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101
9화

기본소득의 지속 가능성

기후 위기 시대의 기본소득


녹색 운동은 1970년대 이래 기본소득의 최대 지지자였다. 1970년대 말 영국생태당(British Ecology Party)은 당 강령에 기본소득을 포함한 유럽 최초의 정치 단체다. 지금 이 당의 이름은 잉글랜드웨일스녹색당(Green Party of England and Wales)이고 꾸준히 기본소득을 당 강령에 가지고 있다. 잉글랜드웨일스녹색당은 2019년 총선 공약으로 2025년까지 모든 주민에게 최소 주급 89파운드(14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을 내걸었다. 오래된 기본소득 지지 정당인 핀란드 녹색연맹(Green League)도 2019년 총선 공약으로 월 600유로(80만 원)의 기본소득을 제시했다. 캐나다 녹색당은 보장생활소득(Guaranteed livable Income)이란 이름으로 기본소득을 핵심 공약으로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 뉴질랜드, 프랑스, 독일 등의 녹색당이 기본소득을 강령 혹은 주요 정책으로 가지고 있으며, 한국 녹색당도 2012년 이래 예외 없이 기본소득을 총선 및 지방 선거의 공약으로 삼았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녹색좌파당(GroenLinks), 스위스 녹색당, 벨기에의 프랑스어 정당 에콜로(Ecolo)와 네덜란드어 정당 흐룬(Groen) 등에서는 당원들 사이에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가 엇갈린다. 유럽을 대표하는 녹색당인 독일의 ‘동맹 90/녹색당(Bündnis 90/Die Grünen)’ 역시 과거 당 대회에서 기본소득 강령이 여러 번 부결된 적이 있다. 그러다가 2020년 11월 22일에 당 대회에서 기본소득 (Grundeinkommen)을 당 강령에 포함하는 개정안을 62퍼센트의 지지로 통과시켰다. 강령에는 “숨겨진 빈곤은 극복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지도 이념을 지향한다”로 명확히 기본소득이 명시되어 있지만, 독특하게도 정책안에는 선별 복지 정책이 포함되었다. 근로 요건은 강요하지 않지만 자산·소득 심사를 거쳐야 수혜자가 될 수 있는 ‘보증보장(Garantiesicherung)’이 통과된 것이다. 왜 녹색 정치에서 기본소득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걸까?

기본소득은 소비주의를 조장해 탄소 배출을 늘리나?

1972년 앙드레 고르츠(André Gorz)는 ‘탈성장(décroissance, degrowth)’이란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지구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질 생산에서 무성장, 나아가 탈성장이 필수 조건이다.” 지구는 더 이상 무한한 성장을 감당할 수 없다. “경제 성장이 여전히 인간의 복지를 증진할 수 있고 여전히 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주의가 결여”[1]된 것이다. 그런데 탈성장을 위해서는 소비를 줄여야 한다. “요점은 더 많은 소비를 억제하는 게 아니라 덜 소비하는 것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남아 있는 자원을 보존하는 다른 길은 없다.”[2] 소비는 한마디로 ‘성장이라는 모터’의 핵심 부품이다. 소비는 더 많은 생산을 추동하고, 더 많이 생산된 재화는 더 많은 수요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소비는 성장의 기관차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의식적인 소비 거부가 필요한데, 생태주의 관점에서 이것은 문명의 쇠퇴가 아니라 더 높은 질을 갖춘 삶의 이행으로 이해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생태주의 진영 일부의 우려가 발생한다. 더 많은 소득이 더 많은 소비를 야기하고, 더 많은 소비는 더 많은 온실가스 배출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총수요가 증가하여 소비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기본소득은 기후 위기를 가속하는 반생태적 기획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본소득은 ‘탈성장’의 수단이 아니라 ‘경기 회복’의 수단이 되며, 총수요를 자극하여 성장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21세기형 케인스주의가 될 수 있다. 과연 기본소득은 기후 위기를 가속할 것인가?

우려의 논리는 이렇다. 기본소득은 전 사회적인 재분배 계획으로 저소득층의 ‘처분가능소득(disposable income)’을 증대시킨다. 사회 전체의 부의 총량은 변화가 없다. 한쪽에 쌓여 있던 부를 좀 더 골고루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저소득층은 고소득층보다 ‘한계 소비 성향’이 크다. 한계 소비 성향은 소득이 늘어날 때 증가하는 소비 증가분의 비율을 말한다. 쉽게 말해 한 명의 부자가 1000이란 수입이 추가로 생겼을 때 예를 들어 400을 소비한다면 한계 소비 성향은 0.4다. 하지만 저소득층은 돈이 없어서 소비를 하지 못했을 뿐 소비 잠재력은 높다. 그래서 만약 이 1000을 100명에게 10씩 나눠 주어 각자가 9까지 소비하게 된다면 한계 소비 성향은 0.9가 된다. 정리해 보면 전자의 경우는 총소비가 400, 후자의 경우는 총소비가 900이므로 기본소득을 주면 총소비가 늘어나서 큰일이 나겠다는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의 질적 측면과 동태적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 이러한 양적 비교는 주류 경제학 인식의 근본적인 한계를 보여준다. 다음은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팸(Oxfam)’이 가계의 소비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lifestyle consumption emissions)와 소득 불평등 사이의 연관 관계를 표시한 그림이다. 사람들이 사는 제품과 먹는 음식, 생활 방식과 이동 수단, 이용하는 서비스 등에 따라 탄소 배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공장에서 옷을 생산했다 하더라도 이 옷을 미국의 베벌리힐스(Beverly Hills)에서 입는다면, 이 옷과 관련된 탄소 배출은 베벌리힐스에 사는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 이렇게 생산이 아닌 소비에 따른 탄소 배출을 파악하는 이유는, 다양한 소득 격차에 따른 사람들의 실제 ‘탄소발자국(carbon footprint)’[3]을 파악하는데 훨씬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면 소득 불평등(Income Inequality)을 곧 탄소 불평등(Carbon Inequality)이라고 할 만하다. 1990~2015년의 25년간 세계 소득 상위 10퍼센트가 지구 온실가스 배출의 52퍼센트에 책임이 있다. 연간 순소득 3만 8000달러 이상인 6억 3000만 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소득 하위 50퍼센트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다 더해도 지구 전체 배출량의 7퍼센트밖에 안 된다. 연간 순소득 10만 9000달러 이상인 소득 상위 1퍼센트는 전체의 15퍼센트에 해당하는 온실가스를 배출하여, 소득 하위 50퍼센트를 다 더한 배출량보다 두 배 이상을 배출했다. 부자들은 비행기를 훨씬 많이 타고 개인 비행기와 요트도 탄다. 자가용을 많이 타고 SUV 같은 탄소 고배출 차량을 몰고, 고기도 많이 먹으며 옷도 자주 산다. 여기서 한계 소비 성향이 높고 낮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생활의 필수적 욕구를 넘어선 소비는 과시성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및 지위재(positional goods) 소비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소비일수록 단위당 탄소 배출량이 훨씬 크다.

따라서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서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은 평면적이고 무차별적인 말이다. 상위 10퍼센트, 그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의 소비를 대폭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옥스팸은 부자의 탄소 배출을 줄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네 가지 방책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부자에게 더 많이 과세하라. 둘째, 사치성 제품과 서비스에 더 많은 부담금을 부과하고 건강과 돌봄, 교육, 주거 등 사회 보장에 더 많은 재원을 투입하라. 셋째, 대중교통 확대와 에너지 효율 제고 등 저탄소 프로젝트에 더 투자하라. 넷째,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사치품에 대한 공중 광고를 금지하라. 특히 사회 보장의 강화는 개별적으로 소비해야 하는 물품과 서비스의 발생 자체를 원천적으로 줄이므로 사회 전체의 물질적 소비와 낭비를 줄일 수 있게 해준다.

