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7화

착취당하지 않는 열정

착취당하지 않는 열정


지망생들은 순진하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 가지 필연적인 질문이 생긴다. ‘대체 무슨 힘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불안을 받아들이고 뚜렷한 기약 없이 지난한 과정을 철두철미하게 지속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경을 극복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열정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열정은 더 이상 긍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한때 열정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으로 대변되는 긍정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이제 열정을 논하는 어른들은 꼰대가 되고, 청년들은 열정을 불태우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언론학자 레니 홍(Renyi Hong)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우후죽순 출판된 자기 계발서들이 열정을 신격화하고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 압박 아래 도구화된 열정은 국가나 기업의 생산성을 위해 개인을 포섭하고 착취하고 있다.[1]

사회적 부조리를 은폐한 채 개인의 희생만을 강조하는 사회를 보면 열정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열정이란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도구적 열정의 허울을 벗겨 내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 맥락 아래서 모든 이의 열정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든 열정을 산업에 의한 착취 수단으로 환원하는 것은 모든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인식하에서는 지망생을 비롯한 준비 과정의 도전자들은 영원히 착취당하는 대상이 될 뿐이다.

잠시 열정에 대한 분노를 걷어 내고, 주체적인 열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순수한 형태의 열정은 우리 안에 분명 존재한다. 남들이 모두 안 될 거라고 해도 한번 몸을 던져 보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이다. 영화감독 지망생들의 모습 또한 그렇다. 창의 노동의 불규칙한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뛰어드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항상 존재해 왔다. 배에 올라타기로 결심하고, 그 배 위에서 아무도 시키지 않은 단련을 해나가는 모습에는 분명 열정 비슷한 뭔가가 불타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본인이 열정적인 분인가요?)
종환: 열정 있죠. 열정 없이 할 수 있어요? 내가 힘들어도 앞을 보면 어떻게든 가잖아요.

신희: 좀 그런 거 같아요. 열정이 없으면 못하는 일 같아요. 이게 누가 강요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이면 좋은 원동력인 것 같아요. 뭐든 그거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거니까.

윤진: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열정적인 것 같아요. 나를 표현하는 두 가지 하면 ○○○(영화 소재)랑 영화였거든요. 휴학하고 나서 스물세 살 때인가, ‘○○○ 영화제’를 처음 안 거예요. 거기 이력서를 냈는데 소식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하고 싶으니까 용기를 내서, 할 말을 적어 전화를 했어요. 통화 후에 면접을 보게 됐고, 붙어서 내려갔었거든요. 가서 몇 개월 살고.

준성: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영화를 하고 있어서, 꿈을 위해서 나아가고 있어서. 그래서 저는 영화 빼면 아마 병신이 될 것 같아요, 지금은.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정, 개인과 집단을 구분 짓는 경계를 꿰뚫고 넘나들면서 기쁨과 슬픔의 효과를 생성하는 힘’을 ‘정동(affect)’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2] 정동은 지망생들이 가진 열정과 통하는 지점이 있다. 지망생들의 열정은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을 넘나들며 작용한다. 이들을 창의 노동이라는 판에 겁 없이 덤비게 하면서도,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접근하게 하는 힘이다. 이런 힘은 외부로부터 강요되어 생긴 것이라기보다, 신희 말대로 자신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온다.

신희는 사회가 비판하는 도구적 열정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열정은 그런 열정과 구분된다고 말한다. 신희뿐 아니라 준성과 윤진 또한 자신의 순수한 열정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당사자들의 의견과 관점을 배제하고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으며 진전된 논의를 이끌어 낼 수도 없다. 그들의 열정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창의 노동을 잘 이해하기 위한 길이고, 결과적으로 구조를 바꾸는 첫발이 될 수 있다.[3]

 

열정의 또 다른 이름, 의지


지망생들이 영화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에는 열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희, 준성, 윤진, 종환은 자신이 열정적이라고 표현했지만, 나머지 열한 명은 조금 다른 설명을 했다. 열정과 비슷하지만 ‘열정은 아닌 다른 것’을 가졌다고 말하거나, 자신이 열정적이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부인하기도 했다. 이들이 말하는 열정, 열정 같은 어떤 것, 그리고 열정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현빈: 열정적인 사람이었죠, 굉장히. 지금도 열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연륜? 그러니까 이런 거죠, 예전에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면 지금은 조율할 수 있게 된 거죠. 내가 (원하는) 마음이 커도 좀 조절을 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열정적이고 싶은 사람’이라고 해주세요. 좀 자제하는 거죠. 표현이나 이런 걸. 왜냐면 그렇게 했는데 열정이 반박되면 힘든 걸 아니까. 열정의 형태가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열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달라진 거지. 꼭 막 달려든다고 열정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현빈은 폭발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졌지만 자제한다. 영화 작업을 오랜 시간 지속해 나가기 위한 방법이다. 지망생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동력원을 조절해 나가고 있었다. 목적지에 언제 닿을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바다를 항해하는 지망생들에게 열정은 한마디로 연료 같은 것이다. 연료를 폭발시켜 급가속하면 안개 속에서 장애물을 만나 침몰하게 될지 모른다. 긴 항해를 앞두고 연료를 낭비하는 것은 금물이다.

