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O, 주인공이 되다
완결

NATO, 주인공이 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나토의 존재감이 급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다. NATO의 실체는 무엇인가?
벨기에 브뤼셀의 나토 본부 건물 외부에 설치된 나토의 상징인 별 모양 조형물 ©Photograph: Bloomberg/Getty Images

나토(NATO)가 돌아왔다.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이라는 한 인물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단행하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의 운명을 되살려낸 것이다. 나토는 다시 각국 외교 정책의 최우선 의제가 되었다. 한때는 나토에 가입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던 북유럽 국가들도 이제는 가입을 열망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지금껏 전례가 없었던 대규모 국방비 증액을 약속했는데, 이는 나토 내에서 독일의 기여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군사 전략가들은 태평양에서 새로운 버전의, 제2의 나토를 전개한다는 꿈을 꾸고 있으며, 유럽연합(EU)의 관료들은 인터넷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나토를 계획하고 있다. 나토에 가입하지 않고 동맹에 회의적이었던 진영에서는 트럼프 집권 시절에 CIA나 FBI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나토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냉전 시절에 태어난 늙은 보안관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나토는 아직도 무척이나 건재하며 러시아에 대항하는 전쟁에서도 충분한 역량을 가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 사실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나토가 다시 뜨겁게 주목받으면서, 이 기구의 역사를 둘러싼 논쟁도 새롭게 되살아났다. 나토에 이해관계를 가진 모든 당사자는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한다. 러시아 정부에 나토는 서방의 자유 진영이 러시아를 굴복시키고 그들의 영향력을 과거의 기억 속으로 묻어 버리려는 오랜 프로젝트에 다름 아니었다. 백악관 입장에서 나토는 원래 서유럽 국가들이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으로 창설되었지만, 9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민주주의와 인권, 자본을 확장하기 위한 전진 작전의 수단이 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에 있어서 나토는 러시아 탱크들의 진격을 막아주는 신성한 서약이다.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에 있어 나토는 헐값으로 미국산 핵우산을 제공받아 군대가 아닌 사회복지 사업에 예산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존재였다. 나토에 대한 분담금 등의 의무가 너무 과도해서 긴축재정을 시행해야 한다는 논리는 애초에 펼 수 없었다. 전 세계 다른 지역들이 보기에 나토는 한때 대서양을 중심으로 결성된 방어적인 동맹이었지만, 이후에는 빠르게 변신하면서 더욱 멀리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공격적인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나토를 두고 벌어지는 이 진부한 논쟁들은 매우 놀랍게도 나토라는 존재 자체를 매우 익숙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러한 주장들 모두가 유럽이라는 어떤 특정한 개념에 있어서, 또는 서방 세계라는 개념에 있어서 나토를 중심적인 존재로 가정하고 있지만, 정작 나토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NATO라는 네 개의 글자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단순한 군사적 동맹을 넘어서는 것이다. 나토는 더 이상 ‘북대서양’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조약’에도 얽매이지 않지만, 그들을 ‘기구’라고 부르기 때문에 얼핏 보면 무슨 자선단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토의 정확한 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이 동맹이 최소한 서방에서는 오랜 홍보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50년대에 나토는 대형 전시시설과 야외 영화관으로 구성된 이동식 ‘차량 전시회’를 유럽의 깊숙한 지역들로 보내서 나토에 회의적인 시민들에게 이 동맹의 장점을 설명했다. 이제는 나토가 그렇게 고된 노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1980년대 이후로는 나토에 대한 반대 여론도 크게 줄어들었다. 한때는 냉전 질서의 유물로 여겨졌던 것이 이제는 서방의 군사-정치-경제 체제의 중심에 매우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나토가 유럽의 지형에서 원래부터 자연스럽게 존재했던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도 많다.

1. 나토의 탄생

서류상으로 보자면, 나토는 자유주의 제도에 헌신하는 30개 민족국가가 모인 동맹이며, 나토 헌장의 5조에는 어느 회원국이라도 공격받으면 회원국 전체가 공동으로 대응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물론, 조건이 걸려있기는 하다. 1949년에 태어난 나토는 스스로를 UN(국제연합)이나 훗날 WTO(세계무역기구)로 거듭나는 GATT(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와 같은, 20세기 중반 무렵에 결성된 다른 국제기구들의 동생 격으로 상정한다. 또, 반세기 이상 유럽의 평화를 유지해 온 것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나토는 헤이스팅스 이스메이(Hastings Ismay) 초대 사무총장이 내세운 “러시아를 막아내고, 미국과 함께하며, 독일을 억제한다”는 임무를 대체로 잘 수행해오고 있었다.

