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시나리오
3화

예고 없이 찾아온 재앙 ; 〈투모로우〉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뭔가 불길한 일이 닥치려 할 때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날씨는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거나, 앞으로 전개될 재앙의 전조 역할을 하는 일종의 클리셰다. 내 마음이 슬프다고 하늘이 나와 함께 울어줄 리는 없지만, 인물들의 내면과 날씨가 동조하는 이런 장면들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네 가족이 박 사장네 집 드넓은 거실에서 집주인이 된 듯 신나게 놀던 중 먹구름이 깔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장면은 마치 그들이 꿈꾸는 미래가 생각만큼 쉽지 않으리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기상 예보로 미래의 운명을 점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날씨는 기상청 슈퍼컴퓨터로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내일 비가 올지 안 올지도 100퍼센트 확실히 말할 수 없다. 다만 아직까지 기후는 예측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7월보다 12월의 온도가 낮고, 시베리아보다 서울이 더울 거라는 사실은 누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기상학자 케네스 헤어(Kenneth Hare)는 “기후는 날씨에 대한 보통 사람의 기대이다……. 기후는 기대하거나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날씨들의 연속으로 구성된다”고 말했다.[1] 문제는 이 ‘보통 사람의 기대’가 빗나가는 경우다. 아프리카에 폭설이 쏟아진다거나 시베리아 기온이 38도까지 올라간다면 해외 토픽감인데, 이 두 가지 사례가 2020년부터 2021년까지 실제로 발생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보통 사람의 기대를 빗나가는 일이 최근 들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쩌다 한 번이면 몰라도, 예외 현상이 계속 일어나면 더는 예외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뭔가 거대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징후이다. 기후 변화의 시대에 날씨는 더 이상 인간 심리의 반영이거나 사건의 배경이 아니다.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덮치는 중심 사건 그 자체다. 기후가 인간을 제치고 드라마의 전면으로 성큼 나서고 있다.

 

기후 변화를 둘러싼 논쟁


자연과 사회 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인류세에는 기후와 날씨도 단순 자연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 신석기 시대에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래로, 벌목 등 자연 환경을 인위적으로 변화시키는 인간 활동은 계속되어 왔다. 대기 중에 축적된 이산화 탄소 농도는 산업 혁명 시대에 화석 연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화석 연료가 기후에 미친 효과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100년이 넘는다. 1896년 스웨덴 과학자인 스반테 아레니우스(Svante Arrhenius)가 석탄을 태워 나온 이산화 탄소가 지구 온도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를 최초로 계산했다. 1950년대까지는 이런 연구가 관심을 끌지 못했다가 1970년대 이후 ‘환경주의(Environmentalism)’[2]가 부상하면서 인간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과학자들이 온실가스가 지구의 온도를 높이고 있음을 발견했다. 2001년에는 전술했듯, IPCC에서 인류 문명이 심각한 지구 온난화 효과에 직면했다는 데 합의가 이뤄졌다. 과학 사학자 나오미 오레스케스(Naomi Oreskes)는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전미 과학 저널에 실린 지구 온난화 주제의 논문 928편의 초록을 조사한 결과, 기후 변화의 규모와 방향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다 해도 기후 변화가 인간에 의해 초래됐다는 사실 자체에 동의하지 않은 과학자는 단 한 명도 없음을 밝혀냈다. 그는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기후 변화가 현실임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이 지구의 가장 기본적인 물리적 프로세스를 변화시키는 지질학적 행위자가 됐음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이 뒷받침하듯이, 기후 변화가 이미 광범위하게 진행 중이며 인류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가공할 재난을 가져오리라는 경고의 목소리는 절박하다. IPCC의 기후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2100년까지 지구의 평균 온도는 4도 가량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럴 경우 아프리카, 호주, 미국, 남아메리카 파타고니아 북부 지역, 아시아의 시베리아 남부 지역은 열기와 사막화, 홍수로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환경으로 바뀐다. 2016년 파리 협정(Paris Agreement)이 체결될 당시, 2도 정도의 기온 상승이 인류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수해야 할 최후의 마지노선이라 했지만 그 선은 이미 한참 넘어 버렸다. ‘기후 변화 대응 행동 분석기관(Climate Action Tracker)’의 분석에 따르면, 파리 협정에서 협의한 약속들을 모두 실행해 온실가스 배출을 막는다 해도 약 3.2도의 기온 상승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이미 인류가 배출한 온실가스 양으로 인해 기온 상승은 막을 수 없는 일이 됐다는 것이다. 그럼 굳이 온실가스를 줄이고자 애쓰지 않고 살던 대로 산다면? 그 대가는 4.5도의 상승이다. 파리 협정의 목표를 달성해 2도 정도만 기온이 올라갔을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결과는 이렇다.

