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시나리오
2화

인류세는 인간의 시대인가

겨울답지 않게 따스한 날씨가 며칠간 지속된다 싶으면, 지구 온난화가 심각하다는 과학자들의 말이 맞느냐고 의심 섞인 농담을 주고받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지구촌 곳곳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불길한 소식들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가 더는 부정하기 힘든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일상까지 변화시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2020년 여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역사상 최고를 기록했다는 이상 기온으로 발생한 산불은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내고 한국 면적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땅을 불태웠다. 불길로 주변 하늘과 강물이 온통 시뻘개진 금문교 사진은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지구 종말의 광경이었다. 이듬해 터키와 그리스 또한 대규모의 산불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남의 나라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도 강원도의 대규모 산불 소식이 전에 없이 자주 뉴스를 탔다.

2021년 독일과 중국의 기록적인 폭우가 남긴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독일에 내린 비는 100년 만의 폭우였고, 중국 허난성에 쏟아진 비는 1000년 만에 내린 양이었다. 그보다 앞선 2019년,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폭우로 도시의 85퍼센트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었고, 산 마르코 광장에서 수영하는 관광객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제 100년, 1000년 만의 기록이라는 호들갑에도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전 세계의 이상 기후는 나날이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전례 없는 대규모 기후 재앙에 겹쳐, 여전히 종식되지 않은 코로나19 바이러스 또한 과학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풍요롭고 행복해질 거라는 오랜 낙관적 믿음을 뒤흔든다. 코로나19와 기후 재앙은 우리의 기존 상식을 뛰어넘는 전례 없는 재앙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두 사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정체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불안한 예감을 들쑤신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놓고 무수한 예측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적어도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은 그 시대가 결코 코로나19 이전과 똑같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4차 산업혁명으로 인류가 물질과 신체의 구속을 벗어나 ‘호모 데우스(Homo Deus·신이 된 인간)'[1]로 살아갈 ‘멋진 신세계’를 꿈꿀 수 있었다면, 이제 코로나19 라는 긴 터널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세상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마냥 희망과 낙관에 부풀기는 어려워졌다.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말대로, 우리는 4차 산업혁명과 여섯 번째 대멸종[2]의 갈림길 위에 서 있다.

 

인류가 들어선 낯선 시대


인류세라는 단어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므로 새로운 시대 구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제시한 지질학적 용어다. 현시대는 지질학적으로 약 1만 2000년 전 시작된 ‘홀로세(Holocene)’다. 홀로세는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다음 빙하기가 시작되기 이전까지의 간빙기(間氷期)로, 홀로세의 지구는 비교적 안정된 기후를 유지해 왔다. 그 덕분에 인류를 비롯한 포유류가 지구상에 번성하고, 인류는 농경을 시작하며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즉, 홀로세의 온화한 기후는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 구분은 이처럼 인류에게 우호적이었던 지구 환경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그것도 혜성의 충돌이나 지구 축 이동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힘에 의해서.

최근 미디어에서 환경 문제를 거론할 때 인류세가 자주 언급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기만 하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1980년대에 지구과학자 유진 스토머(Eugene Stormer)가 처음으로 제안했지만, 당시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듯했던 인류세라는 말은 프롤로그에 언급했듯, 2000년 지구 시스템 과학 연례 학술 대회에서 파울 크뤼천의 선언 이후 비로소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는, 소위 핫 키워드로 떠올랐다. 인류세라는 이름은 언뜻 보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딱 좋다. 지질학적 시대 명칭에 인류가 들어간다니, 이거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인류가 주인공이 된, 인류의 시대라는 공식적인 인정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마냥 터무니없는 얘기도 아닌 것이, 실제로 인류세를 이러한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며 ‘선한 인류세’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인류가 과학 기술과 문명의 발전으로 얻은 엄청난 힘으로 인간은 물론, 지구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5년 발행된 《이코노미스트》의 인류세 관련 특집 기사 제목은 “인류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Anthropocene)”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를 홀로세 대신 인류세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처음 주장한 이들의 의도는 명실상부하게 지구의 주인이 된 인류의 승리를 축하하자는 뜻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지구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인류의 힘에 대한 경고에 더 가까웠다.