나토가 주로 군사적인 성격의 동맹이긴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문화이기도 하다. 나토의 3대 유럽연합군최고사령관(SACEUR)이었던 알프레드 그룬서(Alfred Gruenther)가 말했던 것처럼 “나토는 일종의 개념”일 수도 있다. 나토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기업형 도시들은 네덜란드의 브룬섬(Brunssum), 독일의 람슈타인(Ramstein), 가일렌키르헨(Geilenkirchen), 오베람메르가우(Oberammergau), 우에뎀(Uedem), 이탈리아의 아비아노(Aviano), 폴란드의 슈비엔토스죠브(Świętoszów) 등 유럽 대륙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나토의 직원 자녀들을 위한 나토 학교들을 비롯하여 ‘스마트 방어를 위한 스마트 교육’이라는 나토의 군사 커리큘럼을 가르치는 나토 아카데미와 각종 센터가 있고, 로마에는 나토방위대학(NDC)이 소재하며, 제트기 연료를 공급하는 나토의 파이프라인이 독일의 지하를 관통하여 매설되어 있다. 또한 나토의 노래책과 나토의 찬가, 빙 크로스비(Bing Crosby)가 부른 〈나토〉라는 제목의 팝 음악도 존재하며, A는 알파(Alpha), B는 브라보(Bravo) 등으로 부르는 나토 자체의 음성문자가 있다. 그리고 나토는 각종 기금과 대학교의 교수직들에 대한 자금을 지원하며, 매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나토 국제모델’을 선발한다. 또한 에르메스는 나토를 기념하여 스카프를 제작하기도 했고, 벨기에에는 핸디캡 36의 초보자들도 가입할 수 있는 나토의 골프 동호회도 있다. 그리고 브뤼셀 소재의 나토 본부에는 영국이 자금을 후원하는 ‘역선전 부대’가 있고, 또한 ‘예술유산허브’라고 불리는 나토 박물관도 있는데, 이곳에는 고대 그리스 조각상의 복제품들을 비롯하여 특별할 것 없는 수많은 나무 책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토의 서류상 예산은 비교적 검소한 25억 유로 수준이며, 이는 모든 회원국의 기부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러나 80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방위비 예산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토는 자체 예산의 상당 부분을 그들의 요식적인 체제를 유지하는데 지출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 보자면 나토가 ‘합의’에 의해 의사결정을 내린다고는 하지만, 나토라는 동맹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은 딱히 비밀이 아니다. 나토의 헌장에 의하면, 회원국이 동맹을 정식으로 탈퇴하기 위해서는 나토의 사무총장이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에게 탈퇴의 사유를 반드시 설명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실제로 나토는 정치적인 합의체임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문제들에 대한 대응 방안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미국에게 우선권을 내주고 있다. 브뤼셀에 있는 현대식 신축 건물은 나토의 정치적인 본부에 불과할 뿐이고, 그들의 가장 중요한 군사지휘본부는 미국 버지니아의 노퍽에 자리잡고 있다. 1949년 이후로 나토 연합군의 최고사령관들은 모두 미국의 장성들이 맡아왔다. 나토에는 자체적인 군사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토를 실제로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그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4000명의 관료다. 나토의 군대는 필요시에 각 회원국의 정부에서 파견한 자원 병력들로 구성되는데, 일반적으로는 미국이 다수를 파견한다. 룩셈부르크와 터키가 한국전쟁에 파병했던 사례나 스페인과 포루트갈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했던 것과 같은 나토의 참전 및 교전에 관한 결정은 일반적으로 워싱턴에서 그 계획이 수립된다. 리비아 사태에 나토가 개입했던 사례처럼 주로 유럽인들이 참전하는 전쟁에서도, 그들은 미국의 물류 시스템과 주유 시설, 하드웨어 장비 등에 크게 의존해야만 했다.

나토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핵무기이다. 이론적으로는 나토의 3대 핵보유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이 다른 동맹국들 전체를 위하여 핵 방어체제에 있어서 서로 조율하고 있다. 나토가 유럽 대륙에서 핵전력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는 대체로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약 모스크바에서 브뤼셀을 향해 핵미사일을 날리면, 이에 대한 초기의 대응 결정은 워싱턴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나토의 실제 의사결정 과정에는 복잡한 절차들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즉, 나토의 핵전력 담당 그룹이 먼저 만나서 대응 방법을 논의하고 합의를 이뤄야 하며, 그런 다음에는 유럽의 영토에 배치된 핵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하여 워싱턴이 갖고 있는 미국 측의 암호를 요청해야 하는 것이다.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항공기들이 벨기에에 있다면 벨기에 국적을 가진 사람이 조종하고 정비를 해야 하며, 독일이나 이탈리아, 네덜란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자국민들이 운항과 정비를 담당한다. 하지만 이런 무기 시스템 중에서 미국 대통령이 다른 나토 회원국들의 승인을 받지 않고도 언제든 활성화할 수 있을 만큼 상시 고도의 경계 상태로 준비된 것은 없다. 자국이 핵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백악관과 협의하지 않고도 언제든 적들을 제거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는 독자적으로 자체 핵전력을 보유한 프랑스와 영국뿐이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이 나토 설립의 기초가 되는 북대서양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Photograph: Hulton Getty