주현, 수빈, 소영은 자신들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조금 더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영화가 이상이 아니라는 주현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의 힘은 자신의 내외부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 토대를 둔다. 언제든 떠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는 힘,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는 힘은 열정이라기보다 의지에 가깝다.

주현: 열심히는 하죠. 그래서 애들이 작년에 날 워커홀릭이라고 불렀죠. 열정이겠죠. 근데 부끄럽잖아. 그냥 계속하는 거예요. 그니까 나는…… 열정에 대한 좌절을 두 번 정도 겪고 나니까, 막 그렇게 이상적으로 말하는 게 되게 웃긴 거 같아요. 절대 이상적인 게 아니거든요. 영화를 한다는 게. 이거는 직업이고, 이거는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되게 현실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 그리고 일단은 사실 시나리오 쓸 때는 영화만 들어가면 될 줄 아는데, 영화를 들어가면 또 다른 지옥이 시작되거든요. 그런 거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수빈: 열정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버팀? 근데 두 개가 이퀄(equal)인 것 같아요. 열정이랑 버티는 것.
(영화를 위해 버티는 거예요?)
그렇죠. 돈을 받고 하는 게 아니지만 지금 계속 영화를 하고 있으니까. 일단은. 언제든 맘만 먹으면 떠날 수 있지만 안 그러고 있으니까.

소영: 난 열정적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한 것과, 뜨거운 열정이 있는 거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나는 하고자 하는 의지가 뚜렷한 건 맞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의지는 의지에 그쳐도 의지인 거예요. 행동으로 어떻게 얼마큼 뜨겁게 나오지 않아도. 나는 의지는 확실해요. 의지를 유지만 하고 있는 것도 저는 되게 힘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난 그 의지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상태인데. 물론 계속 흔들리지만. 지금도 그렇고.

의지란 자신이 선택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결단하고 실현하는 주체적인 힘이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밀어붙이는 힘이 되기도 하고, 아무리 힘겨운 상황에서도 분투하는 힘이 된다. 이러한 힘은 선택에 대한 믿음, 목표에 대한 욕망이 있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수빈과 소영은 자신의 의지를 잃지 않기 위해 버텨야 하고, 의지를 애써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의지를 위해 또 다른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의지를 코나투스(conatus)라고 불렀다. 그는 인간이 억압에 저항하고 집요하게 삶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코나투스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코나투스는 분투(striving)하는 특성으로,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지킬 수 있는 힘이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가 밖으로 표출되면 열정이 되지만, 안에 머물 경우 의지의 형태를 띤다고 말한다. 열정과 의지는 어쩌면 한 끗 차이인 것이다. 몇몇 지망생의 경우 코나투스를 열정의 형태로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었으나, 많은 경우 의지의 형태로 열정을 차갑게 식힌 채 유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 의지가 깨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는 쉽게 파괴되지 않지만 더 강한 외부적 압력을 만날 경우에는 파괴될 수 있음을 짚는다. 만약 한 인간이 코나투스를 잃게 되었다면, 그것은 외부의 감당하기 힘든 압력에 의해서다.

“의지를 유지하는 것만도 힘들다”는 소영의 말은 창의 노동의 환경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보여 준다. 지망생들은 영화판에 그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도 아닌, 자신의 의지로 뛰어들었다. 쉬운 길도, 미래가 보장된 길도 아니지만 그들이 자신의 선택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강한 코나투스를 지녔기 때문이다.

주현: 물론 이렇게 말하지만, 나도 일주일에 한 번씩 새벽 2시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고민하고, 친구들이랑 밤새 통화하고 그래요. 그렇게 뭐 계속, 해나가는 거죠. 약도 먹었죠, 나도. 우울하던 시기에. 그렇게 하면 냉정해지는 걸 아니까.
(냉정을 유지해야만 하는 일이죠?)
엄청. 장난 아니죠. 평정심을 갖는다는 게.

수빈: 사실 힘든 건 불안한 것 그리고 경제적인 것 때문에 힘든 거지. 영화를 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든가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 연출부 하면서도 스트레스 받은 적은 몇 번 있지만, 끝나고 나서는 재미있었어요. ‘아, 이제 안 해!’ 이러진 않았던 거죠.