기본소득 등의 소득 재분배 정책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소비 능력이 높아진다면 배출 가스가 크게 증가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은 여러 면에서 잘못되었다. 위 그림이 가리키듯 25년간 지구의 탄소 배출은 60퍼센트가량 증가했다. 그 사이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 중산층이 되었고 그들의 탄소 배출도 늘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국과 인도가 비약적 산업 발전을 이루기 이전인 1990년에 상위 1퍼센트와 10퍼센트였던 사람들의 탄소 배출 비율은 25년이 지나도 그대로다. 이것은 빈곤층과 중간층의 생활 개선과 관계없이 탄소 배출의 주범은 언제나 초부유층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초부유층의 소비를 억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빈곤층과 중간층의 탄소 배출 증가를 우려하는 것은 위선적이다.
이것은 소득분위별 탄소 배출 ‘비율’만이 아니라 해당 25년간의 탄소 배출 ‘절대량’의 변화와 관련해서도 분명하다. 위 도표는 소득분위를 5퍼센트씩 20분위로 나누어 1990년의 탄소 배출량과 2015년의 탄소 배출량을 비교한 것이다. 도표의 모양은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모습을 띠고 있다. 도표의 왼쪽에 있는 소득 하위 25퍼센트까지는 탄소 배출량이 25년간 전혀 늘지 않았다. 소득분위 중위층은 ‘1인당’ 탄소 배출량이 가장 많이 늘었지만, 탄소 배출 ‘절대량’의 증가는 상위 5퍼센트에서 엄청나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상위 5퍼센트의 ‘과소비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 기후 위기 대응에 가장 중대한 과업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처분가능소득을 늘리면 탄소 배출이 늘어난다고 비판하는 것이 옳은지 자문해야 한다. 왜 극소수 1퍼센트, 혹은 상위 10퍼센트의 고소득자만 탄소 배출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지구 빈곤층의 탄소 배출이 25년간 제자리걸음을 했다는 것이 그들 모두가 자원순환형 생활을 했기 때문인가? 이는 그들이 극심한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오히려 ‘기후 정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빈곤층의 탄소 배출은 약간 늘어나되 부유층의 탄소 배출은 크게 줄어드는 것이 진정한 정의일 것이다.

옥스팸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25년간 소득 하위 50퍼센트 이하의 탄소 배출량이 만약 실제 배출한 것보다 2배 많았다 가정해도, 최상위 1퍼센트가 같은 기간 동안 늘린 탄소 배출량보다 적다. 바꿔 말해 소득 하위 50퍼센트의 소득이 두 배 늘어나 그것이 전부 탄소 배출량 증가로 귀결된다 해도, 그 소득 증가가 최상위 1퍼센트에 대한 과세를 통해 재분배된 결과라면 지구에 가해지는 부담은 더 적다는 뜻이다. 최상위 1퍼센트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소득 능력에 따라 폭넓게 과세한다면, 부유 정도에 따라 과세가 차별화될 것이고 지구에 가해지는 부담은 훨씬 더 적어질 것이다. 이것이 기본소득의 과세 방식이다. 결국 기본소득은 소비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주의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전제다.

물론 기본소득 지급만으로 지구 전체의 탄소 배출량을 0으로 만들 수는 없다. 기본소득은 원래 ‘배출 제로(zero emission)’를 위한 정책이 아니므로 그걸 못하는 것이 기본소득의 결점일 수는 없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소득 불평등을 개선하는 것이 바로 탄소 배출을 개선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본소득 지급으로 실질적 자유가 증대하게 되면 환경적으로 책임 있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도 중요하다. 인도네시아의 저소득층이 생계를 위해 삼림을 남벌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현금 지급 정책을 실시했더니 삼림 남벌이 30퍼센트가량 줄어들었다는 보고가 있다. 빈곤층의 환경 파괴 행위가 있다면 그 원인은 대부분 빈곤이다. 빈곤과 싸우는 길이 지구를 지키는 길이다.

탈성장과 기본소득

‘탈성장’을 처음 제시한 앙드레 고르츠는 기본소득이 탈성장의 중요한 요소임을 직시했다. 탈성장이 무엇이기에 기본소득과 연결되는 걸까? 탈성장은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다. 혹은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과격주의로 오독되기도 한다. 성장이라 하면 보통 GDP 성장을 말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탈성장을 곧 GDP 감소로 생각하고 공포를 느끼는 경우도 많다. 정말 그럴까? 오독은 GDP에서부터 시작한다.

“탈성장은 GDP를 줄이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경제의 물질과 에너지 처리량을 줄여 생명 세계와 균형을 이루도록 되돌리는 것, 그러면서 소득과 자원을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사람들을 불필요한 노동에서 해방시키며, 사람들이 번영하는 데 필요한 공공재에 투자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 탈성장 경제는 성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4]

국내 총생산 GDP은 오랫동안 성장주의 도그마를 유지하는 도구가 되어 왔다. GDP의 전신은 국민 총생산 GNP이다. GNP를 1934년에 개발한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는 대공황을 겪으며 하나의 숫자로 경기 변동을 표현할 방법을 구하고자 했다. 그와 동시에 GNP를 복지를 측정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창시자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GNP가 증가하면 마치 국민의 삶이 개선되는 것 같은 지배적 관념이 형성됐다. 소련이 붕괴한 1991년 미국은 GNP를 GDP로 바꾸었는데, 우연의 일치치고는 절묘하다. GNP가 GDP로 바뀜에 따라 ‘초국’적 기업이 구공산권이나 개발 도상국에서 영업을 했을 때, 그 성과가 그 나라의 국‘내’총생산으로 잡히면서 그 나라의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 것 같은 수치적 착각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이것 외에도 GDP는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일단 가치 판단이 부재하다. 이혼을 많이 하고 전쟁이 빈발하고 범죄가 발생하고 환경 파괴가 일어나면 GDP가 증가한다. 게다가 가사 노동과 자원봉사 활동 등 시장에서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는 비非시장 노동은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수치에 잡히지 않는다. 또한 GDP는 소득 분배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다. 미국 대통령 존 케네디의 동생이자 법무부 장관이던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는 GDP가 측정하는 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GDP 증가가 갖는 의미가 그렇다면, 애초에 GDP 감소도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탈성장은 GDP 감소가 아니며 세상의 작동 원리를 바꾸는 아이디어다. GDP 감소는 환경적 압력이 감소하는 신호는 될 수 있지만 지속 가능성에 대한 어떤 정보도 되지 못한다. 또한 GDP 감소는 사회 진보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GDP 대신 대안적 지표를 개발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단 하나의 대안적 지표를 구성하는 건 불가능하다. 삶의 다양한 측면을 반영하여 다양한 생물·물질적 지표(에너지 소비량, 생태발자국 등)와 사회적 지표(건강, 노동 시간, 빈곤율 등)를 연계할 수밖에 없다.

2010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생태적 지속성과 사회적 공정을 위한 제2차 탈성장 회의’에서는 탈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이 제시됐다. 커먼스, 즉 공동자산의 확대, 지역 화폐 도입과 불환 지폐의 폐지, 노동 시간 단축과 자원 활동의 확대, 빈집 이용과 공동 주택의 확대, 기본소득과 최고소득, 천연자원 개발의 제한과 생물학적 다양성 확보, 쓰레기 줄이기, 메가시티 반대, 자동차 중심 도시에서 자전거·걷기 도시로의 전환, 공공장소의 광고 금지 등이 그것이다. 기본소득은 최고소득(특정 소득액을 초과한 구간에는 세율 100퍼센트를 부과하는 방안)과 함께 탈성장의 조건으로 제시되었다. 최고소득이 함께 시행되면 기본소득 수령자와 소수 ‘갑부’로 구성된 신종 계급사회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소득 바닥(income floor)’, 최고소득은 ‘소득 천장(income ceiling)’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사실 기본소득이 세계적으로 언급되는 것 자체가 성장주의 시대가 끝났다는 신호다. 성장의 과실 분배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임금 상승이 보장되던 시대에는, 노동자는 성장을 위해서 열심히 노동할 것이 권장되었다. 성장주의와 노동주의의 결합은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다르지 않았다. 다만 분배의 룰을 정함에 있어 자본주의는 노동조합의 투쟁이 상수였고, 공산주의는 국가가 룰을 정해준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기본소득은 소득과 노동의 연결고리를 끊어 ‘성장과 소득 보장의 성스럽지 못한(unholy) 관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시작이다.