① 해수면이 0.5미터 상승해 방글라데시 다카, 미국 뉴욕을 비롯한 수십 개 대도시에 사람이 거주할 수 없게 되고 1억 4300만 명은 기후 난민이 될 것이다.
② 기후 변화로 무력 분쟁이 대략 40퍼센트 증가할 것이다.
③ 아마존의 20~40퍼센트가 파괴될 것이다.
④ 4억 명이 물 부족에 시달릴 것이다.
⑤ 모든 동물 종의 절반이 멸종 위기에 놓일 것이다.
⑥ 모든 식물 종의 60퍼센트가 멸종 위기에 놓일 것이다.[3]

재앙의 목록은 무수하지만 여기까지 하겠다. 대부분의 기후 변화 연구는 2100년까지를 종점으로 모델링하는데, 일부 기상학자들은 그 이후의 100년을 ‘지옥의 100년(century of hell)’이라 부른다. 어떤 세상일지 상상하지 않는 편이 낫거나, 아예 상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섬뜩한 예측들이지만, 기후 변화가 인간 탓이라는 학계의 연구 결과에 모두가 수긍하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기후 변화에 반응하는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기후 변화 따위는 아예 없다거나 설령 있다고 해도 지구의 온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지 인간 탓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기후 변화 부인론자들의 태도다. 대표적으로 2017년 파리 협정 탈퇴를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여기 속한다.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기후 변화는 중국 정부가 미국 경제를 파탄 내기 위해 지어낸 사기극”이라고 주장한 트럼프는 파리 협정이 미국 경제에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는 2018년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경고한 미국 연방 기관들의 〈기후 변화 보고서〉에 대해서도 “나는 보고서를 믿지 않는다”고 당당히 밝혔다.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진실이 아니라는 트럼프의 뻔뻔함에 최근 ‘탈진실(post-truth)’이 철학과 사회 과학의 주요 연구 주제로 부상했다. 탈진실은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기보다는 ‘진실이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종속된다’는 입장이다. 미국 여론 조사 전문 업체 퓨 리서치(Pew Research Center)는 미국 공화당 지지자의 67퍼센트가 지구 온난화를 부정하는 데 비해 민주당 지지자들은 64퍼센트가 온난화가 사실이며 인간이 그 주범임을 인정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소속 집단의 정치·문화 성향에 사실 판단이 좌우되는 ‘정체성 편향’이 지구 온난화 문제에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아미타브 고시는 기후 변화 부인론자들은 기후 변화에 대한 주장을 우리의 생활 방식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를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라는 식으로 음모론의 렌즈를 통해서 본다고 지적한다.

찬반 논쟁에서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는 언론의 기계적 중립도 ‘사실 아닌 것이 사실로 둔갑’하는 데 한몫을 한다. 앞서 오레스케스의 연구 결과에서 보았듯이 기후 변화에 동의하는 과학자의 비율이 압도적이라 해도, 언론에서 양쪽의 주장에 똑같은 비중을 두어 다루는 방식은 반대 측 입장에도 상당한 근거가 있으며 기후 변화의 사실 여부는 여전히 논쟁 중이라는 오해를 초래하기 쉽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 행태에는 중립성과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일견 훌륭해 보이는 원칙만 작용하진 않는다. 그 뒤에는 화석 연료에 의존하는 거대 기업들과 에너지 억만장자들의 후원이 있다. 이들의 후원을 받은 일부 과학자들과 로비스트들은 과학적 연구 결과와 통계를 입맛대로 교묘히 취사선택해 자신들의 주장을 그럴듯한 사실로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수법은 담배 회사들이 담배의 인체 유해성 논란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오랫동안 써먹은 것으로, 이제는 기후 변화 문제에서 적극 이용되고 있다.[4]

이처럼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모두가 툰베리처럼 현실을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이런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많은 이들이 기후 변화가 사실인 줄 머리로는 알지만, 진심으로 믿지는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다. 소설가 조너선 포어(Jonathan Foer)는 이러한 이율배반적 반응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화에 빗대어 설명한다. 1942년 폴란드 저항군 얀 카르스키(Jan Karski)가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탈출해 대법원 판사 펠릭스 프랑크푸르터(Felix Frankfurter)에게 자신이 직접 목격한 바르샤바 유대인 거주지역 소탕 작전과 강제 수용소에서의 유대인 학살을 증언했으나, 프랑크푸르터 판사는 다만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카르스키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부인하지 않았다. 단지 믿을 수 없다는 것뿐이다. 대홍수, 해일, 폭설이나 산불 등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후 재앙에 관한 기사를 볼 때 우리 또한 그런 마음일지도 모른다. ‘트럼프처럼 기후 변화가 거짓이라는 건 아닌데 믿지는 못하겠어.’ 기후 변화 논쟁은 여전히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과학 논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다. 과학적 근거와 수치 통계 자료를 들이댄다 해도 논쟁은 쉽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인류세의 많은 문제가 그렇듯이, 기후 변화 또한 우리를 둘러싼 주변 세계의 변화를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고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감정’의 문제이다. 동시에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어온 가치들을 재점검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바꿔야 하는 ‘신념’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얼어붙는다면


