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깨우는 식사
완결

감각을 깨우는 식사

판데믹이 일깨운 것은 연결의 감각만이 아니다. 코로나19는 후각도 일깨웠다. 오감을 동원해 음식과 소통하라.

©Composite: Getty Images / Alamy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잠시만 당신의 엄지손가락을 자세히 살펴봐 주면 좋겠다. 엄지손가락이 앞뒤로 어떻게 구부러지는지 보라. 엄지의 피부가 얼마나 민감하며 점착성은 어느 정도인지 느껴보라. 사람의 엄지는 단지 엄지척(thumbs-up) 신호를 보내거나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줍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우리의 엄지손가락은 과일의 숙성도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현존하는 가장 효율적이며 민감한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에겐 대표적인 특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엄지가 다른 손가락들을 마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훨씬 더 튼튼하고 길고 유연하다. 반면 거미원숭이는 엄지손가락이 없고, 마모셋원숭이는 엄지손가락이 있어도 다른 손가락들을 마주 볼 수 없다. 이렇게 마주 보는 엄지손가락은 우리 인간을 비롯하여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 사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그런데 우리의 엄지손가락이 애초에 이렇게 진화한 이유가 과일이 익었는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16년에 생물학자인 너새니얼 도미니(Nathaniel Dominy)는 침팬지가 무화과를 따는 방식을 연구했다. 침팬지는 손을 다재다능하게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들은 무화과가 어느 정도 익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 손으로 무화과를 빠르게 쥐어보곤 했다.[1] 이는 원숭이들이 사용하는 방식보다 평균적으로 4배나 더 빠른 기술이었다. (참고로 원숭이들이 무화과가 익었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무작위로 과일을 따낸 다음 그것을 직접 깨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익지 않은 과일은 뱉어 버린다.)

인간 역시 이처럼 놀라운 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 번만 만져 봐도 가장 잘 익은 과일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류의 대부분은 손을 더 이상 그런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잘 익은 과일이 먹고 싶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손의 감촉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그냥 가장 가까운 슈퍼마켓으로 가서 이미 손질되어 있는 패키지를 구입하면 된다. ‘잘 익은 간편 과일’이라든지 ‘잘 익은 달콤 과일’ 같은 라벨이 붙어있는 그 과일들은 이미 껍질이 벗겨져 조각 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포크로 찍어서 먹기만 하면 된다.

현대의 인류가 무언가를 먹는 행위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가 마치 감각이 없는 존재들처럼 음식을 섭취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겉모습은 수렵 채집을 하던 선사시대의 조상과 기본적으로는 동일하지만, 무엇을 먹을지 선택할 때의 우리는 거의 항상 감각을 꺼버린다. 우리는 신선한 우유와 상한 우유를 구별할 수 있는 코를 가졌음에도, 직접 냄새를 맡아 보기보다는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걸 선호한다. 인류학자 잭 구디(Jack Goody)는 인간의 감각을 가리켜서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라고 불렀다.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중요한 도구라는 것이다. 감각은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가 가진 많은 감각 기능을 현대의 식품 산업에 넘겨주었다. 식품 산업에게는 잘된 일이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먹을거리와 관련한 건강상의 문제점이 만연하지 않던가.

