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깨졌다

6월 28일 - FORECAST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혔다. 미국이 내세웠던 가치도 낙태 접근성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 임신 24주 이전까지 임신 중단을 인정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 현지시간 24일에 뒤집혔다.
  • 낙태가 당장 금지되거나 곧 제한되는 주는 13곳이며 장기적으로 26곳의 주에서 낙태권 폐지 가능성이 점쳐진다.
  • 사법부에서 촉발된 사회 분열의 공식화는 또 다른 의제를 겨냥하고 있다.

CONFLICT_ 문화 전쟁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두고 미국이 깨졌다. 한쪽만의 시위가 아니다. 각지에서 낙태 찬성과 반대파가 격돌했고 각 주의 의회 의사당 앞은 시위대로 가득 찼다. 미국의 여론 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가 2022년 3월 미국의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61퍼센트가 낙태 합법화에 찬성한다. 반대는 37퍼센트다. 예외를 두느냐의 세부적 차이는 있지만 보통 합법을 지지하는 여론이 우세하다. 보통 낙태, 임신 중단의 권리는 여성 인권에 있어 상징적 의제다. 자유의 수호자 미국에선 그렇지 않다. 정치 문법이자 문화 전쟁의 격전지다.
 
  • 문화 전쟁은 전통주의와 진보주의의 충돌을 말한다.
  • 낙태뿐 아니라 동성애 지지와 교육(플로리다의 Don’t say gay bill), 비판적 인종 이론(CRT, Critical Race Theory), 총기법, 기후 위기에 대한 대처, 이민자 정책 등 다양한 쟁점이 충돌한다.

KEYPLAYER_ 3인방

트럼프의 그림자는 유효했다. 바이든은 지난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 이어 트럼프의 유령과 싸우는 중이다. 이번 전장은 연방대법원이었다. 미 연방대법원은 9인으로 이뤄져 있고 사임이나 은퇴, 범죄 행위가 없을 경우 종신까지 임기가 보장된다. 정치적 양극화로 인해 은퇴 시기가 점점 늦어지는 가운데 트럼프 정부에서는 세 번의 대법관 임명 기회가 있었다. 2017년에 닐 골서치, 2018년에 브렛 캐버노, 2020년 에이미 코니 배럿을 연이어 임명했다. 이들은 모두 낙태죄 규정에 합헌 판결을 내렸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던 때 보수 성향 넷, 진보 성향 넷으로 유지되던 균형은 트럼프 이후 보수 여섯, 진보 셋의 구조가 됐다.
NUMBER_ 13

낙태 문제는 곧바로 각 주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낙태를 지지하는 비영리 기관인 구트마허연구소(Guttmacher Institute)는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26개 주가 낙태를 금지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왔다. 판결 이후 13개 주가 즉각 도마 위에 올랐다. ‘트리거 조항’ 때문이다. 연방에서 방아쇠를 당김으로 인해 자동 적용되는 특정 주법(州法)을 말한다. 즉시 낙태가 금지되는 곳도 있고 유예 기간이나 정책 결정자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곳도 있다. 문제는 아칸소와 같은 경우다. 임산부의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만 낙태를 허용하는데, 이는 성폭행이나 근친상간 등에 의한 임신에는 적용할 수 없다. #주별낙태정책현황
 
  • 즉시 시행: 켄터키, 루이지애나, 사우스다코타
  • 30일 후 시행: 아이다호, 테네시, 텍사스
  • 승인 필요: 아칸소, 미시시피, 미주리, 노스다코타, 오클라호마, 유타, 와이오밍

DEFINITION_ 헌법상 권리

발단은 미시시피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낙태 전문 병원이 임신 15주가 지난 태아의 낙태를 금지하는 주법에 제기한 위헌법률심판이다. 이번 연방대법원의 결정은 바로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이다. 미국 연방법은 주법에 우선한다. 미시시피의 낙태법은 6대 3으로 합헌 판결을 받았다. 그렇다면 미국 헌법은 낙태를 규정하고 있을까? 미국 헌법이 1788년에 비준된 이래 낙태권 문제는 주별 해석의 영역이었다. 주마다 낙태법이 제각각인 이유다. 다만 낙태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사례가 있었다. 그 유명한 로 대 웨이드 사건이다.
BACKGROUND_ 로 대 웨이드