2. 순탄치 않은 시작

1949년에 창설된 나토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의 사망선고가 있었다. 특히 나토의 존재감은 위기 상황에서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을 망각한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했다. 동맹은 그 자체로 거의 사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서방과 소련의 병력이 모두 2년 이내에 중부 유럽을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서유럽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경제를 재건하는 동안 미국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길 원했다.

이러한 안보 조약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제안이 있었다. 미국의 전략가인 조지 케넌(George Kennan)은 서유럽이 자체적인 방어 체계를 갖추고 캐나다와 미국도 별도의 방어 체계를 구축해서 혹시라도 소련이 침공할 경우에 서유럽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일종의 ‘덤벨’ 체계를 제안했다. 자유주의 성향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은 핵무기가 등장함으로써 재래식 병력이 불필요해진 세상에서 미국이 굳이 유럽에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이나 딘 애치슨(Dean Acheson)과 같은 대표적인 반공주의자들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했다. 그들은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를 물리친 소련의 붉은 군대가 유럽 대륙 최강의 전력일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 놀라우리만큼 크게 지지받는 세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빈을 비롯한 유럽의 실무자들은 프랑스와 영국이 전후에 체결한 덩케르크 조약을 확대하여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까지 포함하는 ‘서방연합’이라는 기구를 결성했다. 이 기구가 미국 정부에 구속력 있는 안전보장을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자 미국 외교관들이 이 프로젝트를 장악하여 주도하게 되었고, 결국엔 12개의 회원국이 참여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훨씬 더 광범위한 안보협정을 끌어내는데, 이것이 후에 나토가 된다. 당시에 “확대”에 관한 논의는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들을 동맹국에 포함할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것이었다. 케넌은 나토를 남부 유럽으로 확장하는 것이 소비에트연방을 위협하는 효과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나토가 무분별하게 확장하는 단초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는 나토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비슷한 특징을 공유한 북대서양 연안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체결될 때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냉전의 최전선이 정작 북대서양도 아닌 유럽 대륙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게 될 수도 있음을 한탄했다.

나토는 시작 단계에서부터 회원국의 국민에게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 해리 트루먼은 대통령직을 걸고 도전한 첫 번째 선거운동에서 이미 전쟁에 지칠 대로 지친 미국의 국민에게 북대서양조약을 확대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언급함으로써 굳이 위험을 감수할 여유가 없었다.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1949년에 프랑스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에 반대하여 공동으로 시위를 벌였다. 사실 그들은 그 외에도 정부의 거의 모든 이슈에 대해서 반대하곤 했지만 말이다. 이탈리아의 전역에서는 나토에 반대하는 어마어마한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 아이슬란드가 나토에 가입했을 때는, 전후 최대 규모로 기록되는 봉기가 일어났다. 아이슬란드의 수도인 레이캬비크와 워싱턴 사이에서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나토에 반대하는 음악이 셀 수 없이 생겨났다. 아이슬란드가 나토의 회원국이 되기 전날에는 공산주의 성향의 소설가이자 훗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하들로스 락스네스(Halldór Laxness)가 《원자력 주둔 기지》라는 책을 출간하는데, 이는 아이슬란드 버전의 《남아 있는 나날》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며, 여기에 등장하는 북부 출신의 젊은 주인공 여성은 어느 국회의원의 자택에서 일하면서 레이캬비크의 엘리트들이 비밀리에 나토의 관료들에게 나라를 팔아넘기는 과정을 목격한다.

