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석기 시대의 생존 전략

4월 14일 - FORECAST

인수위가 반도체 초격차 대책을 발표했다. 쌀보다 반도체가 더 중요한 시대이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인수위가 반도체 초격차 대책을 발표했다. 강력한 정부 지원책이 나온 만큼 삼성과 SK 등 업계의 책임감도 무거워졌다. 비메모리 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 쌓아둔 현금을 활용한 인수전 참전 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WHY_ 지금 반도체를 읽어야 하는 이유

전기를 이용해 가동되는 물건 대부분에 반도체가 사용되고 있는 규석기 시대이기 때문에. 애플도, 구글도, 아마존도, 테슬라도 자신만의 반도체를 갖고 있거나 가질 예정이기 때문에. 빅테크 기업들이 그리고 있는 AI와 휴머노이드의 미래세계 기반이 바로 반도체이기 때문에. 새 정부가 반도체 산업의 초격차 경쟁력 확보를 위해 각종 지원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에.
DEFINITION_ 규석기 시대  

돌의 시대는 진작에 끝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2022년 지금이 바로 반도체의 핵심 원료인 규소, 즉 돌가루가 지배하는 시대이다. 굳이 핸드폰이나 노트북 같은 고가의 전자제품이 아니더라도 전기로 움직이는 웬만한 제품에는 반도체가 들어간다. 반도체는 인류 사회의 현재를 움직이는 핵심 부품이며 미래를 지배할 권력이다. 전 세계는 이미 반도체 권력 투쟁에 돌입했다. 애플과 테슬라를 비롯한 굵직한 빅테크 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만의 반도체를 만들고 있거나 만들 계획이라는 점이 그 증거다. 
KEYMAN_ 이종호 

우리 정부도 이러한 흐름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새 정부의 인사를 보면 그 시그널이 확실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내정된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비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표준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세계적인 반도체 기술 보유자이다. 물론 삼성과의 악연이 있기는 하지만, 반도체 산업을 잘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가 내각에 포함된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구체적인 지원 정책도 나왔다. 인수위가 반도체 산업의 초격차 경쟁력 확보를 위해 규제 해소, 인센티브 강화, 그리고 인력난 해결이라는 지원책을 내놓은 것이다.
RECIPE_ 초격차 

물론 아직 검토 단계지만, 구체적인 로드맵이 제시되었다. 내용은 한마디로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빠르게 세울 수 있도록 인허가 주체를 중앙정부로 가져오고, 세제 혜택도 강화한다. 또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로 꼽히는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학과의 정원을 늘리거나 석박사 과정을 신설해 반도체 산업 인력을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정부가 내놓은 반도체 ‘초격차' 대책만으로는 초격차, 즉 넘볼 수 없는 차이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인수위가 밝힌 대로 “기업 간 경쟁이 아닌, ‘기업+정부’ 연합 간 경쟁 시대로 돌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의 방향타를 쥐고 있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다. 우리 기업들의 방향타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현실 공간에 동서남북이 있다면 반도체 산업에는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라는 두 방향과 팹리스(설계)와 파운드리(생산)이라는 두 방향이 있다.
CONFLICT_ 메모리 vs 시스템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분야는 시장에 끌려가는 경향이 있다. 메모리 반도체 사업이 잔치를 벌였던 세 번의 ‘빅 사이클’을 살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PC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2010년대 초반, 스마트폰의 대중화가 진행된 2010년대 중반, 그리고 클라우드 업체들의 데이터 서버 구축으로 ‘수퍼 사이클’을 기록한 2010년대 후반 모두 시장의 필요에 의해 발생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시스템 반도체 분야는 시장을 선도한다. 인텔이 대표적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텔이 새로운 CPU를 출시해야 새로운 컴퓨터를 출시할 수 있었다. 시스템 반도체 기술의 한계가 시장에서는 상상력의 한계로 작용한다. 반대로, 시스템 반도체 기술의 발전은 시장의 혁신을 가능케 한다. 애플의 최근 신제품 발표를 보면, 독자 개발한 M1칩에 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애플이 자사 제품을 계속해서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M1칩의 존재 때문이다.
RISK_ 엑시노스 

