많이 준비했는데…….’ 순간 멍했다. 당황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때 읽고 있던 책이 문익환 목사님 평전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인 중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순간 고민이 됐다. 그래도 답은 해야 하니 정신을 차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얼마 전에 《문익환 평전》을 사서 읽고 있습니다.”

면접 이틀 후 라인 프로듀서님의 전화를 받았다. 합격이었다. 내가 막내로 함께할 영화는 바로 장규성 감독님의 차기작 〈여선생 VS 여제자〉였다. 며칠 뒤 바로 여수로 내려갈 수 있는지 물어보셨고, 나는 바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영화인으로서 나의 삶은 전라남도 여수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내가 들어간 제작부는 영화감독이 되는 출발점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여수에 내려간 지 5일 만에 알았다. 감독이 꿈이면 연출부에 들어갔어야 한다는 제작부장님의 말에 처음에는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일단 충무로 영화판에 들어왔지 않나! 난 같은 제작부 동료에게 질투를 받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당시 장애인이기 때문에 부담이 더했다. 내가 언뜻 보기에도, 영화 선배들의 말을 들어도 충무로 상업 영화 현장에 장애인은 내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일을 잘 못하면 장애인들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인식이 안 좋아져 나중에 다시는 장애인을 안 뽑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잠도 안 자고 촬영 준비를 하고, 스태프들이 원하는 것을 잘 듣고 크게 대답하며 열심히 뛰어다녔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 물리적으로 잘 뛰는 모습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제작부 막내는 정말 온갖 것들을 한다. 작게는 촬영 현장의 담배꽁초를 줍는 일부터 크게는 촬영물이 담긴 소중한 필름을 전라남도 여수에서 서울역 뒤쪽의 ‘세방현상소’까지 기차를 타고 혼자 전달하는 일들이었다. 또 영화 제작을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조명팀, 연출팀, 미술팀 가릴 것 없이 누구든 도와야 했다. 열심히 일한 덕에 많은 사람에게 인정도 받은 나는 다음 영화에선 연출부로 일하게 됐다.

첫 연출부 생활은 김성제 감독님의 데뷔작이 될 뻔한 〈일요일 아침엔 초능력〉에서였다. 재미있는 상상을 펼친 코미디 드라마였는데, 막내 조감독으로 참여했으나 결국 그 영화는 충무로에서 흔히 쓰는 말로 ‘엎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감독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연출부로 꾸준히 작업에 참여했다. 화면 밖의 모든 것을 담당하는 제작부와 달리, 연출부는 화면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과 관련된 일들을 한다. 특히 영화 제작 준비 단계에서는 시나리오를 정말 많이 읽고 또 직접 썼으며, 시나리오와 연출에 관한 세미나도 매주 1~2회 진행했다. 영화 〈마음이…〉에선 연출부 막내로, 〈기다리다 미쳐〉에선 공간 미술 담당 조감독으로,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선 사료 고증을 위한 취재와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맡았다. 예술 영화 〈블랙 스톤〉의 프로듀서를 마지막으로 일곱 편의 장편 영화 스태프로 일한 뒤, 이제 나의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나의 데뷔작은 청각 장애인 여성과 시각 장애인 남성이 주인공인 단편 독립 영화 〈다리 놓기〉다. 2000년대 초반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분들과 2년 동안 먹고 자고 함께 생활하며 느낀 것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청각 장애인 유진과 시각 장애인 윤환이 지하철에서 부딪쳐 서로를 오해하다 그 오해를 풀어가는 내용이었다. 영화 공모전 시나리오 부문에 당선돼 서울영상위원회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고 다섯 개 영화제에 초청받아 상영하는 영광을 얻었다.