전후 최초의 10년은 나토에게 격동의 시기였다. 유럽의 경제 회복이 본격화되면서 대륙의 안보를 미국에 의지해야 한다는 예전의 확신이 약화하였다. 트루먼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미국이 얼마나 쉽게 도를 넘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에 대하여 서유럽의 지도자들은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설립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데, 이는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신생 군대들을 하나로 결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유럽 군대를 창설하기 위한 이러한 계획은 거의 시작과 동시에 무산되고 말았다. 영국은 이러한 연합군대를 자국의 주권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한편, 프랑스 정부는 소련의 침공보다도 오히려 독일의 부활을 더욱 우려했다. 그러자 역설적으로 서유럽 국가들이 워싱턴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이러한 초기의 시도가 오히려 그들을 나토의 영향력 안에 더욱 단단히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나토는 서방의 분열 양상을 뒤덮을 수 있는 유일한 협정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처럼 나토는 안보를 위한 임시방편으로 창설되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설계자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서방의 안정을 보증하는 존재가 되었다. 미국에 있어 막대한 양의 국방 예산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으며, 여전히 완전고용을 추진하고 있었던 전후의 경제에서 공공지출을 촉진하는 방법 가운데에서는 가장 논란이 적은 방식이기도 했다. 미국이 이러한 영구적인 전쟁 준비 태세를 단 한 번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은 전후에 취임한 거의 모든 미국 대통령들이 마치 정해진 의식처럼 유럽에서의 미군 주둔 병력을 감축하겠다고 공언했다가 번번이 실패했다는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반면에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막대한 방위비 지출 덕분에 여유가 생긴 예산을 사회복지 분야에 더욱 많이 투입할 수 있었는데, 이는 상당히 호전적이었던 노동운동 세력을 달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나토는 50년대에 잠시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지만, 파열의 잡음으로부터는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1955년에 워싱턴은 서독을 나토에 가입시켰는데, 이에 대한 대응으로 소련은 그들만의 반-나토 안보 체계인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창설했다. 1년 뒤에 수에즈 위기(제2차 중동전쟁)가 발생했고, 자신들의 식민 영토에 욕심을 버리지 못했던 회원국들(영국, 프랑스)과 자칫하면 공산주의 진영으로 돌아설 수도 있는 제3세계 민족주의 세력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워싱턴 사이에 분열이 표출되면서 나토는 심하게 요동쳤다. 애초에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는 과거 식민지들까지 나토에 포함하기를 원했지만, 이는 미국 입장에서 지나치게 과도한 요구사항이었다. 나토 사령부는 대영제국에 대해서는 애증이 엇갈리는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자면, 나토는 한편에서 영국으로 하여금 싱가포르와 같은 과거의 중요한 식민 거점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독일의 라인강 지역에 수천 명의 영국군을 주둔시켜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제국주의의 쇠퇴를 가속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전략가들은 자원이 풍부한 중동에서 영국이 퇴각하면 힘의 공백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나토는 중동조약기구(METO)를 만들어 그러한 공백을 메우려 시도했다. 그러나 수많은 실패 사례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Guardian graphic. Source: Nato

나토에서의 60년대는 비상사태가 지속되었던 시기로 기억된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전 대통령은 이 동맹에 관하여 툭하면 발끈하곤 했다. 그는 1963년에 ‘나토는 가짜다’라고 선언했고, 심지어 이런 말도 했다. “유럽은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나토 때문에 사실상 미국의 종속 상태에 놓여 있다.” 3년 뒤, 드골은 나토 사령부에서 프랑스 및 그들의 핵무기들을 철수시켰다. 다만 이러한 철수는 실질적인 조치라기보다는 다분히 연출적인 행위였다. 이후에도 나토의 군사훈련에 참여하고 기술을 공유한다는 프랑스의 입장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로 유지되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여전히 나토의 회원국이었다.

드골의 결정은 프랑스의 지위를 강대국으로 생각했던 그의 망상 때문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상상력을 더욱 발휘하여 러시아를 유럽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보기도 했다. 다만 냉전에 의해 러시아가 가로막혀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냉전은 언젠가 끝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드골의 관점에서 보자면, 워싱턴의 자본주의와 모스크바의 공산주의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기술관료 사회로 수렴되고 있었다. 그는 나토를 역사의 발전을 늦추어서 워싱턴이 세계의 권력을 거머쥔 상태를 지속시키려는 미국의 고의적인 시도라고 여겼다. 그러나 냉전에 관한 확고한 지지 분위기 속에서 드골의 문제 제기, 그리고 나토의 사망을 선언했던 수많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토는 프랑스의 탈퇴 움직임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서독을 더욱 완전하게 동맹 안으로 결속시켰고, 내부에 경종을 울림으로써 다른 회원국들로부터 더욱 많은 헌신을 이끌어내게 된 것이다.

