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P의 몰락
완결

GAP의 몰락

의류 브랜드 GAP은 시대를 풍미했지만,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카니예 웨스트와의 콜라보는 부활의 열쇠가 될 수 있을까?
Missy Elliott(미시 엘리엇)과 Madonna(마돈나)의 2003년 Gap 광고 캠페인 ©Photograph: Retro AdArchives/Alamy
GAP의 클래식 로고 후드티를 떠올려 보자. 가슴팍에 아치형으로 배열된 세 개의 굵은 글자와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강렬한 무지개 색상이 떠오를 것이다. 이 옷은 패션에 대한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 상품이 아니었다. 합리적인 가격에 편안함을 추구하는 문화를 상징했다. GAP의 옷을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마치 공기처럼, 그리고 쇼핑몰에 흐르는 음악처럼 언제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세월과 함께 이 후드티는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2020년이 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GAP의 후드티가 갑자기 Z세대의 핫한 아이템으로 떠오른 것이다. 젊은 인플루언서들이 인스타그램과 틱톡에 GAP 후드티를 입고 있는 자신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 후드티는 무척 힙하고 멋져 보이는 아이템이 되었다. 유튜브 스타 엠마 체임벌린(Emma Chamberlain)은 흰색 비키니 하의에 남색 Gap 후드티를 받쳐 입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여러 장 올렸다. 무심하고 졸린, 그러나 약간 애틋한 표정을 한 채 수영장에 서 있는 모습이었고, 240만 개 이상의 ‘좋아요’를 받았다.

이후에도 몇 달 동안 수많은 인플루언서가 SNS에 후드티를 입고 찍은 사진을 올렸다. 인스타그램에 74만 8천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덴마크 인플루언서 바바라 크리스토퍼슨(Barbara Kristoffersen)도 갈색 GAP 후드티에 와이드 갈색 바지를 입고 그에 어울리는 루이비통 핸드백을 들었다. 역시 인스타그램에 만 이천명의 팔로워가 있는 영국의 루시 페이지(Lucy Page)는 카우 프린트 바지에 어글리 운동화를 신고 GAP의 후드티를 입었다. 페이지는 인스타그램에 “어린 시절의 나에게 내가 GAP 후드티를 다시 입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고 싶다”고 썼다.

곧 틱톡의 아마추어 패션 평론가들이 GAP 후드티가 명실상부한 트렌드라고 선언했다. 틱톡의 패션 관련 계정들은 그 추세가 빠르게 변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러한 트렌드는 문화적으로 폭넓은 변화의 징후가 되기도 한다. 틱톡에 패션 관련 계정을 운영하는 나탈리 랭혼 (Natalie Langhorne)은 GAP의 부활이 임박했다고 말했다. 젊은 소비자들은 나이키, 구찌, 루이비통과 같은 브랜드의 로고가 많이 드러나는 옷에 열광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옛 시절에 대한 향수로 ‘Y2K 패션’을 입고 있다. 랭혼은 “GAP의 옷은 내 취향에 딱 맞다”고 말한다. 그녀는 필라델피아에 사는 스물네 살이다. 인플루언서들은 GAP의 후드티를 패션의 포인트로 삼았고, 일상적인 옷차림이 아니라 일종의 패션 문법으로 끌어올렸다. 지난여름 GAP은 이런 열풍에 올라타 갈색 로고 후드티 한정판을 출시했고 다음에 출시할 한정판 색상에 대한 투표를 틱톡에서 진행했다. 크리스토퍼슨과 같은 인플루언서들은 GAP의 지원을 받아 인스타그램에 그 후드티를 소개했고, 랭혼은 GAP으로부터 여러 장의 후드티를 선물 받았다.

GAP은 바이럴 마케팅이 필요했다. 센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한때 소매 유통 업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 중 하나였던 이 브랜드는, 소비자가 더 스타일리시하고 저렴한 브랜드로 옮겨 가면서 거의 20여 년 동안 고군분투해 왔다. GAP은 Old Navy(가족용 저가 의류), Athleta(여성용 스포츠웨어), Banana Republic(중고가 라인) 등의 브랜드를 갖고 있지만, 정작 GAP이라는 브랜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물론, 여전히 회사의 정신적 기반일 수는 있겠지만, 재무적인 측면에서 보면 성공적인 브랜드라고 할 수는 없다. 2021년 Old Navy는 밝고 가족 친화적인 기본 아이템을 선보이면서 9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GAP에 두 배에 달하는 수치를 기록했다.

