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짊어진 사람들
4화

부다페스트의 나스차 ; 우크라이나를 돕는 러시아인

아나스타샤 추코프스카야 ⓒEvgenia Vesnina photo

아나스타샤 추코프스카야(Anastasia Chukovskaya)는 선생님이자 러시아 독립 언론사의 기자 출신인 교육 연구자다. 그는 러시아인이다. 작곡가이자 뮤지션인 남편 알렉세이 젤렌스키(Alexey Zelensky)와 함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다. 이 부부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헝가리의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지낼 숙소를 마련하고 아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시설을 열었다. 현재는 식료품 카드 프로그램을 통해 자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아나스타샤의 증조부는 러시아의 유명 작가이자 번역가인 코르네이 추콥스키(Kornei Chukovsky)인데, 이 때문에 러시아 언론으로부터 조국과 증조부를 망신시킨다며 비난받는다. 그럼에도 그는 도움을 멈추지 않는다. 아나스타샤와는 8월 초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매일 밤 나는 기차역에 나갔다


본인 소개를 부탁한다.

나스차(아나스타샤의 줄임말, 애칭) 추코프스카야, 러시아 국적자다.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프로듀서이자 교육자다. 헝가리에서는 11년 동안 살고 있고 업무상 해외 출장이 자주 있었다. 전쟁 전에는 러시아를 꾸준히 왕래해 왔다.

갈 곳 없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위해 숙소를 제공했다고 들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작곡가이자 뮤지션인 남편과 함께 부다페스트에 도착하는 피난민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부다페스트를 통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전쟁 초장기에는 그들을 우리 집에 머물게 했다. 남편이 스튜디오 작업실로 쓰는 작은 아파트가 있어 그곳을 청소하고 장비를 다 정리한 다음 아기 침대와 간이침대를 들이고 침구를 갖다 놨다. 많은 분의 도움으로 수건, 음식 등을 확보해서 하루에 여덟 명이 묵을 수 있는 숙소를 만들어 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나?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렸다. 세계 곳곳의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우리가 피난민을 도울 수 있도록 에어비앤비와 부킹닷컴(Booking.com)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한 여성분은 기차역 바로 근처의 호텔 방을 잡아 주시기도 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하루에 30명 이상에게 숙박을 제공해 줄 수 있게 됐다.

숙소로 이들을 인도하는 과정은 어땠는지 알려 달라.

매일 밤 기차역에 나갔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역에서 당직을 섰다. 피난민들이 안전한 잠자리를 구하기 가장 어려운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상당히 추운 겨울이었다. 역에는 몹시 지친 사람들이 속속들이 도착했고 그들을 발견하는 대로 픽업해 아파트와 호텔에 데려다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다페스트를 경유해 움직였기 때문에 다음 날 밤도, 그다음 날 밤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예상보다 전쟁이 길어져 활동에 변화가 생겼을 것 같다.

전쟁 초에 유럽을 향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대체로 정확한 목적지를 갖고 있었다. 친척이나 지인이 있는 곳, 혹은 나름의 인맥이나 연이 닿은 유럽 국가들로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4월부터는 상황이 바뀌었다. 4월 이후 입국한 난민들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생활을 이어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우크라이나 가까운 곳에 남아 있길 원했다. 그냥 헝가리가 우크라이나의 접경 국가이기 때문에 건너 온 사람들이던 것이다. 하루 이틀 밤 묵을 수 있는 숙소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점차 사라지다 보니 이 경유 숙소 제공 프로젝트는 4월 중순쯤 서서히 종료했다. 피난민들에게는 단기가 아닌 장기 숙소가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개인 차원에서 도울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현재 몇 우크라이나인 교사들에게 아파트를 임대해 주고 있는데 그게 다음 활동을 위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국경 없는 교실의 아이들


난민 아이들을 위한 학교는 어떻게 설립하게 됐나?

어느 날 밤 부다페스트 기차역에서 키이우를 빠져나온 학교 선생님들을 픽업했다. 푹 쉬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선생님들이 제일 먼저 물은 것은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안부였다. 지금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나 학교는 있는지를 내게 물었다. 나는 아무런 학교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때 그 대화를 나눈 선생님과 학교를 설립하기로 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국경 없는 교실(Learning without borders, 우크라이나어: Освіта без кордонів)’이었다.
ⓒEvgenia Vesnina photo
사진을 보니 학교에 정말 예쁜 그림이 많더라. 직접 그린 것인가?

부다페스트에 피난 온 우크라이나 화가분들을 초청했고 그분들이 그려 주셨다. 설립 과정에서 운이 좋았다. 한 유명 브랜드가 소유하고 있는 넓은 사무실 건물이었는데 우리가 자유롭게 학교 건물로 사용할 수 있게 흔쾌히 내어 주셨다. 벽화를 그린 화가분들께 팔로워들이 보내 주신 기부금으로 사례비도 드리며 예쁘게 꾸몄더니, 볼품없던 사무 공간이 멋지고 아름다운 학교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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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열기까지 난관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그리 빠른 시일 내에 열 수 있었나?