1950-60년대에는 나토에 대한 반대가 서유럽에서는 좌파들의 정치적인 구호였다. 그들에게는 나토가 단지 아슬아슬한 핵 위기를 조장하는 제도화된 형태일 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을 통치하는 세력들 사이의 계급동맹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나토가 표면적으로는 소련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체계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을 사찰하거나, 아니면 나토의 파이프라인을 폭파했던 독일의 적군파(RAF) 일당을 소탕하는 등, 미국과 유럽의 기득권층이 자국의 반대세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나토는 회원국들이 단호하게 반공주의를 고수하는 한, 각국 내부의 정치적인 현안에 대해서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살라자르(Salazar)의 독재 치하에 있었음에도 1949년에 환영받으며 나토에 가입했다. 그리고 1967년에는 그리스에서 파시스트 성향의 군부가 나토의 내란 진압 전략을 활용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이 주도하여 그리스를 동맹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의안을 발의했지만, 이러한 주장은 나토 내에서 결코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나토의 단결력을 위협하는 더욱 심각한 사건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1974년에 그리스와 터키가 키프로스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충돌한 일이 있었다. 좀 더 최근에는 2011년에 나토가 리비아 사태에 개입한 이후, 터키와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하프타르(Haftar) 장군의 리비아 국민군에 맞서 싸웠다. 나토의 단결력은 2018년에도 또 한 번 타격을 받았다. 당시 터키가 시리아에서 미국 및 서유럽의 동맹인 쿠르드족을 포위하기 시작하자,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이 나토가 “뇌사상태에 빠졌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미국이 유럽에서의 방위비 지출과 주둔군 병력을 늘리긴 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시절에 동맹의 목적에 대하여 줄곧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으며, 나토의 본부를 방문한 자리에서는 집단방위를 신성시하고 있는 헌장의 5조에 관한 언급을 거부하기도 했다. 나토에는 심리적인 타격이었다.

그러나 나토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실존적 위기는 1990년대에 찾아왔다. 나토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였던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했던 것이다. 새로운 국제 정세 속에서, 심지어 나토에서 일하는 직원들조차도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저물어버린 한 시대의 청산이었으며, 나토에게는 소비에트연방의 핵무기들을 쓸어 모아서 해체하는 업무만이 남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토를 결집시켜주던 망령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유럽연합(EU)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신생 기구들이 유럽에 더욱 커다란 단결력과 미국으로부터의 자율성을 가진 미래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지기 전에도 새로운 정치적 협의체에 관한 제안들은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프랑스 전 대통령이 제안한 유럽연방(European Confederation)에 관한 아이디어가 있다. 물론 논의는 곧 사그라들었지만, 여기에서는 콕 집어서 소비에트연방은 포함하고 미국은 제외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1989년에는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Michael Gorbachev) 서기장이 대서양에서부터 우랄산맥까지 뻗어있는 하나의 유럽이라는 드골의 오래된 꿈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는 이를 두고 ‘유럽의 공동 터전’이라고 불렀으며, 그 안에서는 “전쟁 억제의 독트린이 규제의 독트린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에 활약한 다수의 저명한 관계자들 및 관측통들은 소기의 임무를 완수한 나토가 영업을 종료할 것이라고 믿었다. 소련의 외무장관이었던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는 1989년에 미국의 국무장관을 향해 과감히 이렇게 제안했다.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를 모두 해체합시다. 당신들의 동맹과 우리들의 동맹을 모두 놓아줍시다.” 같은 해 말, 체코의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은 조지 H. W. 부시(George H. W. Bush) 대통령에게 미국과 러시아의 군대가 모두 조만간 중부 유럽에서 떠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저명한 전략가들도 이러한 전망에 동의했다. 소비에트연방은 이미 붕괴했고, 여기에 더해서 미국이 유럽 대륙에서 병력을 철수시킨다면, 이제 유럽의 안보는 유럽인들 스스로 되찾아야 할 차례였다. 1990년에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관계 이론가들 가운데 한 명인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는 《애틀랜틱먼슬리》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소련의 위협은 나토를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의 역할을 했다. 이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면, 미국도 유럽 대륙을 떠날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나토의 관료 집단이 어떠한 상태였는지에 대해서는, 병든 환자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서술하는 혼란스러운 입장문들이 난무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토에 위기인 것만 같았던 1990년대가, 돌이켜 보면 최고의 시절이었다. 90년대에 들어서도 나토는 문을 닫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확대되었다. 그들은 냉전 시기의 흔적만 남은 채 서서히 퇴화하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활기를 띠었다. “나토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아니면 폐업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90년대 내내 나토 조직원들의 구호가 되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만에 이전까지는 주로 방어적인 조직이었던 나토가 드러내놓고 공격적인 조직으로 변신했다. 지정학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보수적인 관리인이었던 그들이 동유럽에서의 변화를 도모하는 주체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952년 그리스에서 선보인 나토의 이동식 전시회 ©Photograph: Nato

3. 탈냉전 시대의 나토

소비에트연방의 몰락을 조사하던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나토에 있어 새로운 도전과제는 신생 러시아연방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유럽이라고 판단했다. 유출된 1992년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문건 초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오직 유럽만이 참여하는 안보 협정의 출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부시 행정부는 표면상으로 나토의 확대에 대하여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냉전에서 거둔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통일국가로 거듭난 독일을 나토에 가입시켰다. 곧이어 나토는 우크라이나 군대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1992년에 빌 클린턴(Bill Clinton)이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실질적으로 달라진 점이라면, 나토의 확장에 관한 공식적인 입장이 현실의 정책과 일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클린턴은 1999년에 폴란드, 헝가리, 체코공화국의 나토 가입을 주도했고, 러시아를 구시대의 망가진 국가처럼 취급했다.

