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 주의보

2022년 열여섯 번째 프라임 레터

안녕하세요. 북저널리즘 신아람 디렉터입니다.

시작의 주간이었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입니다. 날씨도 좋았고, 상서로웠다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지금이 중세도 아니고, 이런 단어의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삐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해 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시작이 좋은 방향을 향하고 있기를, 그리고 5년 뒤 우리의 궤적이 옳고 현명했다고 평가할 수 있기를 말입니다.

취임식 이모저모가 생중계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취임사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죠. 사실, 대통령의 취임사는 언제나 분석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새 정부의 철학과 정책 방향을 대내외적으로 선언하는 연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윤석열 정부의 취임사에 쏠린 관심에는 ‘윤석열’이라는 정치인에 관한 관심도 섞여 있었습니다. 정치 입문 1년 만에 대통령이 된 윤 대통령에 대해, 우리는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의 첫 일성은 ‘자유’와 ‘반지성주의’였습니다.

‘자유’라는 단어는 사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내용입니다. 윤 대통령은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선택할 자유》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벌써부터 경제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새 정부의 기조는 규제 완화, 작은 정부라고 분석을 내놓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반지성주의’는 의외였습니다. 뜬금없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 예상을 뒤엎은 내용입니다.

사실, 대다수의 언론사는 엠바고가 걸린 취임사를 받기 직전까지는 ‘통합’이 주요한 키워드가 될 것으로 보고 관련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참모들이 작업했던 취임사 초안에는 ‘통합’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 든 윤 대통령이 직접 수정한 결과, ‘통합’이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반지성주의’라는 단어가 추가된 것입니다. 물론 윤 대통령은 ‘통합’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추후 단서를 달았습니다만, 그럼에도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통합’을 이야기하는 대신 ‘반지성주의’를 이야기한 대통령에게, ‘반지성주의’는 대체 무엇이며 누가 ‘반지성주의’를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반공하기 위해, 혐오하기 위해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가장 처음 사용한 것은 미국의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더입니다. 모두가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부정당했던 1960년대, 《미국의 반지성주의》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이들을 감시하고 색출, 탄압했던 매카시즘을 비판했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반공’이라는 가치 앞에 그 어떤 논리도, 지성도, 비판도 힘을 가질 수 없는 현실을 고발했습니다.

모두가 어떤 이념을 ‘믿도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포와 혐오가 섞여 만들어 낸 적대적인 기운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더 이상 그 어떤 의심도, 질문도 허용되지 않는 전체주의적 체제가 완성됩니다. 1960년대의 미국이 그러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지성은 의심과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두가 옳다고 믿고 있는 ‘진리’가 정말 옳은 것인지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이 이른바 ‘지성인’의 의무입니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진리를 만나기도 하고, 혁신의 씨앗이 되는 발견을 손에 쥐게 됩니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지성인의 역할은 의심하고 질문하여 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반공을 위해 설계된 사회에서는 그 어떤 의심도, 질문도 죄악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사람들, ‘지성인’에 대한 조직적인 무시가 팽배했습니다. 호프스태더는 바로 이러한 풍조를 지적했습니다. 전문가를 혐오하고 아마추어를 옹호하는 것, 쓸모를 모르겠다면서 순수과학을 멸시하는 것, 대학이나 연구소 등의 지적 독립성을 비난하는 것, 전위적 예술 사조를 무시하는 것, 과학보다 종교를 우위에 놓는 것 등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당시에는 국가를 위해, 체제를 지키기 위해 이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계속해서 믿기 위해 더 알기를 거부하는 행위, 혐오하기 위해 지성을 거부하는 행위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상황을 지난주에 마주했습니다. 위안부 피해 배상금을 ‘밀린 화대’에 빗대거나 “동성애는 정신병의 일종”이라는 글을 자신의 SNS에 개재했던 김성회 전 종교다문화비서관의 이야깁니다. 불행한 이야기입니다만, 우리 사회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신념’을 지켜나갈 수 있는 까닭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연구와 논리를 근거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해도 듣지 않습니다. 지성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자신이 믿어온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습니다.
 


반지성주의에 감염된 세계


‘사퇴’를 선택한 김성회 전 비서관은 자신의 SNS에 "정치인들은 국민을 분열시키지만, 언론인들은 국민의 생각을 왜곡시키고 저능아로 만든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언론인들이 국가를 망치는 제1주범이고 정치인들이 제2주범이라고 생각한다"고 일갈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퇴의 변은 아닙니다. 김 전 비서관과 아주 비슷한 결을 가진 정치인이 있습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반지성주의가 재조명받게 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열풍을 일으키면서입니다. 레거시 미디어를 ‘Fake News’로 규정했습니다. 언론이 국민을 속이고 있다고 선언한 것이죠. 전문가의 분석과 경고는 대중을 속이고자 하는 기득권의 목소리라며 비난했습니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어서는 안 되는지 확실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지지자들은 열광적으로 화답했습니다. ‘똑똑한 척하는’ 민주당이 집권하는 동안 러스트 벨트의 유권자들은 삶이 갈수록 힘들어진다고 느꼈습니다. 자신들을 향해 지구 온난화의 범인이라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손가락질하는 듯한 ‘먹물’들이 지긋지긋했습니다. 그들은 트럼프와 함께 ‘지성’ 앞에 선을 그었습니다.

