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불의

2022년 열 번째 프라임 레터

안녕하세요. 북저널리즘 신아람 디렉터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원합니다. 현재가 불확실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더 나은 미래를 확신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인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 방법은 바로 ‘2여’입니다. 여당이든 여론이든 등에 업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처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저는 회의적이었습니다. 여당도, 여론도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형태의 의사 표현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결과도 그러했습니다. 사정은 알겠지만 너무하는 것 아니냐, 시위 때문에 회사에 지각해서 피해를 봤다,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장애인 단체들과 우리 사회의 간극은 더 멀어지는구나, 입맛이 씁쓸했습니다.

그런데 판세가 바뀌었죠. 우호적인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작은 바로 국민의힘 이준석 당 대표의 비판, 그리고 서울교통공사의 여론전이었습니다. 시위로 인해 불편을 겪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사람들조차 장애인 단체에 대한 이들의 대응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이제 논의는 전장연이 그토록 원했던 장애인 이동권 실태와 해결 방안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준석 대표가 전장연으로부터 공로패라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불의


이준석 대표의 정치 행보를 두고 ‘갈라치기’라는 비판이 항상 따라붙습니다. 세대와 성별, 지역을 갈라 내 편과 네 편을 확실히 구분하는 전략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만 보기에는 이 대표의 논리가 허술하지 않습니다. 막무가내로 우리 편은 맞고 너희 편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닌 겁니다. 이 대표가 꺼내는 담론을 잘 살펴보면 패턴이 보입니다. 바로 ‘새로운 불의’입니다.

이 대표는 여성을 나쁘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여성가족부 장관 자리를 거의 독과점해 왔던 여성 단체에 문제의식을 던집니다. 장애인을 외면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도 없습니다. 시민에게 피해를 끼치는, 불법 시위 방식을 비판합니다. 민주화를 성취해 내는 과정에서 비난할 수 없는 성역이 되어버린 이슈가 품고 있는 불편함이 분명 존재합니다. 지금까지는 이것을 소리 내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왔죠. 그런데 이 대표는 이야기합니다. 불편하다고. 잘못되었다고. 금과옥조처럼 지켜 온 그 가치 안에 부조리가 숨겨져 있다고 폭로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불의가 폭로되는 순간, 그 불의로 인해 불쾌함을 느껴 봤던 사람이라면 환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느꼈던 불쾌함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근거 있고 올바른 마음이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공감받고 싶어 하는 동물입니다. 유력 정치인이 나와 깊은 공감대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공감대의 거품 안에는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고양시킵니다. 고양된 감정은 믿음을 더욱 단단히 강화하고, 강화된 믿음은 공감대의 거품을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이준석 대표는 그렇게 자신을 지지해야 할 이유를 만들었습니다. 정치가로서 젊다는 것 외에 자신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준 것입니다. 이 대표가 정치 개혁을 이야기했을 땐 대중의 지지가 지금 같지 않았습니다. 바른미래당에서 보수의 혁신에 대해 외쳤을 때도 찻잔 속의 태풍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대중에게, 일부의 대중일지라도, 이준석은 필요한 정치인입니다. 나를 대변하는 유일한 정치인이 된 것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없다, 더 이상은


그런데 이번 전장연 이슈는 양상이 조금 다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준석 대표가 제기하는 질문들이 장애인에 대한 ‘갈라치기’로 규정되고, 이에 대한 역풍이 불었습니다. 오히려 장애인 단체들 쪽으로 대중의 마음이 기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표는 대선 기간 동안 장애인 관련 공약을 내세워 왔습니다. 이번 이슈가 표면화된 이후에도 전장연이 아닌 다른 장애인 단체와는 몇 차례 만남을 갖기도 했죠. 그런데 이런 사실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중은 이제 이준석 대표가 장애인 단체와 선을 긋고 대척점에 섰다는 구도만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란, 사안을 세심하게 따져서 디테일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것을 딱히 즐기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써야 하고, 에너지가 많이 들어서 피곤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바쁜 시민들이 장애인 시위에 대한 이준석 대표의 입장에 대해서까지 면밀히 들여다보며 공부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이준석 대표는 전장연과 대립하고 있다는 스토리만 남을 뿐입니다. ‘갈라치기’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던 정치인이었으니 이야기에 더욱 개연성이 생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이 대표의 젠더 관련 입장이 공고한 팬층을 확보하게 된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이 대표가 이야기하는 젠더 관련 정책은 무조건적으로 비논리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법론에 대한 반론이나 비효율에 대한 대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이런 세세한 논의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준석 대표가 여성 관련 정책에 반대한다는 대강의 스토리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논의는 성별 간의 간극을 넓히는 데 분명히 일조했습니다.