이처럼 클린턴은 나토를 강화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는 나토의 문을 닫아버릴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1992년에 대통령 선거 유세를 하면서, 클린턴은 나토의 규모를 축소하고 UN에 더욱 새롭고 날렵한 ‘신속배치군’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재임 초기에도 클린턴은 나토가 유럽의 동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나토의 영역을 동쪽으로 확장하는 전략에 관해 보고 받은 자리에서 그는 당시 국가안보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합의를 추진하는데, 여기서 러시아가 얻을 수 있는 약속이란 것이 이런 겁니다. 예전에는 러시아의 군사적 동맹이었지만 지금은 우리의 동맹이 되려고 하는 나라들에 미국이 군수물자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우리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나 결국 클린턴은 나토의 확장 계획을 승인했다.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가 나토의 확장을 열심히 추구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소속되어 있었던 국가들이 미 국방부를 압박했다. 폴란드와 같은 나라에 있어서 나토의 회원자격은 다시 부유한 서방세계의 일원으로 합류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폴란드의 지도자인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는 1993년 미국의 협상 파트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의 장군들이 화내더라도 그냥 놔두십시오. 어차피 그들은 핵무기를 발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미국 내부의 정치 현안에 관한 고려는 물론이고, 나토의 회원가입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미국의 러스트 벨트(rust belt)에 거주하고 있는 다수의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로부터 표를 얻어낼 수도 있겠다는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주로 자국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 일개 국가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가 아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는 90년대에 들어와서 명확하게 확립된 인권에 관한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도 막강한 우위를 갖고 있었고, 다른 나라에 대한 배려 없이 그들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나토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많은 사람도 냉전이 끝나자 나토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것을 이후에 전개될 새로운 인도주의적 개입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1995년에 나토의 사무총장이 된 하비에르 솔라나는 1982년에 《나토를 반대해야 하는 50가지 이유》라는 책을 쓴 저자이다. 참고로 이 책은 그가 속한 사회당이 스페인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도 미국 정부에 의해 체제를 위협하는 주동자 목록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1995년의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폭격과 1999년의 코소보 폭격은 냉전 이후의 세계 질서에서 나토의 새로운 입지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예전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해 있었던 이들 지역에 대한 폭격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클린턴의 폭격 결정이 UN 안전보장이사회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유럽연합 스스로가, 그중에서도 특히 독일이 그들의 이웃 나라에 발생한 안보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나토의 확장을 보여준 사례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을 더욱 크게 뒤흔든 무력 시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전쟁은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굳이 미국의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도 기술력이 뒷받침하는 ‘완전무결한’ 군사 작전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나토가 주도하여 개입하더라도 미국에 우호적인 자치구를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례로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자신의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클린턴과 부시의 이름을 따서 붙여주었다.

나토의 확장 및 나토의 전쟁에 관하여 클린턴 행정부가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믿음에는 그들이 자본과 시장에 관하여 지니고 있었던 믿음이 반영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나토는 동유럽의 일부 국가들에는 일종의 신용평가 기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외국의 투자자들에게 안전한 지역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되고 결국엔 EU 가입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선언하는 그런 존재 말이다. 클린턴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앤서니 레이크(Anthony Lake)는 1993년에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나토를 업그레이드하여 시장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과정의 배후에서 필수적인 집단적 안전보장(collective security)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시장과 민주주의에 관한 담론이 혼합된 이러한 논리는 지정학적인 이해관계와 더불어 미국의 정치인들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이었으며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완벽한 결합처럼 보였다.

90년대가 끝날 무렵이 되자 여전히 나토의 확장을 반대하는 이들은 미국의 정치가인 폴 니체(Paul Nitze)부터 보수적 역사학자인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에 이르기까지 냉전 세력들 중에서도 열성적인 잔당들뿐이었다. 조 바이든(Joe Biden)처럼 일찍이 나토의 확장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도 동유럽을 순회한 이후에는 나토의 확장 명분에 공감하는 개종자가 되어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마찬가지로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처럼 클린턴의 국내 정책에 반대하는 공화당원들도 나토의 확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입장은 공화당이 당시에 발표한 대국민 공약인 <미국과의 서약>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클린턴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되어서 그가 더욱 빨리 움직이기를 원했다. (참고로 깅리치는 한때 친구들로부터 1만 3000달러를 빌린 후에 유럽으로 안식년 휴가를 가서 나토에 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완성은 하지 못한 상태이다.) 

