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 핸디캡
6화

서영채; 지금 멋있는 엄마가 돼야 하는 이유

불공평 박람회


서영채는 모델이자 세 아이를 둔 워킹맘이다. 선천적 농인으로 서울애화학교 진학 후 장애인 취업 연계 프로그램으로 캐논코리아에 취직했다. 3년간 제품 불량을 확인하는 업무를 맡다 퇴사 후 모델 준비를 시작했다.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4〉 탑10까지 진출했으나 방송 이후 미디어의 관심이 줄어들며, 모델의 꿈을 접고 전문대학에 진학했다.

서영채가 8년 만에 모델로 복귀할 수 있었던 동력은 공백기 동안 생긴 세 아이와 남편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컸을 때, 일과 가정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 엄마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수업 및 촬영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다. 현재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소속 모델로 2021 서울패션위크×그리디어스 패션쇼, 스페이드제이×양해일 디자이너 패션쇼 등에 참가한 바 있다. #인스타그램
스무 살이 되기 전 나는 어른들의 삶이 너무 궁금했다. 어른이 된 농아인[1]들은 어떤 일을 하고 살아갈까? 내게 이야기나 조언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사회로 나왔을 땐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세 살일 때 인공 와우 수술을 시켰다. 인공 와우는 청각 신경을 전기로 자극해서 소리를 듣게 하는 수술이다. 말도 못 하는 세 살 어린아이에겐 잔인한 수술이지만, 나쁘게만 말하긴 어렵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찍 수술한 덕에 청력도 어느 정도 회복했고 듣는 훈련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특수 학교에 가면서부터 부모님과 많이 싸웠다. 다들 농아인인데 나처럼 어릴 때 인공 와우 수술을 한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내가 특이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고, 내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부모님 마음대로 수술해버린 것이 싫었다. 게다가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수어를 금하고 소리 내어 말하는 구화 연습을 엄격하게 시켰다. 편한 수어 대신 구화로만 감정을 정하다 보니 가족은 내게 늘 어려운 존재였다.

오히려 특수 학교를 다니는 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농아인 자식을 둔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일반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지만, 나는 서울애화학교에 다니며 농아인으로서 자신감을 키웠다. 학교에 가서 농인 친구들과 편하게 수어로 얘기하는 게 좋았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여자친구 여섯 명과 서로 의지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농아인이라는 이유로 일반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특수 학교에 가는 것도 좋은 경험일 수 있다. 내가 만약 일반 학교에 갔더라면 소통이 어려워 우울했을 거다. 국어, 영어 같은 과목을 내게 맞는 속도로 배우는 게 좋았다. 우리는 수영도 배우고 도예도 배우고 스케이트도 배웠다. 새로운 과목도 기회가 생기면 언제나 해보고 또 해볼 수 있어서 난 ‘뭐든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농아인 친구들과 대화하며 다녔으니 사회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

스무 살이 되며 가장 먼저 실현해야 하는 것은 혼자 소통하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대화하며 비장애인의 존재를 알았지만 만날 기회는 없었다. 일반 사회에서 소통하는 방법이 너무 적었다. 그 방법을 내가 알아서 찾고 파악해야 했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행동을 보면 적어도 사악한 사람인지 배려 있는 사람인지 귀찮은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 분위기가 강한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압박이고, 낯선 사람에게 바로 적응해 대화하기 쉽지 않다. 통일된 성격이 아니라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농아인은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 소통하고 대화할 기회가 없으니 알아서 해결해야 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많이 조심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먹고살기 위해선 돈이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일자리의 폭이 넓지 않아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농아인에게 제일 어려운 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원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농아인은 쉽게 구하지 못한다. 장애인을 위한 일자리 박람회에서 농아인 직업 중 소리와 관련된 직업은 없었다. 몸 관련 직업만 많았다.

캐논코리아에 쉽게 합격할 수 있던 건 국가 지원 프로그램 덕이었다. 우리 학교와 장애인 직업 훈련 프로그램이 연결되어 있었다. 합격 후 3개월 교육을 받은 뒤 정직원이 됐다. 내가 맡은 일은 캐논 프린터 본체에 기스가 있는지 없는지, 하루에 300개가 넘는 제품을 검사하는 일이었다. 한 사무실에 농아인이 서른 명 이상 있고 농아인을 위한 통역사가 있어 대화도 편했다. 하지만 농아인들과만 수어로 대화하는 것이 농아인의 삶일까?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없이 다녔지만 이 삶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게 무서웠다. 기계처럼 무던한 삶을 사는 것이 좋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하고 싶었던 모델을 다시 해볼까? 아직 늦지 않았으니 도전할까? 입사 3년 반쯤 되었을 때 그만뒀다.
 