2004년에 개봉한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는 기후 변화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개봉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환경 문제를 다룰 때 여전히 자주 언급된다. 이 영화가 개봉된 이후 태어난 사람도 아마 한 번쯤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틀어 주는 〈투모로우〉를 강제 시청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영화적 완성도를 따지기 이전에 기후 변화 문제를 둘러싼 전문가, 일반인, 정치인들의 다양한 반응을 꽤 현실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남극의 빙하 코어를 탐사하던 기상학자 잭 홀 박사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지구에 곧 빙하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는 임박한 기상 이변을 경고하지만, 재난 영화의 흔한 문법대로 고집불통 미국 부통령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홀 박사를 헛소리로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는 무책임한 사이비 과학자라고 비난한다. 물론 예상대로 부통령은 곧 예언을 무시한 대가를 미국 국민들과 더불어 톡톡히 치르게 된다. 일본에서 주먹만 한 우박이 떨어진 것을 시작으로 기상 이변이 전 세계를 덮쳤고, 자유의 여신상이 해일에 잠기고 한파로 뉴욕이 얼어붙는 스펙터클한 대재난이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기후 변화를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듯이, 이 영화도 개봉 당시부터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기후 변화 부인론자들은 영화에서 다루는 기후 변화 자체가 엉터리 거짓말이라고 공격을 퍼부었다. 미국 버지니아대 환경과학 연구교수이자 기후 변화 부인론자로 유명한 패트릭 마이클스(Patrick Michaels)는 《USA 투데이》에 기고한 논평에서 이 영화는 정치 담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과학을 이용한 ‘선동’이라고 비난했다. 기후 변화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영화에서 다루는 방식은 극적 과장과 왜곡이 너무 심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영화 속에서는 빙하기가 잭 홀 박사가 예측한 지 불과 며칠 만에 닥쳐왔다가 6주 만에 물러간다. 이 때문에 지구 온난화를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고 일시적인 기상 재해 정도로 가볍게 해석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기후 변화에 대한 잘못된 재현은 문제의 심각성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다. 괴물의 발자국이 한 발 한 발 다가오듯 한파가 서서히 뉴욕 시내를 덮치는 장면은 블록버스터 영화답게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지만, 현실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기후 변화를 문학이나 영화로 재현할 때의 어려움은 기후 변화가 일으키는 사건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개연성의 법칙과 어긋난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후대의 창작자들이 길이길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을 원칙을 줬는데,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일어날 법한 일을 다뤄야 문학적 허구가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후 재난은 도저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 즉 개연성이 부족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이 문제다.

거짓말 같지만, 짧게 왔다 사라지는 빙하기는 실제로 존재했다. 기원전 1만 4000년경부터 8200년경까지 이어진 드리아스기(Dryas stage)에 10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걸쳐 기후가 급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발생 확률이 극히 낮은 재난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확실한 근거를 기반으로 예측해도 사람들은 잘 설득되지 않는다. 〈투모로우〉의 부통령은 재난 영화에 단골로 나오는 악역이지만, 현실에서도 대부분의 상식적인 사람들은 아마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2012년 초대형 폭풍우 허리케인 샌디(Sandy)가 뉴욕을 강타했을 때, 큰 피해가 발생한 원인은 이를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리 법칙에 기반한 기상 관측 모델은 허리케인의 파급력과 궤도를 사전에 정확하게 예측했다. 단지 샌디가 〈투모로우〉의 빙하기처럼 ‘도저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기상학자 애덤 소벨(Adam Sobel)은 대서양 중부에서 허리케인이 서쪽으로 급격히 진로를 바꾼 예가 기상 관측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에서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고 당시를 설명한다. 이 ‘일어날 법하지 않음’ 때문에 관료들이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긴급 조치를 제때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5] ‘급작스러운 빙하기와 같은 가공할 재난은 전에 일어난 적이 없었으므로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일어난다 해도 나에게 일어날 리 없다’, ‘고로 걱정할 필요도 없다’. 비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인간은 생각만큼 논리적이지 않다. 탈진실처럼 내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가려서 받아들이는 인지 편향이 이 경우에도 비슷하게 작용한다.

