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가 통하는 세상?

8월 4일 - FORECAST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문화재 반환에 있어 멕시코의 정중한 요청 전략이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 선의라는 당연한 단어를 돌아볼 때다.

  • 멕시코가 ‘정중한 요청’으로 해외 반출 문화재 8970점을 돌려 받았다.
  • 소프트 파워에 의지한 캠페인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 이번 문화재 반환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선의’다.

NUMBER_ 8970점

흔히 문화재는 역사의 블랙박스라 한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역사의 증거를 지키기 위해 전 세계가 열심이다. 저마다 해외로 반출된 자국 문화재 환수를 위한 방안을 내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멕시코가 2018년부터 2년 동안 8970점의 공예품을 돌려 받았다. 지난달 반환 실적은 무려 2522점이다. 악시오스는 멕시코가 정중한 요청(asking nicely)을 통해 문화재를 환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것을 가져갔으니 이제 그만 돌려 달라”는 요청에 다른 나라들이 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소 황당할 만큼 당연한 접근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STRATEGY_ asking nicely
  • 불법 반출 문화재 관련 협약과 법은 이미 존재한다. 1970년 유네스코는 ‘문화재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이전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유네스코 협약’을 체결했다. 현재 전 세계 134개국이 가입되어 있다. 1995년 유네스코와 국제사법위원회 주도로 체결된 국제 협약도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유명무실하다.

  • 다른 국가들이 국내 법 개정 등 하드(hard)한 방안을 구상하는 동안, 멕시코는 소프트(soft)하게 접근했다. 해외 반출된 문화재는 대부분 강대국에 포진해 있다. 이들을 상대로 법적 처벌을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유명무실하다. 멕시코는 ‘정중하게 요청’하는 전략을 취했다.


KEYPLAYER_ 원주민

접근하는 주체도 달랐다. 국가가 아닌 당사자가 나섰다. 7월, 미국 앨버커키 박물관 재단에 보관되어 있던 멕시코의 유물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번 반환은 멕시코 원주민과 아프리카 공동체의 촉구로 이뤄졌다. 당사자들이 관련 기관에 해당 유물의 문화·역사적 중요성을 끊임 없이 설명하고 송환을 요구한 결과다. 앨버커키 박물관 재단은 원주민 공동체의 정체성이 담긴 12개 조각품을 송환하기로 결정했다. 재단의 CEO는 송환 의사를 밝히며, “그게 옳은 일(the right thing to do)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가가 아닌 원주민이 앞장선 정중한 요구에 선의(善意), 다시 말해 좋은 마음으로 응답했다.
DEFINITION_ 소프트 파워

언뜻 선의란 단어는 힘이 없어 보인다. 국가라는 거대 시스템에 비추어 보면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멕시코의 이번 사례는 선의란 단어를 다시 살펴보게 했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1990년 본인의 저서 〈Bound to Lead: The Changing Nature of American Power〉에서 처음으로 소프트 파워를 제시했다. 군사력이나 경제제재 등으로 대표되는 하드 파워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설득을 통해 사람의 호감을 사는 매력으로 정의된다. 매력이란 추상적인 단어는 결국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마음에 기대는 일’이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힘이란 뜻이다.
RISK_ 안으로 굽는 세계

그간 국가 간의 관계에 선의가 낄 틈은 없었다. 코로나19,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인플레이션으로 촉발된 탈세계화 흐름이 한몫했다. 수치로 드러나고 있는 지금의 보호무역주의만 봐도 그렇다. 지난해 세계무역기구(WTO)에 통보된 무역기술장벽 건수는 총 3966건으로 역대 최대치다. 또 세계은행(WB)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사태 발발 후 35개국이 식량 수출통제를 선언했다. 하드 파워가 강조되는 국가 경제 논리에서 선의는 힘 없는 단어로 여겨진다.
ANALYSIS_ 온라인 파워

하지만 온라인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의 세계는 온오프라인을 나눠 봐야 한다. 탈세계화로 국가 간 물리적 경계가 확고해졌어도, 온라인에선 그렇지 않다. 어느 때보다 경계가 흐려진 초연결사회다. 온라인 속 세계에서는 국경을 넘나들며 개인을 설득할 수 있다.
  • #MiPatrimonioNoSeVende ; 멕시코는 이 점을 노렸다. 2018년 #우리_유산은_거래대상이_아니다 캠페인을 시작했다. 대상은 유물 수집가였다. 경매에 나오는 메소아메리카 공예품의 불법 취득 경로를 밝히고, 이를 구매하는 건 문화 유산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인식을 알렸다. 캠페인 시작 이후 8970점의 유물이 멕시코로 돌아왔다. 다시 말해, 온라인에서는 여전히 선의에 기대는 소프트 파워가 통한다.