표정으로 읽는 마음의 기술


고등학생 때 학교 강당에서 작은 패션쇼에 섰다. 주변에 농아인 디자이너 언니가 모델을 권유해서 무대에 서게 됐다.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하얗고 긴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걷는 연습이 재밌었다. 캐논코리아에서 반복적인 일만 하다가 무대 위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 마음이 설레었다. 내가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촬영장에서 나오는 음악을 작게는 들을 수 있고, 코치님 말을 듣지 못해도 수어로 말하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퇴사 후 유명한 모델 학원을 직접 찾아갔다. 학원에선 안 된다고 했다. 농아인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인가? 이유를 말해 주진 않았다. 현실이 마음 같진 않았다. 다른 학원도 몇 군데 돌아다녔는데 모두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에스팀 모델 아카데미였다. 하루만 모델 수업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고, 계속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학원 선생님들이 판단하겠다 했다. 일일 모델 수업을 체험하고 워킹했는데 결과는 1등이었다! 수강료도 50퍼센트를 할인해 주셨다. 학원에 등록하고, 3개월 동안 통역사 없이 모델 수업을 들었다. 춤, 패션 이미지, 워킹, 사진 표정 등을 처음으로 연습했다.

찾아보니 세계 농아인 모델 대회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상을 탄다 해도 보람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비장애인과 겨루는 대회에 나가고 싶었다. 친한 통역사분과 함께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4〉 오디션에 도전했다. 그분은 그분 나름의 통역 오디션, 나는 내 모델 오디션이었다. 서류를 쓸 때, 얼굴 정면 사진을 사용하는 게 너무 지겹게 느껴졌다. 그래서 누가 내 머리카락을 옆에서 잡아당기고 나는 아파하는 표정으로 찍었다. 오디션 때 다섯 시간이나 대기하다 들어갔는데, 심사장에 들어가니 너무 많은 참가자들을 대한 뒤 지친 심사 위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화를 할 수는 없으니 수어로 연기했다. 숫자 수어를 보여 주며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 드렸더니 다들 좋아하셨다. 며칠 뒤 합격 전화가 왔다.

첫날 촬영장 공기 냄새는 너무 차가웠다. 용기 있어야 버틸 수 있는 직업 같은데 ‘농아인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합숙하러 들어갈 때 제일 걱정했던 부분은 통역이었다. 처음 보는 통역사와 호흡하기 어려웠다. 낯선 포토그래퍼와 사진을 찍을 때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언어 전달이었다. 사진 작가마다 말하는 표현이 달라서 파악하기 어려웠다. 통역사의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잡는 게 힘들었다. 내 의견을 빠르게 전달하는 것에 서툴렀다. 뭐가 맘에 들지 않을까? 포즈? 아니면 표현? 알 수 없는 분위기였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 알려 주지 않고 어떤 포즈가 어울리는지도 옷 디자이너분과 미리 얘기하거나 알아서 표현해야 했다.
©백만뷰,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시즌 4
농아인의 장점은 눈치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수어를 자주 쓰니 다른 사람의 표정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다른 모델의 워킹을 보고 음악을 추측해 따라 할 수도 있다. 자연스럽게 워킹, 강하게 워킹, 조용히 워킹, 차분히 워킹. 패션쇼를 할 때 나는 소리가 아닌 진동을 듣는다. 음악 소리가 내겐 박자처럼 들린다. 느린 느낌과 빠른 느낌이 있다. 손으로 탁자나 물건을 만질 때 각각 느낌이 다른 것처럼 내겐 소리가 모두 다른 느낌이다. 전자 음악의 활발한 박자와 한국 전통 음악의 조용한 박자가 내겐 모두 다르다.

사람들은 왜 농아인은 소리와 관계된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할까? 농아인마다 소리를 다르게 듣는 것이지 못 듣는 게 아닌데 말이다. 나는 인공 와우 보청기를 끼면 내가 아는 소리가 나왔을 때 무슨 말인지 40퍼센트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모르는 소리일 때도 상대방의 입 모양에 집중하면 절반은 읽을 수 있다. 비장애인들은 사람 성격에 따라, 말하는 상황에 따라 말투와 속도와 강도가 다르다. 농아인도 마찬가지다. 환경과 훈련 정도에 따라, 농아인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게다가 모델에게 중요한 것은 소리보단 포즈다. 팔과 다리만 있으면, 카메라 앞에서 움직이고 사진 찍히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8년의 유랑, 다시 모델로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에선 중도 탈락했지만 모델을 그만두고 싶진 않았다. 매일 새 사진을 찍고 새 포즈를 배우는 게 재밌었다. ‘내가 모델을 할 수 있네?’라는 생각이 들자, ‘앞으로도 모델 일을 할 수 있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통역사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제안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높은 단계까지 갔으니 다른 곳에서도 모델 제의가 많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고작 세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그보단 많이 올 줄 알았다. 한국은 장애인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바보처럼 흥미로울 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에서 모델로 일하는 건 쉽지 않았다.

