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 세대를 위한 소설

6월 10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작가 에이전시 블러썸크리에이티브와 CJ E&M이 IP 제휴 계획을 밝혔다. 콘텐츠 업계와 문학계의 콜라보는 성공할 수 있을까.

  • 작가 에이전시 블러썸크리에이티브와 CJ E&M이 IP 제휴 프로젝트 ‘언톨드 오리지널스’를 공개했다.
  • 구독 모델이 한계에 다다른 현재, IP 확보는 OTT 플랫폼의 새로운 경쟁력이 된다.
  • 스트리밍 시대에 발맞춰 소설을 읽는 방식도, 쓰는 방식도 변하고 있다.

DEFINITION_ 언톨드 오리지널스
 
  • 언톨드 오리지널스(Untold Originals)는 블러썸크리에이티브와 CJ ENM의 IP 제휴 프로젝트다. 블러썸크리에이티브 소속 작가들이 소설을 쓰면 CJ ENM은 그걸 영화로 만든다. 첫 작품은 소설가 배명훈의 신작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이다.
  • 완성된 소설을 영상화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영상화 논의도 함께 시작한다. 2차 저작물을 만들고자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즉 시간 단축이 핵심이다.
  • 작가 개인이 아닌 에이전시와의 계약 또한 강점이다. 기존 콘텐츠 작가들은 대다수 프리랜서였다. 작가 개인의 컨디션과 일정에 따른 콘텐츠 생산의 편차가 컸다. 에이전시와 계약할 경우 콘텐츠의 질과 제작 주기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KEYMAN_ 블러썸크리에이티브
 
  • 블러썸크리에이티브는 ‘국내 최초의 크리에이터 에이전시’를 표방한다. 블러썸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문단 작가들을 대거 영입한 에이전시라는 의의가 크다.
  • 김영하, 김금희, 김초엽, 박상영, 장류진, 천선란, 김중혁 등의 거물급 작가들이 소속돼 있다.
  • 전속 계약을 체결한 작가에겐 담당 기획 PD가 배정된다. 작품 저작권 관리부터 일정 조율까지 각종 지원 업무를 맡는다. 기존 작가들은 주로 출판사를 통해 소통하고 개인 일정은 본인이 관리했다. 이젠 시스템으로 편입하고 있다.
  • 소속사가 직접 출판도 한다. 자이언트북스는 2019년 블러썸 출판 그룹이 만든 출판사다.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로 인지도를 높였다. 작가 발굴부터 작품 기획, 출판, 2차 콘텐츠 생산까지 기존 문단의 파편적인 업무들을 하나의 프로세스로 묶으려는 움직임이다.

REFERENCE_ 82년생 김지영

소설과 시나리오의 경계는 옅어지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세랑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가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은 올해 2월 콘텐츠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과 영상화 계약을 체결했다. 재가공된 콘텐츠 덕에 원작이 다시 화제를 얻는 순기능도 있다. 조남주 소설 원작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대표적이다. 페미니즘 문학으로 이슈가 된 조남주 작가의 소설을 봄바람 영화사 김도영 감독이 영화화했고, 해당 작품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주목받으며 원작 소설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 즉 소설의 시나리오화는 문단과 영화계가 윈윈할 수 있는 구조다. 기성 작가 혹은 작품의 고정 팬층이 영상의 시청율을 높여 준다. 그 대가로 작가는 이름을 알리고 수익을 보장 받는다.
RECIPE_ IP 확보

OTT 대제전도 한풀 꺾였다. 구독 경제는 더 이상 확장성을 띄기 어렵다.  최근 OTT 1일 구독권까지 탄생할 정도다. 플랫폼은 기껏해야 새로운 장르의 콘텐츠를 소개해 이용자 체류 시간을 늘리거나, 구독료를 올린다. 새로운 구독 모델을 발굴하지 못한다면 OTT의 경쟁력은 IP 확보에 있다. 자체 IP를 발굴하거나 크리에이터와 전속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콘텐츠 기획에 드는 비용을 긴축하는 것이다.

REFERENCE_ 스포티파이와 탑코
 

  •  스포티파이 ;  IP 확보에 집중하는 것은 비단 영상 콘텐츠만이 아니다. 오디오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오디오 플랫폼 스포티파이의 다니엘 에크 CEO는 최근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마켓플레이스 도구(marketplace tools)'를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크리에이터들이 직접 오디오북을 큐레이션하고, 팬으로부터 후원 받을 수 있는 구조다. 크리에이터 생태계를 통해 IP와 팬덤 경제,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단 계획이다.
 
  • 탑코 ;  탑코는 성인 전용 만화 플랫폼 ‘탑툰’을 운영하는 웹툰 스튜디오다. 지난해 1월 웹소설 플랫폼 노벨피아를 론칭했다. 웹소설 시장은 전통적으로 조아라, 문피아 등의 기성 플랫폼이 견고하다. 리스크가 큰 시장임에도 웹툰 플랫폼이 웹소설에 뛰어든 것은 IP 확대를 위해서다. “가장 원천적인 IP가 소설이다. 글에 상상력이 들어가면 웹툰, 여기서 영상화하면 영화”라는 단순한 논리가 탑코 유정석 대표의 핵심이다. 노벨피아는 현재 월정액 가입자 13만 명을 확보했다.

