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완결

그 공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세계적인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에마뉘엘 카레르에게 우울의 덫이 찾아왔다. 예순이 다 된 나이에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은 저자는, 이 병과 싸워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에마뉘엘 카레르, 2017년 ©

거의 예순이 다 된 나이에 이르러서야 자신에게 어떤 질환이 있다고 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심지어 이름도 모르는 그 질병 때문에 평생을 고통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경우 일반적인 첫 반응은 그 질병에 저항하는 것이다. 나도 저항했다. 양극성 장애란 어느 날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한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며, 거의 모든 것에 갖다 붙일 수 있는 병명이라면서 말이다. 그다음 단계는 그 주제에 관해 찾을 수 있는 내용들을 모두 찾아서 읽어보고, 습득한 지식에 기반하여 자신의 인생 전체를 재평가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바로 그 질병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흥분감과 우울감이 교대로 찾아오며, 그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기분은 늘 바뀌는 데다, 누구나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으며, 하늘은 맑게 갤 때도 있고 먹구름이 잔뜩 낄 때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속한 인구집단 가운데 2퍼센트의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때는 평균치보다 더 좋고 안 좋을 때는 평균치보다 더욱 안 좋게 떨어지기도 하며, 그것이 계속해서 이어지면 병적인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양극성 장애는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조울병(manic depressive psychosis)’이라고 불렀는데, 처음에는 이러한 설명이 나와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쨌든 당시 나의 증세는 그중에서도 “조증(manic phase)”과 관련이 있었다. 조증 상태란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옷을 벗거나, 갑자기 페라리 3대를 구입하거나, 또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다가가서 3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구아바를 먹어야 한다고 열렬히 설명하는 상태를 말한다. 예전에 나는 그런 젊은이를 한 명 알고 있었는데, 그는 일단 그런 위기가 지나가고 나면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곤 했다.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양극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최대 20퍼센트 정도는 그런 선택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총명했으며 절망적이었던 그 젊은이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설마 내가 그 청년과 동일한 장애로 고통받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물론 나에게는 우울증 증세가 있었다. 공허함을 느끼는 건 자주 겪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더해서 두 가지의 단계로 진행되는 진짜 심각한 우울증을 겪어 왔다. 이러한 증세는 몇 달 동안이나 이어지는데, 이 기간이 되면 자리에서 거의 일어날 수도 없고, 아주 간단한 일조차도 처리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최악인 것은 상황이 바뀌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울증의 특징이 바로 언젠가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좋은 뜻으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괜찮아질 거야, 두고 봐.” 그러나 당신은 그들을 실망스럽게 바라볼 뿐이고, 심지어 그들을 원망하기까지 한다. 그저 하나 마나 한 말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당신이 일단 우울증에 빠지면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당신이 살아서 그 상황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고, 유일한 탈출구는 자살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견딘다면 조만간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올 것이며, 일단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하게 된다면 그토록 참을 수 없고 끝이 없어 보였던 고통의 상태는 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먼 이야기가 된다.

어렸을 때 나는 실수로 환각성 버섯을 먹어본 적이 있다. 지옥에라도 다녀오는 듯한 경험이었다. 말 그대로 끔찍하면서도 절대 끝나지 않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악몽을 꾸면서도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황하지 마. 나는 독을 먹긴 했지만, 버섯이 다 소화되면 효과는 사라질 거야. 8시간이나 10시간만 지나면 끝날 테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나는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 말을 했는데, 그것은 합리적이기도 했고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동시에 나는 이런 걱정이 들었다. “내가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8시간이나 10시간이 지났을 때도 내가 과연 살아 있을까?”