GAP의 CEO 소니아 신갈(Sonia Syngal)은 2020년 발표한 흑자전환 3개년 계획을 한창 추진하고 있다. 신갈은 GAP이 회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비록 작더라도 2023년까지 수익을 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는 곧 비용 절감을 의미한다. 영국과 유럽에서 매장을 폐쇄하고 쇼핑몰에서 벗어나 로드샵 위주로 포드폴리오를 전환하는 것이다. 디자인 변경도 포함되었다. 물론 GAP은 진, 스포츠웨어, 후리스, 니트 등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2020년 6월 최근에 예(Ye)로 이름을 바꾼 아티스트 카니예 웨스트의 영향력 있는 패션 브랜드, ‘YEEZY’와 10년간 협업하기로 계약하면서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시장의 반응을 보면 GAP의 전략은 올바른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2021년에는 북미 지역에서의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연례 보고서에 브랜드가 “다시 쿨하고 유의미해졌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내가 만나 본 소매 유통 전문가들은 GAP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았다. GAP 후드티를 구매하는 틱톡 사용자들이나 YEEZY GAP 제품을 사들이는 카니예 웨스트의 팬들에도 불구하고, 브랜드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이는 의류 브랜드 모두의 장기적인 성공에 결정적인 장애 요소이다. 소매 유통 컨설팅 업체 메타포스(Metaforce)의 공동 창업자인 앨런 아담슨(Allen Adamson)은 “수년 동안 GAP에 명확한 차별점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GAP의 새 슬로건인 ‘현대 미국의 낙관주의 (Modern American Optimism)’는 모호하고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요즘처럼 그다지 밝지 않은 때에 이런 막연한 격려는 특별히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정체성에 관한 이런 의문들은 “누구에게나 삶의 매 순간에 무언가를 제공하고” MZ세대 고객 확보에 중점을 두겠다는 GAP의 이메일 답변에도 해소되지 않았다.

60년대 후반에 GAP이 처음 등장했을 때, GAP은 청년 세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지금은 흐릿해진 메시지를 명확히 해야 하는 과제를 끌어안고 있다.
 
1998년의 미키 드렉슬러의 모습 ©Photograph: Darryl Bush/Getty Images

1. GAP, 전설의 탄생

대중은 SNS에 인생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Z세대는 베이비붐 세대를 웃음거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야말로 GAP의 등장을 기뻐한 세대이다. 1969년 GAP이 첫 번째 매장을 열었던 샌프란시스코는 히피 운동의 온상지였다. 

첫 번째 GAP 매장에서는 음반과 함께 리바이스 청바지를 판매했다. 1853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두고 청바지를 만들어 온 바로 그 회사의 청바지 말이다. GAP의 창업자 도널드 피셔 (Donald Fisher)는 당시 41세의 부동산 사업가였다. 그가 실수로 리바이스 청바지 한 벌을 잘못된 사이즈로 주문했다가 적당한 사이즈로 교환할 수 있는 가까운 매장을 찾지 못하자, 다양한 사이즈의 브랜드를 취급하는 매장을 열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매장에 대한 아이디어는 피셔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킨 반면, 그의 뒤를 이은 베이비붐 세대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청년과 부모 사이의 세대 차이(generation gap)를 따서 명명한 ‘The Gap’이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은 20대 초반이었다. 베이비붐 세대는 청바지를 일상복으로 적극 수용했고 GAP은 청바지 재고를 넉넉히 갖고 있었다.

