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101
7화

정치권의 기본소득 논의

미래통합당의 기본소득 구상


2020년 6월 미래통합당 김종인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보수가 지향하는 가치는 자유인데, ‘법 앞에 평등’ 같은 형식적 자유는 의미가 없다”라며 “실질적인 자유, 물질적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해야 하는지가 정치의 기본 목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실질적인 자유의 방안으로 기본소득을 주장함으로써 국민의힘표 기본소득의 막이 올랐다. 사실 김종인 위원장은 이미 2016년 서강대에서 제 16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가 열릴 때 개회식에 참여하여 기본소득을 옹호한 적이 있다. 다만 그때는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였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김종인 위원장의 주장은 미래통합당 내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당의 경제혁신위원장이던 윤희숙 의원이 나서서 자신들만의 기본소득 구상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본소득’이 아니었다. 이른바 ‘윤희숙 안’은 중위소득의 50퍼센트 미만에 있는 국민 610만 명(하위 11.8퍼센트)에게 지급하는 안이므로 일단 보편성 원칙을 전혀 충족하지 않았다. 2020년 기준으로 중위소득의 50퍼센트는 1인 가구 88만 원, 4인 가구 237만 원 등이므로 소득액이 그 미만인 사람에게만 지급하는 안을 기본소득이라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국민의 11.8퍼센트만이 빈곤한 것도 아닌데, 그런 안을 들고나와 “빈곤 제로 시대를 열겠다”라고 호언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지급 방식도 기본소득이 아니었다. 지급 방식은 중위소득 50퍼센트의 액수에 미달하는 액수를 채워주는 방식이었다. 즉, 1인 가구 88만 원을 기준으로 볼 때 70만 원을 번 사람은 18만 원, 40만 원을 번 사람은 48만 원, 소득이 0원인 사람은 88만 원을 주는 방식이다. 이것은 기초생활 수급자에게 생계급여를 주는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서 그 기준액만을 약간 올린 것에 불과하다. 참고로 2020년 1인 가구 생계급여 기준 금액은 52만 7158 원이었다. 약 35만 원의 기준액 변동인 셈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제도를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는데, 바로 ‘최소 보장 소득(Guaranteed minimum income)’이다. 어떤 사람이건 최소 소득이 88만 원이 되게 만들어 준다는 의미이다.

윤희숙 안은 급조된 것임이 분명했다. 이 제도를 시행하면 1인 가구 기준 88만 원 미만의 소득을 얻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80만 원이나 70만 원을 벌려는 사람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로 소득 0원으로 수렴하게 되는 제도다. 근로 소득이 0원이건 80만 원이건 총소득은 결국 88만 원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수주의자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근로 의욕을 감퇴’시키는 안인데, 이것을 보수 정당의 제1 정강 정책이라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재원 조달 방식은 ‘조삼모사’였다. 이미 사회적 약자들이 받던 복지 제도인 “생계급여(4조 3000억 원), 기초연금(13조 2000억 원), 근로장려금, 자녀장려금 등을 통폐합”하여 기본소득의 재원 “21조 원을 충당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저소득층 내 자체 조달안이다. 저소득층에게 A, B, C, D로 나누어서 주던 것을 하나의 E라고 부르면서 “빈곤 제로”를 만들겠다는 것은 낯뜨거운 계획이었다. 윤희숙 안은 몇 달 언론에 보도된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그 배턴은 같은 미래통합당 소속으로서 9년 전 ‘무상 급식 주민 투표’ 파동으로 서울시장을 사퇴한 오세훈 전 시장이 이어받았다.

 

안심소득은 안심을 줄 것인가


안심소득제는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 박기성, 김&장 법률사무소 전문위원 변양규 두 사람이 2017년에 발표한 <안심소득제의 효과>라는 논문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안심소득제가 기본소득제보다 예산이 덜 들면서도 소득 불평등 해소에는 더 큰 도움이 되는 우월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오세훈 전 시장은 2020년 6월 박기성 교수와 함께 유튜브 ‘오세훈 TV’에 나와 안심소득을 ‘우파 정권 재탈환의 최종병기’라 소개했다.