이것도 운이 좋았다. 우크라이나계 헝가리인인 한 남자분이 내 페이스북 포스팅을 번역기를 돌려 읽으며 내가 학교를 설립하려는 걸 알게 되셨다. 본인이 일하는 곳은 직원이 2만 명 규모인 IT 기업인데 회사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고 그렇게 모집한 성금을 두 배로 불려줄 수 있다고 했다. ‘Cross Over’라는 이름의 회사였는데 이들은 약속을 지켰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모아진 기부금으로 우리는 4월 중순에 학교를 오픈할 수 있었다. 상상이 되나? 학교 문을 여는데 고작 2~3주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어려움은 없었나?

역시나 개인이라는 것의 한계가 컸다. 나는 그저 에너지가 넘치는 평범한 사람이다. 모든 것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처리하기 어려웠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로 인해 공포에 질렸고 어쩔 줄 모를 때도 많았다. 또한 개인 자격으로는 지원해 주시는 건물이나 모아진 성금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비영리 단체의 도움이 필요했다. 헝가리의 자선 단체인 ‘마이그레이션 에이드(Migration Aid)’에 찾아가 내 사정을 설명했다. “많은 피난민 선생님이 있고 그들을 취업시켜 주어야 한다. 전쟁으로부터 피난 온 수많은 아이들이 학업을 계속해 나가고 학기를 마쳐야만 한다.”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다행히도 마이그레이션 에이드 측에서 학교 프로젝트를 인수해 갔다.
ⓒEvgenia Vesnina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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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지금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나?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행히도 국경 없는 교실은 별 탈 없이 운영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현지 규정상 아이들이 헝가리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점인데,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는 헝가리어가 정말 어려울 것이다. 학교에 적응하는 것 역시 다 추가적인 스트레스일 텐데 걱정이다. 현지 사정상 통학으로 이를 해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이들을 위한 헝가리어 교육 프로그램도 많이 없다 보니 우리는 그저 어떤 타협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이 우크라이나 교육 시스템에 남아 편안하게 헝가리어를 배울 수 있도록 말이다. 아이들이 당장 생소한 환경에 내던져지지 않고 편안한 환경에서 헝가리 사회에 적응할 시간을 벌어주는 게 중요하다.

아이들에게 참 힘든 시간일 것 같다. 관련해 입안되고 있는 정책은 없나?

헝가리 교육 시스템에 부담이 될 수천 명의 아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과 교육부는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 헝가리 학교 교사들은 언어가 다르고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더군다나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교육받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정말 걱정된다. 내가 하는 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엄청난 정책이 필요한데,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
ⓒEvgenia Vesnina photo
국경 없는 교실 다음으로는 또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했나?

학교를 열자마자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 같은데, 도서관과의 협력 사업이었다. 기부금으로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어린이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인스타그램에서 어린이 책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좋아하는 책 목록을 만들어 우크라이나어로 된 어린이 책을 구하기 시작했다. 많은 팔로워분들이 기부해 주신 덕분에 다양한 책을 살 수 있었고, 아이들에게 기쁨을 안겨줄 수 있었다. 현재 헝가리의 도서관 다섯 곳에서 우크라이나어 어린이 도서를 만날 수 있다.
ⓒEvgenia Vesnina photo

 

지원의 사각지대를 찾아서


식료품 카드 사업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5월쯤 되어서 난민들의 상황이 무척 안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 헝가리의 난민들이 사실상 제대로 된 보살핌과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들의 삶은 매우 고단했다. 일단 복지비를 거의 지원받지 못했고, 인도적 지원도 날이 갈수록 적어졌다. 사람들이 말 그대로 굶고 있었다. 전쟁 초에는 기차역 근처 텐트에 찾아가 쌀이나 기저귀 등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텐트가 문을 닫았고 운영되지 않는다. 서비스 자체가 종료되어 이유식, 기저귀, 생리대, 약 등을 더 이상 제공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찌어찌 복지비를 받게 되어도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성인에게 50유로(6만 8600원), 아이에게 30유로(4만 1100원)가 지급되는데 생활이 불가능한 돈이다. 그러다 보니 식료품 카드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Evgenia Vesnina photo
‘훈헬프(Hunhelp)’는 어떤 프로그램인가? 소개해 달라.