데님은 내구성이 좋아서 원래 농부, 광부, 산업 근로자들이 입던 옷이었지만, 20세기 중반부터는 사회적 위계질서를 거부하는 데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완벽한 유니폼으로 자리 잡았다. 리즈 대학의 경영사학과 교수인 레지나 블라슈치크(Regina Blaszczyk)는 1960년 미국의 대학 캠퍼스에서 블레이저, 넥타이, 코듀로이를 입은 남학생과 울 트위드 스커트와 스웨터를 입은 여학생을 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또, “그 학생들은 10년 후에는 청바지를 입게 되었다”라고도 지적했다. 1970년대가 되자 청바지는 반체제 문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데님 열풍을 타고 GAP은 매장을 전국적으로 확장했고, 리바이스 청바지와 더불어 판매할 자체 GAP 상표를 출시했다. 그리고 이 브랜드는 1976년에 상장되었다. 창업자 피셔는 청바지가 훨씬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일찌감치 음반 판매를 줄여갔다. 그러나 리바이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보니 GAP은 다른 회사의 사정에 따라 흔들렸다. 1976년 연방 통상 위원회가 리바이스의 가격 담합을 고발한 후, GAP은 IPO(기업 공개)에서 목표 주가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 판결에 따라 다른 소매 업체들이 리바이스 제품의 가격을 인하하자 GAP은 경쟁력 유지를 위해 자체 브랜드 가격을 인하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70년대 후반, 피셔와 함께 일했던 컬럼비아 비즈니스스쿨의 소매유통 연구 책임자인 마크 코헨(Mark Cohen)은 “GAP이 전략적으로 리바이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낄 만큼 큰 문제가 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GAP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코헨은 일할 때 청바지를 입을 수 없는 노년층을 타깃으로 하는 ‘Logo’라는 브랜드를 고안했다. 물론, 그 브랜드는 금방 사라졌지만 말이다. 코헨은 ‘Logo’가 Banana Republic의 모태가 되었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다양한 시도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피셔는 1983년 대박을 터뜨린다. 여성 의류 체인 Ann Taylor의 우수한 실적을 보고 그는 성공의 배후에 있는 사람을 고용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GAP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미키 드렉슬러 (Mickey Drexler)였다. 드렉슬러는 금요일에 Ann Taylor를 퇴사해 곧장 샌프란시스코로 향했고, 월요일에 바로 GAP의 사장으로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드렉슬러는 내게 “GAP은 취향도 관점도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컬러를 GAP의 기본 감성으로 설정하고 스타일의 종류는 줄이는 전략을 세웠다. GAP에 정체성을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드렉슬러의 이름은 모를 수 있어도 그의 작품은 모를 수가 없다. GAP에서 20년간 일한 후, 드렉슬러는 뉴잉글랜드 스타일의 J Crew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J crew를 미셸 오바마와 기네스 펠트로 같은 셀럽들이 사랑하는 브랜드로 만들었다. 그는 1999년에서 2015년까지 애플 이사직을 수행하며, 스티브 잡스를 도와 브랜드의 깨끗하고 미니멀한 매장 개념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뉴욕 토박이인 드렉슬러는 입담이 좋고 집중력이 높으며 정신없이 빠르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그는 유통의 천재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그는 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싶어 하는지, 그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려고 하는지, 그리고 가격을 어떻게 책정할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전화 통화에서 드렉슬러는 “사람들은 일종의 감정의 온도계를 갖고 있으며, 그게 없다면 이 사업을 잘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드렉슬러는 GAP의 사장으로 취임한 뒤 재고 처분에 들어갔고, 이를 위해 가격 인하를 단행했다. 이것은 소매 유통 업체들이 부담을 더는 일반적인 방법이지만, 드렉슬러에게는 끔찍한 과정이었다. 상장회사에서 처음으로 일했던 드렉슬러는, 그 시기를 “속으로는 몹시 무서웠다”라고 회상한다. 회사의 실적과 주가가 급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퇴근 후 밤마다 아내 페기에게 자신이 GAP에서 뭘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는 중산층 베이비붐 세대에게 적합한, 캐주얼하고 클래식하며 저렴한 라인업을 선보이는 것이 드렉슬러의 전략이었다. 이 전략 덕분에 GAP은 히트 상품을 줄줄이 내놓았다. 진, 버튼업 후리스 헨리넥 셔츠 같은 것들이다. 그의 계획대로 대담하고 선명한 색상을 간판으로 내세웠다. GAP 폴로셔츠는 파란색, 검은색, 흰색뿐만 아니라 핫핑크, 빨간색, 옥색 등으로도 출시 되었다.