1973년, 21살에 임신하게 된 노마 맥코비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낙태를 원했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거짓 신고에도 불구, 산모의 건강이 위협받지 않으면 낙태가 불가했던 텍사스에서는 그의 수술을 거부했다. 제인 로(Jane Roe)라는 가명으로 제기한 텍사스 낙태법에 대한 소송은 로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로와 맞선 검사는 댈라스의 검사 헨리 웨이드(Henly Wade)였다. #로대웨이드타임라인
 
  • 당시 연방대법원은 낙태를 수정헌법 14조의 ‘사생활 보호 권리’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 중절이 허용된 임신 기간은 최대 24주(6개월)다. 이후엔 태아가 모체 밖에서 독립적인 생존 능력(fetal viability)이 있다고 판단해 임신 중절을 금지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낙태를 금지하려는 다양한 주법의 도전을 받아왔다. 임신 6주 후 낙태를 금지하는 텍사스의 ‘심장박동법’이 대표적이다. 각 주의 보수적 낙태법에 제기된 위헌법률심판에서 최근 연방대법원은 결정을 미뤄왔다. 49년 만에 첫 번복 사례가 나왔고 미국은 분열했다.
RECIPE_ 여성과 과학, 종교

낙태는 오래된 논쟁이다. 학교 수업, 대학 강의의 단골 토론 주제였다. 모두가 낙태에 관해 나름의 의견이 있다. 과거 낙태 문제는 윤리 혹은 종교적 신념의 문제였다. 종교의 쇠락과 의학 발전, 사회 인식의 변화와 페미니스트 과학은 논의의 지평을 넓혔다.
 
  • 반종교: 종교의 입지가 현대에 와서 가장 크게 흔들린 것은 2000년대다. 2001년에는 9·11 테러가 있었다.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2006년에 저서 《만들어진 신(The Great Delusion)》에서 종교의 유해성을 주장하며 큰 반향을 얻었다. 많은 전통 종교가 급변하는 사회 구조와 마찰을 일으킨다. 미국의 개신교 역시 그 입지와 당위가 줄어들고 있다.
 
  • 의학의 디테일: 의학 기술이 발전하며 생명 존중(pro-life), 선택권 존중(pro-choice)의 논의보다 임신 3분기의 논의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자궁을 떠난 태아의 독자적 생존 능력이나 사고 능력, 자아 인식 등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이는 로 대 웨이드 판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 재생산권: 사회 인식은 언어를 따르고 언어는 다시 인식을 변화시킨다. 형법은 아직 낙태라는 단어를 쓰지만 태아를 떨어뜨린다는 뜻의 부정적 의미 때문에 모자보건법은 임신 중절·중단으로 표기한다. 이제는 임신과 출산, 낙태를 모두 아우르는 용어인 재생산권 용어의 상용화가 논의되고 있다.
 
  • 페미니스트 과학: 페미니즘은 과학이 남성 중심적으로 발전해왔음을 지적한다. 과학기술학자 임소연은 저서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에서 과학계의 성차별적 태도와 성비 불균형을 비판한다. 과학이 여성의 신체를 왜곡하고 신비주의 서사로 그려내 왔다면 여성주의가 균형있게 뿌리내릴 미래에는 낙태에 대한 또 다른 과학적 진실을 마주하게 될 수 있다.

REFERENCE_ 총기 규제

문제는 낙태 문제가 미국에서 오랫동안 정치적 수사로 소모됐다는 점이다. 한국으로 치환하면 대북 정책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정치권의 낙태 논쟁은 여성과 태아를 인용하지만 정작 중심엔 그들을 향한 고민이 부재하다. 총기 문제도 유사하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전통적 레토릭이다. 지난 5월 텍사스 유밸디의 총기 난사에 이어 6월엔 필라델피아 거리에서, 오클라호마의 병원에서 무분별한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 미 의회는 지난 6월 23일 이례적으로 초당적 합의를 이뤘다. 21세 미만 총기 구매자들에 대한 신원 조회 강화, 구매자의 정신 건강 상태를 당국이 최소한 열흘간 검토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미한 규제다. 수정헌법 2조와 전미총기협회(NRA)의 영향력 아래 ‘자유’라는 표현으로 규제를 늦춰 온 사법부가 낙태 문제에선 ‘생명’을 존중한다는 모순을 보인다. 총기 규제로 구할 수 있는 생명의 무게처럼 낙태권 폐지의 후폭풍은 가볍지 않다.
RISK_ 3600만 명