다시 말해 인류세란 인간이 지구 역사와 환경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지질학적 힘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 주변의 환경이 얼마나 인간을 중심에 놓고 인간의 필요와 욕구에 맞게 변형됐는지 생각해 본다면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 어디를 찾아봐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야생 그대로의 자연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나라야 작은 땅덩어리에 인구 밀도가 높아 그렇다 쳐도 아프리카나 중국 오지에 가면 인적없는 태곳적 모습 그대로의 땅이 널려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허나 실은 그런 오지들조차도 대부분은 간접적으로나마 이미 인간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상태이다. 예를 들어, 중국 내몽골의 드넓은 사막은 자연적 요인으로만 형성되지 않았다. 산업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무분별한 용수 개발과 벌목이 해마다 사막의 면적을 점점 더 늘린 결과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얼음이 녹고 수목이 우거진 알래스카의 모습을 TV에서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2002년 생태학자 에릭 샌더슨(Eric W. Sanderson)은 연구를 통해 인간에 의해 변한 생태계가 지구 육지의 80퍼센트를 초과한다고 밝혔다. 직접적으로 개발하지 않았더라도, 인간의 활동은 어떤 식으로든 지구 표면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지구 표면의 모습만이 아니다. 그 위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도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가장 대표적인 증거가 닭이다. 머나먼 미래에 인류가 사라진 지구를 외계인이 방문한다면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닭인 줄 알 거라는 얘기는 농담이 아니다. 가장 값싼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닭은 한 해에만 500~600억 마리가 소비된다. 닭의 총 중량이 다른 모든 조류를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수준이다. 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전 세계 포유동물 중 인간이 36퍼센트, 인간이 기르는 가축이 60퍼센트, 야생 동물은 고작 4퍼센트를 차지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도움 되지 않는 지상 동물을 거의 남겨 놓지 않았다. 그 결과, 종(種) 다양성의 급격한 감소는 인류세의 주된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종 다양성의 손실 비율은 6500만 년 전 공룡이 멸종되었던 사건의 수준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인류가 ‘여섯 번째 대멸종’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 듀크대학교 보전생태학과 스튜어트 핌(Stuart Pimm) 교수와 고생물학자 토니 버노스키(Tony Barnosky)는 연간 100만 종당 멸종하는 종의 과거와 현재 추정치를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 결과 척추동물의 멸종률은 기본 멸종률보다 적어도 10배, 많으면 1000배까지 높게 나타났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인류세라고 주장하는 주된 근거로는 앞서 말한 지표면 형태의 변화와 종 다양성 감소 외에, 기후 변화가 대표적이다. 1980년대부터 과학자들은 온실가스가 지구의 온도를 높이고 있음을 발견했고, 세계 각국은 2001년 기후 변화 정부간 패널(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IPCC)에서 “인류 문명이 심각한 지구 온난화의 효과에 직면했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인류세라는 명칭은 여전히 지질학계에서 공식인정받지 않았으며, 그 개념과 개시 시점, 정확한 정의를 놓고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지질학자와 층서학자들을 중심으로 인류세 워킹 그룹(Anthropocene Working Group·AWG)이 조직되어 정말로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들어섰는지 판정할 지질학적 근거를 조사하는 중이다. 인류세를 인정한다면 언제부터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지도 논란거리이다. 크뤼천은 18세기 후반의 증기 기관 발명과 산업혁명으로 화석 연료의 사용량이 급격히 늘어난 시점을 인류세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대기 중 탄소 비율이 크게 증가하고 지구 기온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생물학자 윌리엄 F. 러디먼(William F. Ruddiman)을 비롯한 다수 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이전인 7000~8000년 전 인류가 농경을 시작했던 시점을 인류세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이때부터 숲에 불을 질러 농지로 바꾸고 가축을 키우면서 지표면의 모습과 대기 구성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지질학자들의 관점은 좀 다르다. 이들은 좀 더 확실하고 분명한, 지층에 영구적으로 남은 변화의 흔적을 찾는다. 1950년대 냉전 시대에 행해진 핵실험이 그런 지질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더 정확히는 1945년 트리니티 실험[3]을 기점으로 지구 표면에 방사성 핵종이 확산되었다. 앞의 두 부류 학자들이 지구 시스템 전반에 일어난 변화를 고려한다면, 지질학자와 층서학자들은 지층에서 인간의 영향이 남긴 흔적을 탐지해 내고자 하는 더 협소한 관점을 고수하는 셈이다.