GAP은 무난한 아메리칸 스타일의 기본 아이템으로 모든 소비자를 공략했다. 당시 다른 의류 소매 업체 대부분은 연령대와 가격대별로 매장을 구분했으며 고객에 대한 접근이 딱딱했다. 전 《하퍼스 바자》 편집장 케이트 베츠(Kate Betts)는 80년대 후반 패션 업계의 간행물 《Women’s Wear Daily》의 패션 리포트로 활동했다. 그녀는 드렉슬러가 “그 모든 것을 그냥 돌파했다”고 회상한다. GAP은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곳에서 베이비붐 세대 뿐만 아니라 그 자녀 세대까지 패션을 향유할 수 있었다.

드렉슬러의 계획이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은 1년 이상이 흐른 후였지만, 이후 브랜드는 확실히 상승세를 탔다. 드렉슬러가 장담했던 대로였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주식회사 GAP의 연 매출은 5억 1800만 달러에서 6억 4700만 달러로 급증했다. 1990년까지 매출은 19억 3천만 달러에 달했다. 그 시절 GAP은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제공하고”있었다. 현재의 브랜드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GAP의 이메일 답변처럼 말이다.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등장하는 90년대 GAP의 잡지 광고 ©Photograph: Retro AdArchives/Alamy

2. 황금기의 비밀, 브랜드 정체성

드렉슬러가 이끄는 GAP은 미국 소매 유통의 황금기를 누렸다. 80년대 교외 쇼핑몰 붐이 일어났고, 이런 쇼핑몰들은 체인점, 푸드코트, 영화관, 뷔페 음식점 등으로 몰려드는 10대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리고 GAP이 속한 전문 의류 매장들이 쇼핑몰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GAP은 단지 그 흐름에 편승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컨설팅 회사 SGG & Associates의 대표인 소매 유통업 전문가 스티븐 골드버그(Steven Goldberg)는 “GAP이 (그 흐름을) 분명히 주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요즘 유니클로부터 ‘완벽한 탱크톱’을 광고하는 브랜드명도 알 수 없는 업체들까지, 캐쥬얼 베이직 아이템을 판매하는 브랜드의 광고를 보지 않고는 인스타그램 같은 온라인에 접속할 수가 없다. 그러나 80년대엔 상황이 달랐다. 당시 새로워진 GAP은 경쟁자가 거의 없었다. 당시 누가 대항마였는지 묻는 말에 콜롬비아 경영대학원의 코헨 교수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며 잘라 말했다. GAP의 옷은 스타일리시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았고, 저렴했지만 품질은 좋았다. 그 균형이 점점 더 편안해지는 패션 경향과 맞아떨어졌고, 90년대 미국의 많은 직장이 ‘캐주얼 프라이데이’를 시행했을 때 GAP의 카키색 면바지는 기회를 잡았다.

GAP은 브랜드 정체성을 찾았으며 그것은 드렉슬러의 정체성이었다.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GAP의 유통 분야에서 일했으며 의류 브랜드 American Eagle과 그 서브 브랜드 Aerie의 사장 겸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젠 포일(Jen Foyle)은 “미키 드렉슬러는 의심할 여지 없는, 북극성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GAP에 재직하는 동안 드렉슬러는 실무적인 접근방식으로 유명했다. 포일은 GAP의 ‘미키 회의’를 언급했다. 각 유통 담당자가 부서 및 부문의 구매 아이템을 발표하는 회의였다. 그 회의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넘쳐났다. 회의 참석자들은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 누가 잘했으며 누가 잘 못 했는지에 주목했다. 포일은 “드렉슬러가 어떤 특정 제품에 시간을 쓰면, 뭔가 잘못되었거나 제품이 옳지 못하거나 우선순위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였다”고 말했다.