코로나19 판데믹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한지 드러냈다. 특히 후각이 그렇다. 이제껏 우리 인간은 코로나19가 유발한 후각상실증(anosmia)만큼 빠르고 동시다발적인 감각의 상실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집단적 후각 상실이라는 현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을 꼽자면, 많은 이에게 그 필요성조차 잊혀 있었던 감각이 상실됐다는 사실이었다. 개와 같은 동물들이 후각에 크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과 달리, 인간에게 있어 후각은 오랫동안 뭔가 사소한 것으로, 심지어 반드시 필수적이지는 않은 감각으로 여겨져 왔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후각이 (시각이나 청각에 비해) 인간에게 “극미하게 기여”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 및 철학자 중 하나였다. 2011년에 7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는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노트북이나 휴대 전화를 계속해서 사용할 수만 있다면 후각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실에서 후각 없이 산다는 건 쉽지 않다. 피프스센스(Fifth Sense)는 후각 및 미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지원하는 단체인데, 이곳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후각을 상실한 사람 중 거의 모두에게서 음식이나 음료를 섭취할 때의 즐거움이 줄어들었고, 외로움과 우울함을 느끼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는 사례도 일부 있었다. 피프스센스가 후각상실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 약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는 음식이나 음료를 섭취할 때의 즐거움이 냄새를 맡을 수 있었을 때보다 줄어들었다고 답변한 응답자가 전체의 92퍼센트였다. 절반 이상은 예전보다 외식을 적게 한다고 답했으며, 심지어 요리를 하는 것조차도 스트레스와 불안감의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더 이상 새로운 레시피를 시도하는 기쁨을 즐길 수도 없고, 혹시 재료가 탈 때도 그 냄새를 쉽게 맡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피프스센스의 한 회원은 그들이 음식의 다양한 냄새를 맡으며 누릴 수 있는 기쁨만이 아니라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모두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나는 2021년 9월에 코로나19에 걸리면서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되었는데, 어느 날 아침 매일 마시던 커피에서 아무런 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맛과 향이 느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카페인의 각성 효과와 함께 혀에서 느껴지는 씁쓸함뿐이었다.

지금까지의 데이터에 의하면, 코로나19로 인해 후각을 상실한 사람의 대다수는 몇 주 안에 그 감각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도 이렇게 운 좋은 다수 가운데 하나였다. 어느 날 레몬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기 중에서 선명한 시트러스 향기가 느껴졌다. 감사한 마음에 하마터면 눈물을 터트릴 뻔했다. 그러나 소수의 몇몇은 완치 이후에도 다시는 후각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어느 페이스북 그룹에서 코로나19의 장기 후유증을 겪었다고 밝힌 사람들에 관한 2020년의 연구 논문을 보면,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잃어버린 먹을 때의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를 엿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입맛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는데,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잃어버린 즐거움을 만회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더욱 많이 먹었다고 대답했다. 그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먹어서 느껴지는 만족감이 없으니, 오직 그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 더 많이 먹게 된다. (중략) 절대 충족될 수 없는 만족감을 얻으려는 지속적인 충동 때문에 체중이 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코로나19에 걸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영구적인 후각 상실증이나 고무가 타는 것 같은 끔찍한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이상 후각(parosmia) 증세를 가진 채 살게 되는 사람들은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불과 202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anosmia(후각 상실)’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후각이 삶의 질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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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식과 단절된 아이들