세 군데 중 한 군데가 쇼핑몰이었다. 일을 시작했지만 쇼핑몰은 옷을 판매하는 곳이니 사진의 중심도 사람이 아닌 옷이었다. 과감한 포즈는 없고 자연스러운 포즈만 하는 게 너무 딱딱했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도 어려웠다. 촬영 전에 사진 작가와 디자이너가 어떤 사람들인지 먼저 파악해야 했다. 디자이너의 경우엔 그래도 스타일이 있으니 쉽게 파악할 수 있는데 사진 작가의 경우 매일 화보의 분위기가 달라 어려웠다.

3개월간 일한 뒤 그만뒀다. 조금 더 기다렸지만 이후론 정말 아무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몰라서 여행을 떠났다. 미술 전시회, 예술 박물관을 구경 다니고 바다도 보러 다녔다. 여행 중 농아인 모임에서 만난 사람과 연애도 시작하고 남자친구의 응원으로 대학에 도전했다. 초등학생 때 배운 비즈 공예로 액세서리를 만드는 취미가 있던 나는 주얼리디자인과에 지원했다. 다행히 장학금 신청에 선발되어, 드디어 나도 대학이란 곳에 입학했다.

취업 시장과 달리 대학에선 대부분의 학생에게 통역사를 지원해 줘서 좋았다. 취미가 일이 되면 재미가 없어진다는데, 나는 액세서리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아도 여전히 재밌었다. 그런데 학교생활 1년 차, 남자친구와 실수로 속도위반을 해서 임신했다. 소중한 임신이지만 첫 임신이라서 너무 혼란스럽고 첫째 아기가 생기자 마음이 무거웠다. 게다가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모델 꿈이 있었다. 지금은 액세서리 만드는 게 재밌지만 나중에라도 누구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모델 제의가 오면 내가 아기를 봐줄 테니 무조건 가라고 응원해 줬다. 대학도 마치고 싶고, 아이도 키우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더 지내고 싶었다. 누가 보기엔 욕심일 수 있겠지만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출산 후 1년 동안 육아 휴학을 한 뒤 학생으로 복귀했다. 대학을 다니며 둘째도 임신했고, 졸업 후에 셋째까지 생겨 우리 집은 정말로 북적북적하게 됐다. 세 명의 아이와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며 육아에 집중해서 살았다.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모델 제의가 없어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이들이 셋이나 생기니 그런 우울함은 모두 사라졌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바로 주얼리와 관련된 직장에 취직하는 것도 어려워, 육아에 집중하는 주부로 살기로 했다. 아이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아이들이 충분히 자라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천천히 직장을 갖기로 남편과 결정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속사에서 모델 제의가 왔다.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영상을 보고 연락했다고 말했다. 많이 당황하고 고민됐다. 아이들이 아직 3살, 5살, 7살로 어렸기 때문이다. 엄마의 도움이 필요한 나이다. 일주일 정도 혼자 끙끙 앓다 남편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농아인에겐 더욱 쉽게 찾아오지 않는 인생의 기회였다.

모델 복귀를 결정한 것은 너무 사랑하는 아기들 때문이었다. 마음속 깊이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 불안하지 않도록 아이들 옆에 함께 있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중에 아이들이 컸을 때 ‘우리 엄마는 멋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면 기쁠 것 같았다. 그렇게 8년 만에 모델로 복귀했다.

몸 상태부터 회복해야 하는데 오랜만에 운동하는 게 어려웠다. 아이 세 명의 엄마가 되니까 몸의 변화도 컸다. 예전 몸매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부터 인정하고, 천천히 운동하기로 했다. 출산 후 체질도 체질이지만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게 힘들었다. 일자리 장소에 가려면 매번 장거리 여행을 해야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서울행 KTX 기차를 예약하고, 서울역에 도착해서도 지하철 1시간 거리에 있는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저녁이면 다시 전주로 돌아와 아이들을 봐주는 것이 큰 체력 소모였다.