80년대 GAP의 정체성은 소비자에게도 분명했다. 패션 디자이너 스콧 스턴버그(Scott Sternberg)는 2018년 자신의 브랜드 Entireworld를 출시할 당시 80년대의 GAP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GAP은 너무나 순수하고 단순했다”고 말한다. 스턴버그는 47세로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자랐는데, 어린 시절 동네 쇼핑몰에 있는 GAP 매장에 가곤 했다. 그곳은 카키색 옷, 진, 티셔츠, 양말 등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원스톱 매장이었다. 스턴버그는 드렉슬러의 GAP이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패션을 소비자에게 제공했으며, 언제 구매하든 상관없이 모든 제품이 호환되는 유토피아적인 질서를 창조했다고 생각한다.

이 시절 GAP은 클래식이 모두를 위한 것이지만 개개인은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한다는 개념, 즉 패션계의 변화하는 취향에 부합하는 취향을 팔고 있었다. 1991년 베츠는 《보그》로 자리를 옮겼을 당시 이 용어를 본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개인적인 스타일’에 대한 아이디어는 그 당시 패션 업계에서 거대한 캐치프레이즈가 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명품 옷을 입은 사람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의 브랜드로 차려입곤 했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디자이너와 편집자들은 명품 옷을 청바지나 티셔츠와 혼합하는, 더욱 개성적인 ‘하이 로우’ 패션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1988년 안나 윈투어(Anna Wintour)가 《보그》 편집장으로서 작업한 첫 번째 표지에는 크리스챤 라크루와(Christian Lacroix) 오뜨 꾸뛰르 재킷에 게스 청바지를 입은 모델 마켈라 바쿠(Michaela Bercu)가 등장했다.

물론 모두가 명품 재킷에 GAP 청바지를 받쳐입을 만큼 돈을 버는 것은 아니었지만, GAP의 심플함은 어떤 패션에도 녹아들 수 있을 만큼 활용도가 높다는 것은 분명했다. 2001년 드렉슬러가 GAP의 광고 작업을 맡긴 광고 책임자 트레이 레이는 “GAP의 진짜 경쟁력은 소비자가 주인공이 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길을 걷고 있을 때, 아무도 그 사람을 멈춰 세우고 ‘세상에나, 당신은 GAP의 스키니 검정 바지를 입고 있군요!’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당신의’ 검정색 바지니까요.”

Gap은 1988년 ‘각자의 스타일’ 광고 캠페인에서 이 메시지를 분명히 했으며, 이는 이후 수많은 광고의 청사진이 되었다. 패션 사진계의 거물인 패트릭 드마셸리에(Patrick Demarchelier)와 애니 레보비츠(Annie Leibovitz)와 같은 패션 사진계의 거물들이 촬영한 캠페인에는 GAP을 입은 유명인들의 흑백 이미지가 등장했다. 모크넥과 카키색 면바지를 입은 스파이크 리(Spike Lee), 후드 스웨트셔츠를 입은 우피 골드버그(Whoopi Goldberg), 터틀넥을 입은 존 디디온(Joan Didion)과 그녀의 딸 퀸타나 루(Quintana Roo) 등이다. 사진은 심플하고 우아했다. 스타들은 마치 자신만의 옷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입은 것처럼 보였다. “저는 그것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라고 베츠는 말했다. “여러분은 대중을 위한 캠페인에서 그만큼 스타일리시한 것을 그 이전까지는 본 적이 없을 거예요.” 수년에 걸쳐 윌리 넬슨(Willie Nelson)과 루시 리우(Lucy Liu)부터 미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와 에이미 포엘러(Amy Poehler)까지 모든 사람이 이 브랜드의 광고에 출연했다. GAP 광고에 등장하는 것이 마치 통과의례처럼 된 것이다. 할리우드 스타와 함께 일하는 것은 이제 그만큼의 여력이 되는 모든 브랜드에서 분명한 움직임이지만, 한동안은 “GAP이 스타들을 소유했다”고 스텐버그는 말한다.