인류세의 그 ‘인류’가 과연 누구냐는 것도 문제다. 화석 연료를 마구 불태워 엄청난 이산화 탄소를 대기 중에 배출하고, 열대 우림을 마구잡이로 벌목하고 개간한 사람들과, 조상 대대로 평화롭게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다가 하루아침에 식민 지배자들에게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사람들을 같은 ‘인류’의 이름 아래 묶어도 될까? 문명의 혜택을 실컷 누린 선진국 국민들과, 경제 발전의 과실(果實)은 맛도 못 보고 희생만 한 제3 세계 사람들에게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의 책임을 ‘인류’의 이름으로 똑같이 물을 수 있을까? 이것은 기후 변화를 막을 대책을 찾으려는 국제적 협력에서도 늘 걸림돌이 되는 심각한 문제이다. 이제 좀 살아보겠다는 인도, 중국 등 제3 세계 국가들은 억울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책임을 면제해 주기엔 현재 상황이 너무 심각한 것도 사실이다.

인류세 문제를 과학을 넘어 사회 과학의 영역에서 처음 제기한 역사학자는 디페쉬 차크라바티(Dipesh Chakrabarty)다. 하나의 집단으로 묶기에 인종, 민족, 성 등 인류 안에서도 너무나 다양한 집단들이 섞여 있다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인류를 하나의 ‘종’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왜 선진국들이 저질러 놓은 죄에 연대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제3 세계의 볼멘소리를 무시할 순 없으나, 그보다는 지금 이 위기 앞에서 인류가 공동의 운명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미 인도와 중국의 탄소 배출량은 선진국 수준을 넘어섰다. 차크라바티는 인류세의 문제들을 보는 시각을 더 넓히고, 더 긴 시간 개념을 토대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후 변화를 가져온 데는 자본주의의 에너지 소비 모델 탓이 크지만, 사회주의 국가들도 탄소 배출 문제 등에 무관심했던 역사를 생각하면 현재의 위기는 자본주의나 국가주의, 사회주의 그 어떤 것과도 본질적으로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질학적 세기의 도래를 인정한다면 그 이름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는 물론 인류세이지만, 이것 또한 모두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페미니즘 이론가 에일린 크리스트(Eileen Crist)는 인류세라는 이름 자체가 인간이 지배하는 시대를 인정하는 셈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과 파괴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차크라바티가 말하는 인류세가 여전히 불공평하며 현실을 올바로 반영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 적절한 대안을 찾는다. 환경사학자 제이슨 무어(Jason Moore)가 주장한 ‘자본세(Capitolocene)’는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를 초래하고 그 영향을 증폭한 원인을 ‘자본’으로 적시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세계화와 뗄 수 없이 연관돼 있으며, 이는 크뤼천이 강조하는 영국 산업 혁명보다 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무어는 산업 혁명 시대에 증기 에너지에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15세기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식민화를 통해 대륙 간 노예 무역이 이뤄지며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전례 없는 지구적 사회 변화와 환경의 변화를 촉발했으며, 이를 계기로 인간 사회는 사회적, 물질적, 생물학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글로벌 체계로 통합됐다. 인류세와 자본세 외에도 대농장세 (Platationocene), 반인간세(Anti-Anthropocene), 동질세 (Homogenocene) 등 여러 이름들이 제안됐다.

