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된 적 없는 미래

4월 27일 - FORECAST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단체가 시위에 돌입했다. 피해자가 속출했던 사건은 왜 11년째 해결되지 않았나.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4월 25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단체가 서울 종로구에서 시위에 돌입했다.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산업의 반대로 피해 조정안이 무산된 것이 화두다. 피해자가 속출했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왜 11년째 해결되지 않았나.

WHY_ 지금 가습기 살균제 사고를 읽어야 하는 이유

가습기 살균제 사고는 유례 없는 재난 사고다. 피해자만 90만 명 넘게 추산된 반면 관심과 보상은 빈약했다. 같은 사고가 반복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지만, 다가올 불의의 날카로운 반면교사가 된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는 재난에 대한 기업의 기계적 대응을 보여 주는 반면교사이자 미래의 재난에 대처할 레퍼런스다.


DEFINITION_ 살균제

가습기 살균제는 미생물 번식과 물때 발생을 예방할 목적으로 가습기 내의 물에 첨가하여 사용한 물질이다. 씻어내는 제제가 아니라 물과 함께 공기 중으로 분무된다. 해당 물질의 유해성은 2011년 8월 처음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0월, 10년 만에 가습기 살균제 피해 보상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출범했다. 조정위는 피해자 유족에게 2억~4억 원, 최중증 피해자들에게 최대 5억 원을 지급하라는 최종 조정안을 기업에 제출했다.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NUMBER_ 95만

2020년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피해자는 95만 명, 사망자는 2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인 재난 사고로 으레 거론되는 인도 보팔 가스 누출 사고(피해자 2만 명)와 일본 미나마타 병(피해자 2200여 명)과 비교 자체가 어려운 수다. 국내 최초 가습기 살균제가 출시된 것은 1994년 유공(현 SK이노베이션)에서였다. 질환과의 인과성이 밝혀지기까지 17년이 걸리는 동안 피해와 관심은 분산되어 왔다.


MONEY_ 5000억 원

이번 시위가 촉발된 것은 가해 기업 옥시와 애경이 조정위가 제출한 피해 조정안을 거부하면서부터다. 조정안에 기재된 아홉 개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총 보상 금액은 9240억 원 규모다. 보상 책임이 가장 높은 옥시는 이중 절반 이상인 5000억 원 가량이 분담된 상태다. 조정위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11일 옥시 한국 지사는 부담금을 1500억 원 규모로 축소해 줄 것을 요청했다.


CONFLICT_ 외국계

전 세계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집중적으로 사용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관련 학술 자료 저자는 대다수 한국인이다. 해당 사고는 외신에서 ‘스캔들(scandal)’ 혹은 ‘우연한 사고(incident)’로 보도된다. 더 큰 문제는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가 영국계 기업이라는 점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21조 원 규모 매출과 5조 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달성한 옥시는 이번 조정위의 제안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 5000억 원선의 보상 금액을 거부한 것은 한국 시장에서 아예 철수할 의사도 포함된 움직임으로 보인다.


KEYMAN_ 거라브 제인

동양제철화학이 설립한 옥시는 2001년 영국 레킷벤키저에 인수됐다. 2011년 12월 유한회사로 법인 성격을 바꿨다. 질병관리본부가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을 본격 수사하기 시작한 해다. 거라브 제인 전 옥시 대표가 피의자로 지목됐으나 검찰 출석에 불응하고 인도로 이주하며 서면 조사로 대체했다. 옥시RB 신현우 전 대표는 2018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은 반면, 관련 임직원 구속 시 외국계 임원은 포함되지 않았다. 외국 임원 중 존 리 전 대표에게만 유일하게 구속 영장이 청구됐다. 이마저도 증거 부족을 이유로 법원에서 기각됐다.


