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의 기정학개론

8월 2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미국은 반도체 ‘칩4 동맹’을 요구하고 있다. 기정학 시대에 전랑과 경찰 사이 한국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 미국은 한국에 ‘칩4 동맹’을 요구하고 중국은 한국 반도체의 최대 수출처다.
  • 미-중 갈등은 체제부터 관세, 금융을 거쳐 기술로 치달으며 기정학 시대를 열었다.
  • 팹리스를 등지고 메모리에 투자한 한국은 반도체 전쟁에서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DEFINITION_ 기정학의 시대

지리의 시대였다. 지정학은 19세기에 출현해 국제관계를 읽는 틀이 됐다. 붙어 있으면 상호 영향을 받고, 대륙이냐 해양이냐에 따라 전략이 달라진다는 논리다. 서구 열강의 팽창주의가 설명됐고 때론 악용됐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국가 간 갈등을 안보에서 경제로 치환했다. 지경학 개념이 등장했다. 돈이 곧 힘이 됐다. 글로벌 공급망에 따라 자원과 자본이 움직이는 길을 꿰뚫는 게 중요해졌다. 어디를 치기 위해 어디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어디로 실어오기 위해 어디를 거친다는 이야기가 먹혔다. 중국의 일대일로가 설명되고 말라카 해협이나 노르트스트림을 둘러싼 갈등이 설명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지정·지경학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현상 타파 이전 G2로 불리는 미-중의 갈등은 기술 분야로 치닫고 있었다. 5G, AI, 빅데이터, 반도체 등 미래를 움직일 기술의 확보가 패권의 우위를 결정하는 기정학의 시대다.
CONFLICT_ 칩4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 협력체 구축을 원한다. 대만, 일본, 한국을 포함한 속칭 ‘칩4 동맹’이다. 미국은 8월 말까지 참여 여부를 알려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7월 21일 중국은 관영매체 《환구시보》를 통해 칩4 참여가 상업적 자살임을 경고했다. 한국이 2021년 수출한 반도체의 60퍼센트는 중국이 샀다. 미국은 반도체 원천 기술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한국은 사드 때와 같이 선택의 기로에 섰고 침묵했다. 고심 끝에 박진 외교부 장관은 8월 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업무보고 모두발언에서 “반도체 공급망 대화”를 하자는 제안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동맹에서 대화로 단어가 순화됐다. 이에 더해 애초 알려진 데드라인은 없으며 이 대화는 중국 배제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중국에 호기로웠던 현 정권이 유독 긴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RECIPE_ 쌀, 뇌, 총

사람은 먹고 생각한다.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자 거의 모든 전자 기기의 중추 신경계다. 너도나도 자랄 수 있던 짧은 성장주의 시대엔 세계는 이를 두고 경쟁했다. 그러나 세계는 저성장과 자원 고갈, 기후 위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오랜 지정학적 갈등이 부른 전쟁이 남은 품위마저 앗아갔다. 올해 상반기, 곡물 위기는 식량을 무기화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같은 기간 반도체 공급난은 이미 반도체를 무기화했다. 더 우월한 기술을 갖추려는 것을 넘어 그 기술을 상대가 갖지 못하게 만드는 게 중요해졌다. 그래서 ‘칩 워(Chip War)’다. 경쟁이 아닌 전쟁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로 승승장구할 때만 해도 반도체 경쟁은 돈의 문제였다. 이젠 총의 문제가 됐다.
BACKGROUND_ 전장의 밑그림

기능으로 분류하면 반도체는 저장용과 연산용으로 나뉜다. 전자는 메모리, 후자는 비메모리 반도체 혹은 시스템 반도체로 불린다. 미래 산업에선 후자의 중요도가 압도적이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2021년 세계 시스템 반도체는 시장 규모는 4021억 달러(511조 원), 메모리 반도체는 1538억 달러(194조 원) 규모다. 