이 골 깊은 선이 그어진 이유는 당연히도, ‘혐오’였습니다. 대중이 언론도, 전문가도 아닌 트럼프 전 대통령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해야 했던 이유는, ‘누가 적인가’를 정의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취임 초반까지는 미등록 외국인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멕시코와 접하고 있는 국경 지역에 들어선 ‘국경장벽’은 아직도 그 광풍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발병하자 그 대상은 ‘중국’으로 옮겨갔습니다. 현재의 역경이 외부의 적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논리는 참 달콤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원망하는 쪽이 훨씬 간편하고 마음 편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팬데믹 시기,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 지지자들 사이에 만연했던 반지성주의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브리핑에서 "살균제는 1분 안에 바이러스를 박멸할 수 있다면서 "몸 안으로 이렇게 주사하거나 세척하는 것 같은 방법은 없을까"라고 발언한 후 살균제나 표백제를 음용하는 사고가 급증했습니다. 또, 마스크의 효과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하면서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죠.

고베 여자대학의 우치다 다쓰루 명예교수는 저서 《반지성주의를 말하다》를 통해 “반지성주의를 움직이는 힘이 단순한 게으름이나 무지가 아니라 외곬의 지적 정열”로, “네가 동의하든 말든 내 말의 진리성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태도라고 말합니다. 즉, 맹목적인 믿음에 감염된 사람들의 열띤 고집 같은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인간의 믿음이 만들어내는 부작용입니다. 우리도 코로나19 시기, 뼈아프게 겪었습니다. 2020년 여름, 이런 메시지가 한참 돌았습니다.

“정부의 세균전-우파만 검사하고 무조건 확진 판정”

“사랑제일교회 성도들 중에서 보건소에서 양성 판정받은 사람들이 일반 병원에서는 전부 음성판정 받았다고 합니다. 언론에는 나오지도 않아요. 그리고 감염자들 대부분이 무증상이라고 합니다. 이게 뭘 뜻하는 지 아시나요? 검체가지고 장난한다는 말입니다.”
 

법과 상식, 과학과 권위 그 위에 이들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절대적이며 유일한 ‘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로 어떤 믿음은 신이 아니라 지상 위의 한낱 인간들에 의해 조작되고 조정됩니다.

그래서 정치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지지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열광적인 믿음은 정치를 독재의 나락으로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절박한 사람들이 믿음을 강요하고 신념을 주입하면 우리 사회는 지성을 오독하게 됩니다. 혹은, 지성을 취사선택하게 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부디, 절박한 정치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정과 팬심의 시대


그런데 팬데믹 시기에 반지성주의가 폭발했던 이유는 정치적 야욕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접하는 바이러스 앞에서 레거시 미디어와 전문가들이 다른 말, 틀린 말을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언론은 대중의 공포가 놓칠 수 없는 기회라는 점을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우리 앞에 닥친 미지의 감염병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속보]라는 머리말은 클릭을 부르는 보증수표가 되었습니다. 경쟁이 시작되었고, 팩트체크에 들이는 시간을 아껴 새로운 기사를 찍어내기 시작합니다. 같은 매체에서 한 두 시간 간격으로 상반된 ‘정보’들이 쏟아졌습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떠돌던 가짜뉴스보다 크게 나을 것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문가들도 스포트라이트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오늘 새로 나온 정보가 결정적인 신종 감염병 상황에서, 벌써 몇 년 전에 연구 활동은 그만두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교수들이 직함을 팔아 너나 할 것 없이 전문가 패널로 방송에 등장했습니다. 감염병이나 코로나19 관련해서 전문지식이 없어도, 직함이 그럴듯한 사람들은 방송국의 전화를 받고 마이크 앞에 앉았습니다. 결국,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다 달라집니다.

게다가 전문가의 직위라는 것에도 의문이 제기됩니다. 지난주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불거진 ‘딸 스펙문제’는 사실 낯선 장면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 지도층 자녀의 ‘스펙’이 부모의 권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불공정’하게 얻어진 것 아니냐는 논쟁을 셀 수 없이 반복해 왔습니다. 결론이 났든 나지 않았든, 그런 논쟁은 전문가 커뮤니티 전반에 대한 불신을 키웁니다. 이러한 불신은 앞으로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50대보다 40대가, 40대보다 2~30대가 ‘지성’이 갖는 권위를 더욱 인정할 수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대중은 지성인이 아니라 ‘전달자’에 열광합니다. 정보와 지식을 찾고자 할 때 우리는 화자의 화려한 스펙에 기대지 않습니다. 내용을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얼마나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기술을 가졌는지를 봅니다. 즉, ‘가상화폐’에 대해 알고자 할 때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슈카월드’ 채널을 봅니다. 조선 건국에 대해 궁금할 때는 원로 사학자의 두꺼운 책이 아니라 큰별쌤의 강의 클립을 찾아 듣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한 전달자에 ‘좋아요’를 누르며 ‘스타 전달자’를 탄생시키는 구조입니다.
 

이런 현상도 ‘반지성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렸습니다. 이쯤 되면 ‘지성’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느냐는 질문에 할 말이 없어집니다. 결국 존경의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고 인정과 팬심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어쩌면 반지성주의는 이제 그 용어의 성립조차 의심해 봐야 하는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존경이라는 권력을 이미 잃어버린 ‘지성’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반지성주의 주의보


다시 취임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왜 반지성주의를 강조했을까요? 맥락을 살펴보죠.

“한편,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입니다.

윤 대통령이 겪은 반지성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그 해답은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과학과 진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반지성주의를 강요하는 정치권입니다. 지성의 존재 의미를 무색케하는 지성의 오만함입니다. 지식과 지성은 이미 권위에서 벗어나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그런 시대입니다. 최고의 권력이라 해도 의심과 질문을 외면해서는 스스로 반지성주의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새 정부도 예외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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