‘anosmia(후각 상실)’라는 단어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우리가 먹을거리와 관련한 많은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행동 중에서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욱 다양한 감각이 동원되는 행위는 없다. 하지만 현대의 세계에서는 심각한 감각의 단절 상태에서 음식을 먹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컴퓨터로 식료품을 구입하거나 휴대 전화로 배달 음식을 주문한다. 그러면 플라스틱 용기에 포장되어 도착하는데, 그래서 첫입을 먹기 전까지는 냄새를 맡을 수도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다. 채소는 미리 손질되어 판매되고, 샐러드 재료들은 거의 대부분 세척이 되어 있다. 그것들을 길러 낸 토양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의 감각이 아니라 포장에 적힌 문구에 의해 먹을거리의 상태를 판단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섭취하는 총 열량의 절반 이상이 초가공(ultra-processed) 식품으로부터 오는데, 이런 초가공 식품의 재료들은 우리 인간의 감각으로는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어 있다. 더구나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이런 음식을 먹는다면, 우리가 섭취하는 먹을거리의 색깔이나 모양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먹을거리와의 이런 감각적 단절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형편없는 식생활을 하는 세태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이는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시중에 판매되는 유아식을 생각해 보라. 이들 중 상당수는 일회용 팩에 포장되어 판매되는데, 과일과 채소를 걸쭉한 퓌레(purée) 형태로 만들기 때문에 원재료의 색상이나 형태는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이런 제품들은 내용물이 유기농이라고 자랑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모들이 이러한 식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집 밖에서도 아이들에게 먹이기가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퍼스트스텝스뉴트리션트러스트(First Steps Nutrition Trust)가 2018년에 펴낸 보고서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이런 팩 제품은 아기들이 처음 음식에 노출되는 데 있어 좋은 형태가 아니다. 아이들은 음식물을 팩에서 입으로 곧장 빨아들인다. 사실 제조업체가 공식적으로 권장하는 방식은 제품을 그릇에 부어서 섭취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모는 아이들에게 그냥 팩 형태로 먹게 놔두는 것 같다. 아이들은 자기가 실제로 무엇을 먹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 공중보건영양학자인 헬런 크롤리(Helen Crawley) 박사는 팩에 든 퓌레가 아이들이 진짜 음식의 맛과 식감에 익숙해지는 것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팩에 들어 있는 달달하고 걸쭉한 당근을 섭취하는 행위가 진짜 당근의 맛을 분별하거나 즐기는 걸 가르쳐주지는 못한다는 점이 문제다.

몇 년 전 영국의 많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맛 교육 수업을 시작하며, 신선한 먹을거리와의 감각적인 단절이 이토록 일상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됐다. 나는 테이스테드(TastEd)라는 단체를 공동 설립했다. 테이스테드는 ‘테이스트 에듀케이션(taste education, 맛 교육)’의 약자로, 프랑스와 북유럽 국가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사용되는 사페레(Sapere)[2] 기법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학교의 교실에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가져다주고 아이들이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먹을거리와 상호작용을 해보게끔 하는 방식이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 잉글랜드에 있는 160개 이상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다양한 무료 교보재를 활용하여 기본적인 식재료에 대한 아이들의 이해를 돕는다. 아이들은 재료들을 직접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소리를 들어보고, 자세히 살펴본 다음 직접 맛까지 느껴본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감각을 길러주는 이러한 형태의 교육을 굳이 학교에서 진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정도는 어차피 집에서 배우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거나, 적어도 예전만큼은 아닌 것 같다. 어떤 부모들은 아주 오랜 시간 일해야 해서 아이들과 함께 식사할 기회를 갖기 힘든 경우도 많다. 그 외에도 많은 부모가 너무 적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신선한 먹을거리를 구입할 여력이 없다. 서양의 가족들에게는 소득 규모와 관계없이 한 가지 추가적인 문화적 문제가 더 있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일상에서 신선한 채소를 즐기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요즘의 평범한 아이들이 먹을거리에 대하여 가지는 감각적인 문해력(literacy)이 매우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0년, 〈제이미 올리버의 먹을거리 혁명(Jamie Oliver’s Food Revolution)〉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에 사는 미국 아이들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토마토를 감자라고 생각했으며, 가지를 가리키며 배라고 말했다. 그걸 보며, 웨스트버지니아에 살고 있으니 무식한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영국 전역의 아이들이 그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먹을거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몇 년 전 여름, 케임브리지에 있는 어느 유치원에서 한 교사와 함께 첫 시범 수업을 진행했다. 당시 복숭아가 제철이었기 때문에, 나는 맛있는 납작복숭아를 사서 교실에 있는 네다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런데 남자아이 한 명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복숭아를 만져본 적이 없어요. 그치만 복숭아맛 약은 먹어봤어요.” 그 아이는 복숭아를 손으로 만지거나 입안에 넣고 그 껍질의 보슬거리는 감촉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복숭아를 깨물었을 때 그것이 부드럽게 으깨지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사실 별로 유별난 사례도 아니었다. 이듬해 여름 다시 한번 복숭아를 사서 또 다른 교실로 가져갔다. 이번에는 4학년 아이들이 있는 교실이었다. 그런데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 한 명이 복숭아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실제 복숭아가 복숭아 이모티콘과 다르게 생겨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다음에는 열 살짜리 아이들을 만났는데, 아이들은 당근이나 생 토마토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양파나 감자를 손에 쥐었을 때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프리미어리그에 있는 모든 축구 팀을 순위대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은 있었지만, 체리의 안쪽에 단단한 씨앗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이는 없었다. 체리를 직접 먹어보려는 시도는 고사하고, 그걸 실제로 먹어 본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들에게 신선한 민트 잎의 향을 맡게 했는데 아이들이 떠올린 것은 기껏해야 풍선껌이나 민트향 샴푸였다고 한다. 링컨셔(Lincolnshire)에 있는 워싱버러 아카데미(Washingborough Academy)라는 초등학교의 교장이자 테이스테드의 공동설립자인 제이슨 오루크(Jason O’Rourke)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교 아이들에게 먹을거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물어보면, 지금까지는 슈퍼마켓이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의 아이들은 ‘엄마의 아이패드’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먹을거리에 대한 아이들의 심각한 무지는 그보다 훨씬 더 큰 문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현재의 글로벌 식품 산업의 유통망은 그 경로가 지나치게 길고 비인격적이기 때문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가 먹는 음식물을 기르거나 재배한 사람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사실 말이다.
A mango festival in Sydney, Australia. ©Photograph: Brendon Thorne/Getty Images for Australian Mangoes