성장주의가 저물면서 기본소득이 대두되었다면, 역으로 기본소득은 분배를 개선하고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여 성장주의를 약화한다. 전체 파이의 분배가 불평등할수록 파이 자체를 키우려는 성장주의의 유혹이 커진다. 성장의 부스러기라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이를 크게 만들려는 경제는 생태적 임계점에 도달하는데, 그 증거가 기후 위기다. 따라서 앙드레 고르츠가 말했던 “성장 없는 평등”, 즉 탈성장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고르츠는 기본소득을 그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더 평등하게 분배할수록 성장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탈성장의 주요 요소이고 성장주의를 약화할 힘이 있긴 하지만, 그 힘이 발휘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결합해야 한다. 기본소득이 탈성장에 기여하려면 첫째로 기본소득의 액수가 “인간다운 삶과 존엄,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참여에 충분한 액수”로 ‘충분한’ 혹은 ‘해방적’ 기본소득이 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의 액수가 작다면, 노동에 대한 협상력이 증대하고 원치 않는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력이 강해지기보다는 노동 유연화의 조건만을 성숙시킬 가능성이 크다. 작은 액수의 ‘부분’ 기본소득으로 시작하더라도 이른 시일 내에 국민적 합의 수준을 높여 의미 있는 액수의 기본소득으로 끌어올려야 탈성장에 다가설 수 있다.

둘째로 앙드레 고르츠는 기존의 ‘사회적 배치’가 그대로인 상태에서 부분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기본소득은 해방적이지 않고 기존의 사회적 배치를 강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기본소득 도입과 함께 노동 시간의 단축과 여가 시간의 확장, 자발적 활동 및 공동체 노동의 확대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본소득은 “자율적 영역”에서 다양한 생태적 활동으로의 이행을 위한 ‘존재적 평정’을 줄 것이라 고르츠는 역설했다.

셋째, 기본소득스페인네트워크 부대표인 다비드 카사사스(David Casassas)는 보건의료, 교육, 주거, 돌봄 등을 시장에서 구매하는 상황 속에서의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적 기본소득’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기본소득은 반드시 사회서비스의 공공성 강화와 결합해야 탈성장을 위해서 소기의 목적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육 개혁이 필요하다. 생산주의·소비주의의 틀을 벗어나는 협동적·대안적·비자본주의적 생활 양식의 함양이 요구된다. 돈이 생겨도 이전과 다르게 살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다면, 확장된 여가 시간은 낡은 소비주의적 생활 양식으로 채워질 것이다. 고르츠가 말한 자율적 영역에서의 다양한 생태적 활동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적이다.

 

탄소세의 비결, 생태배당


2019년 1월 16일 《월스트리트저널》에 ‘탄소 배당(Carbon Dividends)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성명–기후 변화와 싸우는 법에 관한 초당적 합의’가 발표되었다.[5] 성명에는 27명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비롯해 3589명의 미국 경제학자가 참여했다. 성명은 다섯 가지의 정책 권고를 담고 있는데,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탄소세의 효율성을 압축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일부만 살펴보자.

① 탄소세는 필요한 규모와 속도로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비용 대비 효율이 가장 좋은 수단이다.
② 탄소세는 배출량 감축 목표가 충족될 때까지 매년 높여야 하며, 정부 규모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재정 수입에 중립적이어야 한다. 탄소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한다면 기술 혁신과 대규모 인프라 확충을 고취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⑤ 탄소세 상승의 공정성과 정치적 지속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재정 수입 전액을 동일한 액수로 모든 미국 시민에게 직접 되돌려 주어야 한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미국 가계의 대다수는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지불하는 것보다 ‘탄소 배당’을 더 많이 받게 됨으로써 재정적으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가장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탄소 배당의 목표는 두 개, 탄소세 상승을 지속하기 위한 것과 탄소세로 인해 고통을 겪을 경제적 약자에 대한 보호이다. 탄소 배당을 해야 공정성과 정치적 지속 가능성이 극대화된다. 탄소세를 부과하면 탄소를 배출하는 물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당연히 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중산층 이하에게 큰 고통을 준다. 따라서 탄소세를 크게 올릴 수 없고, 탄소세를 크게 올릴 수 없다면 탄소세의 원래 목표인 온실가스 감축에 큰 기여를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탄소세로 걷은 세금을 동일 액수로 생태 배당한다면, 과소비 부유층은 탄소세로 내는 것이 배당액보다 많고 경제적 약자는 탄소세로 내는 것보다 배당액이 많게 되므로, 재분배 효과도 생기고 경제적 약자들이 탄소세 인상을 반대하지 않게 된다.

탄소세를 반대하는 사람들

가끔 탄소세를 반대하는 일부 생태주의자들은 탄소세가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탄소세의 문제점이 아니라 ‘생태배당이 없는 탄소세’의 문제점이다. 탄소세를 부과하는 전 세계 수십 개 나라 중에 그 세수를 배당으로 직접 돌려주는 나라는 스위스밖에 없다. 스위스가 탄소세율을 10년 만에 여덟 배로 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배당이다. 탄소세율이 수직 상승한 스위스는 탄소세를 부과한 난방용 연료 소비를 크게 줄이는 데 성공했다. 2018년 난방용 연료 사용이 1990년 대비 28.1퍼센트 감소한 것이다. 탄소세로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없었던 나라, 탄소세를 크게 올릴 수 없었던 나라는 반드시 위 경제학자들의 권고와 스위스의 사례를 교훈 삼아 배당을 결부시켜야 한다.

독일 녹색당도 2021년 선거를 앞두고 탄소 배당 정책을 수용했다. 독일은 현재 이산화탄소 환산톤[6]당 25유로의 탄소세를 시행하고 있다. 2025년에 55유로로 올리도록 예정되어 있는데 독일 녹색당은 2년을 앞당긴 2023년에 60유로로 올리자고 주장한다. 이런 탄소세 수직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당연히 탄소세 세수를 개인에게 환급하는 정책이다. 독일 녹색당은 이것을 ‘에너지 돈(Energiegeld)’이라 부른다.

탄소세를 ‘시장주의적’ 문제 해결 방식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장주의적’ 온실가스 감축 방안이 그동안 실패했다고 비판할 때, 사실 그것은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Emissions Trading Systems·ETS)’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가 경제 주체들, 주로 기업에게 배출허용총량(cap)을 설정해 주고 그 범위 내에서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permit)를 할당하게 된다. 배출권은 기업들 간에 거래(trade)할 수 있다. ETS는 개념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기업이 탄소를 배출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할당받거나 심지어 구매할 수 있다는 말은, 배출권을 구매할 여력이 있다면 무한정 탄소 배출을 할 수 있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더 큰 문제는 정부의 무상 할당이다. 우리나라도 ETS를 2015년부터 시행 중인데, 2015년 525개 업체로 시작하여 2020년에는 609개 업체까지 확대되었지만 탄소 배출 감축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무상 할당이 2018~2020년 사이에는 전체 할당액 중 97퍼센트, 2021~2025년에도 90퍼센트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국제 경제력을 운운하며 정부가 기업들에게 무상 ‘오염권’을 준 셈이다. 탄소세는 이와 다르다. 탄소세를 부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예외는 있을 수 없다. 배당을 결합하면 날개를 달게 된다. 배당과 결합하여 온실가스 감축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탄소세를 시장에 기반한(market-based) 정책이라는 이유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 가깝다. 기후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장적 방법이건 비시장적 방법이건 가리지 말아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위해서는 탄소세와 같은 시장적 해결 방식 외에도 공급의 ‘금지’와 같은 직접적 규제 조치가 필요하다. 꼭 필요한 금지 조치를 몇 가지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내연 기관 자동차 금지
• 단거리 비행기 운행 금지
• 석탄·LNG 발전 금지
• 1회용 플라스틱·비닐 사용 금지
• 에너지 낭비 신규 건물 금지
• 공장식 축산의 금지
• 생태 파괴적 기술의 금지

우리나라에는 아직 탄소세가 없지만 ‘교통·에너지·환경세’라는 세금이 있다. 2020년 기준으로 세수가 13조 9000억 원으로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많이 걷히는 세목이다. 하지만 재원의 80퍼센트는 도로, 철도 등 교통 시설 특별 회계로 사용되어야 하는 목적세다. 교통 인프라 확충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황에서 세수 상당 부분이 예치금으로 남아 있다. 이제 교통·에너지·환경세를 보내고 탄소세로 바꿔야 할 때다. 교통·에너지·환경세는 유류 1리터당 종량세로 부과하지만, 탄소세는 이산화탄소 환산량 (carbon dioxide equivalent[7])에 대해 부과한다.