기후 변화를 다루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이 이야기에는 전형적인 악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해일이 도시를 덮치고 한파로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도, 날씨의 변덕 탓이 아니라 탄소를 과도하게 배출해 지구의 온도를 올린 악당의 책임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악당의 존재는 뜬구름처럼 모호하다. 대기업? 정부? 트럼프? 과연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모른다. 게다가 그 ‘기후 악당들’ 속에 나도 포함될 수 있음을 인정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기후 변화의 문제는 전통적인 드라마의 플롯에서처럼 선과 악, 이편과 저편이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 그래서 잭 홀 박사는 묵묵히 키만큼 덮인 눈을 헤치고 뉴욕에 고립된 아들을 찾으러 갈 뿐이지, 〈어벤져스(The Avengers)〉 영웅들처럼 때려눕힐 악당을 찾아 나서지는 않는다. 우리가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해 ‘알지만 믿지는 못한다’는 식의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인식과 느낌의 간극 탓도 있지만, 문제의 규모가 가늠도 안 될 정도로 큰 만큼 거기 연루된 책임의 주체도 무수히 늘어난다는 사실도 작용한다. 책임을 모두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다 보면 그 무게는 0에 수렴한다. 모두의 책임인 일은 결국 누구의 책임도 아닌 일이 되고 만다. 책임질 악당이 존재하지 않으니 모두가 기대하는 권선징악의 시원한 결말도 나올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기후 재앙이 일어난 걸까? 아니, 왜 현실에서 정말로 그런 기후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일까?

 

살아있는 지구, 가이아


〈투모로우〉는 여느 때처럼 북극에서 빙하 코어의 변화를 체크하는 잭 홀 박사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지구가 더워지는데 빙하기가 온다니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지구 온난화가 빙하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영화 속 기상학자들의 주장은 사실이다. 영화에서처럼 지구 온난화로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바닷물에 담수가 유입돼 정상적인 해류의 흐름이 교란되면 이상 기후를 일으킬 수 있다. 2004년 미국 국방부는 “20년 안에 지구 온난화로 북극의 빙하가 녹아 해류 순환에 변화가 생겨, 영국과 북유럽이 시베리아성 기후가 되어 전 세계적 기아가 발생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영화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듯한 보고서는 〈투모로우〉가 개봉되기 불과 몇 달 전에 발표된 것이다. 지구의 바닷물은 늘 똑같은 온도, 똑같은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햇볕에 데워지고 그에 따라 염도가 달라지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물론 온도가 계속 올라가거나 끝없이 바닷물이 짜진다면 곤란하겠지만 다행히도 지구는 하나의 살아있는 시스템처럼 바람과 해류를 타고 열을 운반하면서 평형을 유지한다. 지구 해수의 움직임은 컨베이어 벨트처럼 적도의 열을 극지방으로 운반하며 기후 시스템에서 위도 간 열 균형을 맞춰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이 컨베이어 벨트 작동에 문제가 생기면 영화에서처럼 어떤 지역에서는 빙하기가 덮칠 수도 있다. 실제로 비슷한 현상이 2020년 발생했는데, ‘선벨트(Sun Belt)’라고 불릴 만큼 일조량이 많은 미국의 남쪽 주(州) 일부 지역이 북극에서 뻗어 나온 강력한 고기압으로 영하 20도 이하까지 떨어져 알래스카보다도 추워졌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지구 온난화는 어떻게 된 거냐”라며 기후 변화에 관한 주장을 조롱하는 트윗을 날려 기후와 날씨도 구분하지 못하는 무식함을 드러냈다.

해양 컨베이어 벨트 예시에서 보듯이 지구는 대기권(大氣圈), 수권(水圈), 지권(地圈)이 상호 작용하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하나의 시스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1980년대 이후 ‘지구 시스템 과학(Earth System Sciences)’이 시작됐다. 지구를 각 부분이 긴밀히 결합되어 부분의 합보다 전체가 더 큰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봐야 한다는 주장은 1970년대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에서 나왔다.[6] 이 가설은 초기에는 사이비 유사 과학에 불과하다고 과학 공동체로부터 외면받았지만, 결국 지구의 장기적 역학을 이해하기 위해 시스템적 접근을 도입함으로써 지구 시스템 과학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와 함께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1990년대 들어 지구 과학과 지질학계의 관측 방법에 진전이 일어나면서 여러 권역 사이의 물질 교환과 에너지 교환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게 된 덕이 컸다. 또한, 인간 활동의 증가가 지구 시스템 작용에 변화를 일으킨 원인이라는 점을 증명할 수 있게 됐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은 지구를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을, 필요한 대로 쓸 수 있는 ‘죽은 자원’에서 ‘살아있는 전체’로 보도록 생태주의적 전환을 일으켰으며,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강력히 제기했다.

