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는 계속되지 않는다

7월 8일 - FORECAST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정치 생명 최대 위기 끝에 사임했다. 우리 정치도 무관하지 않다.

  •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여야의 사퇴 압박 끝에 총리직을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 폭탄 발언과 돌발 행동, 파티 게이트와 거짓말로 존슨 총리는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 존슨 총리의 몰락 과정은 한국을 비롯한 세계 정치와 리더십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DEFENITION_ 게임 오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국의 일간 신문 《더 타임스》는 7월 6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에게 ‘게임 오버’를 선언했다. 영국 일간지《데일리 텔래그래프》 역시 ‘토리당(보수당)’에게 보리스를 제거해야 기회가 찾아온다고 말했다. 둘 다 존슨 총리가 일했던 언론사다. 존슨 총리는 현지시간 7월 7일, 보수당 대표직을 사임하고 신임 총리가 선출되는 가을까지 총리직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캐롤라인 존슨 보수당 부의장의 사임이 발표된 직후였다. 그는 스스로 게임을 끝냈다. 무슨 일일까?
NUMBER_ 44

존슨 총리에겐 지옥의 이틀이었다. 지난주 여당인 보수당 원내부총무인 크리스 핀처가 술김에 남성 두 명을 성추행한 과거 전력 및 추가 성비위 문제가 폭로됐다. 존슨 총리는 이 전력을 알면서도 말 바꾸기와 감싸주기로 일관해 논란을 키웠다. 괴짜다운 ‘얼렁뚱땅’은 먹히지 않았다.
 
  • 현지시간 7월 5일 밤부터 44명 이상의 장관과 보좌관이 존슨 총리를 성토하며 사임했다. 1932년 9월 영국의 내각 인사 11명이 줄사퇴했던 기존의 최고 기록을 아득히 뛰어넘은 수치다.
  • 리시 수낙 재무부 장관, 사지드 자비드 보건사회복지부 장관 등 존슨 내각 핵심 인사들의 사임을 시작으로 사이먼 하트 웨일스 국무 장관도 사퇴하는 등 연쇄 작용이 일어났다. #타임라인
  • 존슨 총리가 수낙과 자비드 전 장관의 후임으로 임명한 나딤 자하위, 미셸 도닐런도 이틀 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사직서를 제출하기 전 존슨에게 나라와 당을 위해 사임할 것을 촉구했다.
  • 존슨 총리의 30년 지기 마이클 고브 주택부 장관 역시 총리에게 자진 사퇴를 권고 했으나 존슨 총리가 오히려 그를 해임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한편으로 존슨 총리는 세금 감면이 포함된 경제 정책을 발표해 민심을 달래며 총리직 사수에 나서기도 했다.

KEYPLAYER_ 1922 위원회

36일 만에 원 구성 협상을 타결한 우리나라 입장에선 여야의 총공세가 의아하다. 지금도 내부 권력 투쟁으로 당내가 시끄럽지만 존슨 총리처럼 당의 인사이더에서 비호 세력 하나 없이 급격히 아웃사이더로 전락하는 건 한국 정치를 떠올릴 때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존슨 총리 사퇴에 일조한 보수당의 ‘1922 위원회(The 1922 Committee·The 22s)’는 독특하게도 내각을 견제하는 여당 조직이다.
 
  • 백 밴쳐스(Backbenchers) ; PMQ[1]가 진행되는 영국 의회는 여야가 마주 앉는 구도다. 레드라인에 가깝게 앞줄에 앉은 지도부급 의원이 아닌 뒷 벤치에 앉은 평의원들을 ‘백 밴쳐스’라고 한다. 1922 위원회는 이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어린 신진 의원들이다. 보수당이 중진 의원들 중심으로만 고이지 않는 이유는 이들 위원회의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소신껏 할 말은 하는 집단이다.
  • 운명의 1922년 ; 1922년 당시 영국의 53대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조지는 1918년 12월의 선거에서 자유당과 보수당의 연립 내각으로 대승을 거둔다. 다만 그가 소련과 외교 관계를 맺고 아일랜드의 독립을 승인한 것이 패착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보수당 소속 의원 일부는 런던 칼턴클럽에 모여 연정을 깨기로 결의해 총선을 다시 치르게 됐고 보수당은 과반 득표에 성공했다. 양당제의 탄생이었다. ‘정부를 견제하는 여당’으로서의 기능은 존슨 내각에도 예외없이 발휘됐다.
  • 신임 투표 ; 존슨 총리는 불과 한 달 전에 당내 신임 투표에서 신임 211표, 불신임 148표로 생환한 터였다. 이슈는 ‘파티 게이트(partygate)’였다. 신임 투표는 12개월의 효력을 갖는다. 1922 위원회는 12개월 내 신임 투표를 다시 할 수 있도록 그 규정을 바꾸려 했다. 국내 정치권에서 유사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내부 총질’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을 것이다.