우크라이나는 클린턴 재임 기간에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1990년대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뒤를 이어 미국의 국제개발처(USAID)로부터 세 번째로 많은 자금을 지원받은 수혜국이었다. 푸틴이 침공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크라이나는 모두 30억 달러 이상을 받았었는데, 러시아가 발을 들여놓은 이후에도 미국은 지금까지 이미 140억 달러를 지원했고 여기에 더해서 330억 달러를 추가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우크라이나 군대에 대한 나토의 훈련 강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급격하게 증가했다. 1999년 코소보 전쟁에 대한 클린턴의 군사적 개입을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포함하여 냉전 이후에 미국이 주도하는 거의 모든 군사 작전에 우크라이나 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맹공격에 맞서서 우크라이나 군대가 이토록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군대의 상당수는 나토의 훈련을 받았으며, 나토 수준의 무기들도 아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가 2001년에 집권할 당시에도 나토는 여전히 발칸반도에서 한창 전쟁을 펼치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들이 직접 만든 자치국인 코소보 내에서 치안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9.11 테러가 벌어지면서 부시 행정부는 나토의 헌장 5조를 사상 처음으로 발동시켰는데, 그러자 나토는 국제적인 대테러 활동 공조를 자신들의 임무에 포함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러시아가 자국 내에서 반테러를 명분으로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것이나, 중국이 신장 지역에서 위구르족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던 행위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부시는 미국의 방식이 결국엔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던 점에서는 클린턴과 동일했지만, 나토 동맹의 형제 중 일부는 떨쳐내고 싶어 했다. 미국이 나토 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일한 강대국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전 세계가 이미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의 질서로 편입되었다면, 미국이 바라는 걸 얻기 위해서 굳이 벨기에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얻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이유로 부시가 벌인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프랑스와 독일과 같은 나토의 일부 회원국들 사이에서도 비판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부시는 개의치 않았는데, 그들의 실제 군사력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시의 재임 당시 전 세계는 미국과 함께 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의 적이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동유럽 국가들은 확실히 미국의 편이었고, 부시는 그들이 두둑하게 보상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부시는 독일과 프랑스의 경고를 무시한 채로, 조지아와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않도록 약속해달라는 러시아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2008년 두 나라의 나토 가입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동유럽과 워싱턴이 서로 가까워지고 있던 이 시기에 바르샤바, 부다페스트, 프라하의 엘리트들은 이러한 관계 개선을 통하여 유럽연합 내에서 진행되는 자신들과 관련한 논쟁에 있어서 워싱턴이 유용한 동맹으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이들 국가의 민족주의자들은 브뤼셀이 과시하는 탈-민족주의보다는 워싱턴 스타일의 민족주의를 훨씬 더 편안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에 토니 블레어(Tony Blair) 영국 총리(맨 왼쪽)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에 함께 보이는 인물들은 각각 나토의 하비에르 솔라나(Javier Solana) 사무총장(맨 오른쪽),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 대통령(왼쪽 두 번째),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가운데)이다. ©Photograph: Win Mcnamee/Reuters

4. 이동하는 권력의 축, 그리고 나토중

오늘날 워싱턴의 가장 확고한 동맹국들은 폴란드와 발트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이다. 만약 동유럽의 지도자들이 베를린이나 브뤼셀, 또는 워싱턴의 헤게모니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그들은 매번 틀림없이 워싱턴을 선택할 것이다. 영국이 러시아의 자본을 유치하는 데 있어서 특화되어 있고, 독일은 특히 러시아의 에너지를 다량으로 소비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러시아를 잠재적인 전략 파트너로 바라보고 있는 반면에, 폴란드와 발트 3국은 그들이 어렵게 쟁취한 주권을 위협하는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절대 멈추지 않고 있다. 러시아를 바라보는 견해에 있어서 워싱턴은 그들과 동일한 입장이다. 구제 불능인 국가와의 관계를 굳이 ‘재설정’할 만한 가치는 없는 것이다. 워싱턴의 수많은 매파에게 있어서, 만약 나토에 그들의 품 안에 있는 나라들과 ‘문 앞의 야만인들’ 사이에는 거대한 협곡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인식시키려면, 러시아가 구제 불능의 상태여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만약 러시아가 강력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였다면, 러시아는 아마도 유럽 내에서 미국이 장악한 헤게모니에 대응해 훨씬 더 거대한 도전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차라리 독재적이고 호전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힘없는 러시아가 더 나은 것이다.