러브록은 1975년 화성의 대기 구성을 조사해 생명체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나사(NASA)의 화성 탐사 계획 ‘바이킹 프로젝트(Viking program)’에서 연구하던 중 가이아 가설의 단초를 얻었다. 그의 연구 대상은 화성이었지만, 이 연구가 지구에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 지구의 생명체를 발견하기 위해 지구 대기가 어떻게 조성됐는지 조사한다면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이러한 발상의 전환에서 시작된 연구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 줬다. 지구가 화성이나 다른 행성과 달리 운이 좋아서, 혹은 신의 섭리 덕분에 생명체가 거주하기에 적합한 대기로 구성돼 생명의 터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구의 생명체들이 진화 과정에서 자신들이 생존하기에 적합하도록 대기 구성을 변화시켜 왔던 것이다. 러브록과 가이아 가설을 공동 연구한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3000만 종 이상의 유기체가 상호 작용하고, 환경의 화학적 성분들과 상호 작용한다. 그리하여 가스, 이온, 금속, 유기적 구성 물질을 자신들의 대사 작용, 성장, 재생산을 통해 생산하고 제거하며, 이런 상호 작용을 통해 지구 표면 온도를 조정한다”고 설명했다.[7]

러브록은 가이아가 ‘자기 조절 시스템(Self-regulating system)’을 통한 능동적 조절로 비교적 균일한 상태의 ‘항상성(homeostasis)’[8]을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가이아가 추구하는 목표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외부 에너지와 지구 내부로부터의 내부 에너지 유입이 변화하는 것처럼, 모든 조건이 변화하는 와중에도 생물들의 생존에 적합한 환경을 끊임없이 조성해 나가는 것”이다.[9] 즉 항상성의 유지가 가이아의 중요한 목표이며, 인간 또한 알게 모르게 가이아의 일원으로서 항상성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인간의 활동이 환경에 지나친 부담을 주면서 시스템을 붕괴로 몰고 가는 상황이다. 러브록은 연구 초기에 가이아는 인간이 일으키는 변화의 충격 정도는 흡수하고 중화할 능력을 지녔으므로 지구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태도를 보였지만, 2008년 낸 《가이아의 복수》에서는 책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듯 이러한 태도에서 돌아섰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의 이름이지만, 인류세의 가이아는 인간을 보듬어 주고, 때로는 인간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니다. 가이아는 인간을 압도하는 비인간적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든 말든 무심하며, 가이아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겁도 없이 시험한 인간들에게 가차 없는 복수를 가할 것이다.

라투르는 러브록의 가이아 개념이 인류세의 지구를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보고 이를 인류세의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러브록은 가이아를 시스템으로 표현했지만, 라투르는 컨트롤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기계적 비유보다는 얇은 ‘생물막(biofilm)’으로 표현하는 쪽을 선호한다. 이 생물막은 불과 몇 킬로미터 두께의 지표면, 해수면, 대기권으로 이루어지며, 거기 속한 모든 생명체와 비생명체들까지 아우른다. ‘막’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이 영역은 안정되어 있거나 단단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 해양 컨베이어 벨트의 예에서 보듯이 대기와 해수는 쉬지 않고 흐르고, 뒤섞이고, 소용돌이친다. 이 생물막은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인 상태이며, 그만큼 위태롭다. 끊임없는 순환으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평형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그래서 라투르는 이 생물막을 다른 표현으로 ‘임계 영역(critical zone)’이라고 부른다.

이 막은 얇고 위태롭지만, 우리가 거주할 수 있는 장소는 오직 여기뿐이다. 러브록과 라투르의 가이아는 전통적인 의미의 자연도, 지구도 아니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에서 대기가 역사적 과정을 거쳐 인간이 생존하기에 적합하도록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다. 생명체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조절되고 구성되었듯이, 이 생물막에서 인간과 인간이 뿌리박힌 환경은 상호 작용하며 분리될 수 없다. 가이아와 우리의 관계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이아 속에 있기도 하고 가이아가 우리 속에 있기도 하다. 1972년 아폴로 17호에서 우주인이 지구를 바라보며 찍은 한 장의 사진 ‘푸른 구슬(blue marble)’은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생명체가 사는 단 하나의 행성, 지구의 소중함을 상기시키면서 환경 운동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신(神)이나 우주인이 아닌 이상 우리는 지구 바깥으로 나가 우주의 어느 한 자리에서 한눈에 지구를 조망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생물막 또는 임계 영역 안에서 흙과 물과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뿜으며 벌레, 잔디, 바이러스와 뒤엉켜 존재한다. 우리는 가이아의 일부다.