미국의 시민단체 ‘플랜드페어런트후드’와 ‘인아워보이스’는 대법원의 이번 결정으로 3600만 명의 가임기 여성이 낙태 접근을 박탈당할 것으로 추정했다. 원격 진료 상담으로 낙태약 처방을 알선해주는 비영리 단체 ‘저스트더필’에는 평소 일일 문의량의 네 배에 달하는 100건의 예약 문의가 접수됐다. 낙태가 즉각 금지된 주에서는 병원에서 임신 중절 수술이 모두 중단되며 문을 닫는 곳도 속출했다. 낙태 금지는 저소득층에 치명적이다.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이 불법 시술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INSIGHT_ 분열의 공식화

미국 사회는 갈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최근 분열의 속도가 빨라졌다. 에이미 추아가 2020년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경고한 정체성 정치는 불과 2년 만에 수면 위로 오르며 공공연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 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을 만들고, ‘샌더스 키즈’로 불리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AOC)는 도합 2000만 명이 넘는 소셜 미디어 팔로워를 거느린다. 품위 있어야 할 정치권의 문법은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선동이 됐다. 미국이 내세우는 가치도 흔들리고 있다. 2021년 1.6 의회 폭동에서는 소수의 극단주의 내러티브가 읽혔다. 낙태법 판결로 드러난 미국 사회의 분열은 양극단의 정서가 사회 일반에 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번 연방대법원 판결은 미국의 분열을 공식화했다. 레드, 블루, 스윙 스테이트의 역동성이 상실된 채 내륙과 남부, 도시와 북부의 뿌리 깊은 지역주의의 탄생이 예고된다. 상식과 비상식의 이분법을 대입하면 대립은 심화한다. 볼모로 잡힌 것은 언제나처럼 사회적 약자다.
FORESIGHT_ 깨진 유리창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James Q. Wilson)과 조지 켈링(George L. Kelling)이 1982년 3월에 《디아틀랜틱》에 기고한 〈깨진 유리창〉에서 유래한 깨진 유리창 이론은 방치의 사회심리학을 대표하는 표현이다. 첫 돌이 날아들면 어김없이 더 큰 돌이 날아든다. 낙태죄 규정을 합헌 결정한 법관 중 아버지 부시 정부에서 임명된 토머스 클래런스 대법관은 “향후 우리는 그리스월드, 로런스, 오버게펠을 포함해 앞선 판례 모두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의 판결문 작성을 주도한 새뮤얼 얼리토 주심 대법관은 진보 진영의 확대 해석에 선을 그었지만 이미 유리창은 깨졌다. 동성혼이나 피임, 임신 중절 알약 등으로 논의가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예상되는 일은 험난하다.
 
  • 민주당은 본 사건을 계기로 다가올 11월 8일 중간 선거에서의 결집을 유도하고 있다. 반향은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바이든 정부의 지지율은 인플레이션과 소비자 물가 상승, 진척 없는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30~50퍼센트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다.
 
  • 반면 공화당의 득세는 무섭다. 스윙 스테이트에서 계속 득점 중이다. 특히 플로리다 주지사인 론 드산티스는 범보수 진영에서 트럼프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트럼프 2.0’으로 불린다. 다양성 교육과 집회 금지법, 비판적 인종 이론 등 미국 문화 전쟁의 이슈에서 극도로 보수적 입장을 가졌다. 낙태 접근성의 원복은 요원할 수 있다.
 
  • 이는 전 세계를 비롯해 한국의 낙태 논의에도 영향을 미친다. 2019년 한국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의견을 냈다. ‘단순 위헌’은 즉각 폐지를 의미하는데 이보다 중립적인 결괏값이다. 아직 대체 입법은 무소식이다. 양극화되는 한국 사회가 미국의 정치 지형을 답습할 경우 낙태는 한국에서도 정치 문법으로 소비되며 정작 당사자들을 논의에서 지우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오늘의 포캐스트는 여성은 출산에서 어떻게 소외되는가, 일할 수 없는 여자들, 〈어떻게 유리천장을 깨부술 것인가와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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