산업으로서 메모리 반도체는 대개 종합 반도체 업체(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가 설계와 제조를 함께 도맡고 소품종 대량 생산된다. 시스템 반도체는 조립 전문 기업,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Fabless), 생산을 하는 파운드리(Foundry)로 나뉘며 다품종 소량 생산된다. 목적에 따른 맞춤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RISK 1_ 기형적 구조

한국은 반도체 강국으로 불렸다. 그러나 기정학 시대의 반도체 전쟁에서 한국은 무기력하다. 전쟁의 핵심인 시스템 반도체 분야가 약하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를 주력으로 하는 대기업에 인재가 몰리며 팹리스 산업은 중소기업 위주로 성장했다. 파운드리 역시 해외 고객을 우선하느라 국내 팹리스 업체를 등한시했다. 한국의 반도체 스펙은 반쪽짜리 기형적 구조다.
  • 메모리 반도체 ; D램과 낸드플래시는 세계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이 절반을 뛰어넘는다. 메모리 부문은 그야말로 초격차다.
  • 팹리스 ; 한국은 설계 시장 점유율 1~3퍼센트로 추산된다. 유수의 팹리스는 대부분 미국에 있다. 점유율은 미국 64퍼센트, 대만 18퍼센트, 중국 15퍼센트다.
  • 파운드리 ;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주력 분야다. 물론 1위는 대만의 TSMC다. 50퍼센트 이상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올 1분기 16.3퍼센트 점유율로 2위다. TSMC는 파운드리 전문이기에 IDM인 삼성전자보다 고객 선호도가 높다. 삼성전자는 설계 분야의 잠재적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RISK 2_ 수율

파운드리는 희망이 될까?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에 승부수를 띄웠다. 그러나 세계 상위 10개 파운드리 회사 중 삼성전자만 1분기 매출이 역성장했다. 삼성전자는 6월 30일부터 세계 최초 3나노 공정이 적용된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반의 반도체 양산에 돌입하며 반전을 꾀한다. TSMC는 올해 하반기에 3나노 양산이 예정돼있다. 인텔은 아직 10나노 아래로 가지도 못했다. 그런데 퀄컴과 애플, AMD, 엔비디아, 미디어텍 등 주요 팹리스는 TSMC를 선택했다. 왜일까?
  • 나노 ; 반도체에서 나노 기술은 한 웨이퍼(판)에 몇 개의 반도체를 찍어내느냐를 결정한다. 나노 단위가 작아질수록 많이 찍어낼 수 있어 생산 효율이 높아진다. 기존 핀펫(FinFET) 방식의 7나노보다 반도체 성능과 소비 전력도 줄어든다. 회로의 간격이 미세해지기 때문이다.
  • 수율 ; 하지만 핵심은 수율이다. 수확체증 덕에 무어의 법칙은 깨졌다. 수율은 양품 비율을 의미한다. 아무리 미세하게 찍어도 건질 것이 적으면 신뢰도가 낮아진다. 4나노 공정 기준 TSMC의 수율은 70퍼센트, 삼성전자의 수율은 35퍼센트정도다. GAA 기술에서 수율 안정화를 이루지 못하면 핀펫 기반 3나노 양산에 들어갈 TSMC의 고객을 뺏어올 수 없다.

RISK 3_ 반도체 장비

반도체 문제를 논할 때 빼놓아선 안 되는 게 장비다. 글로벌 반도체 장비 상위 4개 기업이 무려 70퍼센트의 점유율을 자랑한다. 1위는 미국의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이다. 2위는 네덜란드의 ASML이다. 3위는 미국의 램리서치, 4위는 일본의 도쿄일렉트론(TEL)이다. 이들은 2021년 R&D 투자에만 8조 원을 쏟아부었다. 생산 공장을 지어도 이 장비가 없으면 생산이 불가하다. 한국의 반도체 장비 기업은 세메스와 원익IPS 등이 있지만 세계 10위권 밖이며 상위 경쟁자와 격차가 매우 크다.
STRATEGY 1_ 프렌드 쇼어링

그에 반해 미국의 전략은 매섭다. 바이든 정부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를 출범시키며 경제와 안보의 합일, 중국 견제, 동맹 외교를 공언했다. 세계화 시대에도 중국은 견제 대상이었지만 이번 전략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생산 설비의 동결이다. 과거 미-중 무역 분쟁 시기에도 미국은 생산비가 저렴한 중국과 이해관계가 있었지만 공급망 위기 이후 급격히 ‘리쇼어링(Reshoring)’을 단행했다. 생산 설비를 다시금 불러들인 것이다. 이 개념을 동맹국으로 확장한 것이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이다. 현지시간 7월 30일 미국 상무부는 자국 내 반도체 장비 업체들에 공문을 보내 14나노미터 공정보다 미세한 제조 기술을 적용한 장비의 대중국 수출을 막았다. 이 칼은 중국을 향하고 있지만 한국도 웃을 수 없다. 한국의 약점인 팹리스와 반도체 장비가 곧 미국의 강점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원천 기술을 가졌다는 것은 이 의미다.
KEYPLAYER_ ASML

