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는 장애인
완결

지하철을 타는 장애인

지난 5월 3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재개했습니다. 지하철에 오른 장애인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박경석 대표를 만나 직접 들어봤습니다.

신아람 에디터
#다양성 #프라임Lite
어제였죠, 5월 4일 아침 8시.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승차장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장애인 권리예산 촉구 삭발식과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어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기어서 지하철에 오르는 ‘오체투지’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여러 회원이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에 오르는 출근길 시위는 잠시 멈추지만, 오체투지 시위는 내일, 5월 6일 아침에도 이어질 예정입니다.
박경석 대표는 사실 오래전부터 이런 말을 해 왔습니다.

“욕을 바가지로 먹든 한 트럭을 먹든, 욕을 더 많이 먹어서라도 우리 문제가 〈100분토론〉에 한번 나와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장애인의 문제가 주류 공론장에서 ‘함께’ 논의되고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로’ 논의되는 ‘타자의 문제’로 다뤄지는 현실을 멈추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2022년, 우리 사회는 그 첫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집권여당의 당 대표와 박경석 대표가 같은 테이블 앞에 앉아 토론을 진행하는 모습이 그 상징입니다. 두 사람의 눈높이도 맞추지 못한, 준비가 덜 된 토론장이었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에 20년이 걸렸습니다.

북저널리즘은 박경석 전장연 대표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시민의 출근길에 휠체어를 타고 함께 지하철에 오른 이유를, 그리고 그 지하철을 타고 과연 도달하고 싶은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독자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 모습이 언론을 통해 많이 노출되었다. 때문에 과격한 이미지를 갖고 계시는 분도 많은데?

전장연이라는 단체의 목표는 명확하다. 장애인의 문제는 바로 ‘차별’의 문제이며 이 차별에 대해 ‘저항’한다는 것이다. 저항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집회를 언론이 주로 보도한 측면도 있고 해서 그런 이미지가 있을 수는 있겠다.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라면 어떤 것이 있나?

전장연은 토론이나 연구, 문화재 등의 방법으로도 저항을 이어오고 있다. 문화재에서 노래도 부른다.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지만 변화를 만들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비장애인이 누리는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를 장애인도 함께 누려야 된다는, 권리의 불평등성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서의 투쟁이다.

잘 부르지 않아도 아름다운 노래는 많다고 생각한다. 그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 언론과 사회의 숙제 아니겠나?

전장연이 원래 숙제를 많이 던지는 조직이다.  (웃음)

다만, 조금 전 ‘관계’의 문제를 풀고자 한다는 말씀이 있었다. 현재 전장연의 시위 방식(출근길 지하철 탑승)이 오히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관계를 악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시민에게 불편을 끼친다는 지적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관계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가 바로 관심이다. (장애인이) 사회와 분리되어 20년이고 30년이고 살아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불쌍한 시각으로 볼 뿐이다. 이런 풍조가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받는 비난조차 우리는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그 비난이 이 문제를 바라보게 되는 일종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쌍한 시각에서 우리 사회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이다. 장애인의 시각에서 이 문제를 조망해 주신다면?

장애인의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시민들은 버스를 타는데 왜 장애인은 타지 말아야 하는가’이다. 20년을 외쳤는데도 여전히, 우리가 버스를 타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좀 설명해 달라는 것이다. 2001년도부터 우리가 이동권 투쟁을 하면서 내건 슬로건이 ‘버스를 타자’였다. 버스를 탄다는 것은 관계를 맺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요구다.

버스를 타는 것이 관계의 기초가 된다? 

매년 장애인의 날이 되면 장애인들을 모아서 어디 나들이를 시켜주는 행사를 많이 한다. 모범택시 운전기사님들이 모여서 30년 동안 외출 한 번 못한 장애인들에게 남산 꽃 구경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꽃 구경을 해서 너무 좋다는 장애인의 목소리를 보도한다. 그러나 언론은 그 장애인이 왜 30년 동안 외출을 못 했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다. 만약 비장애인을 30년 동안 집 안에만 있도록 한다고 생각해 보라. 말이 되는가? 장애인이 일상적으로 거리를 돌아다니고, 그 과정에서 비장애인과 만나야한다. 그것만큼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이 없다.
전장연의 이번 시위가 관계의 기초가 되는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 것도 한몫한 것 아닌가?

사실 이준석 대표는 합법과 불법이라는, 방식적인 문제를 가지고 선동하고 있다. 혐오를 조장하고 있으면서 혐오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의 차별적인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그런 구조적인 문제는 싹 무시하고 단어 몇 개를 들어 말장난을 하려고 한다. 그런 논쟁을 보면서 배운 사람의 독사 같은 지식이란 생각을 했다.

차별의 구조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뿌리내려 있나?

교육의 문제부터 보자. 봉건 시대에는 계급에 따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한정되어 있었다. 이것이 근대로 넘어오면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을 더 우대하고 능력을 존중하고 거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사회구조이다. 그런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장애인은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국가가 장애인에 대한 교육에 투자할 필요가 없어진다. 지하철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에 처음 지하철을 건설할 당시부터 엘리베이터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바꾸기 위한 노력도 없었다.