CONFLICT_ 등단
 

  • 스트리밍 서비스 왓챠와 스토리 제작사 안전가옥이 올봄 〈2022 스토리 공모전 : 이중생활자〉를 내놨다.  ‘이중 생활’을 주제로 한 텍스트 콘텐츠를 단편 소설, 시리즈 대본, 웹툰 스토리 3개 부문에서 공모 중이다. 참고 사항엔 ‘모든 수상작에 대해서 왓챠가 웹툰화 및 영상화 작업의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타진한다’는 항목이 있다. 콘텐츠 IP를 확보하려는 OTT의 적극적인 움직임이다.
  • 문단에서 인정하는 ‘등단’의 기준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였다. 하나는 권위 있는 출판사에서 단행본을 출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이다. 위 스토리 공모전은 두 요소 모두 무관하다. 그러나 상금(최대 1500만 원)은 웬만한 기성 문학상 상금만큼 높다.
  • 문단과 문학의 권위가 해체되는 과정은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흐름이다. 그러나 이번 OTT와의 제휴는 그 패러다임을 전환한다는 의미가 크다. 현재까진 문학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내용적 비판이 주를 이뤘다. 이젠 아예 새로운 생태계를 향한 형식적 제안의 단계다. 문학상은 공모전으로, 등단은 섭외로, 명예는 저작료로 대체되고 있다.

RISK_ 원작과 2차적 저작물
 
  • 원작 ;  잘 쓴 작품을 잘 가공하는 것은 어렵다. “다시는 나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체코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본 뒤 던진 말이다. 반대로 작가 김영하는 본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살인자의 기억법(2017)〉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선, 일부러 의견을 남기지 않았다고 밝힌다. 즉 작가는 가공물이 원작을 해할까 염려한다. 감독은 영화의 언어를 모르는 원작자가 개입하는 걸 두려워한다. 그렇기에 2차 가공물의 성공은 단순 흥행의 문제가 아니다.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완전히 다른 두 언어를 조심스럽게 번역하는 과정이다.
 
  • CJ E&M ;  거대 자본은 손쉽게 기존 생태계를 교란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CJ E&M 산하 엠넷(Mnet)이 기획한 〈쇼미더머니〉와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다. 거대 방송 플랫폼이 난입한 결과는 소수의 스타 탄생과 남겨진 서브컬처의 분열이었다. 지난 4월 해체한 하이라이트레코즈는 언더그라운드 시절을 함께한 비프리, 오케이션 등의 랩퍼와 함께 화려한 출발을 알린 레이블이다. 그러나 지나친 방송 노출과 대기업의 힙합 씬 개입으로 이들이 떠나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번 블러썸크리에이티브와 CJ E&M의 제휴에서도 한국 문단의 젠트리피케이션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 블러썸크리에이티브와 계약을 체결한 작가들은 이미 네임드다. 모회사 블러썸엔터테인먼트는 연예 기획사다. 작품과 작가를 대하는 가치관이 기존 출판 업계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엔 기성 작가 혹은 대형 출판 그룹이 문단 내 권력을 형성했다면, 이젠 그 역할을 거대 에이전시가 꿰차고 새로운 장벽을 형성할 수 있다. 무명 작가와 소형 출판사들이 빛을 발하기 어려운 문단의 구조적 난제는 제자리를 맴돈다.

INSIGHT_ 작법

소설 작법의 패러다임 자체가 변하고 있다. 기존에는 감정 표현이나 풍경 묘사에 힘을 줬다. 이제는 캐릭터와 서사를 강조하는 식으로 변모하고 있다.

  • 일부러 2차 가공이 수월한 소설을 쓰는 경우도 있다. 배명훈 작가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썼기에 재미있는 캐릭터를 많이 만들려고 했다.” 서사는 단순하게, 캐릭터는 입체적으로 만들수록 재밌는 시나리오가 된다.
  • 의도가 아닌 습성이기도 하다. 현대 소설의 생산자들은 비주얼 콘텐츠에 익숙한 스트리밍 세대다. 내면을 분석하고 묘사하는 것보다 사건을 덩어리로 만들고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잘한다. 이상과 김승옥이 치열하리만큼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었다면, 김영하와 김초엽은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시공간으로 유인한다.
  • 독자들 또한 스트리밍 세대다. 영화처럼 읽히는 소설에 환호한다. 결국 영상이 지금 대중의 취향을 만들었고, 대중의 취향을 반영한 소설이 인기를 얻었으며, 그 소설들이 영화로 재탄생하고 있다.

FORESIGHT_ 에이전시

아이돌 그룹이 국내에서 붐을 일으키기 시작한 1990년대, 음악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비판이 잇따랐다. 개인이 작사와 작곡을 도맡아 손수 음악을 만들던 시대는 결국 한차례 저물었다. 자본과 욕망의 공장식 생산물이라 비판받던 K-팝도 어느새 하나의 음악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한 지 오래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아이돌 그룹을 양성하듯, 글쓰기에 재능을 보이는 어린 작가들을 발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정 장르에 두각을 보이는 작가들을 범주화해 작가 그룹을 형성할 수도 있다. 이미 시중에 많이 나오는 앤솔러지물[1]의 계획된 버전이겠다. 개인에게 의존하던 창작의 영역은 정교한 공정으로 발전하고 있다. 에이전시의 시대는 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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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 소설, 에세이 등의 작품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모아놓은 출판물이다. 최근엔 여러 작가의 글을 한 가지 주제로 묶어낸 앤솔러지 에세이가 유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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