이처럼 인류세의 정의를 두고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며, 저마다 나름대로 그럴 듯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가 결코 하나의 단어, 몇 줄의 설명으로 명쾌하게 정의될 수 없는 복잡하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인류세 무대에 등장한 비인간


오랫동안 우리는 인간 사회와 자연을 서로 분리된 영역으로 생각해 왔으며, 두 영역은 각기 다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의 영향력에 의해 자연이 변형된 인류세에는 이러한 오랜 믿음이 힘을 잃는다. 차크라바티는 인류세의 기후 변화가 “인간 역사와 자연사 간 벽에 균열이 간 시점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2003년 수단에서 발생해 30만 명 넘는 희생자를 낳은 다르푸르 분쟁[4]은 사회와 자연을 분리해서 보는 전통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수단 정부의 아랍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비아랍인들의 정치적 분쟁이다. 그러나 그 사태의 배경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식수원이 고갈되고 농경지가 감소한 생태계의 변화가 민족 간 분쟁이라는 사회적 갈등 요소를 증폭시켰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일으킨 기후 변화에 기인한다. 인류세에 들어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꼬리에 꼬리를 물듯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가고 뒤섞이고 있다. 그렇기에 이제 인류세에는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가 융합된 ‘지구사 (geo-history)’가 쓰이게 된다. 분쟁의 원인을 단지 사회적, 정치적, 혹은 역사적 요인과 같은 인간의 영역에서만 찾으려 한다면 인류세의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인류세에 인간과 자연의 영역 구분이 흐려졌다는 말은 자연이 이제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연이 인간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시절에는 돌, 물, 바람, 흙과 같은 것들은 무기력한 물질에 불과했다. 그것들은 인간이 필요한 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거나, 아니면 인간이 주인공으로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배경일 뿐이었다. 근대 이전에는 이러한 자연 요소들에도 생명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무를 베거나 땅을 파헤쳐야 할 때는 나무의 정령이나 흙의 정령에게 제를 올려 허락을 구했다. 서구의 근대 과학은 이러한 태도를 비과학적인 미신일 뿐이라고 조롱했지만, 인류세에는 근대 과학의 난폭한 힘에 짓눌려 침묵하던 자연이 되살아나 역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우리를 덮쳐 온다.

늘 똑같은 모습으로 고요히 흐르거나, 댐과 같은 인간의 기술로 다스릴 수 있을 줄 알았던 강이 어느 날 갑자기 무섭게 불어나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뱀이 요동치듯 삶의 터전을 모두 삼켜 버린다면, 그래도 여전히 강이 인간의 의지대로 이용 가능한 죽은 자원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2019년 9월에 시작한 호주 산불은 거의 반년이 지난 2020년 2월에야 진화됐다.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 기온이 올라가고 강수량이 줄어들면서 하늘을 시뻘겋게 물들인 무시무시한 화염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인류세에 와서 “인간의 역사는 얼어붙고 자연의 역사는 미친 듯이 움직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같은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인류세는 인류가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전에는 눈에 띄지 않고 배경에 죽은 듯 숨어 있던 비인간들이 그 존재를 드러내면서 우리 삶과 세계 전반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인류세에 인간이 환경에 미치는 힘은 커졌지만, 동시에 인간의 힘이 지구 환경의 모든 요소들과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게 되면서 인간은 한편으로 한없이 무력하고 취약한 존재가 됐다.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행위성’은 이전까지 오로지 인간만의 것이라 여겨졌지만, 이제는 비인간들도 비록 작을지라도 행위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행위성은 비인간들의 행위성에 의해 제한된다. 라투르는 도로의 과속 방지 턱을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다. 과속 방지 표지판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폭주족이라도 방지 턱 앞에서는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과속 방지 턱은 우리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우리의 행위성에 제한을 가하는 행위자 역할을 한다. 정치생태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이를 ‘분산된 행위성(distributed agency)’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삶에서 기술적 도구들로 연결성이 강화되면서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을 포함하는 네트워크는 점점 더 커지고, 비인간 행위자들에게도 행위성이 분산된다. 인간은 네트워크와 비인간 행위자에 더 많이 의존하고, 그만큼 더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직장도 학교도 갈 수 없었던 지난 2년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아무리 외부 활동을 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해도 바이러스라는 비인간 행위자는 우리의 행동을 제약한다. 그리고 뒷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한갓 미물로만 여겼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이런 막강한 힘을 휘두르게 된 것도 인류세의 변화들 탓이다.