그러나 동유럽 국가들끼리는 나토가 그들의 주권을 보호해준다고 확신한다 하더라도, 유럽 전반적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의 인식이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가 언젠가는 유럽이 스스로의 안보를 지켜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을 때, EU 국가들이 미국의 보호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회원국 다수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유럽을 지켜주는 더욱 강력한 파트너가 있다면 얼마든지 반겼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나토는 유럽이 당사자라고 생각하는 이해관계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자면, 2010년에 나토의 회원국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했던 네덜란드가 자국 군대의 주둔 기한을 연장하려 했으나 대중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무산되었고, 결국엔 이를 추진했던 연립정부가 무너지는 사건이 있었다. 또, 독일은 러시아와 긴밀한 에너지 공조 추진에 관하여 이미 미국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제 독일은 이제 우크라이나에 중화기를 보내고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수입을 전면 중단함으로써 나토의 우려를 누그러트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과 미국의 이해관계 사이에 보이는 이러한 명백한 차이는 유럽의 몇몇 사상가들을 계속해서 자극해왔다. 2018년 독일 좌파의 거물이자 작가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er)는 나토에 관하여 워싱턴이 벌이는 전쟁에 나토의 회원국들과 제휴국들이 주기적으로 병사들을 보내는 조공체계(tributary system)라고 묘사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레지 드브레(Régis Debray)는 드골의 말을 되뇌며 이렇게 말했다. “나토는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이며 정치적인 지배체계에 불과하다.”

유럽에서는 몇 년 동안 ‘유럽 안보 및 방위 정체성’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자는 다소 얼빠진 논의가 있어왔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토의 머리에서 아테나 여신 같은 걸 태어나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자주적인 방어를 향한 유럽의 행보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드러내 보였다. 또한 나토가 유럽이라는 대륙에서 제도적으로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도 보여주었다. 이미 2020년에 독일의 외무장관은 딱 잘라서 이렇게 말했다.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통해서 나토와 미국 없이도 유럽 대륙의 안보와 안정,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는 환상을 조장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지나친 것입니다.” 오히려 나토의 권한이나 유럽과의 연관성은 앞으로 몇 년 동안 더욱 커질 예정이며, 미국에 비하면 여전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지만 유럽이 방위비 지출을 늘린다는 사실은 나토의 관할 내에 더욱 많은 물자가 넘쳐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 사헬 지역에서부터 우크라이나를 관통하는 드네프르 강변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부의 관리를 받음으로써, 이제는 그들이 꿈틀거릴 수 있는 여지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유럽이 방위에 있어 자율권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단지 1952년에 유럽방위공동체(EDC)를 추진할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EU의 현재 모습이 어떠한지를 고려해 볼 때, 설령 지금보다 더욱 군사화된 형태를 취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모습을 장밋빛 전망으로 보기는 매우 힘들다. 가령 EU의 유능한 군대가 불법 이민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헬 지역을 순찰하고, 그들을 다시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한 정교한 시스템을 시행하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정권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곳의 자원을 지속적으로 수탈하고 유럽의 폐기물을 버리는 곳으로 활용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유럽이 외국인을 혐오하는 신자유주의의 선봉이라는 오명을 더욱 키우고 ‘요새 유럽’이라는 폐쇄적인 이미지를 훨씬 더 공고히 할 것이다.

1978년 영국의 역사학자 E. P. 톰슨(E. P. Thompson)은 ‘나토 주의’가 극단적인 무관심의 한 형태이며, 오직 그것이 무엇을 반대하는지만 알려진 공허한 이데올로기에 둘러싸인 병리학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톰슨이 그런 글을 쓰고 있을 당시에만 하더라도, 나토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직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전이었다. 1983년에 나토가 서독에 퍼싱 미사일을 배치했을 때, 만약 나토에 관한 회의론이 팽배했다면 이는 전후 독일의 역사에서 최대의 저항 시위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토 회원국의 수많은 시민이 한때는 나토가 제도적으로 채택한 벼랑 끝 핵전략을 위험천만한 도박으로 여겼던 것과는 다르게, 오늘날 나토가 리비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였던 최근의 전쟁들은 회원국 내부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절차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들은 참담하게 실패했고, 명백할 정도로 세계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나토의 생명력을 더욱 장대하게 연장시켜 주었다. 비록 아직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데 있어서 나토의 지원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훨씬 더 어려운 질문은 나토가 여전히 냉전 시대의 유물인지에 관한 것이다. 과거 나토는 냉전의 논리를 내세워서 서방의 자유를 제한하고 전 세계의 인구를 위험에 빠트렸던 전력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 질서의 또 다른 대안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나토는 어쩌면 그러한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토는 부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부활은 그저 ‘대안은 없다’라는 낡은 깃발을 내걸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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