그런 인식에 내심 찬성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목소리 없는 자는 없는데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다”는 말이 있다. 듣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본다. 부딪혀보고, 서로 이해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헌법에는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권리의 불평등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지금은 신분사회도 아니고 봉건사회도 아닌데 누군가는 이동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시위로 인해 몇 시간 지각하는 분들이 분명히 계신다. 그런데 장애인은 수십 년 차별받아왔다. 이동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결론적으로 시민권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 장애 문제의 당사자입니다. 그 해결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존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베풀어야만 일상이 가능한 상황은 문제의 해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눈이 나쁜 사람은 안경을 써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영어가 병기된 도로 표지판이 문제의 해결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분히 책임과 역할을 다했을까요?


지금 서울 지하철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지만 지방으로 가면 이동권 문제는 더 심각하지 않나?

이 시위는 단순히 서울 지하철만을 문제로 삼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이동권 문제는 서울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지하철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역 간 차별이 심각해서 중앙정부가 예산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준석 대표가 서울 지하철을 기준으로 몇 퍼센트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는 둥 발언하면서 논의가 협소해져 버렸다. 저상버스 도입같은 경우 경북 일부 지역은 0퍼센트인 곳도 있다. 지방에서는 시외간 이동은 꿈도 못 꾸는 경우가 많다. 시외버스 중에 저상버스가 한 대도 없기 때문이다.

시위의 목적에는 이동권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장애인 예산 확보 관련 취지도 있다고 알고 있는데?

큰 종류로는 이동권, 교육, 노동, 24시간 활동 지원, 탈시설 권리에 대한 예산을 주장하고 있다. 이 중 장애인 이동권 문제 관련해서는 중앙정부가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어달라는 것이 요구 사항이다. 지방정부의 예산 격차가 이동권 지역 격차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동권 예산은 장애인을 비롯한 교통약자 모두가 수혜자가 되지 않나?

그렇다. 인구의 40~50%가 교통약자이다. 반면, 장애 인구는 5%이다. 저상버스가 도입되면 무릎이 안 좋은 어르신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이동권 관련 예산은 전 국민이 누리고, 또 누리게 될 예산이기 때문에 꼭 장애인 예산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24시간 활동 지원 예산 관련해서는 꼭 필요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제 경우는 하반신 마비라서 손을 써서 잠잘 때 혼자서 몸을 뒤척이는 정도는 가능하다. 그런데 전신마비 장애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밤에 잠잘 때 누가 돌려주지 않으면 욕창이 생기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시설에서는 한 방에 일곱 명씩 재우면서 생활 교사 한 명이 한꺼번에 돌려주고 가는 식으로 생활한다. 아시다시피 시설에서는 개인 생활에 대한 어떠한 선택도 의지도 없다. 시설에서 나와서 자립 의지를 갖고 살아가려는 장애인에게 24시간 지원은 필수다. 밥을 먹고 목욕하고 잠을 자는 동안 지원이 있어야 자립이 가능하다.

24시간 활동 지원 서비스는 탈시설의 전제가 된다는 말씀인데, 탈시설을 두고는 장애인 본인이나 가족분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있지 않나?

장애인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줘야 한다. 말을 못한다고 스스로 선택할 수 없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장애인을 시설에 수용하는 순간 우리 사회의 책임을 시설에 외주 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 책임을 지역사회로 가져와야 한다. 지역사회가 지원해서 장애인이 자립해서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

커뮤니티 케어 개념인가?

‘케어’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다. ‘돌봄’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하다. 보호와 사랑은 인간의 감정에 관한 문제다. 지원은 책임과 의무의 문제다.
 
자립이란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삶이란 없으니까요. 도쿄대학교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 ‘당사자연구팀’의 구마가야 신이치로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이 장애인용으로 돼 있지 않으니 장애인은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적습니다. 장애인이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의존할 게 부족하기 때문에 자립이 어려운 겁니다. 인간은 약함을 서로 보충하고 의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서 강해졌어요. 장애인만 ‘의존하지 말라’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탈시설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 않나?

문재인 정부가 내놓았던 탈시설 계획은 20년짜리다. 게다가 시설에서 무조건 나오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마저 예산을 제대로 쏟지 않았다. 장애인 본인에게 물어봐야 한다. 여섯 명씩 한방을 쓰는 시설에서 살아갈지, 지원이 약속되어있는 자신의 공간에 거주하며 지역사회와 함께 살아갈지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적어도 토론과 대화라도 잘 되었으면 한다.

국회에 장애인 의원이 두 명이나 있다. 그런데도 현실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이 정치를 이뤄내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 한두 명의 장애인 의원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힘, 대중의 힘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이 있어야 먼 미래의 정치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지금 당장 장애인 정치인이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정치를 든든하게 할 수 있는 힘,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진짜 힘은 목소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던 사람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이 과정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정치인들이 하고 있는 권력 투쟁은 필요 없다. 권리 투쟁이 필요할 뿐이다.
목소리가 없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지금도 지하철 탑승 시위를 이어가고 계신다. 이 시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어떻게 들어야 할지 말씀 부탁드린다.

저희 목소리를 ‘이렇게’ 들어달라고 말씀드리지 않겠다. 어떤 분께는 괴성으로 들릴 수도 있고, 어떤 분께는 그냥 노래를 잘 못 하는 음치의 목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분께는 조금 아름답게도 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저희의 목소리는 개개인의 다양한 목소리이다. 이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잊히지는 않겠다는 말씀을 드린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소수이며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힘없는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단지 우리는 잊히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신아람 에디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