 

기후 재앙 시대에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숱한 논란과 비판이 있었지만, 영화 〈투모로우〉가 기후 과학의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기후 변화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지리학자 앤서니 레이세로비츠(Anthony Leiserowitz)는 2004년 국제 환경 저널인 《인바이런먼트(Environment)》지에서 〈투모로우〉 덕분에 2001년 IPCC 보고서에 대한 뉴스 보도가 열 배로 증가했다고 말했다. 〈투모로우〉는 개봉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기후 변화 문제를 다룬 수많은 보고서와 기사에서 끊임없이 언급된다. 영화는 대중의 관심을 끌어올리고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복잡한 숫자와 통계로 풀어내는 딱딱한 수백 편의 연구 논문도 하지 못한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그렇지만 전형적인 할리우드 재난 영화의 공식을 따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한계도 있다. 해일과 한파로 뉴욕이 쑥대밭이 됐어도 빙하기는 지나가고, 주요 인물들은 어김없이 살아남아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잭 홀 박사는 한파로 뉴욕에 갇힌 아들을 구하러 떠나는 것 외에 재앙을 극복하기 위한 영웅적인 노력은 하지 않는다.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가 아들과 감격스러운 재회를 할 수 있던 것은 운 좋게도 그가 뉴욕에 도착했을 시 때마침 살인적인 한파가 물러갔기 때문이지, 기상학자로서의 능력과는 아무 관계없다. 어찌 보면 현실적인 설정이다. 티핑 포인트를 지나 지구 시스템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기후 변화를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들이 자칫 어차피 이 재난을 우리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무력감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기후 변화 문제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짓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믿지 못한다. 심각한 건 알겠는데 한 개인에 불과한 내가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뭔가 한다 해도 이 거대한 흐름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 않다. 툰베리가 유럽 정상들 앞에서 위기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입만 살아서 공허한 말잔치만 한다고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지만, 그것도 잠시, 바다에 조약돌 하나 던진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다. ‘기후 변화 부인론자’까지는 아니지만 ‘기후 변화 회의론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실천 목록은 꽤 길다. 일단 가장 중요한 탄소 배출 감소를 위해 가솔린 자동차를 전기차로 바꾼다. 대부분의 자동차 회사들은 전기차로의 전면적인 생산 체제 전환을 이미 선언하여 실행에 옮기는 중이다. 채식주의자들은 채식이야말로 탄소 배출을 크게 줄여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행동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지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내 식욕과 지갑을 희생해야 할지 아직 마음도 정하지 못했는데 이런 개인의 노력이 다 쓸데없는 짓이고 지구 온난화를 막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기분만 좋아질 뿐, 기후 변화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서 개인의 노력은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기에 너무나 미미하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내려면 자원을 채굴하고 석유와 석탄을 태우며 엄청난 양의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 연료 기업들의 활동을 막도록 정부 정책에 압력을 가하는 정치적 노력이 필요하다. 전 세계에 친환경 정책을 펼치는 정권이 더 많이 들어서도록 선택함으로써 화석 연료 경제 체제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친환경 정책을 내건 정당에 투표하는 것과 고기 대신 샐러드를 먹는 것, 둘 중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맞을까? 둘 중 꼭 하나만이 옳은 주장이고,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까? 개인의 행동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은 분명 맞지만, 그렇다고 오늘 저녁 메뉴로 치킨도 포기하지 못하면서 선거에서 각 정당의 환경 공약을 꼼꼼히 읽어 보고 환경 관련 세금을 올리겠다는 정당에 투표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종이 빨대를 쓰면서 만족감에 취해 이것으로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믿어 버린다면 곤란하지만, 그러한 일상 속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를 둘러싼 더 큰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얼마나 망가져 가고 있는지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더 중요한 행동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일상 속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일 것이다. “행복하니까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때로는 머리로 납득하기 전에 행동하고 습관을 바꾸는 것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태도를 바꿀 수 있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온다는 말처럼, 기후 변화는 우리에게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사소한 변화들이 전체 시스템과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 연결성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울 것을 요구한다. 가이아 혹은 임계 영역, 생물막,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건 중요한 사실은 이 세계 안에서는 멀고 가까운 것, 오래된 과거와 먼 미래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후 변화의 위기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듯, 이 세계 안에서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운다. 기후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이루는 조건이면서 우리의 일상 속 행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연결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기후 변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행동의 첫 단추이자 핵심이다. 살인적인 한파가 뉴욕을 덮쳐올 때, 기상학자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연구에 쫓겨 늘 뒷전이었던 아들의 곁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던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를 위기 앞에서 그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러나 만약 다음번에 다시 기후 재앙이 닥친다면 이번만큼 운이 좋을지는 알 수 없다. 아들에게 안전한 삶과 평온한 일상을 주고 싶다면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가는 것 말고 뭔가 다른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다.