REFERENCE_ 테레사 메이

1922 위원회가 몰아낸 것은 존슨 총리만이 아니다. 존슨에 앞서 보수당 당대표로 총리직을 수행한 영국 76대 총리 테레사 메이 역시 1922 위원회가 신임 투표를 조기 개최할 수 있다며 압박 수위를 높이는 바람에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당시 이슈는 ‘브렉시트(Brexit)’였다. 세 차례나 브렉시트 합의안이 하원에서 부결된 것이 화근이었다. 비운의 총리다. 당시 메이 총리를 비난했던 것은 브렉시트 강경파 존슨 본인이었다. 뒤이은 존슨은 브렉시트를 완수했지만 분열된 영국을 통합하고 이끌어야 할 시기에 오히려 논란에 끌려다녔다.
BACKGROUND_ 파티게이트

존슨 총리의 가장 큰 실수인 파티게이트는 영국의 코로나19 방역 상황에서 터졌다. 2020~2021년 사이 정부 방역 수칙을 위반하며 다우닝가 10번지 일대와 정부 청사 등에서 내각 각료, 보수당 의원, 존슨 총리 등이 모임을 가진 사실이 조사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다. 토론하며 술판을 벌이고 싸우고 토하는 등 난장판을 벌였다. 이 사건이 영국인의 분노를 더 크게 부채질한 이유는 영국의 방역 정책 때문이다.
 
  • 영국은 코로나 초기 전문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느슨한 방역 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감염자가 늘어나고 2020년 4월 존슨 총리가 코로나에 감염되며 상황이 반전됐다.
  • 코로나가 이미 확산한 다음에야 이뤄진 전면 봉쇄는 민심 악화를 초래했다. 존슨 총리는 봉쇄 정책으로 생일 파티를 열지 못한 7살 아이의 손편지에 “모범이 되어주고 있어 고맙다”는 답장으로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 영국은 방역 패스 해제도 다른 나라에 비해 서둘렀다. 영국의 코로나 사망자 수는 7월 7일 기준 18.1만 명이다. 확진자 수가 비슷한 한국 사망자가 2만 4593명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수치다. 파티게이트는 국민적 분노를 키우기 충분했다.

RECIPE_ 쿨한 거짓

영국 공영 방송 BBC는 존슨의 몰락 과정을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크리스 핀처 사건, 파티게이트, 물가 상승 및 세금 인상, 오언 패터슨 스캔들, 아이디어와 집중력 부족이 그것이다. 물가 상승은 1차적으로 외부 요인이고 판데믹 기간 정치 지도자의 지지율 하락은 자연스럽다. 세금 인상 역시 정책 비전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 진정한 패착은 상황을 수습하는 존슨 총리의 방식에 있다. 핀처 사건, 파티게이트, 오언 스캔들 모두 존슨 총리는 거짓 해명과 말 바꾸기로 일관했다. 그가 입은 신뢰의 타격은 비리 등으로 인한 도덕적 흠결과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이는 그만의 가볍고 거침없는 언사, 장난스러움의 문제다. 그는 쿨한 거짓을 일삼았지만 대중의 분노는 뜨거웠다.
CONFLICT_ 폭탄

