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은 좌우를 떠났다

6월 27일 - FORECAST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콜롬비아에서 첫 좌파 대통령이 탄생했다. 민생은 좌우가 아닌 ‘변화’를 외치고 있다.

  • 콜롬비아에서 사상 첫 좌파 게릴라 출신 대통령이 당선됐다.
  • 구스타보 페트로 당선자를 향한 지지는 좌우를 떠난 ‘변화’의 열망이었다.
  • 민생을 향한 외침은 전 세계 지도자를 자국으로 소환하고 있다.

DEFINITION_ 구스타보 페트로
 

좌파 연합 ‘역사적 조약’의 구스타보 페트로가 콜롬비아의 첫 좌파 대통령이 됐다. 그의 이력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좌익 게릴라 단체 ‘M19’ 활동 경험이다. M19가 민주동맹 정당으로 전환되며 정계에 입문한 페트로는 상·하원 의원,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 시장을 지냈다. 하지만 우파 역사가 깊은 나라에서 게릴라 출신이란 꼬리표는 그를 따라다녔다. 2010년과 2018년 대권에 도전했으나 녹록지 않았다.


BACKGROUND_ ‘좌우’ 아닌 ‘변화’
 

콜롬비아는 중남미의 대표적인 친미 우파 국가다. 역사상 게릴라 반군 출신, 좌파 대통령은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최악의 상황 속 열린 대선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좌우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변화’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사상 최초로 우파 후보가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빈곤률 40퍼센트, 실업률 11퍼센트라는 먹고 살기 힘든 현실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진 두케 정권의 증세 계획은 기득권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콜롬비아 국민들은 우파 세력을 ‘항상 같은 사람들(los mismos de siempre)’이라 부르며, 그 반대편에 섰다. ‘항상 같은’ 현실에 대한 변화를 촉구했다. 콜롬비아 첫 좌파 대통령 탄생은 국민들이 변화를 택한 결과였다.


STRATEGY_ 먹고사니즘
 

페트로는 선거 운동 내내 ‘변화’를 외쳤다. 민생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빈부격차, 불평등에 지친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이데올로기는 중요치 않았다.

  • 먹고 ; 페트로는 시작부터 빈부격차 시정에 밑줄을 그었다. 회사 배당금, 역외재산를 중심으로 한 ‘부자증세’를 내세웠다. 이를 통해 마련된 재원을 시민들에게 돌려줄 것이라 밝혔다. 무상 고등교육, 건강보험제도 확립 등 사회보장 정책을 강조했다.
  • 사는 ; 러닝메이트로 프란시아 마르케스를 택한 전략도 유효했다. 마르케스는 환경운동가, 아프리카계 여성, 빈민가 비혼모 가사도우미 출신 등 수식어를 다수 보유한 부통령 후보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인종과 계층 등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했다. 불평등에 대한 그의 시선은 콜롬비아의 젊은 세대를 설득했다.

ANALYSIS_ 뉴 핑크타이드
 

먹고 살기에 지친 중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변화를 택하고 있다. 페트로 당선을 기점으로 제2의 핑크타이드가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일었던 좌파 물결과는 차이점이 있다.

  • 핑크타이드 ; 1990년대 말 중남미의 극우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촉발됐다. 1990년대 말부터 약 15년간 남미 12개국 중 10개국에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마르크스-레닌 사회주의가 아닌 21세기 개혁적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의미에서 ‘레드’가 아닌 ‘핑크’ 물결(tide)로 불렸다.
  • 뉴 핑크타이드 ; 과거 반제국주의, 권위주의의 핑크타이드에서 벗어나 진보주의로 흐르고 있다. 각국 좌파 정부의 이념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미국,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다양한 입장을 취한다. 뉴 핑크타이드는 친환경 에너지를 통한 녹색 성장에 집중하고 있다. 자원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과거의 한계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RISK_ 미국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도 핑크타이드 간의 연대는 미국으로서 탐탁지 않다. 미국의 중요한 우방국이었던 콜롬비아의 변화는 미국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민생 문제를 이유로 지지율 부진을 겪고 있는 바이든 정부에게 특히 그렇다.

  • FTA 재협상 ; 페트로는 후보 시절부터 미국과의 관계, 특히 2012년 발효된 FTA를 재협상하겠다고 밝혀 왔다. 미국과의 FTA가 콜롬비아의 원자재 수출 능력을 저해하고 있다는 이유다. 자국의 권리를 우선으로 하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 마약과의 전쟁 중단 ; 미국의 자금 지원을 받아 펼쳐 온 마약 카르텔 퇴출 정책을 바꾸겠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이후, 마약 등의 문제로 중남미를 ‘골치덩어리’ 취급해 온 미국과 거리를 두겠다는 뜻이다.
  • 베네수엘라와 관계 회복 ; 미국은 콜롬비아를 거점 삼아 반미 독재 정권을 고립시키려는 정책을 펴왔다. 그중 하나가 베네수엘라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실제 6월 열린 미주정상회의에 베네수엘라 정상을 초청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하며 멕시코, 볼리비아는 보이콧을 선언했다. 페트로는 당선 직후 베네수엘라와의 관계 회복에 나섰다.