기후 변화가 가져올 끔찍한 미래의 전망을 듣고 있으면 아마도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들이 맞이할 세상을 걱정할 것이다. 자식이 없는 젊은 세대라면 그런 세상에 자식을 낳는 것이 옳은 일일까 곰곰이 생각할 것이다. 《시간과 물에 대하여》에서 아이슬란드 작가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Andri Snær Magnason)은 그가 책을 쓰고 있던 2018년, 94세가 된 그의 증조할머니로부터 자신의 딸의 미래 증손녀가 94세가 될 2186년까지, 262년의 시간을 계산해 본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한참 넘어가는 262년은 추상적인 개념 같지만, 앞뒤로 이어진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만져볼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실체가 된다. 그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상상해보렴. 262년이야. 그게 네가 연결된 시간의 길이란다. 넌 이 시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 거야. 너의 시간은 네가 알고 사랑하고 너를 빚는 누군가의 시간이야. 네가 알게 될, 네가 사랑할, 네가 빚어 낼 누군가의 시간이기도 하고. 너의 맨손으로 262년을 만질 수 있어. 할머니가 네게 가르친 것을 너는 손녀에게 가르칠 거야. 2186년의 미래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다고.”[10] 기후학자들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할 것이라 경고하는 2100년은 아득하게 멀어서 나와는 상관없는 텅 빈 미래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 혹은 그 사람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살아서 겪게 될 시간이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갈 미래의 시간은 우리의 현재와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현재에 한 일들이 그들의 미래를 만들 것이다.

시간상으로 우리의 현재가 사랑하는 아이들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면, 공간상으로도 우리는 다 함께 지구에 격리된 ‘지구 생활자’들로서 운명을 공유한다. 라투르는 판데믹으로 각자 집안에 격리되기 이전에도 우리는 이미 생명체가 거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성인 지구에 격리된 상태였으며, 코로나19 덕분에 이 당연한 사실을 비로소 새롭게 깨달았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 같이 가이아 안에 있어도 기후 변화를 초래한 대가를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치르지는 않는다. 〈투모로우〉에서는 북반구에만 빙하기의 한파가 몰아친다. 잭 홀 박사는 미국인들을 멕시코로 대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멕시코 국경에서는 현실의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 벌어진다. 단지 현실에서처럼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남미의 난민들로 국경이 붐비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한파를 피해 도망치는 미국인들로 아수라장이 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영화에서는 미국 대통령도 피난길에 올랐다가 자동차 안에서 얼어 죽는다. 궁지에 몰린 부통령은 멕시코의 부채를 탕감해 주는 조건으로 미국인들을 멕시코에 대피시키기로 한다.

현실은 전혀 다르다. 전 세계 인구 중 가장 부유한 10퍼센트가 전체 탄소 배출량의 절반에 책임이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1인당 배출량은 가장 가난한 10퍼센트 175명의 배출량과 맞먹는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에 가장 책임이 적은 사람들이 제일 큰 타격을 받는다. 기후 변화에 가장 취약한 나라로 꼽히는 방글라데시는 벌써 약 600만 명이 폭풍 해일, 가뭄, 홍수 등 환경 재앙으로 강제 이주했다. 현재 예상되는 해수면 상승이 현실이 된다면 방글라데시는 전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기고 2500만 명에서 3000만 명이 고향을 떠나게 될 수도 있다.[11]