나는 그걸 이겨냈다. 그리고 일단 살아나서 이런 지옥의 상태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당시의 공포를 금세 잊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루이-페르디낭 셀린느(Louis-Ferdinand Céline)은 《밤 끝으로의 여행(Journey to the End of the Night)》 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삶의 어느 부분에서든 가장 커다란 패배는 잊어버리는 것이며, 특히 당신을 힘들게 했던 상황을 잊는 것이다.”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불행하게도, 나는 우울증이 낯설지 않다. 그러나 내가 처음 정신과 상담을 받을 당시에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 있었다. 양극성 장애의 정의에 따르면, 우울증의 정반대 극성(pole)이 반드시 엄청난 행복감이나 완전한 탈억제(disinhibition)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양극성 장애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적 자살행위(social suicide)나 때로는 자살 그 자체로 이어질 정도의 심각한 상태에서 극도의 희열감을 느끼는 경지로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신과 의사들이 경조증(hypomania, 가벼운 조증)이라고 부르는 상태를 경험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는 쉽게 말하자면 당신이 바보처럼 행동하지만 터무니없는 바보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을 ‘제2형 양극성 장애(bipolar II disorder)’라고 부른다. 불안함을 느끼지만, 크게 기쁨을 느끼는 일도 없다. 오히려 때로는 매력적이고, 이성에게도 적극적이며, 매우 섹시하고, 겉으로는 매우 활기가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나중에 가장 크게 후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았으며 그러한 결정을 절대로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그 이후에는 정반대의 확신이 들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을 시정해보려 노력하지만,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악화하기만 할 뿐이다. 한 가지 생각을 하다가 정반대로 생각하고, 한 가지를 했다가 다시 정반대로 하는데, 이런 상황이 무서울 정도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나와 비슷하고 스스로를 분석하는 일에 익숙하다면, 최악의 사실은 일단 양극성 장애의 진단을 받고 기분의 두드러진 변화가 실제로 확인되고 나서야 과거에 자신이 그랬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뒤늦게 깨달아봐야 별 소용이 없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하든, 행동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한 사람 안에 서로에게 적대적인 두 명의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에 더는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 병과 함께 삶이 무너졌다.

그것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조증의 흥분상태가 있으면 그 이후에는 예외 없이 우울증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끔찍한 기간이다. 첫 번째 단계에 있던 나는 새로운 책과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리고 수많은 가능성과 성취감에 대한 충만함으로 마냥 신이 났다. 나는 파리의 포부르 푸아소니에르 거리(Rue du Faubourg Poissonnière)에 있는 상당히 멋진 아파트를 빌렸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구입했고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인 디저(Deezer)에 가입했는데, 아주 묘하지만 이 두 가지가 내 새로운 삶을 대표하는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한 마리의 쥐가 된 것처럼 외로워졌다. 만나는 여자도 없었다. 어쩌다 여자를 한 명 집에 데려와도 성 기능은 무기력했다. 나의 목덜미에는 비듬이 가득 내려앉았고, 성기에는 포진이 뒤덮였다. 불과 몇 주 전만 하더라도 아주 정확했고, 매우 필요했으며, 충분히 해낼 수 있었던 글쓰기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어버린 채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그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만이 나의 지상과제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그런 상태가 되면 내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나 스스로는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산다는 건 하나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되면 나에게는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진다. 나의 삶은 끔찍한 땀으로 범벅이 되는 침대와 흐리멍덩한 상태로 줄담배만 피우며 몇 시간을 보내는 카페 르 랄리(Café Le Rallye) 사이에 있는 비좁은 길 위로 축소된다. 요즘에도 이 카페를 지날 때면 몸서리가 쳐진다. 거의 두 달 동안 나는 거의 씻지도 않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욕조가 막혔지만 고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침대에 갈 때조차도 우울증에 걸린 남자의 의상을 갈아입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아무런 개성 없는 코듀로이 바지, 구멍투성이의 낡은 스웨터, 그리고 끈이 없는 운동화 차림 그대로였다. 운동화에 끈이 없는 이유는 마치 정신병원에서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불의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조처를 하는 것처럼 나 스스로 그것을 없앴기 때문이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고, 손에서는 물건들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냉장고에 요거트 병을 넣으려고 하면 미끄러져서 부엌의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요거트를 겨우 다룰 수 있게 된 어느 날에는 쌍둥이자리를 본뜬 작은 조각상을 옮기고 싶었다. 마치 제단처럼 선반 위에 올려놓고 있었던 것인데, 불과 몇 센티미터 옮기자마자 그것 역시 떨어트리고 말았다.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적어도 한 시간 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마룻바닥의 두 발 사이에 흩어져 있는 내 사랑의 비밀스런 상징이었던 테라코타 조각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저게 바로 너야. 이보다 더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었을 거야. 모든 것이 부서졌어. 아무것도 고칠 수 없어. 모든 게 끝났어. 
 