훈헬프라는 플랫폼에 난민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자원봉사자들과 나는 식료품 카드(상품권)를 구입해 우편으로 보낸다.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자 그들에게 음식의 선택권을 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익숙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고를 수 있다. 익숙한 음식이 주는 아늑함과 선택권은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정말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이 역시 계속 이 일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많은 분들께서 기부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이는 부다페스트를 겨냥한 사업이 아니다. 부다페스트는 아무래도 대도시이다 보니 난민들이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로가 존재할 거다. 다만 헝가리 지방 지역에 있는 수천 명의 우크라이나인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걱정되어 시작하게 됐다.
아나스타샤의 구호 활동 ⓒ아나스타샤 추코프스카야
헝가리 정부나 국제기구가 보지 못하는 구호의 사각지대는 어디인가?

현재 열 명의 자원봉사자가 나와 함께 일하고 있고 우리에게 온 우리에게 온 도움 요청은 1000건이 넘는다. 이게 바로 사회 시스템의 사각지대다. 난민들에게 필요한 식료품과 생필품을 파악하는 데 천재적인 두뇌는 필요치 않다. 파악하고자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원은 여전히 터무니없이 적거나 부재하다. 헝가리 교회들이 자체적으로 도우려고 하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수천 명인데 교회들은 약 200가구 정도만 지원하고 있다. 이래선 안 된다. 난민 구호를 위해 막대한 예산이 배정되고 있다고 해서 이것이 실질적인 도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예산이 대체 어디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내 눈앞에는 지금 굶고 있는 사람들, 매우 혹독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달라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청하지 못하는 경우 역시 존재할 것 같다.

실제로 그렇다.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어떤 문제를 누구에게 문의하며 어느 기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에 관한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실질적이고 유용한 정보는 텔레그램이나 바이버(Viber)같은 비공식적인 채널에서만 접할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지만 기관들을 신뢰하진 않는다. 기관들 또한 이들과 헝가리어로 소통하려 하는데 이들은 헝가리어를 할 줄 모른다. 어마어마한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장기 체류하는 난민들은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나? 마땅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나?

공식 국가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고 일종의 보호소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국가 프로그램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헝가리인의 집에 얹혀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공장에 취직해 기숙사에 들어가는 이들도 있다. 이 역시 사각지대다. 그곳에서 난민들의 생활이 어떠한지, 과연 필요한 지원과 도움을 받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얹혀살게 되면 집을 내어 준 주인과 갑을관계가 형성된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아주 불행한 이야기들이 탄생하는 공간일 것이다.

게다가 기숙사 역시 문제다. 우리가 파악하기로 그곳에서는 하루에 한두 끼 정도가 지원되고 있으며 대체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익숙하지 않고 잘 안 맞는 음식들이다. 특히 아이들이 먹기 힘든 음식이다. 나 역시 헝가리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어머니들의 심정이 너무나 이해된다. 아마 나도 먹기 힘들 거다. 식료품 카드로 음식을 전달받은 분들은 “정말 오랜만에 과일, 고기, 채소를 먹었다”고 말한다. 최악의 상황이다.

 

러시아인, 마음의 벽을 허물다


헝가리 현지인들은 난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나?

난민에 대한 헝가리인들의 반응은 매우 엇갈린다. 수많은 헝가리인이 우리를 돕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이들은 사회적 명성이 있거나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 난민 문제를 고민할 겨를이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헝가리인은 난민을 경계하고 있다. 그들은 낯선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이민자를 싫어한다. “난민이 아닌 헝가리인을 도와라. 우리에게도 충분히 많은 문제가 있다”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아주 복잡한 사회 문제가 펼쳐지고 있다.

아무래도 러시아인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난민을 돕는 러시아인이 많은가?

정말 많은 러시아인이 난민들을 돕고 있다.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구소련 국가 출신 사람 중에도 난민을 돕는 사람이 많다. 나에게 돈을 보내고 침구와 장난감을 가져다주며 여러모로 지원해 준다. 그런데 이들이 왜 직접 나서지 못하는지 어느 순간 깨달았다. 해외에 거주하는 많은 러시아인들은 직접 우크라이나인과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진 말을 듣지 않을지, 도움을 거절하진 않을지 말이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엔 그런 것이 없다. 온라인상으로는 모두 서로 증오하고 욕하고 모진 말을 내뱉지만, 사실 온라인은 현실의 일그러진 거울이다. 현실에는 오로지 ‘도움’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인들과 처음 대면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어땠나?

나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유리 두즈[1]의 다큐멘터리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기차역에서 난민을 만났을 때 그들이 내게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다. 나는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는데 원래 모스크바 출신이라고 답했다. 그때 공기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 침묵이 아픈 침묵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절절하게 깨닫게 하는 침묵이었다. 어떤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에 가서 사람을 죽이고, 어떤 러시아인은 우크라이나인을 돕고 있고.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미쳐버릴 것 같다. 다만 내가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서 부정적인 반응을 얻은 적은 없었다.

마음의 벽을 어떻게 허물 수 있었나?