이후로도 내가 만든 열 편의 영화들은 주인공이 대부분 사회적 약자였다. 영화 〈중고 거래〉에선 비장애인 여성과 장애인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고, 이주민 여성과 장애인 남성이 주인공인 〈따뜻한 독종〉을 제작하는 중이다. 지난해엔 예술인 지원 사업에 선발되어 8월부터 상영 행사 준비를 했다. 장애인이 주인공인 영화를 제작하고,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들도 함께 상영하는 행사였다. 장애인분들을 관객으로 모시고 화질과 음향이 한국에서 가장 좋은, 동시에 접근성도 좋은 서울의 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여 드리고 싶었다. 지원 사업에 선발된 후 바로 그 극장에 문의했고 10월 중순에 대관하기로 구두로 협의했었다. 그러나 이후 일정 확정을 위해 다시 연락 드렸을 때 대관이 11월로 연기됐고, 대관 조건은 점점 까다로워졌다. 중간에 담당자가 바뀌었다며 여름에 문의했을 땐 말해 주지 않던 것들을 하나둘씩 말씀해 주셨다. 상영 행사를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함께 작업한 장애인 배우분들과 그 가족들을 모시고 작게라도 상영회를 하면 그분들께도 추억이 생기고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결국 대관 장소를 여의도 이룸센터로 변경하고 일정을 새로 기획했다. 이룸센터는 장애인 단체들이 모여 있는 건물로,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분들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드디어 2021년 연말, 행사에 찾아온 관객분들이 힘든 시기를 따뜻한 행사로 채워 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자 영화를 만들고 행사를 준비하며 쌓였던 모든 속상함이 녹았다.
©김종민, 〈다리 놓기〉

장애인 사위는 결사 반대일세


어릴 적부터 사랑을 참 좋아했다. 첫사랑과는 당연히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콩 영화를 한참 즐겨 보던 시절, 첫사랑이었던 두 살 연상의 누나에게 반해 4년을 사랑했고 이별 이후 4년을 아무도 못 만나고 힘들어했다. 그때 나는 연극을 하는 청년이었고 첫사랑 누나는 사회의 첫발을 네트워크 마케팅, 사실상 다단계 회사에서 디뎠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는 회사 동료를 좋아하게 됐다며 내게 이별 통보를 했다. 처음엔 이별의 이유가 내가 가난한 연극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맞을 수도 있지만 그 다단계 회사에서 본인과 같은 꿈을 꾸고 한 방향을 바라보는 남성에게 호감이 간 게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그래도 4년을 사랑했는데 말이다.

이후 또 다른 사랑을 시작했지만 2년을 사랑하고 헤어졌다. 그때 나는 이제 정말 영화에 집중해 내 영화를 찍을 때가 왔다고 결심했다. 운 좋게 데뷔작 〈다리 놓기〉 시나리오가 공모전에 당선돼 제작비를 지원받았지만 부족했다. 더 많은 제작비를 확보해 더 좋은 영화를 찍고 싶어서 현대자동차 대리점에 취직했다. 직무는 신차 영업이었다.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보상인지 또 한 번의 사랑이 찾아왔다. 교회에서 만난 사람이었는데 얼굴도 마음도 예뻤다. 나의 장애를 많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고마웠다. 그녀를 많이 사랑하게 됐고 청혼했다. 그녀도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지만, 조심스럽게 이런 질문을 덧붙였다. “오빠, 영화감독 말고 지금 하는 자동차 영업이나 다른 일 하면 안 돼?”

처음에는 매우 당혹스러웠지만, 결혼 상대에게 그런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영화감독은 안정적이지 않은 직업이니깐. 바로 교회로 달려가 기도했다. 영화를 그만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는데도 기도를 시작한 지 40분도 안 돼서 답이 나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보다 내게 더 가치 있는 건 없었다. 영화보다 사랑이 먼저였다. 드디어 우리는 결혼을 하기로 했다. 결혼 자금도 차근차근 모았다. 난 목표가 있으면 뭐든 열심히 하는 편이어서 그쯤 인천 지역 우수 판매 사원 즉 판매왕까지 달성했다. 우리는 결혼을 결심하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후 예비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여행까지 다녀왔다. 결혼 허락을 받은 뒤 이것저것 준비해 예식장 예약까지 마쳤다. 대부분 그렇듯 상견례는 형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뒤로 미뤘다. 약간의 마찰은 있어도 전체적으론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상견례 전날까지는 말이다.