남편에게 육아를 맡기는 것도 걱정스러웠다. 남편이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아이들을 맡기는 게 처음이라서 불안했다. 서울에 일하러 오면 남편이 아기들을 세수시키고 아침을 차려 주고, 외출복을 입혀 등원까지 마친 후 일을 나갔다. 오후에 퇴근 후 남편이 집에 도착해서 아기들과 잘 있다며 사진을 보내면, 서울에서 일하던 나는 그때서야 안심했다.

체력은 바닥이었지만 오랜만에 활동하는 게 기뻤다. 이때까지 잊고 지낸 자존감을 다시 찾은 것 같았다. 2021년 박윤희 디자이너의 그리디어스(Greedilous) 의상을 입고 패션쇼 촬영을 했다. 오랜만에 패션쇼라 어색했지만 클럽 같은 공간에서 춤추는 분위기라 자유롭게 촬영했다. 작년엔 양해일 디자이너의 해일(HEILL)을 입고 2021 미스 수퍼 렌트(Miss Super Talent) 패션 위크에 참여했다. 갑자기 생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잊고 있었던 8년 전의 꿈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최근 코로나 때문에 작업 제의가 많진 않지만 오히려 초심자 입장에서 배우고 있기 때문에 모델 일은 끝없이 새롭게 느껴진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워킹맘이 걱정할 것이다. ‘내가 밖에서 이럴 게 아니라 집에서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오기 힘든 아이와의 시간을 이렇게 놓치면 아이들이 너무 속상해하지 않을까’. 나도 모델 일을 하지 않을 땐 스스로를 완전히 가정주부라 생각하고 모델 일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잡은 꿈이 행복하면서도 아이들이 너무 어린데 내가 일찍 취직해버린 것 같아서 잘한 선택일지 걱정이 많이 들었고 지금도 그런 걱정은 태산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믿을 때가 많다. 가만히 있었더라면 아무도 농아인 모델은 찾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의 바른 만큼 차갑다


비장애인들 중에서 매번 농아인을 배려해 소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차분한 사회 같다. 가만히 예의 바른 것은 쉽다. 하지만 적극적인 것은 어렵다. 나는 항상 먼저 적극적이어야 한다. 종이에 써서, 핸드폰 자판으로 쳐서 물어보기도 하고 몸짓으로 표현도 한다. 사람마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해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생각도 말도 사람의 것이다. 어떻게든 전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노력한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왔을 때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대화하는 것이 충격이었다. 대화하려면 통역사가 필요하고, 통역사를 구하려면 돈을 내야 한다. 나는 스무 살 때 통역사를 구해야 하는 것 자체를 몰랐다. 어디에 전화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서 통역사를 안 불렀는데, 시간이 흐르며 통역사 없이 소통하는 게 힘들었다.

처음 모델 학원을 알아볼 때였다. 한국동시통역센터 규정에 따르면 농아인을 위해 통역사를 구하는 것은 학원 책임이라지만 나를 위해 통역사를 구해 준 곳은 없었다. 학원에 문의하자 학원 측에선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서 모르겠다고 하셨다. 대학은 교육부에서 지원금을 받아 장애 지원 센터를 운영하고, 근로자는 고용노동부에서 활동 보조인을 지원해 주는데 학원은 아무런 국가 지원이 없다. 당시 한국동시통역센터 기준으로 강연 및 세미나 통역은 시간당 7만 원이었다. 통역비뿐 아니라 통역사의 왕복 교통비도 내야 한다. 통역비 얘기를 꺼내자 아무도 농아인 학생을 뽑으려 하지 않았다. 잔인하다고 느꼈다.

지역 농아인 회원증이 있으면 경찰서나 병원, 동사무소, 구청에서 무료로 통역사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학원으로 부를 순 없었다. 요리 학원을 다닐 때 선생님이 빠르게 말하면 입을 읽을 수 없었다. 중요한 내용만이라도 통역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도와줬지만 친구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스스로 공부해야 하나? 농아인들은 학원비도 내고 통역비도 내야 하나? 결국 통역사 없이 수강한 요리 학원 수업은 보람 없이 끝났다. 돈 때문에 농아인들은 많은 배움의 기회를 놓친다.

대학에선 통역사 지원이 문제 없었다. 정부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통역사의 실력이었다. 만나는 통역사마다 실력이 달랐다. 내가 배운 과목의 전문 용어를 많이 아는 통역사는 없었다. 주얼리디자인과에서 배우는 보석은 종류에 따라 이름이 다 다른데 수어는 기호와 같아서 그걸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때그때 빠르게 표현하기도 어렵다. 교수님이 말씀할 때마다 통역사가 전달해 주는 걸 잘 봐야 하는데 교수님이 빠르게 말할 때는 통역사가 표현할 시간도, 내가 그걸 읽는 시간도 부족했다.