칩4 동맹에 있어 한국은 핵심 주체가 아니다. 제로섬 게임 위에 놓인 계륵이다. 반도체 동맹에 플러스 알파가 되는 것은 네덜란드의 ASML이다. ASML은 7나노 공정 이하를 생산할 수 있는 EUV 노광 장비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기업이다. 삼성전자도 EUV를 쓴다. ASML은 이미 EUV를 중국에 수출하지 않고 있지만 그보다 구형 장비인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마저 팔지 말라는 미국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ASML은 결정을 유보하고 있지만 DUV 수출 금지는 중국에 치명타로 작용한다. 대체가 어려운 장비기 때문이다. ASML 역시 중국이 3번째 교역국이라 고심을 이어가고 있다.
STRATEGY 2_ 반도체 산업 육성 법안

미국의 두 번째 전략은 ‘반도체 칩과 과학법’이다. 현지시간 7월 28일 하원에서 가결됐다. 자국 반도체 산업 발전과 기술 우위를 위해 2800억 달러(365조 원)을 투자하는 법안이다.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 65조 원가량을 지원받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22조 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 건설을 진행중이며 향후 20년 내 250조 원을 들여 11곳의 반도체 공장을 추가로 짓겠다 공언했다. SK하이닉스도 최근 28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밝혔다. 문제는 가드레일 조항이다. 중국을 포함한 ‘우려 국가’에 향후 10년간 첨단 반도체 시설을 짓거나 기존 시설에 대한 추가 투자가 금지된다. 중국에 큰 반도체 공장을 이미 갖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타격이 예상된다.
STRATEGY 3_ 인텔

최근 인텔은 대만의 팹리스 미디어텍과 계약을 맺었다. 미디어텍은 이미 TSMC와 생산 계약을 맺었지만 세계적인 시스템 반도체 수급 불안 때문에 생산처 다변화 전략을 꾀한 것이다. 인텔은 2021년 3월 ‘IDM 2.0’ 전략을 발표하며 2024년부터 2나노 첨단 공정으로 파운드리 확장에 나설 것을 공언했다. 반도체 동맹에서 국내 기업의 진정한 적은 IDM이자 미국 기업인 인텔이다. 한국이 칩4 동맹에 미온적일 경우 미국은 파운드리 분야에서 자국 기업인 인텔을 더욱 적극 지원할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INSIGHT_ 차악

반도체 산업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득이 되는 선택지는 없다. 차악만 있을 뿐이다. 한국의 선택은 정해져 있다. 미국 주도의 반도체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중국은 반도체 최대 수입국이자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지만 이미 칩4 동맹 내에서도 입지가 불안한 한국이 기술 우위가 있는 미국에 반기를 들기는 어렵다. 과거 미국이 일본의 반도체 패권을 붕괴시키며 그 반사이익으로 성장한 한국과 대만은 전랑보다 무서운 경찰을 마주하고 있다. 사드 때와 같은 차이나 리스크가 기다리고 있다.
FORESIGHT_ 셔츠 풀어

미국이 구사한 겁박 외교는 중국의 전랑 외교와 닮았다. 일극체제 아래 미국의 힘은 자유주의에 대한 자발적 동의를 전제한 ‘소프트 파워’로 포장됐다. 그러나 연평균 10퍼센트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중국의 부상 속에서 미국은 인내심을 잃었다. 극우 세력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고 말한다. 바이든 정부는 아프간에서 철수하며 세계 경찰임을 포기했다. 한층 노골적으로 변한 대중국 전략은 미중 분쟁이 전쟁으로 격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은 현지시간 7월 29일부터 인도-태평양 지역의 아시아 순방에 나섰다. 대만 방문 가능성에는 함구했으나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만 해협에서 실탄 사격 훈련을 실시하며 긴장 수위를 높였다. 불똥은 대만에 튈 수 있다. 칩4 동맹의 공식화가 대만과의 수교로 인정되면 한국도 안전하지 않다. 기술 냉전은 언제든 뜨거워질 수 있다.


북저널리즘은 반도체를 다룬 다양한 콘텐츠가 있습니다.
오늘의 포캐스트는 〈규석기 시대의 생존 전략〉, 〈모든 칩을 걸어라〉, 《미중 갈등의 구조》와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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