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101
10화

에필로그 ; 시간 주권을 되찾는 사회

경제학에는 ‘소득-여가 선택 모형’이란 것이 있다. 하루의 시간 중 얼마를 소득 활동 즉 노동에 투여하며, 얼마를 여가 시간에 할당할지에 관한 ‘합리적 선택’을 이론적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여가 시간만 누리면 소득이 0이 되고, 가용 시간 모두를 소득 활동에만 사용한다면 여가 시간이 없으니 시간당 임금과 삶의 만족을 고려하여 효용이 극대화될 수 있는 ‘최적’의 소득-여가의 조합을 찾을 수 있다는 전제가 담겨 있다. 요새 말로 하면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여가 시간도 좀 가지면서 ‘워라밸’의 삶을 누리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일견 합리적인 모형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이러한 주류 경제학의 태도는 매우 기만적이다. 노동자 개인의 효용이 극대화되도록 최적의 소득-여가 시간 조합을 찾는다? 그렇다면 C사의 ‘로켓배송’, S사의 ‘새벽배송’, M사의 ‘샛별배송’을 하는 노동자가 여가 시간을 없애는 것을 넘어서 수면 시간까지 줄여가며 새벽에 배송 노동을 하는 것은 그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인가? 새벽 배송을 하다가 심장 마비로 과로사하는 것은 그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인가?

여가(leisure)란 불가피하게 해야 하는 노동 시간의 ‘여집합’일 뿐이다. 노동 시간을 아무리 늘려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한 충분한 소득이 보장되지 않을 때, 여가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애초에 0으로 디폴트 세팅되어 있다. 이때 그가 누릴 수 있는 ‘시간 주권(time sovereignty)’은 없는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최적의 소득-여가 조합을 선택할 수 있는 함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까? 노동 시간과 여가 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시간 주권은 소득 격차의 직접적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보통 사람의 시간 주권을 늘리려면 소득 격차를 줄여야 한다.

CBS의 강연 프로그램 〈세바시〉 1352회에 출연했을 때였다. PD님이 속칭 ‘야마’를 잡기 위해서 기본소득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뭐라고 하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주저 없이 “기본소득은 시간 주권을 되찾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방송의 제목은 ‘시간의 빈부 격차를 해소하는 방법’이 되었다. 기본소득이 ‘실질적 자유’를 준다고 할 때 그것은 화폐의 구매력이 가져다주는 자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망으로서 무조건적 ‘소득 바닥’이 제공될 때 사람들은 진정으로 여가와 소득의 조합을 선택할 자유가 생긴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제대로 된 ‘소득-여가 모형’이 가동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이다.

시간 주권 문제는 젠더 평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구 단위로 지급되지 않고 개인 단위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아직 남성 비율이 높은 가구주에 대한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하고, 누군가의 아내 혹은 엄마로서의 증빙이 아니라 독립적인 인격 주체로서 사회에 등장할 수 있게 한다. 기본소득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지급되기 때문에 젠더 중립적(gender neutral)인 정책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젠더 불평등의 현실에서 ‘젠더 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권력 관계를 재편할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성별 분업으로 자신의 역사를 시작했다. 남성은 노동 시장에 참여하고 가족의 재생산은 여성에게 맡겨졌다. 사회는 남성 노동에 대해서만 대가를 지불하고 여성의 출산·육아·돌봄 즉 ‘재생산 노동(reproductive labor)’에 대해서는 보상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남성의 임금은 가족의 재생산 비용을 포함한 가족 임금이었고, 따라서 여성의 경제적 종속은 구조적으로 내장되어 있었다. 남성의 시간은 노동을 하는 사회적 시간과 노동을 쉬는 여가 시간으로 나뉘었지만 여성의 시간은 사회성이 전혀 없는 ‘사적’ 시간으로 치부되었다.

여성 운동의 발전으로 여성의 사회적 힘이 강화되고 전후 고도성장이 폭발적인 노동력 수요를 요구하면서 여성은 광범위하게 시장 노동에 진출하게 됐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진출에도 불구하고 성별 분업은 이중적 의미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가사·돌봄 사회서비스가 확장됐지만 가족이 떠안아야 하는 양육 책임은 여전히 여성에게 전가되었으며 성별 임금 격차도 엄존했다. 여성의 시간이 집 밖의 유급 노동과 집 안의 무급 노동의 ‘이중 노동’으로 구성되면서 여성은 더 극심한 시간 빈곤에 시달리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노동의 유연화를 추진하면서 남성의 전일제 노동과 여성의 시간제 노동이라는 구조를 정착시켰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서비스의 공공성 축소와 민영화 즉 상품화를 동반했는데, 이는 곧 여성이 가족 안에서 가사 및 돌봄 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함을 의미했다. 즉 재생산 노동의 재가족화다. 여성의 무급 가사 노동은 늘어나고 여성의 유급 시장 노동은 줄어야 했으므로 시간제로 특화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여성의 노동은 계층화되었다. 사회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전문직 고소득 여성과 사회서비스를 구매할 수 없는 보통 여성의 시간 주권은 극히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에 고도의 압축 성장을 하며 이러한 젠더 불평등의 과정이 짧은 시간에 드러났고 각 단계가 혼재해서 병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에 따라 여성의 시간 주권은 소수 전문직 여성을 제외하고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동시에 엄마, 아빠와 자녀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가족 구조는 이미 해체되고 있다. 성별 분업과 노동 시장의 젠더 불평등, 여성의 ‘이중 노동’을 정당화했던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현실 속에서 파산했다. 동시에 ‘동성 결혼’, ‘시민 결합(civil union)’, ‘생활 동반자 관계(domestic partnership)’, ‘공동체 가족’ 등 다양한 가족 구성권에 대한 요구가 확산하고 있다.