2. 냄새의 언어를 잊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감각의 단절은 한꺼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음식과의 감각적인 단절은 여러 세기에 걸쳐서 진행되어 온 것이며, 우리는 현재 그 종착점에 서 있다. 사람에게 다섯 개의 감각이 있다는 인식은 인류 사회 전반에 걸쳐서 거의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각각의 문화권은 이러한 감각에 대한 그들만의 고유한 개념을 갖고 있다. 먹을거리에 대한 감각적인 지식이, 특히 냄새를 통해서 그것을 인지하는 방식이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회는 수렵 채집 공동체다.

대부분이 수렵 채집을 하던 시절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감각을 끈 채로 무언가를 먹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사람들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독성이 있는 열매와 달콤한 과일을 구별할 수 있어야 했고, 야생의 사냥감이 내는 발소리를 기민하게 들을 수 있어야 했다. 수렵 채집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감각은 곧 생존을 의미했다. 그런데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감각들은 예전보다 덜 중요해졌다. 더 이상 공동체의 모두가 나서서 음식을 손수 채취하거나 사냥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그런 일은 곡물을 길러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는 농부들에게 의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었다.

인류학자들은 사회가 점차 현대화되면서 나타나는 한 가지 공통적인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후각이 점점 덜 중요해지고, 반대로 시각은 더욱 중요해진다는 점이다. 요크대학교(University of York)의 심리학 교수이자 후각 언어 분야의 대표적인 전문가인 아시파 마지드(Asifa Majid)는 후각이 시각에 비해 “무뎌진 감각”으로 여겨져 왔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영어에서 냄새를 묘사하는 단어의 수가 색채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보다 훨씬 적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마지드는 현지 연구를 통해서 일부 수렵 채집 공동체에서는 냄새를 지칭하는 단어들이 색깔을 표현하는 단어만큼이나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서 멕시코의 세리(Seri)라는 유목민 공동체에서는 바다사자의 특정한 냄새, 상한 콩 냄새와 타버린 콩 냄새, 덜 자란 푸른바다거북을 익히는 냄새, 부패한 꿀 냄새 등을 구별하는 다양한 단어들을 사용한다. 세리 부족에게는 후각 풍경(smellscape)이 일상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런던이나 뉴욕에 사는 요즘 사람들도 어쩌면 세리 부족민들처럼 콩이 탄 냄새를 분명히 맡을 수는 있겠지만, 그 냄새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저 ‘윽’ 하는 소리만 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지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영어에서 악취는 그냥 악취일 뿐이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면서 ‘감초의 향미’가 난다거나 ‘구스베리의 첫 향’이 난다며 와인의 다양한 향을 묘사하는 전문가들을 보면 그들이 다소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직접적인 비유만이 향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영어에서 냄새를 표현하는 단어가 지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수렵 채집의 시대가 지나간 이후에도 먹을거리를 구하는 작업은 감각과 깊이 얽혀 있었다. 역사학자인 마들렌 페리에르(Madeleine Ferrières)에 따르면 중세 프랑스에서는 사람들이 시장에서 먹을거리를 구입할 때 특정 순서에 따라 감각을 활용했다고 한다. 냄새를 맡아 보는 일이 첫 번째 순서였다. ‘악취가 나는 것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가까이 들여다보면서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만큼 실제로도 신선한지를 판단했다. 그다음은 촉감인데, 먹을거리를 손에 들어서 무게를 가늠하고 품질을 평가했다. 마지막으로는 소량을 시식해 보면서 그 농산물이 정말로 먹기에 괜찮은지를 판단했다. 