GAP은 다른 모든 이들과 똑같은 옷을 입는 것이 멋져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1999년에 GAP은 소박하지만, 상징적인 TV 광고 3편을 출시했다. 첫번째는 파란색과 회색의 차분한 색조로 맞춰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카메라가 방 안을 비출 때 흰색 세트에 앉아 도노반(Donovan)의 노래 〈Mellow Yellow〉를 부른다. 출연진 중 라시다 존스(Rashida Jones)같이 나중에 유명해 진 사람들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눈에 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광고는 이 그룹의 일원이 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고 광고 감독인 페드로 롬하니(Pedro Romhanyi)는 회상했다. 그는 “GAP이 성공한 원인 중 하나는 군중 속에서 돋보이기보다는 군중 속에서 스타일리시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광고들이 나왔을 때, 업계는 GAP의 천하였다. 1999년에는 전 세계에 2,000개 이상의 매장이 있었고, 주식회사 GAP의 매출은 116억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도전받은 적 없는 GAP의 지위에 접근하는 경쟁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백화점에서도 청바지, 카키색 면바지, 캐주얼 상의를 팔기 시작했고 TJ Maxx, Ross, Marshalls와 같은 의류 할인 매장도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저가 매장과 경쟁하기 위해 드렉슬러는 1994년 단조로운 할인 매장에 대한 활력 있는 대안으로 Old Navy를 출시했다. 새 브랜드는 대성공을 거뒀지만, GAP의 위상을 지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95년 피셔는 드렉슬러를 CEO로 임명하고 자신은 이사회 의장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2년간의 매출 하락을 겪은 2002년, 드렉슬러는 사임했다. 
 
나오미 캠벨(Naomi Campbell)이 등장하는 90년대 GAP 광고 ©Photograph: Retro AdArchives/Alamy

3. 흔들리는 정체성, 흔들리는 매출

드렉슬러가 떠나기 전에 있었던 침체의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제품의 전략 실패에 있었다. H&M은 2000년 뉴욕에 첫 번째 미국 매장을 열었다. 유럽의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이 미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GAP은 겁에 질려 강점은 클래식 아이템보다는 트렌디한 제품들로 시선을 돌렸다. 드렉슬러의 사임에 관해 다룬 기사에서는 ‘로우 라이즈 팬츠’나 ‘보라색 가죽바지에 홀터넥 탑’과 같은 예를 들며 잘못된 시도를 언급했다. 포일은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섰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제, 브랜드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겁니다. 이건 내가 지금껏 배운 최고의 교훈이에요.”

이런 시행착오를 깨닫게 된 포일은 제품 카테고리 전체를 살펴보고 좋은 성과를 거뒀던 주요 아이템을 골라냈다. 이는 GAP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업과 다르지 않은 프로세스이다. “우리는 정말 근본으로 돌아갔다”라고 포일은 말했다. 2003년과 2004년에 판매량이 다시 증가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시작된 감소세는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2000년대와 2010년대 GAP의 추락은 로우 라이즈 팬츠보다 훨씬 더 큰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과도한 확장이다. 80년대와 90년대에 Gap은 수천 개의 신규 매장을 열면서 수익을 쌓아갔다. 이 전략은 당시 표준이었다. “시장은 더 많은 매장을 요구했다”라고 캐나다에 기반을 둔 소매 유통 컨설턴트 더그 스티븐스(Doug Stephens)는 말했다. “대부분의 회사의 경우와는 달리 그것은 선택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투자자들은 수익보고서를 검토할 때 신규 매장을 얼마나 많이 열었는지를 늘 알고 싶어 했습니다.” 

“브랜드가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브랜드의 특별함을 유지하면서도 판매망을 전 세계로 확장하는 것”이라고 소매 유통 분석가인 시메온 시겔(Simeon Siegel)은 지적한다. 또, 그는 미국 시장에서 유일한 성공사례는 나이키뿐일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2000년대 초까지 GAP은 너무 멀리 갔다. 규모가 커질수록 브랜드 입장에서는 신규 매장이 기존 매장의 매출을 잠식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수많은 신규 직원을 교육하고 매장 운영 상황을 감시해야 한다. 쉬지 않은 과제이다. 

GAP과 같은 소매 유통 업체가 이러한 문제들을 예견할 수 있었을까? 코헨은 그렇게 믿는다. “그것은 긴 터널 끝에서 볼 수 있는 열차 사고였지만, 아무도 조처를 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아마도 GAP은 온라인 시장의 부상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소비자들이 최근 몇 년 동안 온라인 쇼핑 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한때 강력했던 수많은 미국의 백화점과 인기 쇼핑몰 브랜드가 무너져 내렸다. 막대한 부동산 포트폴리오가 부담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팬데믹 기간 동안 더욱 악화했다. 영국의 번화가도 코로나 기간 동안 자체 붕괴를 겪었는데, Topshop 소유주인 아르카디아(Arcadia) 그룹은 법정관리 수순을 밟았고 막스앤스펜서(Marks & Spencer)도 매장 폐쇄를 가속화했다.