파리의 생트안 정신병원 ©Photograph: Serge Mouraret/Alamy

2. 입원, 싸움은 그만한다.

생트안(Sainte-Anne) 정신병원에서의 입원 생활은 넉 달 동안 지속되었다. 내 앞에 있었던 의료기록은 이런 요약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우울병 요소 및 자살에 관한 생각 등 제2 유형 양극성 장애의 맥락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우울 에피소드(depressive episode).” 그리고 좀 더 밑으로 내려가면, 환자의 입원 당시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안면은 무표정과 슬픈 표정이지만 정서적 반응은 있는 중간 정도의 정신운동지연(psychomotor retardation). 허탈감, 성욕장애, 무의지, 상당한 정신적 고통, 일상적인 활동을 수행하면서 초래된 정신적 그리고 신체적 피해를 동반한 무력증. 미래에 대한 기대 하락 및 치료불가능 의식을 가진 우울병 요소. 과도한 곱씹기(rumination),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반복적인 자살 충동 등.”

심리학 용어들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나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약간의 차이를 설명하자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은 우려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극심한 정신적 고통”보다는 덜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곧 이러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조차도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덜 우려스러운 편이다. 나는 그 상태도 경험을 했지만, 그 다음의 네 번째 단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상태는 이미 보잘것없었지만, 지난 며칠 사이에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그전까지 나의 상태는 하루하루 매시간이 지나면서 불안증(agitated) 수준에서 긴장증(catatonic) 단계로 발전했다. 이런 나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란 여동생 나탈리(Nathalie)가 나를 위해 생트안 정신병원에 진료 예약을 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종합병원 지구의 가장자리에 있는 현대식 건물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흰색 가운을 입은 60세의 친절한 의사 앞에 앉았다. 그는 두 눈은 밝은 푸른색이었으며, 목소리에는 거물(bigwig)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조용한 권위가 실려 있었다. 비록 소물(little wig)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내가 의료기록에 적힌 상태 그대로라고 생각한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를 입원시키기로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들이 나를 침대로 데려갔다.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상태를 지켜보아야만 했다.

의사는 나의 증세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했는데, 그것은 성인이 된 이후의 내 삶을 지배해 왔던 신경증(neurosis)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기원을 밝혀내거나 또는 내가 왜 평생을 머릿속에 그렇게나 많은 쓰레기를 넣고 다녔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프다는 것이 중요했다. 마치 내가 뇌졸중이나 복막염에 걸린 것처럼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료진은 나를 침대에 눕혀 놓고 적절한 치료법을 찾을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까지는 자신들도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고 있으며, 나에게 꼭 맞는 치료법을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거물이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걸 찾아낼 때까지 당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퇴원할 수 있게 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프다. 나는 누워 있게 될 것이다. 싸움은 그만할 것이다. 모든 게 잘 풀리도록 내버려 두자. 이 사람들이 나를 돌봐줄 것이다. 우선은 커다란 주사를 맞게 될 것이다.

3. 케타민이라는 구원

다시 의료기록으로 돌아가 보자. “주 2회 케타민(ketamine) 투약 프로그램 포함. 처음 세 차례 투여 시에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없고 조울증 개선.”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케타민은 원래 말 마취제이지만 사람들이 일종의 마약처럼 사용하는 약물이며, 최근에는 항우울제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정신의학 약물에 대해서 내가 아는 지식은 이것이 전부이다. 아무튼 각 치료의 전후에는 살고 싶거나 죽고 싶은 욕구, 자살 충동, 미래에 대한 절망 등의 내용이 적힌 질문지에 답변을 적었다.