당시 프랑스 시민법에 의하면, 소비자들에게는 구매를 결정하기 전에 먹을거리를 만져보고 맛을 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요즘에도 야외 시장에서라면 감각을 동원해서 음식을 구입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는 일반적인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중국에서 수박이 잘 익었는지를 판단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직접 두드려보는 것이다. 잘 익은 수박은 통통거리는 소리가 난다. 영국에서도 콕스 오렌지 피핀(Cox’s Orange Pippin)이라는 사과의 품종을 검사할 때 비슷한 방식을 사용했었다. 이 사과가 잘 익었다면 그것을 흔들었을 때 안에 있는 씨앗이 부드럽게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요즘의 우리는 먹을거리를 구입할 때 활용하던 감각적인 경험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전 세계적으로 노천 시장이 슈퍼마켓으로 바뀌고 있다. 슈퍼마켓은 사냥이나 채집 같은 일의 대부분을 대신해 주겠다고 현대인들을 유혹한다. 이처럼 거대한 상거래의 성전에서 판매되는 모든 농산물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이미 검사를 해서 포장하고 라벨을 붙인 다음 한 공간에 가지런히 모아 놓은 것들이다. 덕분에 우리는 여기에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해서 뭔가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에 내가 살던 마을에 세인즈버리(Sainsbury’s)의 대형 매장이 처음으로 들어섰다. 우리 어머니가 거기 다녀오시더니 어찌나 황홀해 하시던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직장에 다니던 어머니는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먹을거리를 구입하려면 식료품점이나 빵집 등 여기저기 흩어진 가게와 노점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런데 누구나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고 모든 것이 잘 구비된 그 대형 마트는 그러한 번거로움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이런 편리함을 얻은 대신에, 먹을거리 쇼핑은 이제 예전보다 덜 감각적인 과정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다녔던 세인즈버리의 냄새가 어땠는지 기억해 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반면에 그전까지 어머니가 들르곤 했던 청과물 가게의 신선하고 푸릇푸릇한 냄새와 우리가 주말 만찬을 위해 고깃덩어리를 구입하던 정육점의 퀴퀴한 피 냄새, 그리고 차양이 덮인 시장의 작은 커피숍에서 이제 막 갈아내어 담아 놓은 따뜻한 원두 봉지에서 풍기던 천상의 향기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2000년대 초에 프랑스의 두 사회학자는 베트남에 대형 마트가 들어서면서 먹을거리를 구입할 때의 감각적인 경험이 어떻게 변화하기 시작했는지 연구했다. 그에 따르면 전통시장에 들르는 베트남 사람들은 다양한 먹을거리의 품질을 따져 보기 위해서 인체의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토마토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빛깔이 선홍빛인지, 그리고 줄기는 다친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 토마토가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았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고기를 구입할 때면 그들은 신선도를 판단하기 위해 냄새를 맡아보고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슈퍼마켓이 급속도로 확산하면서 이처럼 감각을 동원한 면밀한 검사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들의 조사에 응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슈퍼마켓에서는 일일이 살펴보지 않고 구입합니다.” 홍콩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연구자들은 홍콩에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 먹을거리의 냄새와 관련하여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폭넓은 어휘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연령층은 소금에 절인 생선이나 오래된 두부, 눅눅한 땅콩 등에서 풍기는 특정한 냄새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알고 있었다. 반면에 젊은이들이 음식의 냄새에 대해 사용하는 표현은 ‘향긋하다’ 내지는 ‘고약하다’ 정도에 불과했다.
©Photograph: Mira/Alamy