 

인류세 장애와 지구에 묶인 자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기후 재앙 뉴스들을 보노라면 인류세가 인류의 마지막 시대가 되는 건 아닌가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이 어린 학생들과 젊은 세대에게는 이러한 위기감이 더 날카롭게 닿아 온다. 이러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꿔보려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젊은 세대의 대표 주자가 스웨덴의 10대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다. 툰베리는 우리가 지금 비상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2018년 학교에 가는 대신 의회 앞에서 기후 변화 대책을 요구하는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지금 집이 불타고 있는데 학교에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다른 10대들의 동조를 얻어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FFF)’ 집회로 확산했다.

툰베리의 목소리는 현재 상황의 위급성을 알리려는 듯 절박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목소리에 호응해 행동에 나서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전 국토가 불바다가 되고 수도가 가라앉으며 빙하까지 녹아내리는 유례없는 위기들에 비해, 사람들의 구체적인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미미한 편이다. 환경 파괴의 대가를 치르는 건 다음 세대이지만, 지금 환경 정책을 바꿀 힘을 쥐고 있는 건 나이 든 기성세대인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후 변화를 막으려는 노력의 성과는 시원치 않다. 기후 변화 대응은 특정 국가나 몇몇 지도자들의 인식 변화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기후 변화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거나 사실로 인정한다 해도 당장 나의 문제로 인지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 일상과는 관계없는 너무 거창한 이야기이거나, 나와 무관한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빙하가 녹아 삶의 터전을 잃은 북극곰이 나오는 환경 단체의 공익 광고는 귀여운 북극곰에 대한 동정심을 자극할지 몰라도 우리 신세가 북극곰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현실은 잊게 만든다. 일각에서는 인간이 환경을 망쳐 놓았으니 멸종될 운명을 피할 수 없고, 그래도 마땅하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있다. 심지어 인간이 지구의 암적 존재가 되었으니 다른 생명체들을 위해서는 인간이 사라져 주는 편이 낫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온다.

인류세가 인류의 종말을 목도하는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경고들이 이어지는데도 왜 우리는 툰베리가 호소하듯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을까? 여러 이유가 복잡하게 얽혀 있겠지만 일단 기후 변화, 종 다양성 감소, 해수면 상승 등 인류세 위기들의 규모가 인간의 지각 범위를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인식하거나 실감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대기 구성의 변화는 산업 혁명을 기점으로 수백 년, 농경 시작을 기점으로는 수천 년에 걸쳐 인간 활동이 누적된 결과다. 길어야 100년을 사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그 시작과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지구 기온 상승이 심각한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다들 막연히 내가 죽고 난 뒤의 먼 미래에나 닥칠 일이려니 생각한다.

