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광장

2022년 열네 번째 프라임 레터

안녕하세요. 북저널리즘 신아람 디렉터입니다.

일주일 남았습니다.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의 임기가 바로 다음 주 월요일에 끝납니다. 시작도, 끝도 참으로 드라마틱한 5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몇 차례, 커다란 변화를 겪었던 기간입니다. 여러분의 5년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5년은 여러분에게 어떤 이름으로 남았는지 말입니다.

문재인 정부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인 재난을 겪어낸 정부입니다. 남북관계에 관한 희망이 끓어올랐지만, 결국엔 허무하게 흩어진 5년이기도 했습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인정한 시간이었지만 공정이란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사건들도 일어났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수백가지의 목소리를 듣고 수천 가지의 고민에 흔들렸습니다.

생업으로 우리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일을 해 온 제 입장에서 지난 5년은 ‘광장’의 시간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광장이 우리를 정치적 아노미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 시간이었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광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도 역시, 광장과 함께 합니다.
 

쪼개진 광장


시계를 거꾸로 돌려 5년 하고도 몇 개월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계셨나요? 어떤 분은 TV 앞에 계셨을 것이고 어떤 분은 회사에 남아 야근을 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광화문 광장에 계셨을 겁니다. 그때, 광장은 정말 온전히 시민의 것이었습니다. 시민이 촛불을 들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광장이 시민을 끌어안자 힘이 생겨났고, 우리는 그렇게 불의가 정의가 되는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모여 환호하는 동안 광장은 둘로 쪼개졌습니다. 광화문 광장과 시청 서울 광장 사이에는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이 자라났죠. 그 벽을 5년 내내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2008년 명박산성 앞에서, 꽤 어렸던 저는 친구들과 웃으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2017년 초, 서울시 의회 앞 차도에 세워진 그 벽을 보면서는 웃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절박했고 화가 나 있었습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카메라 감독들이 광장으로 스케치를 하러 나갔다가 머리채를 뜯기고 왔다고 했습니다. 기자들도 험한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 분노가 참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까닭은 광장이 우리를 분리했기 때문입니다. 광장은 우리가 함께 모여있는 이곳만이 세상 전부인 양 착각하기 쉬운 공간입니다. 그러나 광장을 나서면 또 다른 광장이 있습니다. 5년이 다 지나도록 우리는 또 다른 광장의 분노를 설득해 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 분노의 힘을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은 결국, 불의와 정의에 관해 합의해 내지 못했습니다.
 

광장의 정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광장이 탄생시킨 정부였습니다. 시민들이 스스로의 힘을 강하게 의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치권에도 ‘광장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가 휘몰아쳤죠. 누군가는 광장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를 보았고 또 누군가는 우려와 의심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광장이 탄생시킨 정부였습니다. 

그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마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일 겁니다. 2017년 8월 19일 문재인 정부 취임 100일을 맞아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원칙에 따라 탄생했습니다.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의 ‘위더피플(We The People)’을 벤치마킹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이 게시판을 제안한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알고 있었을까요? 청와대 국민청원이 이 시대의 가장 큰 광장으로 기능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시기별로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공론화되었던 주제를 살펴보면 지난 5년간 우리 사회가 어떤 고민을 했으며 어떤 논의와 갈등을 겪었는지 알게 됩니다. 2017년 12월에는 가상화폐 규제 반대 청원이 올라왔습니다. 2019년 4월에는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에 183만 명이 참여했고 맞불 성격의 더불어민주당 해산 청원에도 33만 명이 몰렸습니다. 조국 전 장관 임명을 둘러싸고는 임명 찬성에 75만 명, 반대에 30만 명이 동의했습니다. 2020년 2월 문재인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청원에는 146만 명이, 반대로 문 대통령을 응원하는 청원에는 150만 명이 클릭했습니다.