3. 영양의 전환, 그 후


이러한 모든 현상은 먹는다는 것에 있어서 지난 50년에서 70년간 일어난 더욱 큰 혁명의 일부다. 이러한 흐름에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UNC)의 배리 팝킨(Barry Popkin) 교수가 ‘영양의 전환(nutrition transition)’이라고 부르는 특성이 있다. 이는 각국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인데, 지구촌의 거의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방식과 그 종류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한 끼의 식사에서 간식의 형태로, 짭짤한 음식에서 달달한 음식으로,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집에서 직접 만든 요리에서 다국적 식품 기업이 균질하게 만드는 초가공 식품으로의 전환이다.

이러한 영양의 전환 덕분에 세계 전반적으로 굶주리는 비율은 줄어들었지만, 제2형 당뇨병부터 심장병, 우울증, 천식, 암에 이르기까지 먹을거리와 관련한 질병들이 만연해졌다. 최근에는 영양실조(malnutrition)라는 개념이 절대적인 굶주림에만 국한되지 않고 비만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변했다. 브라질 같은 중간소득 국가에서는 영양이 부족한 사람들과 과잉인 사람들이 동시에 늘어나고 있다. 섭취하는 열량은 많지만, 우리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미량영양소(micronutrient)와 단백질은 부족한 상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영양의 전환으로 이뤄낸 풍족함을 유지하면서도 식품 경제를 덜 파괴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정부의 급진적인 개입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건강한 먹을거리는 저렴해야 하고,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하며, 일상적인 식단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개혁 과제는 세계 5위의 밀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욱 시급한 사안이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기본 식재료의 가격이 많은 가정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오를 것이다. 하지만 구조적인 개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먹기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한 가지 제안할 수 있는 건 우리 스스로의 감각을 더욱 신뢰하고 음식 포장에 적힌 문구들은 덜 믿는 것이다. 음식 관련 저술가인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건강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하는 음식은 피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왜 그럴까? 어떤 식품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준다고 스스로 주장한다는 건,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음식이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먹고 싶은 건강한 음식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우리가 가진 다섯 가지의 감각을 모두 동원해서 먹을거리에 대해 파악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좀 더 다양하고 즐거운 방식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아마 예전보다 먹는 양은 줄어들 수도 있지만, 자신이 먹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우선 몸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이고, 몸과 먹을거리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나의 경험상으로는 그랬다. 요리를 하면서 풍기는 향내를 모두 들이마시고 눈앞에 펼쳐진 식재료들을 눈에 담다 보면, 심지어 완성된 요리를 먹으려 자리에 앉기 전에 이미 그것들로부터 영양분을 모두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요리 관련 저술가인 다이애나 헨리(Diana Henry)는 자신의 글에서 몸을 망치는 요요 다이어트가 되풀이되는 과정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났는지 솔직하게 쓰고 있다. 그는 요요 다이어트를 두고 “지나치게 안 먹는 완전한 결핍과 그 정반대인 폭식의 과정이 롤러코스터처럼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2014년에 출간한 《입맛의 변화(A Change of Appetite)》에서 그는 일본 요리의 원칙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설명한다. 일본의 문화에서는 한 끼의 식사를 할 때도 세부적인 감각들까지 최대한 음미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한 끼 식단에 포함된 칼로리가 얼마인지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칼로리를 계산하는 일은 감각을 느끼는 것과는 정반대다. 건강한 식사를 위해 더욱 알차고 죄책감도 주지 않는 방식은, 요리를 하고 먹는 전 과정에서 그 모든 요소들이 가진 색채와 질감과 요리 기법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느끼고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다이애나 헨리가 썼듯, “먹는다는 건 단지 식욕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놓인 것을 자신이 가진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후각을 더욱 잘 활용하는 것이 사라진 입맛을 되살리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치매를 앓는 사람의 대다수는 음식에 대한 흥미를 잃기 때문에 자칫하면 영양실조에 걸릴 위험이 높다. 2013년에 영국의 디자인 회사 로드(Rodd)는 치매 환자들의 식사를 돕고자 개발된 ‘오드(Ode)’라는 신제품을 선보였다. 이 장치는 음식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 환자들에게 익숙한 음식의 냄새를 하루에 세 차례 방출했다. 여기에는 대표적으로 과일 파이나 찜 요리, 카레처럼 그리운 옛맛을 주는 음식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테스트 단계에서 그 음식 냄새를 맡은 치매 환자들 가운데 절반이 체중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거나 증량했다고 한다. (2022년 4월 20일 기준으로 오드는 더 이상 시중에서 판매되지 않고 있다.)
©Photograph: Popa Ioana/Alamy