게다가 우리 몸속에 쌓이는 미세 플라스틱, 방사능, 화학 물질 등은 현미경이 아니면 보이지도 않으며, 몸속에 들어온다고 해서 당장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오염 물질들이 우리 환경 전반에 넓게 퍼져 있고 우리 건강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과학적 실험과 조사를 거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인식하기 어렵다. 이렇듯 우리 눈에 당장 보이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사이에는 큰 인지적 부조화가 있다. 문학 평론가 티머시 클라크(Timothy Clark)은 이 괴리를 ‘인류세 장애(Anthropocene disorder)’라 부른다. 방사능, 오염 물질과 같이 치명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은 근대 이후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등장한 새로운 위험들의 특성이며, 인류세의 위험이 갖는 특성이기도 하다. 문학 이론가 티머시 모턴(Timothy Morton)은 이러한 방사선, 탄화수소처럼 인간의 시공간상에 대규모로 분포한 것들에 ‘초과물(hyperobjec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초과물의 여러 특성 중 하나는 우리에게 찰싹 달라붙거나 우리 몸속으로 침투해 뒤섞이는 점착성이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강렬해진 햇빛은 발진이나 화상, 암의 형태로 드러나고 비스페놀 A, 방사선, 수은(水銀)은 보이지 않게 우리 몸속을 흘러 다닌다. 모턴은 이렇게 말한다. “초과물을 이해하려 애쓰면 애쓸수록, 우리가 그것들에 달라붙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초과물들은 나를 온통 뒤덮고 있다. 초과물이 곧 나 자신이다.”

‘초과물이 곧 나’라는 말은 나와 다른 존재들을 명확히 구분하는 선을 긋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시사한다. 내가 버린 플라스틱이 돌고 돌아 내 몸의 일부가 되듯이, 나의 운명은 다른 모든 존재들과 공동의 운명으로 얽혀 있다. 일론 머스크가 화성 개발 계획을 추진한다지만, 모두가 우주선을 타고 화성으로 이주할 수는 없다. 인류세에 나 혼자만의 안전지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몸이 외부로부터 단단히 밀봉돼 있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은 코로나19 판데믹을 겪으면서 이미 깨졌다. 마스크를 쓰고 백신을 맞는 것은 나의 건강을 위해서이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라투르는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준 깨달음은 우리가 탈출할 수 있는 ‘거대한 외부 (Great Outside)’란 어디에도 없고, 우리는 이 사태 이전부터 이미 지구에 격리된 상태였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지구 행성의 이미지는 아폴로 17호가 우주에서 찍은 푸른 구슬(The Blue Marble)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신처럼 지구 바깥의 초월적인 자리에서 지구를 조망할 수 없다. 우리는 땅 위에서, 대기 속에서, 모든 생명체와 비생명체들과 함께 뒤엉켜, 라투르의 표현처럼 ‘지구에 묶인 자(Earthbound)’로 존재한다.

 

인류세를 위한 상상력


인간과 비인간의 운명을 공동의 것으로 상상한다는 것은 인류세 이전에는 해본 적 없는 경험이다. 오롯이 혼자서, 나의 의지로 내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서구 근대 개인주의의 신화는 깨졌다. 낯설더라도 우리는 이제 수천 킬로미터 밖 북극곰의 운명이 나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으며, 수천 년 전 농사를 지으려고 밀림을 불태운 행위의 결과가 지금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수치 자료들을 보아도 이렇게 멀리 떨어진 세계와 긴 시간대는 여전히 마음에 잘 닿지 않는다. 앞서 살펴 보았듯 기후 변화의 복잡성 때문에 인간의 행동과 전체 지구 환경 사이에서 어떤 피드백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고, 이러한 불확실성은 인류세의 위기들로부터 나의 책임을 면제할 구실이 된다. 그렇기에 인류세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필요한 건 상상력이다.