공부하러 대학에 오는데 통역사 실력이 부족하면 전문 대학 2년 동안 우리의 공부는 손해를 입는다. 그래서 통역사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는데 학교에선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고 넘어갔다. 그러다 한 선생님과 함께 대학교 교무처에 찾아갔다. 교양 과목은 중요한 용어가 없기 때문에 실력이 부족한 통역사도 괜찮지만, 필수 과목의 경우 실력 있는 통역사를 고용해야 한다고 여러 번 말했더니 통역사를 바꿔 주셨다.

비장애인은 통역에 대하여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기본적인 수어와 공부할 때 쓰는 수어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영어를 빠르게 전달하는 통역과 같다. 예를 들어 회사에 중요한 외국인 고객이 왔을 때 생활 영어가 가능한 초보 통역사를 고용하는가? 회사 거래에서 손해를 보면 안 되지 않나? 실력 있는 통역사를 원하는 건 농아인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통역사를 먼저 만나서 이야기 해보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시작하면 좋겠다.

아니면 일반 수어 수료식을 마치고 농아인 수어 수료식을 한 번 더 받으면 좋겠다. 일반 청각 장애인들이 쓰는 수어와 농아인의 수어는 완전히 다르다. 일반 수어는 국어책을 읽을 때 문자 그대로 표현하지만 농아인 수어는 모든 글자를 표현하지 않고 요약해서 표현한다. 일반 수어로 내게 말하면 아무리 좋은 통역사여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내 첫 직장 캐논코리아는 농아인을 위한 회사 같았다. 농아인들이 서른 명 이상 있고 통역사 직원도 한 명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통역사를 불러 빠르게 해결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대기업이 아닌 회사에 가면 통역사가 없어 혼자 힘으로 소통하기 어렵다.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최종전에서도 통역사가 아예 없어서 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농아인은 본인에게 익숙한 단어나 문장으로만 말한다. 처음 보거나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 특히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농아인 스스로 말할 때와 통역사를 통해서 말할 때 차이가 난다. 내 말을 듣고 촬영 때마다 통역사분을 초대하는 게 기뻤지만 촬영장에서 통역사는 저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왜 뒤에서 멀리 통역하는지 이상했다. 미국의 유명한 농아인 모델 나일 디마코(Nyle DiMarco)가 생각났다. 그가 촬영하는 장소엔 늘 바로 옆에 통역사가 있었다. 내가 촬영할 때는 통역사가 스크린에 잡히면 이미지가 안 좋아지니 일부러 멀리 떨어트린 건가? 아니면 사람들은 그 자리가 내게 불편하다는 걸 몰랐을까? 외국인을 인터뷰할 땐 통역사를 바로 옆에 두지 않나? 만약 그때 촬영을 중단하고 당당하게 내 입장을 말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결국 탈락한 대회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어릴 땐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구화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도 말할 수 있는 단어가 몇 개 없다. 들을 때도 오해가 많다. 사용하지 않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말할 땐 정확하지 않다. 나는 그래서 대화할 때 구화와 수어를 섞어서 말한다. 입으로 말하는 동시에 손으로 말하는 농아인이다.

스무 살이 되어 처음 사회로 나왔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그때처럼 나는 미래가 두렵다. 내가 아직 겪지 못한 삶, 낯선 세상이 또 있을까? 끝없이 있을 것 같다. 누구한테 도움을 구할 수 없다면 혼자라도 세상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일반 사회에서 농아인은 불편하지 않게 그대로 사는 건 불가능하다. 눈치 있게 살아야 한다. 그게 내 장점이기도 하다. 나는 예쁜 옷을 입고 사진 찍는 모델 일이 좋다. 하지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 가보는 모델도 되고 싶다. 꿈을 보여 주지 못한 농아인들에게, 아직 다가온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먼저 다가가자고 말하고 싶다.
[1]
청각 장애인은 흔히 농(아)인과 난청인으로 나뉜다. 농인의 사전적 의미는 청력이 거의 손실된 사람이다. 난청인의 사전적 의미는 귀만으로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다. 그러나 농인 세계에선 ‘청각 장애인’ 등 장애를 포함하는 차별적인 언어 사용은 지양한다. 따라서 대다수의 농인은 수어라는 고유한 언어 체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농인’이라 지칭하고, 음성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구화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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