탄소세의 장점은 온실가스가 배출되는 모든 지점, 에너지 채굴, 산업 생산, 운송, 유통, 소비, 폐기물 처분의 모든 과정이 과세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탄소세는 탄소세로 인해 가격이 높아진 상품의 시장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최종적으로는 시장에서 몰아내기 위한 ‘교정 과세(corrective tax)’다. 단점은 배출권 거래제에 비해 탄소 배출 총량에 대한 규제 기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탄소세율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와 연동하여 탄력적으로 조정해야 하며. 전년도 감축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세율을 대폭 올리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한다. 이때 배당이 동반되어야 실행이 가능하다는 점을 한 번 더 강조한다. 탄소세를 위해 배당이 있는 것이지, 배당을 위해서 탄소세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탄소세는 찬성하지만 배당은 반대?

앞에서 탄소세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났다면 이번에는 탄소세를 찬성하는 사람들을 만날 차례다. 탄소세는 좋은데 배당은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탄소세를 통해서 걷은 세금을 재생 에너지나 그린 리모델링 즉 친환경 주택 개량 등에 투자하자는 것이다. 유럽 녹색당에서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이런 입장을 취한다. 탄소세를 재원으로 한 생태배당이 ‘기본소득 방식’으로 지급된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기본소득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거칠게 말해 기본소득을 반대한다 해도 생태배당까지 반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설명한 이유로 인해서 배당이 없는 방식으로는 탄소세를 획기적으로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제적 약자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이다. 배당과 결합하지 않은 탄소세는 서민층을 녹색 전환의 반대자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 결과 유럽 일부에서 볼 수 있듯이 녹색당이 중산층의 정당으로 변모할 위험성이 있다. 녹색당은 ‘지구만 걱정하고 서민은 걱정하지 않는’ 정당처럼 비치게 되는 것이다.

탄소세 세수를 배당이 아닌 녹색 전환 기금으로 쓰면 어떨까? 모두를 위한 녹색 전환에 따르는 비용을 저소득층이 상대적으로 더 과중하게 부담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숫자로 예를 들면 100만 원 버는 사람이 3만 원을 탄소세로 추가 부담하게 되었고 1000만 원 버는 사람이 20만 원을 탄소세로 추가 부담하게 되었다 할 때, ‘세액’으로는 부자가 탄소세를 더 많이 냈지만 소득 대비 전자는 3퍼센트, 후자는 2퍼센트의 탄소세를 낸 것이다. 그 얘기는 녹색 전환을 위한 세금이 부자에게 세율이 높은 누진세가 되기는커녕 가난한 자의 ‘세율’이 높은 역진세로 편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탄소세의 재원을 가지고 녹색 전환 비용으로 쓰자는 주장은, 결국 지구를 지키기 위해 가난한 사람의 고혈을 더 짜야 한다는 말과 같다.

기후 위기 시대에 녹색 전환 기금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탄소세 같은 목적세가 아니고 일반 재정에서 나와야 한다. 일반 재정의 가장 큰 세원은 우리나라 기준에 서 소득세와 법인세인데, 이 둘은 누진세다.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누진세로 걷어서 지구와 뭇 생명을 위한 일에 써야 하는 것이다. 헌법에 기후 정의를 명시하고, 기후 정의를 위한 법을 제정하여 재정의 특정 비율을 녹색 전환에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반대로 역진세로 걷은 탄소세는 배당을 해야 역진성이 없어지고 지속 가능한 목적세로 기능하게 된다. 물론 전액을 다 배당하지 않고 스위스처럼 일부는 녹색 전환 기금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스위스는 세수의 삼분의 일은 건물과 주택의 개량 사업에 사용한다. 탄소세의 목표가 무엇인지 국민에게 시그널을 주기 위해 세수의 일부는 그렇게 설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수는 배당으로 쓰여야 한다. 그것이 훨씬 중요한 시그널이다. 탄소세는 경제적 약자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시그널 말이다. 탄소세는 탄소 배출이 줄지 않는 한 계속 올라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본소득과 생태배당, 토지배당 등 성격이 다른 제도를 한데 섞어 기본소득의 전체 지급액을 표시하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기본소득은 늘어날수록 좋은 것이지만, 탄소세 생태배당과 토지 보유세 토지배당은 줄어들수록 좋은 것이다. 특히 생태배당은 없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셋을 섞어서 표현하면 액수를 키워 보일 순 있겠지만 국민에게 나쁜 시그널을 주게 된다. 현금 수급액을 늘리기 위해서 탄소를 더 배출하거나 부동산 투기가 더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니겠는가?

 

노동주의의 종언과 기본소득


19세기에 자본주의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이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대안으로 여겨졌다. 제정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혁명적 해석을 기초로 1917년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한때 기세를 올렸던 소련 중심의 세계 사회주의 체제는 1991년에 몰락했고, 더 이상 바람직한 사회 대안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서유럽의 사회주의는 소련 체제와 구별하여 ‘사회 민주주의’ 혹은 ‘민주 사회주의’ 등으로 불렸는데, 20세기 노동자의 삶을 크게 개선했지만 20세기 말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Tony Blair)와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der)의 ‘제3의 길’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부속물로 전락했다.

근대 문명의 쌍생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당, 노동당, 사회민주당 등의 이름을 가진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 정당은 원래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당이었다. 하지만 생산 구조가 변화하면서 비정규직, 계약직, 임시직, 파견직, 파트타이머가 양산되고 내부에서는 실업자, 외부로부터는 이주자들이 급증하면서 이 당들이 대변하는 노동자들은 점점 노동자 계급의 일부가 되어갔다.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은 사회 체제 내에서 중간층을 형성하게 되고 그 아래에 위에 언급한 광범위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층이 존재하는 구조가 되었다.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의 뜻을 가진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 (proletariat)’의 합성어로서 1980년대 프랑스 사회학자들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가이 스탠딩이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이란 책을 쓰고 나서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노동자 계급은 이제 안정적 화이트칼라인 ‘샐러리아트(salary+proletariat)’, 또한 전문 기술자 집단에 해당하는 ‘프로피시언(professional+technician)’, 전통적 육체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그 아래에 프레카리아트가 존재하는 중층적 구조로 변모했다. 원래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이었던 사회 민주주의 정당들은 여기서 프레카리아트를 중심으로 하는 ‘더 낮은 곳’으로 전환하지 않고 그 위에 있는 샐러리아트와 프로피시언을 포섭하는 전략으로 이행했다. 바로 그것이 ‘제3의 길’의 본질이었다. 사회 민주주의 정당이 이처럼 중산층 정당으로 변모하자, 프레카리아트는 자신을 대변할 정치 세력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적, 배외주의적 극우 정당들에 포섭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영국의 영국독립당, 프랑스의 국민전선,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오스트리아 자유당,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그리스의 ‘황금새벽당’ 등 각국의 극우 정당은 유럽 정치의 상수가 되었다.

