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맥의 시대는 끝났다

4월 20일 - FORECAST

일상이다. 주류업계는 리오프닝을 꿈꾸고 전국의 부장님들은 회식을 꿈꾸지만, 지난 2년 동안 주류 소비의 트렌드는 급격히 변화했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757일 만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리오프닝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러나 섬세한 전략 없이는 리오프닝은 기회가 아니라 도태의 덫이 될 수도 있다. 지난 2년 동안 소비자가 진화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리오프닝 분야로 꼽히는 주류 업계를 들여다보면 주목해야 할 키워드가 보인다.
WHY_ 지금 술에 대해 읽어야 하는 이유

리오프닝과 함께 전국의 부장님들이 회식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침체되었던 주류 업계가 호황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지난 2년여 동안 한국의 음주 문화는 변화했기 때문에. 달라진 음주 문화에는 달라진 마케팅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주류 산업의 리오프닝을 통해 진짜 리오프닝의 실체를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에.
MONEY_ 9조 원

우리나라 주류시장 규모는 출고액 기준 약 9조 원으로 추산되며, 이 중 약 83퍼센트는 희석식 소주와 맥주이다. 이른바 '소맥'의 재료들이다. 코로나19 이전까지 주류시장은 유흥용과 가정용 시장이 6:4 비율을 유지했다. 압도적인 영업력을 가진 하이트진로나 오비맥주 등이 실적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회식과 2차, 3차가 사라진 것이다. 2020년에는 한때 가정용 주류시장의 비중이 70퍼센트까지 치솟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하이트진로와 오비맥주 모두 2021년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0퍼센트 이상 감소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실상 종료되면서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이 다시 ‘소맥’을 말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CONFLICT_ 저녁 있는 삶

그러나 '소맥'을 둘러싸고 부장님과 젊은 직원 간에는 새로운 갈등이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직장인들이 2년도 넘게 ‘저녁 있는 삶’을 국가 정책에 의해 경험했기 때문이다. 거리두기 종료에도 불구하고 재택근무를 확대하거나 아예 거점 오피스를 만들어 이용하는 움직임이 빅테크 기업은 물론 대기업에서도 나오고 있는 마당이다. 탈오피스 시대를 열고 있는 젊은 직장인들에게 갑자기 회식과 3차의 시대로 회귀하자는 이야기가 제대로 먹힐 리 없다. 실제로 한국리서치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회식이 필요하다’는 데 20대의 52퍼센트, 30대의 57퍼센트가 반대했으며, ‘특별한 개인 사정이 없으면 회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데에는 20대의 72퍼센트, 30대의 67퍼센트가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NUMBER_ 1200

그렇다면 직장인들의 저녁은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갓생’을 살기 위해 자기 계발을 하고, 운동에 몰두할 수도 있겠지만 뉴노멀의 저녁 시간에도 여전히 술은 존재한다. 그러나 술의 종류는 달라질 전망이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소맥이 아닌, 새로운 취향의 술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전통주의 약진이 눈에 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먼저, ‘초개인화 시대’에 걸맞은 다양성이다. 대량 생산되는 희석식 소주와 맥주로는 채울 수 없는 다양한 취향을, 다양한 맛과 향을 가진 전통주는 충족시켜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전통주 양조장 개수는 약 1200여 개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다음으로는 온라인 구매가 가능하다는 점이 주요했다. 청소년 보호 등의 이유로 주류는 온라인으로 판매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예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전통주다. 팬데믹 기간 동안 집으로 간편하게 배달시켜 맛볼 수 있는 전통주는 혼술에도, 소규모 홈파티에도 빠질 수 없는 품목이 되었다.
KEYMAN_ 박재범

이런 흐름을 타고 다양한 전통주가 출시되고 있다. 특히 최근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박재범 소주’로 불리며 연일 품절 대란을 빚고 있는 원 스피릿츠 ‘원소주’다. 저렴한 서민의 술의 대명사였던 소주가 이렇게 트렌디하고 고급스러워질 수 있다는 점이 언론의 주목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미 시장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새로운 전통 증류주가 사랑받고 있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들에서는 이미 ‘토끼소주’, ‘서울의 밤’ 등 프리미엄 증류주를 토닉과 함께 판매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다만, ‘원소주’의 성공은 과거 한두 브랜드가 독과점했던 주류 시장이 이미 변곡점을 맞았다는 사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저렴한 술을 취하기 위해 ‘부어라 마셔라’ 마시는 문화에서 제대로 된 술 한 잔을 즐기는 문화로 진화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음주 문화와도 맞닿아 있다.
DEFINITION_ 취향과 관계