이쯤 되면 청원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의사 표현입니다. 헌법상 정당을 해산시킬 권한이 청와대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답변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원은 이어집니다. 국민이 청원 게시판을 ‘온라인 광장’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청원 게시판을 언론이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앞다투어 단독 경쟁에 나섭니다. 청원 게시판에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민심’인 양 보도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때문에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습니다. 언론사가 기사를 만드는 일종의 도구로 청원 게시판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게시판에 올라온 청원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사용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진영 싸움에 언론이 플레이어로 뛰어들면서 ‘민심’의 한 면만을 부각하기 위한 꼼수였습니다. 참여 인원이 스무 명인 청원 화면을 캡처해 올리면서 대단한 일인 양 기사를 쓰는 경우도 나타났습니다. 돌이켜보면 참 씁쓸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청원 게시판은 광장의 역할을 해 냈습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니 청원에 힘이 실리고, 힘이 실리니 결과를 내고, 언론이 계속해서 주목하는 선순환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많은 청원 동의를 얻어낸 국민청원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 내용이었습니다.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낸 청원이 총 9건이었으며, 동의한 인원을 다 합치면 769만 명에 달합니다. 이를 통해 성폭력 처벌법이 개정되었고, 주범 조주빈 등에 중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또한 소방직 공무원의 국가직 전환, 경비원 갑질 사망사건 관련 청원을 통해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법과 제도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국민청원이 탄생시킨 ‘윤창호법’과 ‘민식이법’을 둘러싸고는 광장이 만들어 낸 변화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법조계에서 위헌 소지가 있다는 의견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광장의 목소리에 압도된 입법부가 제대로 심의하지 않은 채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법을 세심하게 다듬어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실제로 '민식이법'의 경우, 지지 여론에 힘입어 청원 마감 하루 전날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보완 입법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로 인해 초래된 사회 혼란은 우리가 지불해야 할, 광장의 비용으로 남았습니다.
 

공터로 모인 정치


한편, 팬데믹을 거치면서 정치권은 또 다른 광장들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온라인 커뮤니티입니다. 사람이 모일 수 없는 선거를 치르면서 정치권은 ‘조직표’가 예전만큼 모이지 않는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선거철이 되면 예약을 잡기가 힘들었던 동네 술집들은 밤 10시가 되면 문을 닫았습니다. 지역의 당협위원장이 섣불리 건배라도 외쳤다간 사진이 찍혀 ‘방역 역풍’을 맞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온라인 커뮤니티가 주목을 받게 됩니다.

각 정당은 전략적으로 커뮤니티들의 성향을 분류해 모니터링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자신들을 지지하는 성향의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목소리들에 민감해졌습니다. 이들을 일종의 ‘조직표’처럼 관리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정치를 하는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승리하기 위해서 어떤 커뮤니티의 목소리에 충실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커뮤니티들은 광장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매몰차게 내쫓는, 아주 폐쇄적인 공터일 뿐입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담론들은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담론들과는 다릅니다. 다른 의견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부딪히며 잡음을 내는 광장과는 달리, 이곳에 ‘다른 의견’이란 없습니다. 같은 의견이 계속해서 공고해지면서 과정은 사라지고 목적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옳고 그름이나 불의와 정의도 상관없어지는, 집단적 오만함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정치와 커뮤니티의 공생관계는 그래서 위험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결국 시민이 쥐고 있습니다. 광장의 힘을 경험했던 바로 우리만이 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선량한 광장


문재인 정부는 광장과 시민의 선의를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선량한 광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순간에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때로는 악인이 되길 마다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든 공간이 바로 광장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남긴 몇 가지 실패의 원인은, 바로 이 사실을 간과했던 순진함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광장에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광장이 내지르는 함성이야말로 불가침한 불의를 정의로 바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새 정부의 광장은 어떤 모습일까요? 기대도 되고, 또 걱정도 됩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국민청원 게시판을 한시적으로 운영하겠다고 했지만, 윤석열 정부가 계획하는 통합플랫폼이 갖춰지면 이에 통합시킬 예정입니다. 어디에 있든, 그 크기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광장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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