사회 민주주의 정당들은 왜 프레카리아트 쪽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고소득 노동자 쪽으로 이동한 것일까? 원인을 한두 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사유 구조 하나를 들면 개인적으로는 ‘노동주의’를 꼽는다. 마르크스 이론에 따르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노동자의 ‘살아있는 노동’이다. 물론 원자재나 기계 같은 생산 수단도 상품의 가치에 기여한다. 하지만 생산 수단에서 상품으로 넘어가는 가치는 ‘이전’되는 것이지 창조되거나 증식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 생산 수단은 과거의 살아있는 노동이 체현된 것, 즉 ‘죽은 노동’이다. 결국 환원해 보면 모든 가치의 연원은 노동이며, 노동으로 환원되지 않는 ‘최초의 자본 축적’은 인클로저와 같은 폭력적 수탈로 이루어졌다.

노동이 가치의 유일 원천이며 최초로 존재한 자본은 폭력으로 생겼다면 자본가 ‘계급’은 존재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레닌주의는 그것을 직접 실행했다. 서유럽의 사회 민주주의는 그걸 말하기는 하되 실천으로서는 유예했다. 노동자의 분배 몫이 더 커져야 한다는 이론적 명분으로 ‘노동가치설’을 활용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둘은 달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노동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은 곧 생산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이며, 비생산적인 것, 즉 노동 과정에 투입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생적’인 것이 된다. 가치 및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은 ‘생산적 노동’이고 돌봄이나 가사 노동은 ‘비생산적’ 노동이 된다. 화이트칼라 샐러리아트는 생산적 노동자인 반면, 프레카리아트인 실업자는 자본주의 축적 과정의 폐인, 즉 ‘산업예비군’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사회의 ‘공동의 부’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기본소득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

노동을 가치의 유일 원천으로 보는 생각은 인간 중심주의로도 설명된다. 카를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한 과정이다.”[8] 인간 중심주의에서 자연은 인간의 물질대사의 대상에 불과하다. 자연은 인간 노동의 가공 대상이다.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군데군데 생태적 통찰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주요한 요소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모두 인간 노동을 찬양했다.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가 근면한 노동의 결과라고 정당화했고, 공산주의는 근면한 노동자에게 ‘노동 영웅’ 칭호를 주었다. 생산력 향상을 위한 체제 경쟁에서 자연 파괴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공산주의에서 대규모적 생태 파괴가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앙드레 고르츠는 지구의 균형은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동시에 ‘탈성장’의 개념을 수용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들도 공박했다. “성장 없는 평등에 관한 고민을 거부하는 급진론자들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연장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고르츠는 일갈했다. 유럽에서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생산주의의 기조 아래 ‘성장 동맹’의 파트너로서 성장의 몫을 누가 더 많이 가져갈 것인가를 둘러싸고 분쟁했을 뿐이다. 유럽의 사회주의자에게 분배 개선이란 ‘노동의 몫’을 늘리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에서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를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로 그렸다. 사회주의자에게 분배의 권리는 노동에서 나온다. 이런 생각은 노동과 무관하게 모두가 모두의 몫을 분배받을 권리가 있다는 기본소득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 기본소득은 노동과 소득, 생산과 소득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본다.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공산주의도 유럽 사회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노동은 권리로 선언되었지만 그 이전에 의무였다. 열심히 노동하는 것이 사회주의 인민의 고결한 책무였다.

“스스로 선택한 유익하고 사회적인 활동 분야에서의 양심적인 노동과 노동 규율의 엄수는 노동 능력을 가진 개개의 소련 시민의 의무이고 명예이다. 사회적으로 유익한 노동의 기피는 사회주의 사회의 원칙과 상용되지 아니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헌법 제60조

‘더 많이 노동하고 더 많이 생산하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성장주의 근대 문명의 쌍생아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인간의 자연 지배를 정당화했던 이성 중심적, 인간 중심적 사고를 극복해야 기후 위기 시대를 이겨낼 수 있다.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로서 상호관계를 맺는 한 요소에 불과하다.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가치를 만든다는 ‘가치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동만이 아니라 자연이 만드는 부, 인간의 관계와 협동이 만드는 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만드는 부, 커먼스의 지위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새로운 분배 원리로서 기본소득을 전면화하는 첫걸음이다.

이것은 노동에 따른 분배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노동의 몫을 늘리려는 싸움이 무의미하다는 뜻도 아니다. 노동조합 조직화가 필요 없다는 주장도 아니다. 이것을 포함하여 노동 운동의 전략이 전환·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몫’을 늘리려는 싸움과 함께 ‘모두의 몫’을 늘리려는 싸움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노동 운동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노동 운동도 ‘모두의 몫’을 늘리려는 기본소득 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프레카리아트 확산에 대해 노동 운동은 프레카리아트의 ‘노동자성’을 인정받아 프롤레타리아트에 포함시키고 ‘노동 3권’을 따내며 사회 보험의 일원으로 포함하는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9] 물론 이 전략은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몫’은 끊임없이 감소하고 있다. 그것은 21세기 자본주의 경제가 확고하게 그러한 추세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재산생산과 사후적 해소
이것은 ‘지식재산생산(Intellectual Property Products·IPP)’이 늘어남에 따라 노동소득분배율(Labor Share·LS)[10]이 얼마나 떨어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그래프다. 이 그래프는 지식재산생산을 제외한 전통적인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등에서의 노동소득분배율 추이인데, 지난 60여 년간 미세하게 떨어지고 있다. 즉 전통적인 산업에서의 노동소득분배율은 큰 변동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식재산생산을 포함한 노동소득분배율 추이를 보여주는 ‘총합(Aggregate)’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지식재산생산만의 노동소득분배율을 표시한 것이 아니라 지식재산생산과 전통 부문을 합친 값인데도 하락이 가파르니, 지식재산생산만을 표시한다면 더 급격한 감소 추세를 보일 것이다.

플랫폼 등 지식재산생산은 전통적인 업종에 비해 투자된 자본이 노동을 대체하는 효과가 훨씬 크다. 따라서 지식재산생산에 종사하는 개별 노동자의 임금이 높다 하더라도 전 사회적인 노동 소득의 비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 개념을 중심으로 한 분배 정의 구현 시도가 계속 실패하는 이유는, 피케티가 말했듯 자본 소득의 증식이 노동 소득을 항상 추월하거니와 국민 총소득 내에서 노동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산업의 구조적 변화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에 대해서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보고서[11]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유형 자본(기계류)이 1퍼센트 증가하면 노동소득분배율은 0.13퍼센트포인트 상승하지만, 지식자본(소프트웨어)이 1퍼센트 증가하면 노동소득분배율이 0.01퍼센트포인트 하락하는 것으로 추정됨 ...... AI, 빅데이터 활용, IoT 등 무형 자본의 발달로 나타나는 최근의 기술 개발은 향후 노동 소득분배율의 하락 ...... 요인이 될 가능성 ...... 이 과정에서 예상되는 자본 소득과 노동 소득 간의 격차는 사후적으로 해소할 필요”