‘원소주’를 맛보고 싶다면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된다. (지금은 물량 문제로 주문이 일시 중단되었다.) 전통주이기 때문이다. 전통주는 팬데믹 기간 동안 이 온라인 판매라는 독점적인 지위를 영리하게 이용했다. 당장에 전통주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플랫폼들이 생겨났다. 배상면주가에서 운영해 온 전통주 쇼핑몰 ‘홈술 닷컴’이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고, 전통주 소믈리에의 큐레이션과 추천 셀렉션 등을 제공하는 ‘술담화’도 전통주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유명세를 타고 있다. 최근에는 ‘백걸리’라는 전통 막걸리를 출시한 백종원 대표의 ‘백술닷컴’까지 가세하며 전통주가 담고 있는 스토리는 물론, 최근의 소셜 트렌드까지 제공하고 있다. 각각의 전통주에 관한 전문적인 정보까지 제공하는 이런 플랫폼들이 각광받는 현상은 새로운 관계 맺기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네트워킹을 위해 넓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과거와는 달리, 느슨하지만 부담 없는 사람끼리 만나 취향을 공유하는 관계를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술자리의 변화로도 이어진다. 일단 술부터 마시고 나면 친해진다는 믿음은 이미 깨졌다. 취향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 좋은 것을 함께 즐기는 술자리가 대세다.
RISK_ 전통주

다만, 이 ‘전통주’라는 단어에 함정이 있다. 박재범의 ‘원소주’는 전통주이지만, 백종원의 ‘백걸리’는 전통주가 아니다. 현행 주세법이 문제다.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제조하거나, 대한민국식품명인이 제조하거나, 그도 아니면 농업 경영체 및 생산자 단체가 직접 생산해야 전통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이 양조장이 위치한 지역의 농산물을 주원료로 해서 생산하는 것이다. 젊은 감각의 ‘원소주’는 강원도 원주에 양조장을 두고, 해당 지역의 쌀을 100퍼센트 사용해서 제조하고 있다. 전통주의 자격이 있다. 그러나 ‘백걸리’의 경우 양조장은 서울에 위치하고, 재료는 충남 예산에서 난 쌀을 사용한다. 전통주 자격 미달이다. 이런 구시대적 잣대로 전통주를 정의하고 혜택을 준다면 성장하는 시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정부도 기준 변경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속도 조절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음주를 조장하거나 미성년자의 주류 구매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다.
RECIPE_ 화이트와 꿀주

전통주에 대한 경험을 중심으로 이미 달라질 대로 달라진 음주 문화에 메이저 기업들은 얼마나 대비가 되어 있을까? 리오프닝을 맞아 잇따라 내놓고 있는 신제품들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오비맥주는 밀맥주인 ‘카스 화이트’를, 롯데칠성음료는 ‘처음처럼 꿀주’를 내놓았다. 모두 기존 제품에 변주를 준 형식이다. 그러나 새로울 것은 없다. 맛과 향으로 취향을 충족하고자 하는 소비 욕구를 노렸다기보다는, 회식 자리에서 소소한 즐거움이 될만한 아이템에 가까워 보인다. 신세계L&B는 아예 소맥용 발포주 ‘레츠’를 내놓았다. 리오프닝과 함께 당분간 이어질 회식의 부활에는 걸맞은 전략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미 변화한 소비자의 입맛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 이제 술에도 입맛을 따지는 시대가 되었다.
INSIGHT_ a real re_opening

수많은 경제 기사가 리오프닝을 다루고 있다.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동안 팔리지 않았던 것들이 팔릴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달라졌다. 소맥으로 시작해 발렌타인으로 끝나는 3차 풀코스의 고전적인 회식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다. 지금은 내 취향에 꼭 맞는 전통주를 구독하고, 집에서 배송 받아 여유롭게 맛과 향을 즐기는 시대인 것이다. 즉, 술은 팔리겠지만, 다른 술이 다른 방식으로 소비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소비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2년 전과는 다른 방식의 전략이 필요하다. 키워드는 ‘개인’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새삼, 각자가 이미 갖고 있던 ‘개인의 취향’을 발견해 버렸다.
FORESIGHT_ 플랫폼

그래서 전통주 업계의 플랫폼 전략이 유독 눈에 띈다. 여행이 되었든, 화장품이 되었든, 술이 되었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소비해야 할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스토리와 구체적인 정보, 큐레이션 등을 제공할 수 있는 플랫폼이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21세기는 소비로 자아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그리고 그 자아들은 팬데믹 기간 동안 스스로의 취향과 관계를 재정립했다. 리오프닝이라는 기회를 잡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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