오세훈 후보는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안심소득(safety income system)을 두고 “하후상박(下厚上薄)으로 어려운 사람일수록 많이 드리기 때문에 소득 양극화 개선에 가장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말하면서, 기본소득은 “가난한 분은 너무 적은 돈을 받아 고통받고, 부자는 굳이 안 받아도 되는 돈을 받게 된다”라고 비판했다. 3장에서 말했듯 허구적인 설명이다.
안심소득제는 앞에서 살펴본 밀턴 프리드먼의 ‘음의 소득세’를 한국에 적용한 것이다. 4인 가구 기준으로 볼 때 중위소득에 준하는 연 소득인정액 6000만 원 미만의 가구를 대상으로 현금을 지급하되, 지급액은 기준 소득(4인 가구 6000만 원) 미달액의 50퍼센트로 한다. 즉, 4인 가구 연 소득인정액이 4000만 원이면 미달액 2000만 원의 50퍼센트인 1000만 원이 지급되어 처분가능소득(disposable income)이 5000만 원이 된다. 윤희숙 안에 비해 기준 소득이 중위소득 50퍼센트에서 중위소득 100퍼센트로 크게 높아졌고, 지급 방법은 미달액의 100퍼센트가 아니고 50퍼센트 지급으로 바뀌었다. 밀턴 프리드먼의 원래 안이 50퍼센트 지급이었기 때문에 안심소득은 음의 소득세 원형에 보다 더 접근했다.[1]

재원은 국민 기초생활 보장 제도의 일곱 개 급여 중 생계급여, 주거급여, 자활급여, 그리고 국세청의 근로장려금과 자녀장려금을 폐지해 마련한다. 기준 소득 미만의 가구에는 현금을 지원하되 기준 소득을 상회하는 가구의 경우에는 현재의 소득세 제도를 유지한다. 즉, 증세하지 않는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재원 마련을 위해 통폐합되는 기존 복지 제도는 윤희숙 안과 크게 차이가 없는데, 기준 소득을 두 배 높게 잡아 수혜자를 대폭 늘린 안심소득제의 재원을 그것만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인가? 오세훈 시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안심소득제를 시행하는 데 2023년 기준 53조 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 53조 원 중 11조 원은 원래 기초생활 보장 제도 일곱 가지 급여 중 세 가지(생계, 주거, 자활급여)를 폐지해 그 예산을 전용해 마련할 수 있다. 남는 42조 원은 앞으로 늘어나는 복지 예산에서 충당이 가능하다. 계산해보니 매년 30조 원 이상 복지 예산이 늘어나고 있다. 2023년에는 90조 원이 늘어나 있는 셈이다. 이중 절반도 안 되는 돈을 안심소득제 재원으로 쓰면, 증세 없이도 충분히 시행이 가능하다.”
-2020년 8월 24일, 이로운넷 인터뷰