여기서 “사후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으로 자본 소득에 과세하여 기본소득으로 분배하는 것이 가장 유력함은 앞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지식생산 업종 내의 노동자가 노동의 몫을 개선하는 임금 투쟁을 벌이더라도 전 사회적인 격차를 해소하긴 어렵다. 개별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더라도 지식 자본의 고용 효과가 전통적 자본에 비해 작기 때문에 자본 소득의 증가율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 자본의 수익에 과세하고 기본소득을 지급하여 ‘모두의 몫’을 늘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점점 줄어드는 ‘노동의 몫’을 상쇄할 방법이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본소득이 분배 구조만을 건드릴 뿐 생산 구조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두 가지 점에서 틀렸다. 지식 자본이 엄청난 이익을 거두는 것은 인류 ‘공동의 부’인 빅데이터의 독점적 활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이것은 생산 과정에서의 ‘착취(exploitation)’가 아니고 ‘경제적 지대’ 수익이다. 시장에서 발생하는 지대 수익의 재분배를 꾀하는 것을 ‘분배 구조’를 건드리는 것이라 비판하고 생산 과정 내의 착취율 개선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경직이며 사회운동가로서 임무 방기다. 둘째로 기본소득은 공유지분권과 커먼스 기금을 통해 생산 구조의 전환을 이루려고 한다. 국유화만이 생산 구조의 전환이 아니다. 국유화가 곧 사회주의도 아닐 뿐만 아니라 기간산업 범위를 넘어선 국유화는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녹색 운동은 사회주의 정당들보다 더 성장의 물질적 한계를 인식하며, 만인의 완전 고용을 유의미한 사회적 목표로 보는 전통적 노동자주의보다 개방적으로 세상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녹색 운동은 만인의 진정한 자유를 원하며, 할 만한 일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여가 시간에 대한 주권을 더더욱 바란다. 기본소득의 도입은 경제 성장주의, 노동주의, 생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다는 점에서 생태적 전환에 친화적이다. 기본소득은 녹색 운동이 원하는 자유와 시간 주권을 늘려 줄 것이다. 버니 샌더스를 위시한 미국의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최근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지칭하고 있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연방 일자리 보장’은 사회주의의 전통적 개념에 따르면 ‘임금 노예’를 창출하는 계획이다. 실업이 만연하는 세상에 일자리의 중요성을 부정하고자 함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이상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인플레이션을 부를까


기본소득을 주면 인플레이션이 오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쉽게 말해 이것은 ‘도루묵’ 논리다. 기본소득을 받아 구매력이 커지면 당장은 좋겠지만 물가 상승 압력이 생기게 되고, 총수요의 증가는 가격에 다 반영되어 버리므로 결국 실질 구매력은 원래 상태로 복귀하게 된다는 얘기다. 다수의 소득이 증가하면 구매력이 커지고 이렇게 총수요 증가로 인해 물가가 오르는 경험은 많은 사람에게 친숙하다. 예컨대 최저 임금이 오르니까 밥값이 오른다는 경험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착시일 수 있다. 최저 임금은 지속적으로 올랐다. 그런데 최저 임금이 오를 때마다 밥값이 계속 올랐는가? 꼭 그렇진 않다. 더 중요한 것은 물가는 밥값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저 임금이 올랐다고 기름값이나 아파트값이 올랐는가? 아니다. 오히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기름값이 폭등했다. 최저 임금은 약간밖에 오르지 않았는데 말이다.

보통 ‘생활 물가’에 속하는 식료품 가격은 다른 품목에 비해서는 소비자의 처분가능소득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소비자 물가지수는 509개 품목을 대상으로 하지만, 생활 물가지수는 154개의 기본 생필품을 대상으로 할 뿐이다. 생활 물가지수와 소비자 물가지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생활 물가지수라 해도 처분가능소득과 같은 수요 요인보다 글로벌 공급망 차질이나 국내 생산 격감 같은 공급 요인에 더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즉, 비용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최저 임금 때문에 물가가 올랐다는 말을 많이 한다면 그것은 최저 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여론에 영향을 미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기본소득을 주면 물가가 오를 것이라는 말도 비슷한 정치적 동학이 작용한다. 총수요의 증가가 물가 상승의 원인이 될 때, 경제학 교과서는 그것을 ‘수요견인(demand-pull) 인플레이션’이라 부른다. 하지만 수요견인 인플레이션은 단기 인플레이션이다.

기본소득의 재원이 조세 수입에 의한 것이라면 경제 내의 통화량에는 변동이 없다. 기본소득은 고소득자로부터 저소득자에게로 화폐의 분포 상태를 바꿀 뿐이다. 그 결과 저소득층과 중간층이 주로 소비하는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일시적으로 오를 것이다. 하지만 가격이 오르면 해당 상품의 공급이 증가하고 가격은 조정된다. 대신 부자들이 쓰는 사치품과 지위재의 수요는 감소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건전한 방향으로 경제의 체질을 바꿀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세를 재원으로 한 기본소득은 한 국가 내의 상품별 공급과 수요의 변동을 초래할 뿐이며 전체 물가를 지속적으로 상승시킬 수 없다.

인플레이션의 원인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는 이론은 없다. 하지만 물가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경제 현상이 화폐 공급의 증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 거래액도 커지고 따라서 거래를 매개하는 화폐 공급량도 늘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평균 물가상승률과 평균 통화량 증가율 사이에는 뚜렷한 양의 상관관계가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밀턴 프리드먼은 이를 압축해서 표현했다.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

기본소득의 재원이 화폐 공급량을 늘리는 것에서 온다면 이러한 기본소득은 인플레이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아니 거꾸로 인플레이션을 만들기 위해 화폐 발행에 의한 기본소득 제도를 시행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코로나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 전 세계의 많은 경제학자는 고의로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기 회복을 위해 각국 정부는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라 불리는 통화 공급 정책을 사용했는데 그 결과 주식 등 자산 시장만 폭발했을 뿐 실물 경제는 여전히 디플레이션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양적 완화가 아니라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낫다는 견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코로나 이후 각국 정부는 엄청난 규모의 국채를 발행하여 화폐량을 늘리고 국민에게 직접 재난지원금을 지급했는데, 그 결과 많은 나라들이 인플레이션으로 돌아섰다. 이 형태의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후술하겠다.

마지막으로 기본소득 시행으로 부자가 조금 덜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이 조금 더 살만해지면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가난한 사람이 더 어려워진다는 주장이 정말 사실이라면, 이 체제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뒤집으면 인플레이션이란 재앙을 막으려면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게 살아야 하고 부자는 계속 부를 세습해야 한다는 말 아닌가? 결국 ‘기본소득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며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게 ‘현 체제는 불의의 체제’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조세 외의 재원 조달 시나리오


2장에서 우리는 증세 혹은 감세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세금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 이에 따라 조세 수입을 근거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지속성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조세 수입에 더하여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에 대한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다.

먼저 기초자산제 논의에서 다루었던 ‘공유지분권’이다. 특히 에너지 전환과 디지털 전환 등 생산 구조의 격변에 즈음하여 대규모 국가 재정 투자가 필요한 이 시점에서 공유지분권 논의를 널리 확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 하나는 앞 장에서 자세히 다루었던 ‘커먼스 기금’이다. 커먼스 활용에서 나온 수익에 부담금을 물려서 그것을 기금화하고 그 기금 운용에서 나온 수익을 배당 재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절박한 기후 위기 대응 차원에서도, 빅데이터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현실 속에서도, 세대 간 평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이 방안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마지막으로 바로 앞에서 말한 인플레이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방안이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활용해 화폐 발행을 늘리고 그것을 재원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냥 들어서는 다소 놀랄만한 말이다. 이 방안을 설명하려면 짚어야 할 몇 가지 일들이 있다.

위기의 2008년과 양적 완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경기 침체가 지속되자 미국 등 선진국은 정책금리를 계속 내려 경기 활성화를 도모했다. 전통적인 통화 정책의 상식에 따르면 금리를 내리면 통화량이 증가하여 경기가 부양되고, 금리를 올리면 통화량이 감소하여 경기 안정을 꾀하게 된다. 그런데 금리를 내리고 내려 금리가 0퍼센트가 되었는데도 경기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디플레이션 위기가 계속됐다. 금리를 0보다 아래로 내릴 방법은 없으므로 전통적인 통화 정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미국 등 선진국은 2001년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의 경기 침체를 타개하고자 실시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라는 비전통적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양적 완화는 중앙은행이 국채, 지방채, 주택담보부증권(MBS), 심지어 회사채에 이르기까지 금융 기관이 보유한 자산을 거대한 규모로 매입하여 금융 기관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정책이다. 미국은 양적 완화를 총 4회 실시했는데, 양적 완화 이전 중앙은행의 자산 보유액은 7000~8000억 달러 정도였지만 3차 양적 완화가 끝나는 2014년 10월경 그 규모가 4조 5000억 달러에 달했다. 1~3회 동안 한화로 4000조 원이 넘는 양적 완화가 단행된 것이다. 4차는 코로나 사태 이후였다.