지나치게 많았던 매장뿐만이 아니다. 중산층 고객을 위한 GAP의 클래식한 패션 제안은 더 이상 시대에 걸맞지 않았다. 미국에서 부의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할인점 TJ Maxx와 Ross는 계속 번창했고 Forever 21, H&M, Zara와 같은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은 저렴하면서도 런웨이에서 영감을 받은 옷으로 쇼핑객을 끌어들였다. 스티븐스는 “2000년대 초반까지 중산층 소비자를 타깃으로 하는 중가 브랜드는 점점 더 어려운 상황을 겪게 될 것이 자명해 보였다”고 말했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 걸쳐 GAP은 정체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갈팡질팡했다. 드렉슬러의 뒤를 이은 3명의 CEO는 디즈니 파크 리조트 출신의 폴 프레슬러(Paul Pressler), 캐나다 Shoppers drug Mart 출신의 글렌 머피(Glenn Murphy), 그리고 머피가 CEO를 맡았던 시절 10년간 주식회사 GAP에 재직했던 전직 컨설턴트 아트 첵 코헨(Art Peck Cohen)이었다. 그들에게는 GAP의 사업을 개편할 만한 경험이나 상품화 기술이 없었다. 떠들썩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은 브랜드에 영속적인 활력을 불어넣지 못한 채 왔다가 사라졌다.

그동안 GAP은 고객을 잃었다. “GAP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상징하지 않았고 고객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소매 유통 분석가 자넷 클로펜버그(Janet Kloppenburg)는 말한다. GAP은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자들을 사로잡는 데에 실패했다. 그들은 주로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와 함께 GAP에서 쇼핑하며 자랐고 매장에서 본 로고 스웨트셔츠와 청바지에 대한 좋은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다. 90년대 어린 시절의 GAP을 생각하면 풍부한 색깔의 스웨터로 가득한 매장이 떠오른다. 쇼핑몰에 갈 때마다 느꼈던, 변화의 가능성이 가득했던 밝고 깨끗한 매장 말이다. 그러나 GAP은 밀레니얼 세대와 함께 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Abercrombie & Fitch, American Eagle, Aeropostale등과 같이 더 멋지고 섹시한 브랜드들에게 밀려났다. 눈길을 끌고, 쇼핑몰에 주력하는 브랜드들이다. GAP은 한 세대의 격차(gap)에 힘입어 탄생했지만 다음 세대의 격차를 메우는 데는 실패했다..
 
올해 초 코펜하겐에서 검은색 YEEZY X GAP 재킷을 입은 스페인 인플루언서 지지 비브스(Gigi Vives) ©Photograph: Streetstyleshooters/Getty Images

4. YEEZY X GAP이라는 도전

이러한 역사는 카니예와의 협업으로 이어진다. GAP의 회생 전략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이 바로 YEEZY 콜라보 브랜드이다. 2년 전 런칭한 이래 푹신한 볼레로 재킷과 후드티를 포함한 소수의 아이템만이 나왔고, GAP이 카니예와 그의 크리에이티브 팀의 작업 속도에 불만이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니예의 팬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첫 번째 YEEZY X GAP 후드티는 90달러에 판매되었지만, 업계 웹사이트 ‘Business of Fashion’에 따르면 리셀 사이트인 StockX에서 원래 가격보다 50퍼센트 비싸게 팔렸고, 이에 따라 구하기 힘든 검은색 버전의 후드티는 무려 899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유튜브에서 리뷰어들은 솔기의 품질에서부터 후드의 늘어진 부분까지 모든 것에 대해 논의하며 후드티에 대해 면밀한 분석을 했다. 카니예는 올해 초 디자이너 브랜드 발렌시아가와의 콜라보를 발표했는데, 이곳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뎀나(Demna)는 그와 절친한 친구 사이다.