영국을 흔히 ‘신사의 나라’라고 하지만 영국은 점잖음을 잃어버렸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원지이자 과거 수백 년간 세계를 호령한 유럽의 권위는 정치적 극단주의와 함께 흔들리고 있다. 프랑스가 그랬다. 톨레랑스는 죽었고 앙시앵 레짐(구체제)은 무너졌다. 존슨 총리의 폭탄 맞은 듯한 금발은 사뭇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그는 괴짜다. 존슨 총리 역시 시원시원한 입담과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밈을 양산했다. 언론인 출신으로 방송 패널로 활약하며 사이다 발언을 쏟아내던 그는 총리 당선 이후에도 다양한 폭탄 발언과 돌발 행동을 일삼았다. 애초 브렉시트 완수에 대한 자신감(Get Brexit Done)과 PMQ에서의 인상적인 토론으로 인기를 구가하던 존슨 총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인플루엔셜한 언행에서 발목이 잡혔다.
STRATEGY_ 외풍

존슨 총리가 이슈를 대하는 것에는 일종의 패턴이 있다. 처음엔 부인한다. 진상이 드러나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거나 거짓 해명을 한다. 의회의 비난 수위가 높아지면 국민들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한다. 여론의 비난까지 거세지면 지금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 총리를 관둘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존슨 총리의 캐릭터에서 기인한 서사가 아니다. 전형적인 내로남불과 외풍이다. 한국 정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및 그로 인해 촉발된 에너지, 경제 위기는 영국에게 독이었지만 반대로 총리의 돌파구로 작용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고조되던 시점부터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기까지 존슨 총리는 파티게이트 논란을 잠시 피할 수 있었다. 그는 결국 국제 무대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실패하며 여야의 공세 속에 직을 내려놔야 했다.
INSIGHT_ 쇼맨십 정치의 종말

트럼프의 등장은 탈권위와 함께 이뤄졌다. 그의 ‘스트롱맨’ 리더십은 구체제에 위협을 가했다. 지지자들은 그의 발언을 발칙함과 솔직함으로 받아들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나 ‘오바마 케어’같은 정책보다 철저히 경제 논리로 무장한 자국 우선주의에 환호했다. 국제 사회가 이룩해 온 가치를 뒤집는 포퓰리즘은 미국 사회에 상흔을 남겼다. 로 대 웨이드 판결 번복은 대표적 예다. 존슨 총리를 트럼프에 비견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 역시 브렉시트 완수라는 메시지와 탈권위 행보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말주변과 사이다 발언, 탈권위적 모습, 젊은 세대를 타깃한 밈 정치, 구체성 없는 한 줄 공약 등이 난무한다. 이런 메시지는 강렬하지만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한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던 강원국은 《대통령의 글쓰기》에서 정치 리더의 메시지가 갖춰야 할 품격과 진정성을 논한다. 지금 시대의 정치는 더 이상 정치적 광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극이 아닌 품위와 진심이 요구되는 시대다.
FORESIGHT_ 노동당

야당은 존슨 총리가 총리직에서도 즉각 사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22년 5월 지선에서의 보수당 패배에 이어 자유민주당까지 노동당에 힘을 실어주며 정치 지형의 변화가 예고된다. 그럼에도 차기 총리로 가장 주목 받는 것은 보수당의 경제통 리시 수낙이다. 이외에 벤 월러스 국방부 장관도 책임감 있는 이미지로 지지율이 높다. 노동당은 아직 과반 의석 확보가 어렵다. 파티게이트가 더 불거져 보수당의 타격이 커진다면 차기 총선에서 노동당 당수인 키어 스타머가 총리를 노려볼 수 있다. 독일의 사민당 승리와 숄츠 총리 당선과도 결이 맞는다. 이 경우 브렉시트 잔류파였던 만큼 국제 무대에서 영국의 역할이 달라질 것을 기대해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이민자 문제가 특히 그렇다. 영국은 최근 난민을 르완다로 이송하는 정책을 펴왔는데 이는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존슨 총리의 사임은 영국과 유럽의 관계가 회복될 기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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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정치 지형의 변화와 정치 리더십의 차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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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me Minister's Question, PMQs. 매주 수요일 의회에서 열리는 총리와의 질의응답을 말한다. 영국의 서민원에서 진행되는 헌법관습 절차다. 화려한 언변으로 격식 없이 토론을 나누는 자리로, 쇼미더머니를 방불케한다며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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