우리가 인류세의 위기를 아무리 뉴스에서 접해도 내 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상상력의 부재다. 인도 소설가 아미타브 고시(Amitav Gosh)는 “인류세의 위기는 곧 문화의 위기이며, 문화의 위기는 곧 상상력의 위기”라고 말한다. 나와 다른 남의 처지를 내 처지로 상상해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공감 능력도 발휘되기 어렵다. 그는 “우리가 기후 변화를 상상할 수 있다면, 기후 변화를 더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숫자로, 과학적 사실들만으로 인류세를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인류세의 현실을 가리키는 사실들은 단순한 경험적 관찰이 아니라 엄청난 데이터와 계산을 통해서 산출된다. 과학적 관찰과 모델링을 통해 1990년대 이후 기후 변화의 현실에 대한 명확한 동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과학적 동의를 어떻게 새로운 이름으로 번역할 것인가이다. 이 번역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인류세의 문제들이 우리가 머리로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세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데 행동이 나올 리 없다. 더군다나 그 행동은 우리가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류세의 위기를 알아도 남의 일처럼 여기는 또 한 가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류세의 문제들은 당장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 반면, 약간의 비용만 치르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소비 자본주의의 편익들은 너무나 달콤하다. 인류세가 새로운 시대의 공식 명칭이 된다 해도, 자본세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핵심적인 본질을 꿰뚫는 중요한 키워드다. 인류는 지구에 등장한 이래로 모든 환경을 인간에게 이롭도록 변형해 왔지만, 이러한 변화를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까지 가도록 증폭한 결정적인 요인은 자본이다. 수천수만 년간 땅속에 축적된 탄소를 화석 연료 즉,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인류는 전에 없는 풍요를 누리게 됐고, 역사상 처음으로 굶주림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렇기에 지구 온도가 올라가고 해수면이 상승해도 현재 누리는 문명의 편리함과 물질적 풍요를 포기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당연하고 유일한 삶의 형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고기들이 물의 존재를 굳이 의식하지 않듯이,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자체인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삶의 형식을 상상하기 어렵게 됐다. 기후 변화 부인론자들이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환경론자들의 주장을 우리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말은 틀리지 않다.

우리의 일상이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 보여도 세계 다른 어딘가에서, 이 일상의 배후에서 점점 커 가는 거대한 변화의 규모와 강도를 가늠하려면 우리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 앞에 전개될 인류세의 미래를 상상력으로 그려볼 수 있다. 이를 상상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지금보다 나아진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꿈꿀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인간과 더불어 무수히 많은 생명체와 비생명체들까지 제각기 한몫을 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상상력은 필요하다. 이 새로운 이야기는 인간이 유일한 주인공인 ‘역사(History)’가 아니라 모두가 참여하는 ‘지구 이야기(geostory)’이다.

이야기, 혹은 내러티브는 상상을 행동으로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인간은 이야기를 구성함으로써 주변 세계를 이해한다. 임상 심리학자 사이먼 바론 코헨(Simon Baron Cohen)은 저서 《마음맹(盲, Mindblindness)》에서 자폐증을 겪는 아이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내러티브로 연결하지 못해 주변 상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설명한다. 인류세의 내러티브는 인류세 상황을 재현할 뿐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 인식틀의 역할을 한다. 내러티브는 다루기 힘든 현실에 패턴과 질서를 부여해 주고, 과학적 사실들과 사회학적 분석을 일관성 있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연결한다. 생태학자 얼 엘리스(Erle C. Ellis)는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고 세계, 그리고 그 안의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맺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 사회가 언제나 내러티브를 이용해 왔다고 말한다. 내러티브와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이고, 지구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며, 자연과는 어떤 관계인가를 탐구하고 재설정한다.

그렇다면 인류세에 새롭게 쓰일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티머시 클라크은 인류세가 ‘문턱 개념(threshold concept)’으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이 문턱을 넘는 순간 이전에는 정상이거나 큰 의미가 없던 많은 행동이, 단지 인간의 숫자나 힘에 의해 파괴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턱은 그 이전과 이후가 영원히 달라지는 임계점이다. 이 임계점을 인류의 종말이라는 예정된 결말로 넘어가는 국면의 시작으로 봐야 할까? 임계점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오로지 종말과 파국의 묵시록뿐일까? 그 이야기가 오롯이 인간의 손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손을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직 쓰이지 않았으며, 그 텅 빈 여백이 우리가 놓쳐선 안 될 희망이다.