상견례 날짜에 맞춰 지방에 살던 여자친구 부모님께서 인천의 여자친구네 집으로 올라오셨다. 여자친구는 그날 밤 아무렇지 않게 부모님께 나의 장애를 얘기했다고 한다. 여자친구가 내 장애는 부모님께 가능한 나중에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때까지 우리는 내 장애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그동안 여자친구 부모님 댁을 세 번이나 방문하고, 2박 3일간 함께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안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상견례가 끝나고 여자친구 부모님께서 댁으로 돌아가신 뒤, 여자친구에게 전화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장애인 사위는 절대 안 된다! 결혼은 없던 것으로 해라!”

영화에서나 보던 대사를 예비 장인어른이 하셨다니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내가 생각한 방법은 손편지로 진심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여자친구 아버님께 진심을 담아 다섯 장의 편지를 썼다. 병원을 찾아가 장애가 있는 것 외에는 다른 건강에 문제가 없으며, 현재의 장애 또한 다른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의사 소견서까지 첨부해서 보냈다.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내 진심이 닿았는지 여자친구 아버지는 마음을 돌리시고 결혼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이제는 여자친구의 마음이 변해 있었다. 그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갑자기 떠났다. 집 문도 굳게 잠겨 있었고 일하는 곳도 그만두었다고 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자친구는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 상황이 영화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참 많이 했다. 영화 속 주인공 종민은 어떤 대사를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 해피엔딩이면 좋겠지만 내가 좋아했던 멜로 영화의 결말은 해피보단 새드엔딩 또는 열린 결말이 많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며 자기가 더 잘하겠다는 〈봄날은 간다〉의 소리 녹음사 ‘상우’, 사랑하지만 사랑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화양연화〉의 초식남 ‘차우’, 외롭기를 작정한 듯하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해지고 싶은 〈아비정전〉의 ‘아비’. 하지만 영화는 영화였을 뿐, 장애는 사랑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11년이 지난 지금, 조금씩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언젠간 완전히 극복할 거란 믿음도 있다. 2, 3년에 한 번씩 영화로 좋은 일이 있으면 그 힘으로 다른 새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는 아파하지만 다음 사랑을 만나면 놀랍게 회복됐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장애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나는 누구보다 사랑에 진심인 사람이다. 영화에서든 연애에서든 성실한 노력파인 내게 장애는 잠깐의 트라우마일 뿐 현재의 핸디캡일 수는 없다.
 

나의 첫 VIP 시사회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 남산 자락에 자리잡은 동네에서 나는 삼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지금은 고가의 브랜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지만 어린 시절만 해도 정감 있는 주택들이 즐비한 동네였다. 장애를 얻은 것도 이곳에서였다. 세 살 때 일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평소 나는 어머니가 빨래를 하실 때면 다 끝날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얌전히 앉아 있던 순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날은 유독 어머니랑 떨어지기 싫어서 펑펑 울었다. 마을의 교회 옆 계단에서 혼자 한참을 울던 중 머리 안에서 무언가 펑 터지는 느낌이 들며, 정신을 잃었다.

뇌병변이라고 했다. 부모님은 어린 나를 업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셨다. 여러 번의 검사 후 마지막으로 입원해 치료받은 곳이 경희대학교 병원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중증이라 마비 쪽으로 가장 유명한 병원을 가신 것이다. 사건 이후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왼쪽 팔다리를 잘 움직일 수 없어 침대에 누운 채로 2년을 보낸 뒤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뇌병변 편마비 판정을 받고 아버지는 내 장애를 고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으셨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용하다는 의료인, 무속인들을 찾아다니셨다. 무허가 침집도 가리지 않으셨다고 한다. 나는 매번 침집 앞에서 울며 안 들어가려고 발악했다. 그런 곳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무서웠다. 마치 사이비 종교 단체처럼 오래된 건물에 위치했고 내부는 이상한 조형물과 그림들로 가득했다. 침을 놓는 할아버지도 무섭게 생긴 데다 뾰족한 대침들은 극한의 공포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그런 막내아들이 가여워 아빠를 설득하려고 하셨고 그래서 부모님은 나 때문에 다툼도 많으셨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침보다 더 강력한 것까지 체험하게 됐다. 바로 영화 〈곡성〉에 나오던 굿과 같은 의식이었다. 우중충한 한복을 입은 무당 같은 여자와 꽹과리 치는 남자가 우리 집에 와서 시끄럽게 의식을 치렀고 친할머니는 내 손을 만지며 큰소리로 기도하셨다. 결과는 예상과 같이 아무 효과가 없었다.