이러한 기후 난민은 앞으로 급속도로 늘어나겠지만,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타국의 부채를 탕감해 줄 능력이 있는 선진국 국민이기보다는 스스로를 보호할 형편이 되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 출신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오래전 빙하기에는 인류가 조금이라도 살기 나은 땅을 찾아 이동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각국이 더 단단히 국경을 걸어 잠그는 지금 시대에는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기후 재난은 계층에 따라 다른 강도로 닥친다. 〈기생충〉에서 폭우는 사장네 가족에게는 모처럼의 캠핑을 취소하고 돌아와야 하는 정도의 사소한 사건이지만, 기택네에는 하룻밤 사이 그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해 버리는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온다. 〈기생충〉의 폭우 장면은 2021년 9월 뉴욕에서 현실로 재현되었다. 허리케인 아이다가 미 북동부를 강타하면서 이날 뉴욕 맨해튼 파크에 쏟아진 비의 양은 1869년 기상 관측 이래 최고 기록이었다. 그러나 60명이 넘는 뉴욕의 사망자는 맨해튼 파크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부촌인 맨해튼 파크 인근은 잘 갖춰진 배수 시설 덕분에 폭우에도 큰 피해를 면했지만, 지하에 사는 사람이 많은 빈민가에서 사망자의 80퍼센트가 발생했다. 지구는 평평하지 않고, 기후 재난의 결과는 공평하지 않다.

어제 화창하던 하늘에서 오늘은 비가 쏟아지듯, 날씨는 하루하루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지구 어느 곳에서는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삶의 터전을 폭우가 하루아침에 쓸어가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또 예상치 못한 한파로 떼죽음을 당하지만, 같은 시각 반대편 어느 곳에서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여유를 만끽한다. 짧은 시간 범위 내에 좁은 지역을 떼어놓고 본다면 기후 변화의 영향은 고르지 않다. 그러나 나날의 다양한 날씨들을 합쳐 놓고 보면 지속적이고 관성적인 패턴이 드러나듯,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기후의 영향은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한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기후 변화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사실인 줄 알아도 믿지는 못하는 사람들을 행동하도록 만들기는 또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아무리 길게 설명해도 변치 않는 진실이 있다. 기후 변화 부인론자들의 앞마당에도 언젠가는 물이 차오르는 날이 올 것이고, 삶의 터전을 잃고 국경 지대를 떠도는 기후 난민들의 고통이 더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날이 오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바꾸는 것, 믿음을 토대로 한 행동을 바꾸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 해도 손 놓고 가이아가 망가져 가는 것을 언제까지나 방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 가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살고자 하는 절실한 열망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 반대편의 난민들, 내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 지구 온난화로 멸종되어 가는 새와 물고기와 벌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아직은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1]
Kenneth Hare, 〈The Concept of Climate〉, 《Geography》, vol.51, 1966.4, pp.99-100.
[2]
생태학에 기초한 일련의 사상으로, 자연적 환경과의 조화를 증진시키는 사회 운동이다. 즉,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철학이다. 생태학적, 혹은 과학적 환경주의는 생존할 수 있는 물리적, 생물적 환경을 유지시켜야 할 중요성을 강조한다.
[3]
조너선 사프란 포어(송은주 譯), 《우리가 날씨다(We Are the Weather: Saving the Planet Begins at Breakfast)》, 민음사, 2020.10.29, 79-80쪽.
[4]
1953년 담배 속 타르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연구 결과를 담은 논문이 발표되자, 미국 담배 회사들이 공동으로 담배산업연구위원회(Tobaccon Inderstry Research Committee)를 설립하고 지원하여 “흡연이 암을 유발한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주장을 퍼뜨렸다. 담배 회사들은 이렇게 과학적으로 합의된 사실에 대대적인 광고 의혹을 제기하는 식으로 진실을 호도하고 책임을 회피했다. 1998년 흡연 피해자들에게 2000억 달러를 배상한다는 소송 결과가 나옴으로써 40년간 이어진 담배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5]
Adam Sobel, 《Storm Surge: Hurricane Sandy, Our Changing Climate, and Extreme Weather of the past and Future》, HARPER WAVE, 2014.10.14, pp.91-105.
[6]
지구가 대기, 해양, 토양과 생물권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이론이다. 모든 생명체와 지구의 물리적 요소들이 상호작용하여 복잡하고 거대한 생물체와 같은 자기조절체계를 형성한다는 개념
[7]
Lynn Margulis, 《Symbiotic Planet: A New Look at Evolution》, Basic Books, 1999.10.8, pp.31.
[8]
변수들을 조절해 내부 환경을 안정적이고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계의 특성을 말한다. 그리스어 ὅμοιος('유사한'이라는 뜻)와 στάσις('동일하게 유지하다, 버티다'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9]
James Lovelock, 《Gaia: A New Look at Life on Earth》, Oxford Landmark Science, 2016.6.20, pp.227.
[10]
안드리 스나이어 마그나손(노승영 譯), 《시간과 물에 대하여(Um tímann og vatnið)》, 북하우스, 2020.12.7, 28쪽.
[11]
Gore, Timothy, 〈EXTREME CARBON INEQUALITY: Why the Paris climate deal must put the poorest, lowest emitting and most vulnerable people first〉, Oxfam International, 201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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