3장에서 살펴봤듯이 다양한 음의 소득세 설계가 있겠지만 음의 소득세의 본질은 기준 소득을 넘어서는 계층으로부터 ‘양(陽)의 소득세’를 거둬서 기준 소득 미만의 계층에게로 ‘음(陰)의 소득세’의 형태로 소득을 이전한다는 것이다. 즉, 음의 소득세는 소득 재분배 기능이 탑재되어 있으며, 그것이 프리드먼의 원래 구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한국적 변형인 안심소득제에는 음의 소득세 구간에 대한 언급은 있는데 양의 소득세 구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이것은 ‘반쪽 자리 NIT,’ 혹은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사자성어처럼 태평양을 건너오다 ‘탱자’가 돼버린 NIT ‘귤’의 오세훈 버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국가 예산을 매년 증액할 때 그 증액의 재원은 증세 아니면 국채 발행이다. 저성장이 뉴 노멀이 돼버린 지금은 더욱 그렇다. 오세훈 시장이 갑자기 손 위에 굴러떨어진 것처럼 말하는 ‘매년 30조 원 이상의 복지 예산 증가’도 증세 아니면 국채 발행의 결과다. 그런데 그는 증세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국채 발행에 대해서는 나랏빚이 늘어나 큰일이라고 늘 말하는 확장적 재정 지출 반대론자다. 한마디로 그는 예산 증액의 두 방법을 다 반대하면서 두 방법 중 하나로부터 나온 예산은 매년 꼬박꼬박 42조 원을 사용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하에 있는 밀턴 프리드먼이 이것을 듣는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안심소득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딱 하나만 든다면 중위소득 100퍼센트 미만의 가구에게만 소득 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왜 그것이 문제인가? 먼저 우리나라의 소득 불평등은 너무나 심각한 수준이라 중위소득을 넘었다고 넉넉한 가구라고 보아선 안 된다. 중위소득은 평균소득에 비해 매우 낮다. 국민 소득 중 가계 소득의 비율이 낮고 가계 소득에도 양극화가 심하기 때문이다. 수치로 살펴보자. 2020년 기준 1인당 명목 GNI(국민 총소득)는 ‘3만 달러’를 넘어 연 3900만 원 정도이다. 4인 가구라면 수학적으로 연 소득이 1억 5000만 원이 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국민 총소득에서 가계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61.3퍼센트(2017년 기준, OECD 추산)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79퍼센트, 독일이 73퍼센트 등인 것에 비해 매우 낮은데, 그만큼 기업의 소득이 가계로 덜 이전되며 정부의 공적 이전지출도 타국에 비해 적다는 의미다.

여하튼 1억 5000만 원의 61.3퍼센트는 9200만 원 정도이다. 이것이 가계 부문 4인 가구의 ‘평균’ 소득이다. 그런데 보건복지부가 2020년 고시한 4인 가구의 ‘중위’ 소득은 5800만 원 정도이다. 요컨대 5800만 원과 9200만 원 사이에 중위소득은 상회하지만 평균소득에는 미달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심소득은 바로 이 평균소득도 안 되는 무수한 사람들을 수혜 대상에서 제외한다. 또한 안심소득은 평균소득을 넘지만 부유하지는 않은 사람들도 당연히 배제한다.

안심소득은 분명히 기존의 기초생활 수급자와 근로·자녀장려금 수령자를 더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현금 복지 혜택 속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위소득 100퍼센트 미만, 즉 인구 절반만을 대상으로 하는 안심소득의 사후적 결과는 매우 나쁜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중위소득 이상이지만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 다수에게는 복지 제도에 대한 불신이 생길 것이고 복지 제도를 위한 기여인 증세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 잡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안심소득 주창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복지 전반에 대한 불신 말이다.

소득 기준을 구분하지 않고 100퍼센트의 국민에게 보편 지급한 2020년 1차 긴급재난지원금은, 모두가 혜택을 보는 보편적 복지야말로 복지 제도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고 ‘증세의 선한 면’을 깨닫게 하며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강화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당초에 기획재정부가 ‘하위 70퍼센트만 선별’하겠다고 할 때는 국민 간의 분열 조짐이 보였다. 소득 하위 절반만을 대상으로 하는 안심소득이 만약에 실시된다면 이것은 세금을 내는 상위 50퍼센트와 복지 수혜를 입는 하위 50퍼센트로 사회를 분열시킬 것이다. 참고로 국세청 통계연보에 따르면, 납세 대상자 중 근로 소득세 면제비율은 2015년 48.1퍼센트, 2018년 41.0퍼센트였다. 결국 세금을 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복지 국가의 반대자로 내몰 것이란 의미다. 특히 중위소득은 넘지만 부유하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다는 것은 매우 뼈아픈 것이다.