작가 로이 스크랜턴(Roy Scranton)은 《인류세에 죽는 법 배우기(Learning How to Die in the Anthropocene)》라는 책에서 멸종이 우리 삶의 형식을 바꿀 기회라고 주장한다. 2003년 사병으로 이라크 전쟁에 참여했던 그는 귀국 후 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를 보면서 전쟁의 경험을 떠올렸다. 테러가 아닌 기후 변화가 바그다드에서 보았던 암울한 미래상을 연상시킨 것이다. 실제로 2013년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었던 새뮤얼 로클리어(Samuel J. Locklear) 장군은 오늘날 기후 변화가 핵이나 테러, 중국 해커보다 더 큰 위험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스크랜턴은 인류세가 제기하는 도전은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한다. 인류세는 인간 존재가 무얼 의미하는가,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와 같은 무거운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는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하고 지금의 삶의 방식이 영원히 이어질 거라 믿고 싶어 하지만, 사실 이 문명은 이미 숨이 끊어졌음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며, 바로 거기에서부터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SF, 디스토피아물, 아포칼립스물 등 위기와 파국을 다룬 소설과 영화는 우리가 갇혀 있는 좁은 일상의 벽 너머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우리 문명과 현재 삶의 방식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위하여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이러한 허구의 이야기들은 인류가 처음으로 겪는 전례 없는 위기를 다루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크뤼천의 표현을 빌리면 인류가 들어선 이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을 항해하는 지도이자 나침반, 즉 인류세에 벌어지는 변화의 진폭을 섬세하게 감지하는 지진계가 된다.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다는 점 이외에도 상상력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강점은 정서적 힘이다. 문학 작품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몰입해 대리 체험하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경험은 내가 겪어 보지 않은 고통까지도 상상 속에서나마 느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정서적 감응을 바탕으로 비로소 내 삶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생판 남에게도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의도에서 다음 장부터는 본격적으로 문학과 영화의 상상력을 빌려 인류세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2장에서는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를 통해 인류세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기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3장에서는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를 통해 자원이 고갈된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생존으로 화석 연료와 인류세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4장은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 《스테이션 일레븐(Station Eleven)》의 배경이기도 한 전염병으로 문명이 붕괴한 이후 세상을 생각해 본다. 판데믹을 겪으면서 우리는 어떤 끔찍한 미래도 더는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로 치부할 수 없게 됐다. 5장은 심각한 위기가 닥쳐도 결국은 과학 기술이 우리를 구해 줄 것이라는 오랜 믿음을 되짚어 본다. 환경 문제와 기후 변화를 기술로 극복하려는 시도는 〈설국열차 Snowpiercer〉와 〈인터스텔라 Interstellar〉에서 각각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문학과 영화가 다가올 위기에 딱 떨어지는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판데믹과 기후 재앙의 우울한 소식들 한가운데에서 인류세의 의미를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또 그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새로운 시대의 길을 찾는 시작점으로 충분할 것이다.

[1]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2015년 책 제목.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의 다음 단계로 옮겨가게 된다는 주장이 담겼다.
[2]
지구가 이미 다섯 번의 대멸종을 겪었고, 이제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로 여섯 번째 대멸종이 눈앞에 와 있다는 주장. 2015년 엘리자베스 콜버트가 퓰리처상 수상작인 《여섯 번째 대멸종》에서 주장했다
[3]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앨러모고도에서 실행된 세계 최초의 핵 실험 프로젝트. 티엔티(TNT) 22킬로톤 규모에 맞먹는 플루토늄 핵무기를 폭발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원자력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4]
2003년 수단 정부의 다르푸르 지역 아랍화 정책에 대해 비아랍인들이 반기를 들고 정부군과 민병대를 상대로 투쟁한 유혈 사태. 2010년까지 20만 명 이상 희생됐고, 2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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