RISK_ 유한회사

옥시레킷벤키저의 유한회사 전환은 국내 다국적 기업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였다. 유한회사는 소수의 사원이 자신이 출자한 금액만큼 책임을 지는 구조다. 주식회사와 달리 외부 감사 등에 회사 상황을 공시할 의무가 없으며 국세청의 열람 권한 또한 국내 거래에 한정된다. 더 큰 문제는 공소권이다. 피고인으로서의 법인이 존속하지 않을 시 형사소송법상 공소는 기각되도록 규정돼 있다. 2011년, 옥시레킷벤키저는 법적으로 완전히 별개의 법인으로 전환했다. 2010년대는 루이비통, 구찌를 비롯한 수많은 글로벌 기업의 한국지사가 유한회사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INSIGHT_ 대응

레킷벤티저 본사가 2001년 옥시를 인수할 당시 살균제의 독성을 인지했는지 여부는 큰 쟁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실수는 옥시의 위기 대응법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로펌 김앤장을 고용하고, 질병관리본부의 2012년 역학조사 결과를 반박하는 77페이지 분량의 의견서를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했다. 갑론을박을 위한 법률 대응만 있었을 뿐 홍보팀의 대응은 소극적인 수준도 미치지 못했다. 레킷벤키저는 “본사로 오는 모든 문의는 한국의 자회사로 넘기겠다”고 밝혔다. 한국 옥시는 “본사의 컨펌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최소한의 커뮤니케이션마저 챙기지 못한 옥시레킷벤티저의 대응이 사건을 11년째 끌고 왔다. 보상은 지연됐고, 관심은 증발했다.


RECIPE_ 불매

불매는 소비자의 마지막 선택지다. 가장 큰 파장을 일으켰던 국내 불매 운동은 2019년 노재팬 운동이다. 2년간 아사히 맥주의 매출이 90퍼센트 가까이 감소했고 50개가 넘는 유니클로 매장이 문을 닫았다. 하지만 옥시는 다르다. 옥시 불매 운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유해성 논란 초기부터 10년 넘게 불매 움직임이 일었고 이에 대한 언론과 정계와 대중의 관심은 많은 불매 운동이 그렇듯 짧은 파장 이후 산발적으로 흩어졌다. 불매가 현상이 아닌 운동으로 역할하기 위해선 일정 규모 이상 확장돼야 한다. 옥시 입장에선 한국 시장은 포션 자체도 작을 뿐더러 국내 매출이 10년 넘게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미지 복구 비용 대비 현 한국 시장의 규모엔 큰 메리트가 없다. 그 와중에 인후통에 효과가 있는 ‘스트렙실'이나 손세정제 '데톨' 등으로 코로나19 시기에 매출이 증가한 것 또한 용두사미를 반복하는 불매의 모순이다. 이번 조정위의 시위 또한, 옥시와 애경의 입장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FORESIGHT_ 중대시민재해

고객 중심의 시대다. 소비 행태가 기업의 철학과 경영진의 태도를 바꾼다. 그러나 C2B가 적용되지 않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올해 1월 27일부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다. 그중 중대시민재해는 특정 제조물이나 시설 등의 결함으로 사망자 1명, 혹은 부상자 10명, 혹은 질병자 10명 이상 발생 시 적용된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세월호 사건과 함께 중대시민재해법의 대표적인 트리거로 꼽힌다. 현재는 외국계 기업 적용과 사고의 인과 증명 등에서 혼선을 겪는 초벌 단계이나, 중대시민재해법은 기업과 대중으로부터 잊히기 쉬운 사고를 기억하고 갈무리해야 할 법적 근거를 마련해 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단체가 옥시 관계자를 찾아갔을 때, 사측이 그들을 “입증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민원인으로 취급했다”는 증언은 기계적으로 고객 중심 경영을 주창하는 시대의 아픈 민낯이다. 시위나 불매가 보상도 위로도 안겨 주지 못할 때, 중대재해법은 소비자가 피해자로서의 마지막 권리를 기대할 수 있는 안정망이다.

갈무리되지 못한 재난 사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97년생의 비욘드-세월호〉를 추천합니다.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는 97년생 저자의 시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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