오세훈 시장은 왜 안심소득제를 지지하고 나선 것일까? 유튜브 오세훈TV의 ‘우파 정권 재탈환의 최종병기-안심소득’ 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통령)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이 뭐냐? 어떤 유권자들의 표를 가져와야 우리가 51퍼센트 이상을 얻을 수 있는 거냐? 저는 요즘 그것만 고민하고 살기로 했습니다.” 이 중 “어떤 유권자들의 표를 가져와야”라는 말에 눈길이 간다. 중위소득 100퍼센트 미만, 즉 안심소득을 받는 구간은 바로 타기팅된 유권자들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022년 7월부터 안심소득 시범 사업에 착수할 예정이다. 박기성 교수는 시범 사업 자문단에 포함되었다.

 

공정소득은 안부터 만들어야 한다


2021년 국민의힘 유승민 의원은 기본소득 비판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자신의 안을 ‘공정소득(NIT)’이라고 표현하며 공정소득이 곧 음의 소득세이자 그것의 한국어 번역이라고 소개했다. 그렇다면 유 의원은 마땅히 안심소득제에 빠져 있는 ‘양의 소득세’ 구간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공정소득 역시 안심소득처럼 증세 등 재원 마련 계획이 없는 셈이다. 유 의원은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다양한 발언을 했을 뿐 자세한 공정소득 계획안을 제출한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공정소득은 안심소득보다 더 무책임하다.

유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부가 돈을 줄 때는 당연히 가난한 서민에게 더 드려야 한다. 그런데 왜 기본소득은 똑같이 나눠주나.” 기본소득을 비판할 때, 걷는 액수와 주는 액수를 통일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주는 액수가 똑같다는 이유로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유 의원의 사고가 전형적으로 그렇다. 이런 사고에 빠지는 이유는 그들의 머릿속에 애초부터 걷는 것, 즉 ‘증세’에 대한 사고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공정소득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유 의원은 “기본소득에 쓸 돈을 소득 하위 50퍼센트에게 주면 두 배를 줄 수 있다. 소득 하위 33.3퍼센트에게 주면 세 배를 줄 수 있다”라며 “양극화와 불평등을 완화하는 효과는 공정소득이 훨씬 우월하다”고 덧붙인다. 한편 기본소득은 ‘포퓰리즘 (populism)’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왜 포퓰리즘은 부정적 의미로 통용되는 걸까? 포퓰리즘은 사람들(people)의 생각을 중심에 두고 ‘엘리트’에 대한 대항을 전략으로 삼는 정치적 기획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포퓰리즘을 ‘대중영합주의’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언론이 많다. 결국 기본소득이 포퓰리즘이라는 말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대중에게 영합하는 불의한 정책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유 의원의 위의 주장이야말로 대중영합적 주장이 아닐까? 기본소득 비판자들은 항상 ‘동일한 재원’이라는 부당 전제로 말을 시작한다. 동일한 재원이라면 서민에게 더 나눠주는 제도가 가장 서민적인 제도라는 논지다. 만약에 기본소득과 동일한 재원으로 더 ‘친서민적’인 제도를 만들고 싶다면 우선 지금 존재하는 생계급여부터 혁신적으로 올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대 정부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공정소득의 안 자체가 없다는 것은, 실은 그만한 재원을 조성할 의지도 계획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예상하건대 그만한 재원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고 싶은 것이 다. 그만한 재원을 만드는 일에 돈을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실체가 바로 ‘친서민적’ 공정소득이다. 의지도 계획도 없으면서 서민에게 두 배, 세 배 더 지급할 수 있겠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대중 영합주의의 전형이다.

 

참여소득의 트라일레마


‘OO소득’이란 이름의 다양한 소득 보장 방법이 제시되는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이 ‘참여소득(participation income)’을 주장하며 이 영역에 뛰어들었다. 참여소득은 불평등 연구의 대가인 영국의 경제학자 토니 앳킨슨(Anthony Barnes Atkinson)이 1996년에 최초로 주장한 것으로 기본소득의 지급 방식을 달리하자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기본소득의 5대 원칙 중 ‘무조건성’을 약화시켜 특정한 활동에의 ‘참여(participation)’를 조건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참여란 반드시 시장 노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및 훈련, 돌봄과 자원봉사 등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기여(social contribution)’를 의미한다.