4. 오감을 동원하라


한편, 현대 사회의 문화가 다양한 감각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새롭게 바뀔 수 있다는 조짐이 있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은 플라스틱을 반대하는 사회적인 움직임이다. 올해 1월 1일, 프랑스 정부는 슈퍼마켓을 비롯한 매장에서 오이를 포함한 30가지의 과일과 채소를 비닐 랩에 싸서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물론 이러한 정책의 발의는 우리의 감각을 복원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생태적인 이유 때문이다. 당시에 프랑스 환경부 장관은 일회용 플라스틱의 “충격적일 정도로 무분별한” 확산을 반드시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플라스틱을 사용하면 음식물 낭비를 줄이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이유를 들면서 오이와 같은 품목들을 비닐 랩으로 포장해 소량 단위로 판매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 《괴짜경제학(Freakonomics)》의 공동저자인 스티븐 더브너(Stephen Dubner)는 불과 1.5그램의 비닐 랩만 사용해도 냉장고 안에서 오이의 보관 기한을 최대 14일까지 늘릴 수 있다는 오이 재배 농가의 근거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비닐 랩 때문에 소비자들은 자신의 감각을 이용해서 냉장고 안에 보관된 오이의 신선도를 판단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프랑스에서 플라스틱의 사용을 금지하면서 의도치 않게 나타나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다면, 사람들이 슈퍼마켓에서 식재료를 구입할 때 좀 더 날것 그대로의 상태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닐 랩에 싸여 있지 않은 레몬의 껍질을 직접 살펴본 후에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닐 포장을 벗어던진 부추의 알싸한 향을 직접 맡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페인도 2023년에 이런 흐름에 동참할 예정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다면, 음식을 먹을 때 우리의 감각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의 상당한 진전이 되리라.

희망을 가져도 좋은 두 번째 이유는 코로나19 봉쇄 기간에 각 가정에서 직접 요리하는 횟수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소비자 조사에 의하면 2020년에 유럽 전역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 밀가루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식재료 구매가 증가했다고 한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사람들은 판데믹 기간에 새로운 조리법을 시도하는 걸 즐겼다고 응답했다. 요리를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요리를 한다는 건 팬 안에서 지글거리는 마늘 냄새나 버섯이 익으면서 내는 소리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제대로 치댄 밀가루 반죽이 손안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을 알아야 하고, 렌틸콩이나 쌀을 완벽하게 조리하면 알갱이들이 부풀어 오른다는 사실도 배워야 한다.