첫 번째 투약은 정확히 40분이었다. 그리고 투약이 끝나자 진짜로 끝이었다.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갔다. 투약을 하는 40분 동안은 최고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침대에 누운 자세에서 나는 의식을 되찾았다. 완벽하게 의식을 되찾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가 소곤소곤 말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그들이 나보다 아래쪽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공중 위에 떠 있고 그들은 저 아래의 풍경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공중에 떠 있었다. 나는 떠다니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보였다. 나는 완벽하게 침착했으며, 완벽하게 멀쩡했다. 나는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임사(臨死) 체험을 하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물론 헤로인을 복용했을 때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헤로인을 절대 손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나치게 기분을 좋게 해주기 때문이다. 생트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렇게 놀라운 약물을 맞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처음의 세 차례 투약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부작용도 없이 약물의 효능이 아주 고무적이었고 조울증도 뚜렷이 개선되었기 때문에, 나는 벌써부터 떠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단지 병원을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이 나라를 떠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케타민만 있으면 다시 원래의 프로젝트로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번째 투여: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동반한 부작용, 그리고 안락사를 요청.” 상황이 악화의 조짐을 보이면 우리는 곤경에 빠졌다.

네 번째 투약이 있기 전날 밤, 나는 환각 증상을 겪었다. 내가 비록 많은 기억을 잃기는 했어도, 나의 불안감이 양극성 장애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이한 환각과 함께 시작한다는 점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일단 그러한 우울증의 전조 단계에 이르고 나면, 내가 결국 끔찍하고 지옥과도 같은 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반면에 조증 단계는 그것이 조증 단계라는 사실을 자신이 깨닫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스며든다. 특히 비교적 가벼운 경조증 상태이고, 굳이 길거리에서 옷을 벗거나 충동적으로 페라리를 구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기 스스로에게 멀쩡하다고,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한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정상이며, 심지어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그것이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함정이라고 부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거대한 타격이 기다리고 있다는 전조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침이 되자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나를 단 30분 만이라도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 케타민이었다. 나는 케타민을 너무나도 간절하게 원했다. 그리고 만약에 나의 심리적인 상태를 솔직하게 고백하면 혹시라도 그걸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질문지를 작성할 때 어젯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으며 뭔가 어두운 생각들이 들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약물이 투여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 황홀한 용액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서는 상황이 더욱 악화하였다. 나는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확실했다. 나는 진정으로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의사들이 내 침대의 오른쪽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나를 중유(中有, 생과 사의 중간)의 단계로 데려다주기 위하여 《티베트 사자의 서(Tibetan Book of the Dead)》 를 암송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위쪽으로 한 줄기의 빛이 보였다. 그곳에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출구를 놓치면 안 된다. 이러한 중간의 상태에서, 이처럼 형편없는 삶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고통은 영원히 멈춰야만 했다. 나는 몇 번이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 “죽고 싶어, 죽고 싶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케타민을 투여하고 있을 때면, 한 단어를 말하는 데에도 엄청난 희생이 뒤따른다. 원래는 두 명이던 의사들이 이제는 나의 병실에 네다섯 명이 들어와 있었다. 병실은 너무나도 작아져 있었다. 너무나도 작아져서 하나의 작은 상자로 오그라들었고, 바닥이 천장에 거의 달라붙을 지경이 되었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죽고 싶다고 말했다. 나를 죽이는 게 그들의 업무가 아닌 것은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죽여 달라고 간청했다. 마침내 나를 죽여 달라는 신음과 간청을 들어준 것인지, 아니면 실패한 것인지, 어쨌든 그들은 나의 정신을 잃게 했다. 그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처리했다. 주사 한 방에 퓨즈가 끊어졌다. 모두가 사라졌다. 그런 다음에는 며칠 동안 백지상태가 이어졌다. 이 문장을 추가하지 않았더라면, 이번 장은 이대로 끝나버렸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내용들이 참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 나의 상태는 참혹했다. 그래도 생트안 정신병원에서 나를 치료했던 의사들이 모두 유능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그렇지만 어디에든 멍청이들은 있는 법이다. 이런 일을 겪고 난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동생 나탈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물어본 직원이 있었다. “당신 오빠가 안락사를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파리 센 강 위의 퐁 뇌프 ©Photograph: Gavin Oakes/Alamy