삶의 가치도 변했고 사람의 생각도 변했는데 젠더 불평등을 기초로 한 사회 경제 구조는 변화의 기미가 없다. 이런 극심한 부조화는 사상 초유의 ‘재생산 위기’로 표출되고 있다. 통계청(KOSIS)에 따르면 2020년 대한민국의 합계 출산율(Total Fertility Rate)은 0.837로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둘러싼 소위 전문가들의 대책과 사회 각계각층의 혐오와 배제의 언사는 차라리 이 문제를 외면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참혹하다. 가족 개념이 진일보하는 시대다. 어떻게 개인의 자율성을 증진하면서 전통적인 결혼 관계를 뛰어넘는 자기 통치권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고 젠더 정의를 획득하며 모두의 시간 주권을 늘릴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사회적 노동 시간이 단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 구성원 모두의 재생산 노동 참여를 위한 객관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다. 노동 시간 단축은 재생산 노동만이 아니라 생산 영역에서의 성차별과 불평등을 제거할 수 있는 조건도 제공한다. 이와 함께 무상 혹은 저가로 공급되는 양육, 돌봄의 공공 사회서비스가 확충되어야 한다. 공공 사회서비스의 확충은 가족이 부담해야 할 재생산 노동을 최소화하여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 기회를 넓힌다. 동시에 정부의 임금 지지 정책을 통해 서비스 노동 종사자의 저임금화도 방지할 수 있다. 서비스 노동은 주로 여성의 진출이 두드러진 곳인 만큼, 성별 임금 격차의 해소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의 도입이다. 시간 분배의 관점에서 보면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무조건적 시간 배당’이다. 기본소득이 제공하는 소득 바닥은 그 액수만큼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다른 일에 시간을 쓸 수 있게 한다. 아무리 공공 사회서비스가 늘어나도 가족이 해야 할 재생산 노동의 영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장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그동안 가사 노동에 종사하지 않던 가족 구성원이 가사 노동을 늘리는 방향으로 시간을 재분배할 가능성이 커진다. 노동과 연계된 현금 지급은 그 노동을 반드시 해야 지급되므로 저임금을 고착화하는 임금 보조금 구실밖에 못 하는 반면, 시장 노동과 무관하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노동자의 협상력을 키우고 저임금 일자리를 거부할 역량을 높인다. 이는 여성의 시장 노동의 가치를 높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기본소득의 지급이 도리어 여성을 노동 시장에서 이탈시키고 가사 노동 종사자로 복귀시키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 때문에 여성이 노동 시장에서 이탈하게 된다면 그것은 노동 시장 일반에서의 이탈이 아니라 기본소득이 대체하는 ‘저임금’ 노동 시장으로부터의 이탈이다. 다시 말해서 이 이탈은 오히려 여성에게 있어 시간 주권의 신장을 의미한다. 오히려 이탈한 부문의 임금이 상승하는 조건이 될 것이다. 이에 더해 기본소득의 지급은 가족 안에서 여성의 힘을 높일 것이며, 여성의 높아진 힘은 가사 노동의 보편화를 위한 큰 동력이 될 것이다.

기본소득은 다양한 가족 구성의 자유를 보장한다. 기본소득의 개별성 원칙은 이를 위해 결정적 구실을 할 것이다. 가구 단위와 부양가족 개념으로 설계되는 다른 복지 제도와 달리 개인 단위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가족 관계 입증도 서류 심사도 증빙도 필요 없다. 다양한 가족 구성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률 제정과 함께, 개인의 존엄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기본소득의 시행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안정된 여유를 누리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를 앞당길 것이다.

GDP로 측정되지 않는 활동,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일은 무가치하게 여겨진다. 고귀한 감성과 자유로운 상상력, 관습에의 도전과 맑은 마음은 비생산적 시간으로 무시되고 삭제된다. 이 참혹한 현대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우리 모두의 약속이다. 시간의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공동의 시간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각오다.

미국의 소설가 에드워드 벨러미(Edward Bellamy)가 1887년에 쓴 유토피아 문학의 고전 《뒤돌아보며: 2000년에 1887년을》에서, 주인공은 1887년의 보스턴에서 잠이 들었다가 2000년의 보스턴에서 깨어난다. 눈 앞에 펼쳐진 유토피아 세상에 눈이 휘둥그레진 주인공은 2000년의 사람에게 묻는다.

“무슨 권리로 한 개인이 자기 몫을 주장합니까? 재화를 분배하는 근거는요?”
“인간성이죠. 자기 몫을 주장할 권리는 그 사람이 인간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인간이기 때문이라고요?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몫을 가져간다는 뜻입니까?”
“물론이죠.”
-《뒤돌아보며: 2000년에 1887년을》, 84쪽.[1]
[1]
에드워드 벨러미(김혜진 譯), 《뒤돌아보며: 2000년에 1887년을》, 아고라, 2014.,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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