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짊어진 사람들
7화

에필로그 ; 이름 모를 누군가가 될 수 있기를

에필로그는 《전쟁을 짊어진 사람들》을 함께 기획하고 통역, 번역을 담당한 번역가 정소은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인터뷰이의 섭외와 소통을 포함해 많은 부분을 전담해 주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에 거주하며 우크라이나의 전쟁 상황을 가까이서 보고 듣고 옮겼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의 동원령으로 인해 가족들과 헤어지며 러시아를 떠나야 하기도 했다. 그는 번역 이외에도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전쟁 시작부터 지금까지 봉사 활동을 위한 모금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수년간 러시아와 인연을 이어 왔다. 통·번역을 중심으로 러시아와 관련된 일을 직업 삼아 지냈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많은 게 바뀌었다. 지난 8개월 동안은 우크라이나를 위한 자원봉사에 힘을 쏟았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에도 그랬지만 러시아 내 동원령이 선포되며 부분 징집이 발표된 9월 21일부터 몇 주 동안은 러시아 내 분위기가 정말 불안했다. 이미 전쟁 초였던 2월 말 계엄령이 내려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고, 하루가 다르게 이어지는 ‘산책’에서 붙잡힌 사람들이 폭행과 고문을 당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산책은 참 교묘한 표현이다. 러시아에서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지 않은 시위를 일컫는 은어다. 내 지인 몇 명 또한 산책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끌려갔다. 그들이 풀려날 때까지 밤새 불안해했던 기억이 난다. 한 친구는 붙잡혀 가 15시간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풀려났는데, 해맑게 웃으면서 “그곳에서 휴대폰을 빼앗겨서 연락할 수 없었고,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 했다”고 했다. 그래도 다른 경찰서에 비해서 운이 좋았다며 “두들겨 맞지 않은 게 어디야”라고 한다. 결국 그 친구는 지난 4월 러시아를 떠났다.

올해 3월 초에는 대학 동창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왔다. 인권 보호 관련 NGO에 근무하던 그녀의 사무실 문에 누군가 오물을 뒤집어씌웠다는 전언이었다. 그리고는 얼마 후 경찰들이 들이닥쳐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모든 기기를 빼앗아 갔다고 했다. 친구의 직장은 바로 얼마 전인 10월 7일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러시아의 인권 단체 ‘메모리알(Memorial)’이다. 소련의 정치적 억압에 대해 연구하는 단체로, 1989년에 창설된 이후 모스크바에 본부를 두고 옛 소련 지역을 포함한 여러 유럽 국가에 위치해 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인권 단체이기도 하다. 3월의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그녀는 현재까지 무사하다.

전쟁 초 여느 때보다 자주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났다. 매주 해외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작별 인사를 나눴고, 무거운 현실과 상관없는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었다. “숲으로, 들판으로 걸어서 넘을 수 있는 러시아 국경을 찾아보자!”라든가 “우리 이러지 말고 어디 우랄산맥 산골짜기 마을에 가서 감자 농사나 하면서 살래?” 등 웃픈 이야기들이었다. 반전 운동 참여로 직접적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껴 떠나는 이들도 있었고,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면서는 더 이상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을 수 없다고 느껴 떠나는 이도 있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이렇게 떠난 이들이 ‘러시아 여권 소유자’라는 이유로 어느 누구도 반기지 않는 이방인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두 명씩 내가 아끼는 이들이 떠날 때마다 나는 안도를 느꼈다. 그 당시에는 떠날 수 있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나라에서 자리를 지키기로 결정한 사람도 있었다. 반면, 떠나고 싶어도 부모님이나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어 떠나기 어려운 사람도 있고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이유 외에도 조국을 떠나는 건 여러모로 쉬운 선택이 아니다. 개인의 신념만큼이나 삶의 문제는 중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떠날 수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전쟁이 시작하고 약 2~3주 간은 마치 얼어붙은 듯했다. 러시아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무리도 아니다. 그러다 내가 번뜩 정신이 들게 한 문장이 있다. 한 러시아 기자의 말이었는데 “전쟁 상황에서는 한 사람의 작은 재능이나 노력이라도 꼭 보태어 서로를 도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부터 눈에 불을 켜고 무엇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한국 출판사 이야기장수의 이연실 대표님과 연락이 닿았고 3월 중순 올가 그레벤니크(Olga Grebennik) 작가의 《전쟁일기: 우크라이나의 눈물》 번역을 맡게 됐다.

올가는 하르키우에 거주하던 그림책 작가다. 아들 표도르와 딸 베라를 지켜내기 위해 전쟁 상황에서 고군분투한 과정을 시작으로 불가리아에서 난민이 되기까지의 내용이 담겼다. 연필 한 자루로 전쟁의 참혹과 절망을 그려낸 절절하고 먹먹한 작품이다. 번역하는 내내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짊어진 전쟁의 무게에 숙연해졌다.