당시 영국에서는 기본소득이 ‘시민소득(citizen’s income)’이란 이름으로 논의되었는데, 앳킨슨은 이 시민소득의 핵심을 ‘자산 조사에 기반한 공공부조’를 대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자산 조사에 기초한 복지 급여는 빈곤을 고착화하고 저축을 의미 없게 만든다. 게다가 낙인 효과와 사각지대를 유발하며 가구 단위의 복지 혜택을 고정화하여 여성과 청년, 청소년을 속박한다. 공공부조는 역설적으로 사회 복지를 끝없이 후퇴시키므로, 현대의 복지 제도는 사회 보험과 기본소득의 결합이 되어야 한다. 여기까지는 기본소득의 생각과 동일하다. 하지만 앳킨슨은 기본소득이 특정한 활동과 결합하지 않고 무조건성을 고수하게 되면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 어렵다고 보고 ‘참여’를 조건으로 기본소득 지급을 진행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참여소득은 수급에 있어 어떤 반대급부도 요구하지 않는 기본소득과, 특정 노동을 수행해야만 복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노동연계복지(workfare)라는 양극단 사이에 놓인 절묘한 절충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착시다. 참여소득은 그 취지상 동시에 해결하려는 세 가지 과제가 있는데 사실상 해결할 수 없는 트라일레마(trilemma) 상황에 놓여 있다. 그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공부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포용적이어야 한다. 둘째, ‘참여’ 조건의 엄격한 적용과 엄정한 판정이 필요하다. 셋째, 행정적, 경제적 비용이 적어야 한다. 그런데 참여소득이 포용적이려면 참여 조건을 약하게 하거나 평가를 관대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참여소득은 무조건적 기본소득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진다. 반대로 참여 조건을 엄격하게 하면 노동연계복지의 일종이 되며, 참여를 엄격하게 검사하려면 거대한 행정 비용이 들게 된다. 결국 기본소득과 노동연계복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다만 참여소득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충분히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임에도 시장에서 화폐와 교환하기 어렵거나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활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참여를 고취하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다시 말해 공동체에 큰 공익적 가치를 가지고도 충분히 보상받지 못해 지속성에 타격을 입는 활동에 현금 지급이라는 혜택을 주어, 그 활동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식량을 공급하고 환경을 보전하며 기후 위기에 맞서 싸우는 농업 활동이나, 시장 가치로 측량하기 어려워도 거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예술 활동 같은 것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농민 기본소득’이나 ‘예술인 기본소득’과 같은 경우가 바로 이런 참여소득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참여소득은 기본소득의 정치적 실현을 위한 입구나 경로로 보기보다는 기본소득과 병행하는 보완 전략으로 접근하는 편이 좋다.

이광재 의원은 참여소득을 과거 우리나라의 ‘품앗이’의 정신과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과거 싸이월드의 화폐였던 ‘도토리’를 응용하여 참여소득을 사회에 기여하고 받는 일종의 ‘사회적 도토리’라고 말한다. 참여소득을 품앗이로 말하는 것은 무리하다. 지역 사회 내에서 품앗이 개념으로 서로의 유의미한 활동을 한 시간이라는 동일 단위로 환산하여 주고받는 ‘타임뱅크Time Bank’ 운동이 우리나라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노동 화폐’로서 현금이 결부되지 않는 노동과 노동의 교환이므로 앳킨슨이 말하는 참여소득과는 거리가 있다.

이광재 의원은 병원 이용 기록이나 금융 사용 기록 등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고 소득을 얻는 방법도 참여소득의 한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데이터 매매 행위이지 사회복지 정책으로서의 참여소득과는 무관하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데이터를 양산하고 있고 이 데이터는 모두 소중하다. 최근 금융권에서 각광받는 ‘마이데이터’ 개념은 데이터 주체인 ‘내’가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데이터 매매를 목적으로 구상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모르는 새에 플랫폼과 빅데이터 업체에 이용자의 데이터를 고스란히 갖다 바치는 ‘데이터 인클로저(data enclosure)’가 문제시되고 있다. 빅데이터에 대한 우리 모두의 권리를 인정하고 플랫폼 업체에 정당하게 과세하여 빅데이터에 대한 사회배당으로서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데이터에 대한 올바른 정책적 접근 아닐까?

