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짊어진 사람들
5화

키이우의 올레나 발베크 ; 헌혈은 또 하나의 방어선이다

올레나 발베크 ©Blood Agents
올레나 발베크(Olena Balbek)는 스포츠 이벤트 매니저로 일하는 키이우 시민이다. 2013년 말 헌혈 기증자를 찾다가 약 50명의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블러드 에이전트(Blood Agents)’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정기적이고 의식적이고 대가 없는 헌혈 문화를 목표로 키이우, 오데사 등 우크라이나 내 4개 도시의 헌혈 센터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전쟁 발발 후, ‘스톱 블리딩(Stop Bleeding)’이란 서브 프로젝트를 만들어 응급 의약품을 공급하고 있다. 올레나와는 9월 중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헌혈, 문화가 되다


본인 소개를 부탁한다.

올레나 발베크다. 스포츠 이벤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마라톤을 즐기는 평범한 키이우 시민이다. 블러드 에이전트라는 단체에서 자선 활동을 하고 있다.

블러드 에이전트는 어떤 단체인가?

블러드 에이전트는 약 50명의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자선 단체다. 블러드 에이전트 소속 자원봉사자들은 우크라이나의 혈액 센터 네 곳에서 매주 당직을 서며 다양한 헌혈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자발적이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정기적 헌혈에 대해 널리 알리고 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처음엔 친척을 위해서였다. 2015년, 오흐마데트(Okhmatdyt) 병원에 혈소판 기증자를 모으면서 시작됐다. 이것이 점점 발전해 ‘오흐마데트의 수요일’이란 정기적인 프로그램이 됐다. 그때만 해도 프로그램이 이렇게까지 확장하고 발전할 줄 몰랐다. 단체가 커지면서 리브랜딩의 필요성을 느꼈고, 2020년 ‘블러드 에이전트’로 단체의 이름을 바꿨다.

주 활동 지역이 궁금하다.

키이우 내 혈액 센터 세 곳과 오데사(Odessa)에서 헌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키이우에서 하는 세 프로젝트는 지역과 요일을 따 이름을 붙였다. ‘심장 병원에서의 화요일’, ‘오흐마데트의 수요일’, ‘아모소프(Amosov) 연구소의 목요일’이다. 오데사의 지역 수혈소에서도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헌혈 준비를 돕는 자원봉사자 ©Blood Agents
헌혈 프로젝트에서 블러드 에이전트가 중요시하는 부분이 궁금하다.

헌혈 기증자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한다. 고통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등의 동정에 호소하는 방식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영역에서 헌혈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이타주의와 책임감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 헌혈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고, 최대한 쉽게 헌혈에 접근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헌혈을 마치고 지혈 중인 모습 ©Blood Agents
자원봉사자들이 근무하는 키이우, 오데사에 공습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위험했던 순간은 없었나.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 이후, 블러드 에이전트의 활동도 조금은 달라졌다. 키이우, 르비우, 오데사 모두 공격을 당했다. 실제로 오흐마데트 병원 상공에서 순항 미사일이 격추되기도 했다. 프로젝트 시작 이래 처음으로 자원봉사자들이 혈액 센터에서 당직 근무를 중단했다. 폭격 초반엔 자원봉사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7년 만에 프로젝트가 멈춘 건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오흐마데트, 아모소프 혈액 연구소, 국립암연구소, 국립심장연구소, 키이우 페오파니아 병원, 베를린스키 거리 혈액 센터, 자파로자 거리 혈액 센터, 군사 병원, 이렇게 8개의 혈액 센터의 헌혈 수요와 관련한 소통을 담당하게 됐다.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어떻게 됐나.

5월부터 다행히 키이우의 국립심장병원, 아모소프 연구소, 오흐마데트와 오데사 지역 수혈소의 당직을 재개할 수 있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Belarus)로부터의 미사일 위협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아직까지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시대가 던지는 상황과 도전 속에서 일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헌혈자들이 받는 혈액 세포 브로치 ©Blood Agents
혈액 기증이 더 중요해졌을 것 같다.

그렇다. 전쟁 초반, 우크라이나 의료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민간 도시에 미사일 수천 발을 발사했다. 우크라이나 내 100개 이상의 병원이 파괴됐고, 파편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치고 사망했다. 현재도 우크라이나 아홉개 지역에 폭격이 계속되고 있다. 전선 밖에 위치한 대도시는 미사일 공격이 줄었지만, 전선 인접 지역의 소도시 주민들은 아직도 공습으로 인해 다치고 사망하는 위기 상황이다. 혈액 기증이 더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우리의 후방 지원은 멈추지 않는다


혈액 공급 상황은 어떤가.

믿기 어렵겠지만, 전쟁 첫날 수많은 사람들이 헌혈을 하기 위해 줄을 섰다. 전쟁을 피해 이동한 도시에서 헌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 시작 200일이 지났음에도, 혈액 센터 그 어느 곳도 혈액이 부족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 하루 당직을 서는 동안, 70명의 기증자가 헌혈을 했다. 덕분에 센터도 중단 없이 작동하고 있다.

정기적인 헌혈이 블러드 에이전트의 목표인데, 현재 가능한 상황인지도 궁금하다.