이 대표가 바랐던 결과가 과연 이런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결과로 이 대표가 득을 본 것은 사실입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순간, 세밀한 논의는 묻히고 손쉬운 혐오가 고개를 듭니다. 디테일을 파악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인 반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한 뒤 혐오하고 배제해 버리는 것은 몹시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든든한 내 편이 있다면 더욱 그러하겠죠. 이러한 경험을 함께해 나아가는 동안, 정치적인 공동체의 끈끈한 결속력은 더욱 강해집니다.
 

논리가 아닌 스토리의 시대


여기서 이준석 대표와 대중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오해가 생기는 지점을 짚어볼 수 있겠습니다. 이준석 대표는 논리를 이야기하지만, 대중은 스토리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발신자의 잘못도, 수신자의 잘못도 아닙니다. 이 대표는 논리를 말하도록 교육받았으나 2022년, 현재가 스토리의 시대일 뿐입니다.

요즘 유튜브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유명 드라마 시리즈의 20분 요약 영상, 2시간 요약 영상입니다. TV 채널이 3개뿐이었던 예전에는 36부작 드라마를 한 편 한 편 보면서 대사 한 줄, 장면 하나에 감동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콘텐츠든 빠르게 스토리로 소비하는 시대입니다. 디테일이 주는 감동을 위해 써버리기엔 36시간은 너무 깁니다. 이미 Z세대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볼 때 1.5배속이 디폴트입니다. 초등학생들이 주로 소비하는 유튜브 채널을 보면 말이 굉장히 빠르고 호흡점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2배속으로 소비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 세대입니다.
 
이렇다 보니 찬찬히 생각하고 납득해야 하는 논리라든지 사태의 이면을 드러내는 디테일에는 관심을 두기 어렵습니다. 이제 대중은 쏟아지는 뉴스와 콘텐츠를 스토리로 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논리로 설득하는 시대가 아니라 스토리로 공감받아야 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다시, 새로운 불의


그래서 이 대표가 제시하는 새로운 불의들은 쉽게 오독됩니다. 큰 담론이 아니라 디테일을 들여다보아야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보이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도 그렇습니다. 이 대표는 시위의 대상이 일반 시민일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시위 문화가 용인되었을 때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혼란을 우려합니다. 그렇다고 장애인 단체를 악으로 규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대해 이 대표 자신도 정책을 제안한 바 있다고 할 정도니까요. 그러나 이 디테일은 무시되고 새로운 불의만 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불의를 둘러싸고 또 다른 스토리들이 생겨났습니다. 서울교통공사가 전장연의 시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악의적으로 여론을 조작하고자 했다는 증거가 드러난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할머니 임종, 버스 타고 가세요’ 사건입니다. 시위로 멈춰 선 지하철 안에서 한 시민이 할머니 임종을 봐야 한다며 울분을 토하고, 시위자는 “버스 타고 가세요”라고 답하는 동영상이 여러 언론사를 통해 기사화됐습니다. 서울교통공사 홍보팀이 언론사에 뿌린 자료 내용 그대롭니다. 그러나 “버스 타고 가세요”라는 답변에는 보도되지 못한 그다음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 걸 당해 봤기 때문에 잘 압니다. 저도 그래서 임종을 못 봤거든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 스토리가 여론을 움직였습니다. 여론이 움직이자 여권도 따라 움직이고 정치권이 말을 보태기 시작합니다. 계산이나 논리 없이, 짧은 이야기 속에 누가 약자인지가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제서야 디테일들이 드러납니다. 여전히 장애인은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으며 숫자로는 다 이야기할 수 없는 수많은 계단이 남아 있습니다. 출근길, 장애인들이 지하철에 여럿 함께 오르는 것만으로 시위가 되고, 연착을 초래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승강장 플랫폼과 지하철 사이에 휠체어 바퀴를 넣어 운행을 방해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하철에 오르고자 하는 휠체어 사용자들이 매일같이 겪는 위험천만한 현실일 뿐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이제서야 우리의 마음속에 와 닿습니다.
 
‘새로운 불의’는 절대적으로 옳기만 한 가치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선의로 시작된 목표라 할지라도 그 안에 불의가 있다면 바꿔야 합니다.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던 권위주의 정권은 부정당했습니다. 시민들이 ‘그 어떤 희생도 결코 작지 않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불의를 모른 척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정말 불의인지, 만약 그렇다면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지 치열하게 논의해 나아가야 합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세상을 바꿔 나가는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이 새로운 불의가 퇴행적으로 소모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정치인이 지지층 집결을 위해 편 가르기의 미끼로 ‘새로운 불의’를 앞세우지는 않는지, 혐오를 위한 핑곗거리를 찾는 이들로 인해 고의로 오독되고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전장연의 시위로 인해 뼈아픈 손해를 봤을지도 모릅니다.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불의입니다. 그러나 그 시위가 내포하고 있는 디테일과 스토리들은 지금까지 불의하게도, 우리에게 와 닿지 못했습니다.
 
프라임 레터는 매주 프라임 멤버분들에게 보내 드리는 위클리 레터입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프라임 레터를 읽으시면서 들었던 생각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이 북저널리즘을 완성합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