세 번째 희망은 먹을거리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음식을 먹을 때 오감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은 교육을 통해 습득할 수 있다. 2021년에 영국에서 헨리 딤블비(Henry Dimbleby)가 작성한 〈국가 먹거리 전략(National Food Strategy)〉의 새로운 버전에서는 모든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먹을거리에 대한 감각 교육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구의 근거 자료는 단기간의 교육이더라도 아이들의 음식 취향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핀란드에서 수행한 연구에 의하면, 취학 전 아동을 대상으로 실시한 감각 기반의 먹을거리 교육이 과일, 채소, 베리류를 포함하여 다양한 음식을 먹고자 하는 아이들의 의지를 증진했다.

이러한 효과는 심지어 부모가 입맛이 까다롭다고 평하는 아이들에게서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우리 테이스테드도 이처럼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걸 목격하고 있다. 2021년 가을, 케임브리지대학교 부설 초등학교의 어느 교사가 한 사례를 전했다. 자신의 학급에 예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로운 음식 먹는 것을 무서워해서 2년 동안이나 영양사로부터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 왔던 학생이 있는데, 그 아이가 테이스테드의 수업을 받으면서 갑자기 새로운 과일을 세 종류나 먹어봤다는 것이다. 아마도 수업 내용의 무언가가 아이의 감각을 일깨워서 음식 먹는 행위를 좀 더 부담 없고 더욱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 준 것 같다.

새로운 감각 문화에 대한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비록 수렵 채집을 하던 원시의 조상들과는 매우 다른 세상에 살지만, 물리적으로는 여전히 동일한 감각 기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음식을 먹는 방식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 원동력은 대부분 경이로운 엄지손가락을 가진 우리의 손과 코에 달려 있을 것이다. (먹을거리가 충분하다는 걸 전제로 할 때의 이야기다. 감각적 즐거움과 배고픔은 양립할 수 없다.) 운이 좋아서 아직 후각이 온전한 사람들이라면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활용해 보는 것이 좋다. 부엌이나 정원에 작은 허브 화분을 길러 보라. 그리고 기분이 가라앉았을 때 민트 잎을 하나 따서 손에 대고 문지른 다음 그 향기를 깊이 들이켜 보라.

음식을 눈으로만 보지 말고, 그것을 귀와 코와 손으로 느끼려고 노력해보라. 냄새를 맡고, 만져보고, 자세히 살펴본 다음에 맛을 보라. 향신료라는 복잡한 즐거움의 세계를 탐험해보라. 복숭아 이모티콘과 진짜 복숭아는 아주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느껴보라. 초가공 재료로 만든 빵과 진짜 빵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보라. 달콤한 것만 찾지 말고, 훨씬 더 다양한 맛의 세계를 탐닉해보라. 자몽의 쌉싸름한 맛이나 루바브(rhubarb)의 시큼한 맛을 직접 느껴보라. 다음에 혹시 아주 맛있는 피자를 먹게 된다면, 그런 맛이 나는 이유를 알아내려 노력해보라. 그 비결이 도우에 있는지, 소스에 있는지, 치즈에 있는지, 아니면 세 가지 모두인지 말이다. 셀러리 줄기에 돋은 결이나 케일 잎의 매끄러운 무늬를 느껴보라. 후각이나 청각, 촉각을 활용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사람은 마치 불투명한 유리창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아직 할 수 있을 때 무화과도 직접 손에 쥐어보고 커피의 향기도 느껴보라. 당신의 감각을 일깨워보라.
이 글은 네덜란드의 음식 문제 연구소 플레보캠퍼스(Flevo Campus)에서 출간될 예정인 에세이 모음집에 실린 비 윌슨(Bee Wilson)의 글을 발췌한 것이다.
[1]
https://insider.si.edu/2016/05/did-ripening-fruit-help-hominids-develop-complex-hands/
[2]
라틴어로 ‘맛이 있다’, ‘맛을 느끼다’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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