GAP과 카니예의 10년짜리 계약 발표는 화제가 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계약이 대부분의 디자이너 협업보다 훨씬 더 실질적인 약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카니예는 10대 때 매장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던 GAP의 오랜 열성 팬이다. 2015년 그는 자신의 꿈 중 하나가 GAP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취임해 “GAP의 스티브 잡스”가 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편, GAP은 카니예의 문화적 자본과 팬 팔로워를 이용함으로써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아디다스와 카니예의 콜라보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GAP은 5년 이내에 YEEZY X GAP 매출이 10억 달러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더 많은 제품이 출시된다는 가정 하의 이야기다.
 
남성 패션 팟캐스트 ‘Throwing Fits’를 공동 진행하는 제임스 해리스(James Harris)는 ‘인터넷상의 젊은 남성과 젊음을 유지하려는 중년 남성’이라는 특정 계층의 패션 소비에 있어 카니예의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한다. 남성 패션의 인기 있는 특정 실루엣은 바로 카니예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그의 앨범 《Watch the Throne》을 발매할 무렵, 그는 스키니 팬츠와 두툼한 운동화에 아주 긴 티셔츠를 받쳐 입었다. 티셔츠에는 종종 가죽 스커트를 더해 길이를 과장하기도 했다. 현재 카니예는 커다란 부츠에 빈티지 청바지를 넣어 입는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넉넉한 사이즈에 박시하고, 어깨가 과장된 크롭 기장의 후드티나 재킷과 함께 입는다. 해리스는 1999년에 개봉된 로봇 애니메이션 영화 《아이언 자이언트》의 포스터를 줌 채팅방에 올려 어떤 스타일인지를 보여줬다.

그래서일까, 쏟아지는 언론보도의 영향으로 내가 빨간색 버전의 YEEZY X GAP 후드티를 사 입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카니예처럼 입었다고 느꼈다. 이중으로 된 면 스웨트셔츠는 묵직한 담요처럼 매우 무겁고, 외부 로고는 없지만 처진 어깨, 느슨한 팔, 아주 짧은 기장에 오버사이즈 핏 등 독특한 형태이다. 정말 《아이언 자이언트》에 나오는 로봇 같은 실루엣이다. 단순한 바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GAP의 검정 스키니 팬츠와는 달리, 이 스웨트셔츠는 실제로 거리에서 눈에 띄고,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종류의 제품이다. ‘당신’의 후드티가 아니라 ‘카니예’의 후드티다. 실제 나보다 더 젊고 힙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으로 보이진 않을지 몇 주 동안 고민한 끝에, 나는 후드티를 반품하기로 결심했다. 길거리에서 젊은 YEEZY 팬들이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나이 든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30살이다.)

젊은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GAP에게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클로펜부르크는 “소비자는 나이가 들수록 쇼핑을 덜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YEEZY X GAP이 카니예의 팬들을 GAP 고객으로 포섭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소비자들은 전용 YEEZY X GAP 웹사이트를 통해 상품을 주문할 수 있다. 해리스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 콜라보는 카니예에게도, 카니예 팬에게도 이익입니다. 이제 명품에 돈을 지불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한 규모와 가격으로 생산과 유통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는 그것이 GAP에도 큰 이익이 될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인터뷰에 응한 다수의 소매 유통 전문가들은 YEEZY X GAP뿐만 아니라 월마트와의 가정용품 협업도 진행하고 있는 GAP의 일관성 없는 제품 생산을 지적했다. 스티븐스는 “GAP의 정체성에 관해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GAP이 브랜드로서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리고 소비자들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게 됩니다.” 

YEEZY X GAP의 세계관 안에서, GAP은 마침내 수십 년 동안 갖지 못했던 것, 즉 고유의 정체성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80년대 GAP의 정체성을 만들어낸 사람이 드렉슬러였던 것처럼, YEEZY X GAP은 모두 카니예의 독특한 감성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그 감성은 GAP의 외부에 존재하며 이 계약이 체결되기 훨씬 전부터 생겨났다. 카니예의 팬들은 그가 가는 곳마다 쫓아갈 것이고, 그가 결국 GAP과 결별할 때, 무엇이 남겨질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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