 

그리고 농민 기본소득


참여소득의 정신이 잘 반영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농민 기본소득이다. 농민 기본소득은 모든 농민 개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인 현금을 동일하게 지급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지급하는 기본소득과 비교해 보면, 농민 기본소득은 농민이어야 지급받을 수 있으므로 농업 활동을 ‘조건’으로 하는 참여소득이 맞다. 하지만 왜 농업참여소득이라 하지 않고 농민 기본소득이라고 불리는가? 농촌 내부에서 그리고 농민의 시각에서 보면 분명히 ‘기본소득’이기 때문이다.

현재 농민들은 ‘공익형 직불금’을 받고 있다. 농업 활동을 통해 식품 안전, 환경 보전, 농촌 유지 등 공익을 창출하도록 농업인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제도다. 공익형 직불금은 농업 경영체에 등록된 농가에 다양한 지급 조건을 두어 지급되며 ‘소농 직불금’과 ‘면적 직불금’으로 나뉜다. 소농 직불금은 0.1~0.5헥타르의 농지를 소유하거나 면적 직불금이 120만 원 미만인 농가에 연간 120만 원을 지급하는데, 이를 수령하려면 이 외에도 6가지 요건을 더 충족해야 한다. ‘면적 직불금’은 소농 직불금을 수령하지 않는 농가에 주는 것으로 농지 면적에 3단계의 지급 단가를 곱한 금액을 지급한다. 따라서 농지 면적이 클수록 수령액은 점점 커지게 되고 최대 연간 5734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공익형 직불금은 ‘기존 직불금 수령 이력이 없는 농지’의 경우는 지급받지 못하고, ‘농지 형상·기능 유지’ 등 17가지 준수 사항까지 있다. 또한 임차농은 거의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가구 단위 지급에 부농일수록 지급액이 커지고 각종 요건 및 준수 사항까지 있는 공익형 직불금에 비해, 개인 단위 지급에 액수도 동일, 농업 활동 이외에는 별다른 조건이 없는 농민 기본소득은 농민 입장에서는 기본소득으로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농민 기본소득이 필요한 이유는 소농 중심의 농촌 재건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농민 기본소득은 농민의 ‘소득 바닥’을 만들어서 소농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 소농 중심의 자원 순환형 친환경 농업을 정착시켜야 생태계를 지키고 기후 위기와 싸울 수 있다. 게다가 소농은 농촌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소농을 살려야 농촌 공동화와 소멸을 막을 수 있다. 땅이 있건 없건 농사만 짓는다면 월정액을 보편적으로 지급해야 도시의 청년들이 농촌으로 이주해 소농이 될 수 있다.

농민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지구가 산다. 코로나19로 인한 판데믹은 식량의 기지이자 생명 창고인 농업의 중요성을 모두에게 일깨웠다. 농민 기본소득은 농촌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거대한 전환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과 보완적 효과를 가지는 참여소득으로서 의 농민 기본소득은 자연 약탈적 화학 농업, 대농 중심의 생산주의 농정을 극복하고 농민의 지위와 권리를 되찾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1]
2022년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는 ‘시민최저소득’을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이 또한 음의 소득세의 일종이다. 심 후보는 모든 시민에게 ‘최저소득’ 100만 원을 보장하겠다고 말했기에, 윤희숙 안과 비슷한 ‘최소보장소득’ 제안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안심소득’은 4인 가구를 예로 들고 ‘시민최저소득’은 1인 가구를 예로 들고 있지만, 둘은 중위소득 100퍼센트 미만의 사람에게 중위소득 미달액의 50퍼센트를 지급하는 음의 소득세 안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2022년 1인 가구 기준 중위소득이 194만 4812원이므로, 소득인정액이 0원인 1인 가구는 그 50퍼센트인 97만 원의 시민최저소득을 받기 때문에 ‘최저소득 100만 원’이란 대중적 표현을 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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