양적 완화가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는 논쟁적이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의 디플레이션 수렁을 벗어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하지만 그 부정적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실제로 시중에 투입된 자금은 기업의 투자와 가계의 소득 증가에 기여하지 못하고 대부분 증권과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됐다. 이는 주가와 부동산 가격을 급등시켰다. 자산 보유자와 미보유자 사이의 소득 불평등도 극적으로 커졌다. 2012년 영국 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양적 완화로 인한 이익의 40퍼센트를 상위 5퍼센트가 독식했다. 한편 양적 완화는 기후 위기에도 일조했다. 유럽 중앙은행과 스위스 국립 은행 등은 특히 회사채 구매를 많이 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공해 기업에 보조금을 준 셈이다.

양적 완화의 대안

양적 완화가 결과적으로 투기 수요만을 자극해 자산·소득 불평등을 더 강화하는 결과를 빚자, 중앙은행이 민간 은행 등 금융 기관에 화폐를 공급하는 양적 완화 방식이 아닌 다른 대안들이 제시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2015년 영국 노동당 좌파의 지도자인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이 주장한 ‘인민의 양적 완화(People’s Quantitative Easing)’다.

인민의 양적 완화는 간단히 말해 중앙은행이 민간 금융 기관이 보유한 자산을 매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영 투자 은행(National Investment Bank)’이 발행한 채권을 매입함으로써 정부에 화폐를 공급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 돈을 공공 주택과 대중교통, 첨단 산업에 투자하여 일반 국민의 생활을 향상한다. 국영 투자 은행을 거치긴 하지만 사실상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정부에 공급하는 이 계획은 유럽연합의 ‘리스본 조약’과의 충돌[12] 및 초(超)인플레이션 우려 등을 포함한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양적 완화는 뜻하지 않게 밀턴 프리드먼이 1969년에 주장한 ‘헬리콥터 머니(helicopter money)’를 대안으로서 소환했다. 중앙은행이 민간 은행의 자산을 구매해 화폐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찍어 민간인에게 직접 화폐를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식과 부동산 가격을 앙등시키는 것보다 일반 시민 수중에 돈이 직접 닿게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2015년 3월부터 유럽 중앙은행은 매달 800억 유로를 양적 완화에 썼는데 이것은 유로존 전체 인구인 3억 2500만 명에게 매달 246유로(33만 원)을 지급할 수 있는 돈이었다. 같은 돈을 쓸 것이라면 차라리 후자가 더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생긴 것이다.

일본의 경제학자 이노우에 도모히로는 헬리콥터 머니에서 더 나아가 화폐발행이익 즉 시뇨리지(seignorage) 개념을 연결해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제시했다.[13] 화폐발행이익이란 간단히 말해 화폐의 액면가와 화폐 생산 비용의 차익이다. 쉽게 말해 1만 원권 지폐를 한 장 찍어내는 데 약 300원이 들어간다면 시뇨리지는 9700원이다. 과거에 귀금속 주화가 존재하던 시절에 봉건 영주들은 금화 혹은 은화의 금・은 함유량을 떨어뜨려 멋대로 화폐발행이익을 늘리곤 했다. 시니어(seignior)는 봉건 영주를 뜻하는데 시뇨리지라는 말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정부가 화폐 발행권을 가지고 있다면 화폐발행이익을 무한히 누릴 수 있고 결국 기본소득의 재원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대중들의 인식과 달리 현실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정부의 화폐 발행권은 극히 미미하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를 ‘본원 통화’라고 부르는데, 시장에 유통되는 화폐의 대부분은 이 본원 통화가 아니라 민간 상업 은행이 창조해 낸 ‘파생 통화’다. 2020년도 말 기준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본원 통화는 205조 원인데 반해, 총통화(M2)는 3199조 원에 달한다. 유통되는 화폐의 93.6퍼센트가 파생 통화인 것이다. 고객 예금의 전액이 아니라 일부만을 예치해도 되는 ‘부분 지급 준비’ 제도 아래에서 은행은 연쇄적인 대출을 통해서 화폐를 창조해 낸다. 결국 화폐량을 결정하는 것은 정부도 중앙은행도 아닌 민간 영리 은행 등 금융 기관의 권력인 것이다.

화폐 공급이 대출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화폐 창조 과정 자체가 은행의 이자 장사다. 은행은 연간 수십조 원의 이자를 수취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심지어 정부조차도 이자를 내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한다. 그것이 정부의 국채 발행이다. 돈은 곧 빚이다. 우리가 빚을 져야 화폐가 공급된다. 화폐가 창조될 때마다 은행이 돈을 버니 국민 경제는 통화 팽창의 악령에 시달리게 된다. 1991년 이래 통화(M1, 현금 통화와 예금 통화를 합친 협의 통화)는 IMF 위기 때인 1998년과 세계 금융 위기가 시작된 2007년을 제외하고는 항상 늘어났다. 단적으로 2020년에만 25.7퍼센트가 늘어났다. 인플레이션은 최저 임금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금융 기관이 만들어 낸 것이다.

사실 정부의 적자 재정과 국채 발행은 현재의 화폐 제도 하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메꾸는 정도가 아니라 필수적인 일이다. 민간 은행의 신용 창조는 절대적 한계가 있다. 파생 통화는 본원 통화를 기초로 뻥튀기하는 것이므로, 본원 통화가 늘어나지 않으면 파생 통화도 늘어날 수가 없다. 한국은행은 자산을 매입하여 시장에 본원 통화를 공급하는데, 그 자산이 국채다. 국채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한국은행도 본원 통화를 공급할 길이 없다. 즉, 정부가 국채를 지속적으로 발행해야, 즉 빚을 꾸준히 져야 시장에 본원 통화를 공급할 수 있다. 거꾸로 정부가 흑자 재정을 꾸리면 화폐가 마르게 된다. 결국 정부 부채가 늘어나는 것은 현행 화폐 제도의 필연적 결과다.

사태가 이러하니, 민간 은행의 신용 창조를 중심으로 한 현행 화폐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주권 화폐(sovereign money)’ 제도다. 부분 지급 준비금 제도는 민간 은행의 화폐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므로 ‘전액 준비 제도(full reserve banking)’로 돌아가 본원 화폐량 이상의 대출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부가 ‘통화 권력’을 되찾아 근대 이전 체제와 같이 법정 통화를 공급함으로써 국민 경제의 통화량을 조절한다. 민간 은행의 기능은 화폐 공급과 화폐 수요의 매개자 구실을 하는 것으로 축소되고 민간 은행의 화폐 창조 권력은 사라진다. 화폐는 더 이상 빚이 아니게 되고(debt-free) 이자도 붙지 않게(interest-free) 된다.

주권화폐와 기본소득

이렇게 정부가 화폐 주권을 되찾아 오게 되면 화폐발행이익도 정부, 즉 국민에게 돌아오게 된다. 화폐가 공공의 것임을 고려하면 화폐발행이익도 당연히 사회 공동체 모두에게 속하는 공공의 부, 즉 커먼스이다. 하지만 민간 은행 중심의 화폐 제도 아래에서 화폐발행이익은 공공에 귀속되지 못하고 민간 상업 은행의 이자 수익으로 귀착되고 만다. 주권 화폐 제도가 도입된다면 정부가 화폐발행이익을 활용하여 재정 지출과 복지 정책, 그리고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권 화폐 제도를 통해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주장은 20세기 초 영국의 클리퍼드 더글러스(C. H. Douglas)가 ‘국민배당(national dividend)’이란 이름으로 최초로 주장[14]한 바 있다.