그런데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선두기업이면서 아이폰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갤럭시의 삼성전자에는 일반 소비자가 알 만한 간판 시스템 반도체가 없다. 실은 삼성도 자신만의 브랜드, ‘엑시노스’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삼성은 엑시노스를 갤럭시 시리즈의 얼굴로 내세울 수가 없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기술의 부족이다. 최근 출시된 갤럭시 S22 4대 중 3대엔 퀄컴의 칩이 들어갔다. 뒤집어 말하자면 엑시노스는 4대 중 1대에만 사용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지만 ‘성능’문제 아니겠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둘째, 경쟁사이자 고객사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퀄컴은 엑시노스의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삼성전자의 고객사이기도 하다. 퀄컴 칩의 생산을 담당하는 업체(파운드리) 리스트에는 삼성전자도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퀄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반도체 전략을 두고 아쉽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 1위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이를 충분히 뒷받침 할 만큼의 투자나 인수 합병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실적 신기록을 세워도 주식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한 까닭이다. 미래의 가능성을 반영하는 주식시장이 삼성의 미래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NUMBER_ 35퍼센트 

이러한 시장의 우려를 증명하듯 삼성전자의 파운드리(생산) 사업부에도 악재가 겹치고 있다. 내부 반도체 기술과 영업 비밀을 외부로 유출하려고 한 직원이 적발돼 내부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은 재택근무 중에 발생했으며, 결국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품 부문의 재택근무를 중단시키기에 이르렀다. 기술 유출에 대한 업계의 우려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지난 2022년 2월 공표돼 오는 8월부터 시행되는 반도체 특별법에 따르면 반도체뿐만 아니라 배터리와 백신 등 3개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 인력의 해외 이직이 제한된다. 그러나 이 법안으로 인해 노사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안 그래도 작년 10월부터 진행되어 온 임금협상이 지금까지도 절충점을 찾지 못하면서 사상 초유의 삼성전자 파업 사태까지 언급되는 시점이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수율 저하와 성능 논란이다. 경쟁사인 대만 TSMC는 4나노 제품 수율이 70%대로 안정적인 데 반해 삼성전자는 그 절반 수준인 35% 안팎이라는 보도가 나온다. 또, 논란을 일으켰던 GOS 문제도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에서 생산된 칩셋의 발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REFERENCE_ ARM 

그런 면에서 최근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모바일 칩(AP) 설계 시장의 최강자인 영국 ARM의 공동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리한 전략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ARM은 컴퓨터의 두뇌인 CPU와 스마트폰의 두뇌인 AP의 설계도를 만드는 회사(팹리스)다. 특히 AP 설계 시장점유율은 95%에 달한다. 반도체는 잘 만드는 것도 당연히 첨단 기술의 영역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설계도가 없으면 만들 수가 없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이인자인 SK하이닉스가 이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영역을 확보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파트너로 인텔과 손잡을 가능성이 크게 점쳐진다. 각국 정부가 반도체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보기 시작한 지금, 공동 인수라는 전략도 업계 저항을 낮출 묘수라는 평가다.
INSIGHT_ 반도체가 국력 

우리는 이미 2019년 일본발 ‘소부장 사태’, 2021년 ‘요소수 사태’를 겪은 바 있다.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공급망 문제’와 이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체감하고 있다. 한때는 체력이 국력이었다. 노동력이 곧 돈이 되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통상 능력이 국력이다. 글로벌 경제 시대인 만큼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반도체는 그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다. 전 세계가 반도체를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FORESIGHT_ 팹리스 

그래서 인수위가 내놓은 ‘반도체 초격차 대책’이 아쉽다. 시스템 반도체, 그중에서도 팹리스(설계) 분야라는 우리 기업들의 약점을 돌파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보다 정밀하게 정책을 설계하지 않는다면, 우리 기업들이 메모리 반도체 분야 1위라는 달콤한 독배를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반도체의 혁신만이 휴머노이드 로봇의 미래를 완성할 수 있다. 반도체의 혁신만이 자율주행 자동차라는 이동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 주도권을 빼앗긴다면 그 타격은 경제적 영향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강대국이 한국을 아쉬워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긴장해야 할 때이다. 과감한 투자와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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