4. 잃어버린 것에도 불구하고

나를 치료했던 정신과 의사는 평생 수많은 우울증 환자들을 만나왔다. 그는 자살의 위험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평가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는데, 나의 경우에는 그 위험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나의 의료기록에 언급되어 있는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제대로 전달할 만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지금의 내가 그때와는 지나치게 멀리 동떨어져 있어서 그 상황을 기억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당시에 내가 사로잡혀 있었던 공포에 적절한 이름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끔찍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상상 이상으로 훨씬 더 끔찍했다. 말로 할 수 없고, 형언할 수도 없으며, 적절한 표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공포를 설명해 낼 수 있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기억하지 않는 게 나을 정도로 끔찍한 공포라는 점이 중요하다. 지금 당장 그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기억할 수 없을, 그런 정도의 공포인 것이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만약에 전기경련요법(ECT)이 없었다면 내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쩌면 ECT가 내 생명을 살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의 상황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던 것은 아니다. 치료 기간 내내 작성된 나의 진료기록에는 “조울증의 개선은 있지만 활력의 뚜렷한 회복은 없는 비선형적 발전”, “불안감 및 부정적 생각이 들며 조울증 현저히 악화”, “기억력 문제 증가”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의 경험에서 이러한 기억력 저하는 ECT 치료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대하면서도 가장 심각한 부작용이다. 환자들은 이러한 부작용이 일시적이고 기껏해야 치료 기간 동안에만 나타날 것이며, 나중에는 기억력이 되살아날 거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지금 3년이 지나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나의 기억은 여전히 폐허의 들판이다.

가끔은 바로 전날에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이야기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또는 그 전날에 우리가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내가 그들에게 소홀하거나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까 봐 끊임없이 걱정이 된다. 아니면 내가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이라고 의심할까 봐 우려도 된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알츠하이머에 걸릴 가능성은 양극성 장애가 있는 사람들보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한 줄기의 희망이 존재한다. 기억력 손실을 전기경련요법의 부수적인 피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수적인 이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친구인 올리비에 루빈스타인(Olivier Rubinstein)이 생트안 정신병원으로 병문안을 왔고, 우리는 구내식당에서 함께 핫초코를 마셨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이러한 기억력 문제에 대해 불평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시를 암기해 봐, 그러면 녹슬어 있는 자네의 기억력 세포들을 깨끗이 씻어줄 거야.” 그래서 비록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시를 외우는 일은 삶을 좀 더 감내할 수 있게 해주었다.

5. 한 줌의 소금이 부족해서

나는 4월 말에 생트안 정신병원에서 퇴원했다. 나의 치료기록은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일시적인 회복세는 좋지만, 증세가 빈번하게 재발함.” 그런데 사실 나는 최소한 3개월 동안은 예전보다 훨씬 더 괜찮았다. 약물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리튬은 주기율표상에서 알칼리 금속의 원소인데, 이것을 리튬염(lithium salt) 형태로 투여하면 기분장애 치료에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이미 1970년대부터 입증되어 있었다. 요즘 나는 이걸 매일 투약하고 있는데, 이걸 맞고 나면 나는 미국의 시인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이 썼던 우울증에 대한 성찰이 떠오른다. 그는 가장 극심한 유형의 조울증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그러다 결국 리튬염 치료를 받고 나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내가 고통스러워했던 모든 것들이, 내가 초래했던 모든 고통들이 그저 나의 두뇌에 한 줌의 소금이 부족해서 생겨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참담할 따름이다. 그리고 만약에 그런 소금의 효능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것을 좀 더 일찍 맞았더라면, 나는 기나긴 악몽을 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했거나 적어도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처럼 급진적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가끔씩 그랬기는 하지만, 나의 삶이 기나긴 악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 역시 리튬의 약효에 잘 반응하는 양극성 환자 그룹에 속하는 것은 사실이다. 리튬은 나의 조증을 덜 하게 만들고, 우울증도 덜하게 만든다. 그리고 생트안 정신병원에 다시 입원하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기 때문에, 남은 평생 순순히 리튬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우울감 등 쉽게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에서 24시간 상담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에마뉘엘 카레르의 《요가(Yoga)》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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