CONFLICT_ 도난과 약탈

그렇다면 이러한 접근이 우리나라에서도 통할까? 멕시코의 방식 그대로 적용하긴 어렵다. 멕시코와 우리나라 유물의 유출 배경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도난 ; 멕시코의 경우, 유출된 유물 대부분을 특정 가문이나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 멕시코 당국은 수집가들의 자발적 반환을 촉구하는 건 그들의 양심에 기대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달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가문은 도자기 2522점을 멕시코에 반환했다.
  • 약탈 ; 반면 우리 문화재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혼란의 시기에 약탈 당했다. 현재 국외 소재 문화재 21만 점은 25개국에 퍼져 있는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국가 주도의 약탈에선 개인의 책임이 지워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의 양심과 선의에 기대기 어렵다.

RECIPE_ 공공외교
  • 결국 국가를 넘어 접근해야 한다. 외교란 국가 간에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멕시코 사례처럼 개인을 대상으로 펼치는 외교도 있다. 이를 공공외교라 한다. 국가의 문화, 전통 등을 알려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전형적으로 소프트 파워를 키우는 외교 방식이다. 
  • 놀랍게도 한국의 대표적인 공공외교 사례는 한일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2019년 한일 관계는 악화될 대로 악화됐었다. 일본의 반도체 수출금지 보복 조치에 맞서는 노재팬 운동이 확산됐을 당시,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민간 교류 강화가 한일 관계 회복의 길이라고 했다. 선의만큼이나 힘이 없어 보이는 답이었다.
  •  실제로 노재팬 운동이 일 때도 한일 청소년 교류는 활발했다. 결연을 맺은 한일 학교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오갔고, 한국 문화를 찾아 오사카시 코리아타운에 방문하는 일본 청소년들은 오히려 늘었다. 사례로 증명되는 답에 힘이 더해졌다. 
  • 현장의 전문가들은 한일관계를 정랭민온(政冷民溫), 정랭민열(政冷民熱)이라 한다. 정부는 차가워도 민간은 따뜻하거나 뜨거울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국가가 아닌 개인의 양심과 선의에 기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기도 하다.

REFERENCE_ 문화를 문화로
  • 국가를 넘어 문화 유산 지키기에 나서는 게임회사도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로 유명한 미국의 게임사 라이엇게임즈는 10년째 한국 문화유산 관련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라이엇게임즈는 이런 활동의 목적은 문화의 접점을 넓히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놀이 문화를 만드는 기업으로서 문화의 뿌리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목표다.
  • 라이엇게임즈는 그간 문화재 환수 사업을 위해 총 68억 원의 예산을 조성했으며, 20억 원이 조금 넘는 예산을 별도 기금으로 할당했다. 기금 조성의 초석이 된 건 이용자들의 참여였다. 아리는 구미호 설화를 모티프로 ‘아리따운’이라는 우리말에서 이름을 따와 만들어진 한국형 챔피언이다. 아리의 초기 6개월 판매 금액이 기금 조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라이엇게임즈의 문화 유산 환수 활동엔 우리나라 문화재청이 동참하고 있다.

INSIGHT_ the right thing to do

해외 수집가들이 멕시코 문화 유산을 반환하는 배경도, 앨버커키 박물관 재단 CEO의 답변도, 라이엇게임즈가 한국 문화 지키기에 진심인 이유도,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그게 옳은 일(the right thing to do)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흔적이 묻은 모든 건 인류의 역사기도 하다. 다른 국가의 문화를 지켜준다는 건 다시 말해 인류의 유산을 지키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멕시코 문화 유산 반환은 인류의 유산을 지키자는 멕시코의 정중한 요청이 선의로 응답된 결과다.
FORESIGHT_ 당연과 당위, 그 너머
  • 한편 문화 유산을 지키려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우크라이나의 유적지, 종교시설, 박물관 등 최소 53곳이 망가졌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가 실제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배경에는 ‘아무리 러시아라도’ 라는 문장으로 대변되는 일말의 선의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침공을 자행했다. 당연하던 단어가 당연하지 않게 됐다.
  • 멕시코 문화 유산 반환에 쏟아지는 관심이 말하는 건 하나다. 세계가 동의하는 옳은 일(the right thing to do)이라는 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선의란 단어는 너무나 당연하고 당위적이어서 어쩌면 힘이 없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선의가 통하지 않는 세상의 결말을 우리는 이미 보고 있다. 어느때보다 선의의 힘이 절실할 때다. 당연하고 당위적이라고 선의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 힘은 진짜로 약해질 것이다.

이 글은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짧은 역사에 대하여〉와 함께 읽으시면, 더 깊이 있는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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