이노우에 도모히로는 꼭 주권 화폐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양적 완화의 폐해를 극복하고 중앙은행의 화폐 발행 권력을 활용하여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노우에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중앙은행이 민간 은행에 화폐를 공급하고 다시 민간 은행이 국채를 사서 정부에 화폐를 공급하는데,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어차피 중앙은행의 본원 화폐가 우회해서 정부로 들어가는데, 그냥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여 중앙은행에 바로 팔면 되지 않을까?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정부의 국채를 바로 사는, 이노우에가 ‘직접적 재정 파이낸스’라 말하는 이 방법은 ‘부채의 화폐화(debt monetization)’라고 부른다. 물론 이 방법은 일본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노우에는 현행 화폐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이 방법을 쓰면 되고, 바꾼다면 주권 화폐 제도로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부채의 화폐화건 주권 화폐 제도건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돈을 찍어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생각은 당연히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낳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1930년대 일본의 대장성(大蔵省)의 재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정부가 국채를 중앙은행에 바로 매각하여 화폐를 조달하는 방법으로 대공황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지만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긴축으로 방향을 선회하자 군비 확장을 위해 지속적인 통화 확장을 원했던 군부에 의해 암살됐다. 세금을 걷지 않아도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해 손쉽게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쓰디쓴 유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노우에의 대안은 ‘2층 구조 기본소득’이다. 그는 세금을 재원으로 하는 기본소득을 ‘고정 기본소득’, 국채 직발행이나 화폐발행이익을 재원으로 하는 기본소득을 ‘변동 기본소득’이라고 부르고 고정 기본소득과 변동 기본소득이 복합된 기본소득 제도를 제안한다. 다시 말하면 조세형과 화폐형의 통합형 기본소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변동 기본소득은 물가 변동에 연동한다. 실제 물가상승률이 목표 물가상승률(예컨대 3퍼센트)보다 낮으면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 액수를 늘리거나 법정 화폐 발행량을 늘린다. 실제 물가상승률이 목표 물가상승률을 상회하면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 액수를 줄이거나 법정 화폐 발행량을 줄인다.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쓰기로 되어 있는 국채 직매입액 혹은 화폐 발행량은 일반 재정에 섞이지 않게 하고 n분의 1의 기본소득으로 지급되도록 법으로 규정한다.

디플레이션 위협일 때는 기본소득 액수를 늘리고 인플레이션 위협일 때는 기본소득 액수를 줄인다는 이런 계획을, 가이 스탠딩은 ‘안정화 급여(stabilization grant)’라 일컬은 바 있다. 그는 저서에서 “단순한 기본소득은 경제적 자동 안정장치의 하나가 될 텐데, 불경기에 구매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층화된 체계를 만들자고 별도로 제안한 바 있다. 많지 않은 액수로 정해진 기본소득 위에 ‘안정화’ 요소를 더하자는 것이었다.”[15]라고 말한다. 기본소득은 경기 변동을 안정화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적시에 현금을 지급한다는 점에서, 프로그램 준비와 절차 때문에 정책 시차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일자리보장에 비해 뚜렷하게 우월한 정책 효과를 가질 것이다.

이노우에 도모히로의 안은 가이 스탠딩의 ‘안정화 급여’ 아이디어에 헬리콥터 머니와 화폐발행이익이라는 옷을 입힌 셈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부당한 정치적 요구에 중앙은행이 휘둘릴 가능성은 없는가? 이노우에의 생각에 따르면 국채의 직매입 액수 혹은 화폐 발행량은 철저히 중앙은행이 자체 기준에 의해 결정한다. 결국 변동 기본소득의 액수도 중앙은행의 결정에 따라서 정해지게 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확실히 지켜야 한다. 조세형 기본소득은 경기에 따라 세수가 달라지기 때문에 기본소득 재원도 불안정해질 수 있는 반면에, 화폐형 기본소득은 경기에 ‘역행적’으로 움직이면서 기본소득의 지속 가능성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물론 화폐형 기본소득이 가지고 있는 위험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화폐 발행으로 손쉽게 재원을 조달할 수 있게 되면, ‘조세 저항’ 등으로 시행이 쉽지 않은 조세형 기본소득의 동력이 약화할 가능성이 크다. 조세형 기본소득이 후퇴한다는 것은 결국 소득 재분배라는 중요한 정책이 후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유지분권이나 커먼스 펀드 등 소유 구조 개혁을 동반하는 기본소득도 뒤로 미뤄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기본소득의 중요한 장점 몇 개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재원의 안정적 확보와 지급액의 중장기적 상향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화폐발행이익으로 얼마만큼의 기본소득 액수를 지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주권 화폐 제도를 도입했을 때 기본소득의 지급액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추정한 연구가 없진 않지만, 그것은 일련의 단순한 가정 아래 계산된 것이며 화폐 제도의 전면적 혹은 부분적 개혁이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화폐 발행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방안 자체가 경기 조절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재원과 함께 하지 않으면 독자적인 효능을 발휘하기 힘들다고 본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1]
André Gorz, 《Ecology As Politics》, South End Press, 1979., pp.14.
[2]
André Gorz, 《Ecology As Politics》, South End Press, 1979., pp.13.
[3]
탄소발자국은 개인 또는 단체가 직·간접적으로 발생시키는 온실 기체의 총량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이들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연료, 전기, 용품 등이 모두 포함된다. 비슷한 개념으로 개인 및 단체의 생활을 위해 소비되는 토지의 총 면적을 계산하는 '생태발자국'이 있다.
위키백과
[4]
제이슨 히켈(김현우, 민정희 譯), 《적을수록 풍요롭다: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 창비, 2021.
[5]
George Akerlof et al.,〈Economists’ Statement on Carbon Dividends: Bipartisan agreement on how to combat climate change〉, 《월스트리트저널》, 2019.1.19.
[6]
이산화탄소를 탄소를 기준으로 환산한 톤을 의미한다. 이산화탄소가 배출될 때 얼마만큼의 탄소가 발생하는지를 의미하는 단위다.
[7]
이산화탄소 환산량은 여섯 개 온실가스의 배출량을 온실가스별 지구 온난화 기여도에 따라 이산화탄소 배출량 수치로 표현한 것이다.
[8]
카를 마르크스(강신준 譯), 《자본 I-1》, 길, 2008., 265쪽.
[9]
노동 운동 일부는 자산가들 일부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것에 혐오감을 표한다. 하지만 사회 보험을 비스마르크가 만들었단 사실은 잊은 것 같다. 주장하는 사람들의 재산 크기로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유아적이다. 오히려 새롭고 강력한 사회적 아이디어는 기존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로질러서 지지자를 얻는다. 그리고 그럴 때에만 비로소 진정한 ‘물질적 힘’을 얻는다. 기본소득은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고 앞으로 가는 것이다.
[10]
노동소득분배율은 국민 소득에서 노동자의 임금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노동 소득의 상대적 크기를 측정하기 위해 주로 인용된다.
[11]
오지윤·엄상민, <법인 노동 소득분배율의 추이 및 변화 요인 분석〉, 《KDI 경제전망》, 2019.11.13.
[12]
리스본 조약의 공식 명칭은 ‘EU조약 및 EC설립조약을 개정하는 리스본조약(Treaty of Lisbon amending the Treaty on European Union and the Treaty establishing the European Community)’으로 유럽 연합의 ‘미니 헌법’으로 불린다. 2009년 발효됐다. 이 법에 따르면 각국 중앙은행은 정부의 공공사업에 쓸 돈을 직접 발행할 수 없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독립성 훼손을 놓고 코빈의 인민의 양적 완화와 충돌이 있었다.
[13]
이노우에 도모히로(강남훈, 송주명, 안현효 譯), 《거품경제라도 괜찮아: 헬리콥터 머니와 기본소득》, 다돌책방, 2019.
[14]
클리포드 H. 더글러스(이승현 譯) 《사회신용: 왜 기본소득이 필요한가》, 역사비평사, 2016.
[15]
가이 스탠딩(안효상 譯), 《기본소득: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 창비, 2019.,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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