신희: 제가 본 예술가들은 다 너무 힘들고 바쁘고, 대놓고 막 ‘나는 예술가’ 이런 사람은 없던 것 같아요. 저도 영화를 만들고 예술을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음식집 서빙을 하고 있을 때의 저는 예술가는 아니잖아요. 알바생이지. 제 아이덴티티가 그 사람들한테는 을이고 가난한 청년이고 그렇잖아요. 근데 알바를 마치고 조그만 상영회에 가면 연출자, 감독이 되는 거예요. 그때만 예술가가 되는 거죠.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그 아이덴티티가 규정될 수 없는 것 같아요. 영화감독이라는 역할 하나만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자리를 잡았거나 가진 게 있어서 예술만 할 수 있는 분들이라면 몰라도. 요즘 신인 감독들이나 입봉하지 못한 감독들은 그 경계에서 되게 허덕이고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의 확고한 의지는 외부로부터 공격받고 있었다. 경제적 상황과 현실적 문제들은 스스로의 강한 의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상황이 이들의 일상이라는 점이다. 몇 년 전 영화 〈족구왕〉으로 데뷔한 우문기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이런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요즘 말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집안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지 않는 이상 독립 영화 제작을 꿈꾸는 창작자에게 창작을 위한 환경은 없다. 생계를 위해 일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영화 제작비까지 직접 마련해야 한다. 물론 요즘은 정부 기관이나 단체에서 어느 정도 지원은 하지만 모두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온 시간을 창작 작업에만 몰두해도 자신이 원하는 작품이 나오기 힘든 실정에서 제작비 마련을 위해 열 시간 이상씩 생업에 투자해야 하는 현실은 창작 의지만으로는 가기 힘든 길이다. 나와 함께 영화 공부를 하던 친구들 반 이상도 생계와 제작비 마련을 위해 일을 시작하다가 결국은 감독을 포기하고 생업을 선택했다. 단순한 의지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실정이긴 하다.[4]

이러한 상황이 젊은 세대 영화 작품들의 경향에 반영이 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지망생도 있었다.

신희: 우리나라 영화제는 가면 갈수록, 특히 독립 영화는 되게 무기력하고 참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색감으로 따지면 막 무채색으로 뒤덮인 느낌. ‘신나게 예술을 한 게 아니라 정말 어렵게, 어렵게 찍은 겁니다.’ 약간 이런 느낌이니까. 영화에도 그런 게 녹아 있는 거 같아요. 딱 제 나이 때의 감독들이 그 영화제에 내는 거잖아요. 구성이 다 그런 식인 영화들이 많은 걸 보면, 다들 영화 찍기 너무 어렵고, 항상 알바도 해야 되고 비용도 갚아야 되고, 이런 현실에 치이고 사는 거 같아요. 그래서 영화 안에도 그런 모습들만 보이는 게 아닌가.

이는 비단 신희만의 생각은 아니다.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의 예선 심사 위원 남다은은 다음과 같은 심사평을 적었다.

지난 몇 년간 심사했던 영화들과 비교해 올해 출품된 작품들의 수준은 확연히 미흡해 보였다. 학교 폭력과 취업난에 대한 고민이 대다수였던 지난 몇 년의 경향과 달리, 올해는 유독 집과 관련된 주제가 많았다. 이 화두는 특정 연령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지금 젊은 감독들이 현실을 영화화할 때, 반드시 대면해야 하는 과제처럼 보였다. 집을 버리고 나온 어린 아이들, 돌아갈 집을 갖지 못한 채 방치된 아이들, 집세를 내지 못해 전전긍긍하거나 쫓겨난 청년들, 무너져 가는 초라한 집에서라도 버티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마다하지 않는 청년들, 그리하여 결국 거리를 집으로 삼거나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탈출하는 방법 이외에는 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다수였다. 학교나 성 정체성, 취업에 대한 고민은 집의 문제에 비하면 부차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인간의 생존과 결부된 가장 기본적인 문제 앞에서 이들은 누구의 보호도,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위험에 노출된 채로 견디고 있는 중이다. 이 영화들의 엔딩은 거의 언제나 무력하게, 어떤 답도 내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멈춘다. 어쩌면 생존만이 유일한 목표가 된 상황이, (과하게 말해) 미래의 잠재적 노숙자들의 빈곤한 현실이, 달리 말해 인간의 기본권 앞에서조차 발버둥 쳐야 하는 상황으로의 끔찍한 후퇴가, 과감하고 독창적인 영화적 상상력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5]

영화감독 지망생이라 하면, 여유롭게 꿈꾸는 예술가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감독 지망생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지망생 기간은 열정을 쏟고 의지를 꽃피울 수 있는 기간이 아닌 의지가 깨지지 않도록 저항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꿈을 가지고 뛰어든 이들에게 창의 노동의 장은 열정을 지펴 주기보다 외부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1]
Renyi Hong, 〈Finding passion in work: Media, passion and career guides〉,  《European Journal of Cultural Studies》, 2015, pp.190-206.
[2]
Benedictus de Spinoza, 《Ethics and On the Improvement of the Understanding》, Read Books, 2007.
[3]
이런 맥락에서 사회학자 길(Gill)과 프랫(Pratt)은 창의 노동자들의 부정적 정동이 아닌 긍정적 정동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Gill, R., & Pratt, A. 〈In the social factory? Immaterial labor, precariousness and cultural work〉, 《Theory, culture & society》, 2008, pp.1-30.
[4]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영화감독 우문기 인터뷰, 진지하지 않아도 열정과 즐거움이 있다면〉, 2016. 1. 20.
[5]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선정작 발표〉 2017.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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