의지만 있다면 전시에도 정기적 헌혈은 가능하다. 현재는 혈액 기증자 수도 안정되어 심각한 혈액 부족 상황은 아니다. 기증자의 의지와 별개로 도시에 가해지는 폭격 등 헌혈을 어렵게 하는 물리적인 요인들이 존재한다. 공습이 있을 때 기증자들은 대피소로 이동시키는 등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헌혈자들의 모습 ©Blood Agents
전쟁 상황에서 헌혈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상하게 들릴 테지만, 전쟁 중에 혈액 기증자를 구하는 게 오히려 쉬워졌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전쟁터로 향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헌혈이 가능한 사람 수가 줄었다. 그만큼 남은 이들의 책임이 커졌다. 어느 날은 헌혈 지원자가 많아서 접수를 강제로 종료하기도 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상황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헌혈에 나선 덕분이다.

우크라이나 전반에 혈액 기증자가 얼마나 늘었는지 궁금하다.

보통 헌헐률은 ‘환자 혈액 관리(PBM·Patient Blood Management)’라는 개념을 통해 인구 1000명 당 적혈구제제 공급량으로 산출한다. 다만 혈액 기증자 수를 계산하기 위해선 정부 모니터링을 포함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확인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는 한 가지는, 혈액이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이 그 수요를 채워 준다는 점이다. 그것도 예전보다 훨씬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말이다.

전쟁 중에도 헌혈을 하러 온 사람들은 어떤 말을 전해 주나.

나는 이제 당직을 서지 않지만, 헌혈 센터를 종종 방문한다. 혈액 기증자들은 지금의 전쟁 상황에서 힘을 보탤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고 감사한 마음으로 헌혈에 임하고 있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 말한다. 우리 모두 무기를 들고 군대에 합류할 수는 없지만, 헌혈로써 후방 지원을 할 수 있다.

프로젝트의 자원봉사 인력은 충분한가?

전쟁이 시작되고,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해외로 떠났다. 또 어떤 이들은 무력감에 빠지거나 번아웃이 오기도 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자원봉사는 영원히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빠져나간 인력이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기도 한다.
블러드 에이전트의 자원봉사자들 ©Blood Agents
안정적으로 자원봉사 단체를 운영하려면 인원의 지속적 충원이 필요할 터다. 인력 충원에 특별히 노력하는 부분이 있나?

마케팅에는 ‘고객 생애 가치(Customer Lifespan)’라는 개념이 있다. 고객이 제공할 것으로 추정되는 공헌도의 합계를 말한다. 자원봉사자의 생애 가치는 봉사자 개개인이 짊어지는 의무와 반비례하여 평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개개인에게 지워지는 의무가 늘면 늘수록 기여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따라서 단체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지속 가능하게 운영하려면 젠가 게임처럼 의무를 분산해야 한다. 블록 하나가 빠지더라도 무너지지 않게 말이다.

 

국제적인 헌혈 네트워크를 향해


전시 상황에서 블러드 에이전트가 더욱 집중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사실 전시 상황에서는 사람들에게 헌혈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할 필요가 없다. 국민들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일에 함께하고 싶어하고, 헌혈은 그중 하나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한 뒤부터는 우크라이나 군대를 위해 지혈제 등 전술 의료 장비를 확보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헌혈만큼이나 지혈 역시 중요한 과제겠다. 전술 의료 장비는 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피를 막는 지혈제부터 기도를 확보하는 튜브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토니켓(tourniquet)이라고도 부르는 지혈대, 특수 붕대, 창상피복재 등이다. 창상피복재는 상처에 붙여 오염을 방지하고 체액 손실을 막는 의약품이다. 쉽게 말하면 습윤밴드(드레싱)다. 이런 의약품은 중요한 만큼 값이 나간다. 이러한 응급 처치 의료 도구를 지원하기 위해 ‘스톱 블리딩(Stop Bleeding)’이란 서브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국내에서 구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언급한 의료 도구는 우크라이나와 주변 유럽 국가에서는 거의 구할 수가 없다. 미국이나 거리가 먼 유럽 국가와 교류를 해야 했다. 전쟁 때문에 물류·배송에 있어 꽤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스톱 블리딩 프로젝트 덕분에 우크라이나 군대와 의료진에게 다양한 의약품을 전달할 수 있었다.
  • 토니켓 – 1994개
  • 창상피복재 – 1472개
  • 지혈제 – 1043개
  • 이스라엘산 특수 붕대 – 1828개
  • 구급상자 – 24개
  • 비인두기도기[1] – 79개
  • 반창고, 가위 등 다양한 의료 도구 – 287개

전쟁이 길어지고 소강과 격화를 반복하고 있다. 금전적인 지원은 전쟁 초와 비교해 어떤 상황인지 궁금하다.

당연하겠지만, 작년과 비교하면 우크라이나인들의 수입이 적어졌다. 또 대부분의 지원이 가장 먼저 우크라이나 군대에 닿기 때문에 우리를 포함한 민간 자원봉사 단체는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금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전술 의료 도구들을 구매할 예산을 마련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지원은 늘 충분하지 않다. 혈액 기증자 외에 후원자들도 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헌혈 네트워크를 우크라이나 전 지역으로 넓히는 것이 목표라고 들었다.

전쟁으로 인해 이런 계획은 무기한 연기됐다. 하지만 여전히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눈앞에 있는 전쟁이다. 지금의 과제를 먼저 해결한 후에 우크라이나를 넘어 국제적으로 헌혈 네트워크의 확장을 이어갈 것이다.
블러드 에이전트의 자원봉사자들 ©Blood Agents
국제적인 헌혈 네트워크 형성을 위해 어떤 접근법을 취하는 것이 좋을까?

헌혈은 어느 나라에서든 중요한 문제다. 헌혈을 일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다. 함께라면 언제나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1]
NPA(Nasopharyngeal Airway). 구강 상처가 있거나 입을 벌릴 수 없는 환자의 기도 확보 용으로 사용되는 튜브이며 특히 구토 반사를 자극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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