KEYPLAYER_ 중국


중국은 중남미에서 미국의 빈자리를 파고들고 있다. 멕시코를 제외하면 무역면에서 중국은 이미 미국을 앞질렀다. 또 중국은 코로나19 상황에서 ‘백신 외교’에 나섰다. 중국은 중남미 국가에 시노백을 공급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인프라 투자도 적극적이다. 콜롬비아 보고타 지하철 건설 사업엔 중국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중남미는 미중 패권 경쟁의 새로운 장소가 되었다. 경제에 힘을 쏟고 있는 바이든은 중남미 국가들과의 관계 회복에 나섰다. ‘경제 번영을 위한 미주 파트너십(APEP)’를 구상했다.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의 중남미판 격이다. 하지만 관세 인하 등의 내용이 없어 여전히 ‘빈손’으로 접근한다는 지적이 있다. 미국이 멀어진 사이, 중국이 물량 공세를 하며 중남미와 새로운 이해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CONFLICT_ 자원 내셔널리즘
 

페트로는 여전히 미국에 대화의 장을 열어놓고 있다. 뉴 핑크타이드가 과거의 것과는 선을 긋고 있다는 점 또한 미국으로선 다행스럽다. 과거 핑크타이드는 자원 내셔널리즘을 내세워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을 가중시켰다. 뉴 핑크타이드는 자원 중심의 한계에서 벗어나 녹색 성장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한 문제가 남아있다. 자원부국에게 자원이란 여전히 극복하기 힘든 유혹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심화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석유, 구리, 리튬 등 온갖 자원이 풍부한 중남미가 기회를 쥔 상황이다. 자원 내셔널리즘의 유혹에 빠지기 쉬워졌다.


RECIPE_ 좌익 내셔널리즘?

민생에 기댄 지도자는 자국 이익 찾기에 집중하게 된다. 자원 내셔널리즘이 아니라도 방법은 있다. 자국 우선주의적인 태도는 우파만의 것이 아니다. 좌파에도 비슷한 흐름이 있다. 바로 좌익 내셔널리즘이다. 실제로 페트로 당선자는 바이든 행정부를 향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후변화 정책, 아마존 보호 등에 관한 에너지 전환 회의를 제안하는 한편, 자국 에너지 보호에 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페트로는 수락 연설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아마존 열대우림에 흡수되고 있는 온실가스의 배출에 대해 미국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왔다”고 밝혔다. 민생에 골몰한 지도자는 밖을 보지 않는다. 콜롬비아는 자국 에너지 보호를 내세워 안을 다지고 있다.


REFERENCE_ 장 뤽 멜랑숑

실제 프랑스에서는 좌익 내셔널리즘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겨우 재선에 성공했지만, 두 달 만에 의회 주도권을 뺏겼다. 마크롱이 이끄는 중도 르네상스당을 포함한 ‘앙상블’은 하원에서 과반 의석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이런 와중에 ‘뉘프(NUPES)’가 131석을 차지해 제1 야당이 됐다. 뉘프는 극좌 성향의 장 뤽 멜랑숑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대표가 이끄는 좌파 연합이다. 이 배경에도 ‘먹고 사는’ 문제가 있다. 마크롱이 자국 민생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심을 뒀다는 거다. 그 사이 멜랑숑은 불평등 위기, 금융 통제와 부의 재분배, 복지 확대, 공공 주도 에너지 전환을 말했다. 페트로의 공약도 유사한 지점에 놓여 있다. 좌익 내셔널리즘은 쉽게 민생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INSIGHT_ 자국으로 소환된 지도자

먹고 사는 게 어렵지 않았던 적은 없다만, 코로나 판데믹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가 더해졌다. 전 세계인은 매일 아침 신문을 통해 각국의 언어로 ‘먹고 살기 어렵다’는 현실을 확인하고 있다. 40년 만에 최악이라는 인플레이션 앞에 미국도 프랑스도 헤매고 있다. 먹고사니즘은 지도자들을 자국으로 소환했다. 자국의 민생만으로 벅찬 상황에서 글로벌 리더십이 부재하는 지-제로(G-0)가 계속되고 있다.


FORESIGHT_ 정해진 답

그럴 수록 국내 리더십이 중요해진다. 국제적으로 민생 재정비에 나설 때인 것이다. ‘런치플레이션’이란 단어는 당장 우리나라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먹고 사는 게 어느 때보다 간절한 아젠다가 됐다. 전 세계 지도자가 각국으로 돌아가 민생 돌보기에 골몰하는 동안, 우리나라에선 민생 정치가 실종됐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국회는 원 구성을 두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민생 뒤에 볼모라는 단어를 주고받는다. 전 세계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는 좌우를 떠났다. 안주할 것이냐 변화할 것이냐 묻고 있다. 그리고 답은 늘 정해져 있다.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의 장 뤽 멜랑숑을 더 알고 싶다면 〈톨레랑스는 죽었다〉를 추천합니다.
마크롱 정부 2기 정치 진영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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