아버지는 늘 어머니와 다른 점이 많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그랬다. 2011년 늦가을, 데뷔작을 촬영하던 해 나는 유독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친구분까지 촬영장에 데려오셔서 엑스트라로 출연해 주실 정도로 늘 우리 영화에 여러 가지 도움을 주셨던 반면, 아버지는 대체로 부정적이셨다. 예전에 아버지가 하신 말들이 내 마음속에 쌓여 묵은 상처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나와 화해하고 잘 지내고 싶어 하시는 듯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고 또 이대로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데뷔작 편집을 어느 정도 끝내고 드디어 최종 사운드 믹싱만 남은 상태였다. 자정을 넘겨 집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는 역시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만 보고 계셨다. 60대 중반으로 보기엔 너무 힘이 없어 보이셨다. 곧장 방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도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어머니께 편집본을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에 다시 거실로 나와, 따끈따끈한 영화 파일이 든 노트북을 TV에 연결했다. 하지만 오늘은 피곤하시다는 어머니의 말에 노트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께서 슬며시 거실로 나오시며 물었다. “편집이 다 됐다고……?”

아버지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몸도 안 좋으시니, 어서 들어가시라” 답했다. 이미 노트북을 정리한 상태였고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말투로 감상평을 듣는 것이 싫었다. 아버지는 이불 잘 덮고 자라며 조용히 들어가셨다.

이튿날 아침 화장실 문을 여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세게 밀어 보았지만, 살짝 열렸다 다시 닫혔다. 가슴이 철렁하며 오른쪽 거실 소파를 보았는데 늘 계시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있는 힘껏 문을 밀자 이내 화장실 안의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곧 구급대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최종 편집과 믹싱을 남겨 둔 파일을 DVD로 만들어 아버지 빈소의 영정 사진 옆에 두었다. 의도치 않게 많은 조문객이 나의 직업을 알게 되고, 어르신들은 내 데뷔작에 대해 얘기하셨다. 식장의 대화 소재는 자연스럽게 아버지 이야기 다음으로 내 영화였다. 

삼우제가 끝난 뒤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셨지만 나는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TV에 노트북과 스피커를 연결하고 소파 가운데에 아버지 영정 사진을 놓은 뒤 조심스럽게 영화를 틀었다. 장례식 내내 안 흘렸던 눈물이 갑자기 났다. 몸속 물기가 다 빠져나가야 멈출 것처럼 주룩주룩 흘렀다. 나의 첫 데뷔작 시사회는 아버지만을 위한 VIP 시사회였다.

아버지는 소천하시기 3년 전쯤부터 잘 걷지 못하셨고 귀도 잘 안 들리기 시작하셨다. 사람들과의 교류나 소통도 잘 안 되셨다. 우리나라의 15가지 장애 유형으로 본다면 지체 장애인이자 청각 장애인이셨던 것이다. 이 정도는 장애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버진 따로 장애인 등록을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막내아들의 장애를 고치고자 그렇게 애썼던 분이 일생의 마지막은 본인도 장애인으로 산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앞으로도 남은 삶을 장애인으로 살 막내아들의 밥벌이와 결혼을 걱정했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한국 사회는 경계에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나 어느 한쪽이기를 강요받는다. 장애인 혹은 비장애인, 예술 영화 혹은 대중 영화. 하지만 사회에는 무수한 교집합이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장애를 가졌으나 비장애인과 소통하며 살고, 아버지는 한평생 비장애인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몰랐던 장애를 겪다 소천하신 것처럼 말이다.

나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경계에 있다. 장애인은 맞지만 물리적 이동에 큰 지장이 없고 사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장애인이다. 장애인분들은 같은 장애인이라서 내게 마음을 잘 열어 주시고, 비장애인분들은 나를 편하게 생각하여 장애인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얘기해 주신다. 영화감독으로 살아가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둘을 연결해 준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감독의 역할은 차갑고 냉소적인 세상에 따뜻한 감성 한 스푼 타서 균형을 맞춰 주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있던 내가 다른 감독들보다 가장 자신 있는 것은, 바로 이 둘을 영화 속에서 연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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