나를 직접 겪고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본 사람들에겐 나에 대한 의문이 없을 것이다. 물론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게 원칙적으로 우크라이나어로만 말하는 분들도 계셨다. 이해한다.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난 몇 달을 지나며 우크라이나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고 조금씩 대답할 수도 있게 됐다. 나는 우크라이나인들과 그들의 투쟁을 존경한다.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부디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란다. 나를 본 분들은 이 마음을 아실 것이라 생각한다.

러시아인이기에 특별히 더 무거운 감정과 책임감을 느끼나?

물론 당연하게도 특별히 더 무거움과 책임감을 느낀다. 내 생각에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이 느껴야 하는 감정이다. 사실 이는 정체성에 대한 매우 복잡하고 폭넓은 쟁점인데 이 정체성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마음에서 고장 나버렸다. 반대로 ‘우크라이나인을 돕는 러시아인’이라고 해서 이를 훈장처럼 여길 생각은 더더욱 없다. 사실 훈헬프 홈페이지에는 나에 대한 정보도 없고 식료품 카드가 어디에서 어떤 돈과 경로로 제공되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다. 이는 불필요한 정보다.

이러한 활동을 핑계 삼아 나중에 자신을 세탁하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나는 그런 류의 ‘좋은 러시아인’과 같은 편이고 싶지 않다. 이런 전쟁을 벌이는 나라와 같은 편이고 싶지도 않다. 그 누구의 편도 되기 싫고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기 싫다. 나는 늘 민족적 개념보다 넓은 사람이었다. 우리 가족은 국제 가족이고 나는 단 한 번도 민족주의의 폐해를 겪은 적이 없다.

지원이 많이 줄어든 것으로 알고 있다. 인터뷰를 보는 독자들이 헝가리의 난민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 달라.

관심을 보여준 것에 정말 감사한다. 훈헬프 홈페이지에는 이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이 소개되어 있다. 다른 방법으로 돕고자 한다면 언제든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메시지를 주셔도 좋다. 우리는 언제나 오픈되어 있다.

 

훈헬프로 도착한 메시지들


“저와 제 아내, 어린 아들과 장모님은 하르키우에서 피난 왔습니다. 5월에 장모님이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아파트를 렌트해서 살고 있는데 아이가 한 살밖에 되지 않아서 아내는 직장을 다닐 수 없어요. 장례식 이후로 집세를 낼 돈이 없어서 우크라이나 은행들에 빚을 많이 졌어요. 도움을 요청드려요.”

“제 막내딸 둘은 1년 8개월 된 쌍둥이입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저희는 아브데예프카(Avdiivka, 도네츠크주의 소도시)에서 왔는데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악몽이었습니다. 지금은 부다페스트에 있고 새로운 시작을 해보고자 합니다. 도움이 절실합니다. 도와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23살이고 아이는 3살,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현재 음식을 사거나 유치원에 입혀 보낼 아이 옷을 살 돈이 없습니다. 어떠한 도움을 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68세 연금생활자입니다. 키이우에서 언니(77세)와 형부(75세), 그들의 딸인 제 조카와 함께 피난 왔습니다. 조카는 저희를 케어하기 위해 전시에도 재택근무를 하며 정말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카는 미혼이고 우리 모두를 돌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미혼모이고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 우크라이나인입니다. 전쟁으로부터 피난 왔습니다. 한 달 동안 러시아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전기와 수도 없이 어린 자녀와 숨어서 지냈습니다. 저희 도시가 해방된 이후 저와 친척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짐을 챙겨 도망 나왔습니다.”

“피난민입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생활비가 없고 한 살 된 아기를 돌보는 아내는 직장을 다닐 수 없습니다. 제 월급은 다음 달에나 지급됩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저는 61세이고 당뇨병과 고혈압 등 만성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제 나이와 건강 상태로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7세와 10세 두 손자와 살고 있습니다. 부디 도와주세요. 미리 감사드립니다.”
훈헬프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감사 메시지들 ⓒ아나스타샤 추코프스카야
[1]
러시아의 유명 반정부 기자이자 블로거다. 이번 전쟁 이후 반전 발언으로 인해 ‘외국 요원(foriegn agent)’이 됐다. 외국 요원이란 배신자나 스파이를 뜻한다. 스탈린 시대에 통용된 단어다. 해외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NGO들은 일명 ‘NGO 법’으로 불리는 법안에 따라 자신들을 외국 요원으로 의무 등록해야 하는데, 이 법을 근거로 자금 흐름을 들여다 볼 수 있고 미등록시 징역형 등에 처해질 수 있다. 외국 미디어나 단체 등과 연관된 프리랜서 기자나 블로거, 소셜미디어 이용자 등도 ‘외국 요원’으로 등록해야 한다. 러시아 정부는 전쟁 이후 매주 금요일 새로운 외국 요원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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