7월 초엔 《시사IN》에 소개된 두 개의 글을 번역했다. 러시아의 여성 인권 기자 나스차 크라실니코바(Nastya Klasilnikova)의 롱리드 기고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출산 휴가를 보내던 하르키우의 심장내과 전문의 스베틀라나(Svetlana) 씨의 전쟁 일기다. 후자는 〈유모차 밀던 자리에 폭탄이 떨어져도, 그는 매일 일기를 썼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나스차 크라실니코바는 러시아의 여성 기자이자 블로거, 그리고 페미니즘 운동가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그는 자신의 탤래그램 채널을 통해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실황이 담긴 모놀로그를 전하고 있다. 전쟁 전 나스차는 성폭행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제작했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택시 범죄에 관한 팟캐스트 시리즈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10월 9일 러시아의 유명 교육 기관에서의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 관련 팟캐스트를 방송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반전 운동을 해온 그는 자신과 가족들을 향한 신변 위협 때문에 3월 초 외국으로 망명했다. 러시아 독립 언론 《메두자(Meduza)》에 참전 여성, 강간과 낙태, 인신매매 등 전쟁 중 여성들이 겪는 실상들을 전했다.

전쟁 전부터 수년간 여성 인권 보호를 위해 투쟁했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저주와 협박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군인들이 민간인 대상으로 저지르는 끔찍한 범죄들은 러시아 내부에서 평시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가해졌던 범죄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발언의 진의는 늘 왜곡된다. 러시아인으로부터는 조국 배신자라며, 우크라이나인으로부터는 감히 러시아인이 아는 척, 편 드는 척한다며,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남성들로부터는 지나치게 여성주의적 시각이라며 비난을 받고 있다.

모두에게 박수 받는 일은 없는 법이다. 전시에는 더욱이 그렇다. 자신이 판단하기에 옳고 양심적인 일을 하면서 그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질 각오가 필요하다. 예전부터 존경하고 관심 있게 지켜보던 나스차 기자님이기에 어떻게든 그의 목소리를 조명하고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8월 15일 광복절에는 북저널리즘에서 디지털로 발행한 우크라이나 민간 자원봉사자 세 명의 인터뷰를 통역·번역했다. 이 종이책의 전신이 된 인터뷰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실황, 나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과 그들의 무너진 일상, 그리고 매일 위험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우크라이나를 돕는 민간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를 한국에 알리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반전의 목소리를 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무엇이라도 비교적 안전하게 할 수 있는 나를 내 러시아인 친구들은 부러워한다. 나는 이것 또한 나만의 특권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이 특권은 허비되어선 안 된다. 내 능력과 여건 내에서 최대한 발휘되어야 했다. 한순간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아 열심히 글을 옮겼다.

물론 알리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전쟁 발발 이후로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활동 중인 민간 자원봉사 단체들과 전쟁 난민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금하는 일이다. 나와 몇 명의 러시아인 지인들은 전쟁 피해자인 난민 가족, 그리고 민간 자원봉사단에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전하고 있다.

다른 나라였다면 보다 쉬웠을 일이지만 러시아에서는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현재 러시아에서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우크라이나를 돕는 건 위험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도 지원을 멈추지 않고 어떻게든 반전의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가치관을 지켜내는 내 러시아인 친구들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이들이라고 확신한다.

기부금을 전달하는 건 생각보다 복잡한 과정이다. 도움이 필요하지만 구호 단체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경우도 있고 우크라이나 계좌가 막혀 금액 전달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다행히 몇 명의 아끼는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한국의 A,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A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들의 도움이 없이는 지속하기 어려웠을 터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토록 우크라이나 자원봉사자들에 집착하고 돕게 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겠다. 비단 정의로운 마음으로만 임한 것은 아니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내가 사랑하는 러시아의 자유와 평화 또한 이 잔인한 전쟁이 끝나야 만이 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끼는 이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곳곳에 있다. 이들의 안전을 간절히 바라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하는 내 이기적인 마음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또 하나의 개인적 이유가 있다. 내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다. 나는 직접적으로 전쟁을 겪거나 위험 지역에 있지도 않고, 공습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지난 8개월간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끔찍한 뉴스를 끊임없이 접하고, 지인들이 당하는 일들을 지켜보다 보니 어느덧 나 또한 전쟁으로 인한 간접적인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모든 일들은 심신에 가혹했다.

4월 초 부차(Bucha)와 키이우의 민간인 학살이 보도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고통스러웠지만 뉴스의 모든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스차 크라실니코바 기자의 텔레그램 채널에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겪고 있는 전쟁 실황에 대한 포스팅이 올라올 때 역시 한 문장 한 문장, 사진 한 장 한 장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말로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찬찬히 읽어내려가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정신적으로 견디기 버거웠다. 이 모든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에 관여하고 나를 통해 퍼져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한 이유다. 다만 그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감정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일종의 업무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한 나름의 방어 기제다. 그럼에도 자원봉사 끝에는 작게나마 마음의 치유가 찾아왔다. 자원봉사가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을 위한 내 노력은 나에 대한 일종의 다그침이기도 하다.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인들이 겪는 고통을 인지하고 가장 큰 희생자 또한 우크라이나인들이란 걸 나 자신에게 꾸준히 상기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보다 러시아와 인연이 깊은 나는 종종 우크라이나가 아닌 러시아를 우선순위로 생각할 때가 있다. 팔은 안으로 굽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전쟁을 지지하지 않으며 살인을 변명할 생각이 없다. 내 러시아인 친구와 지인 대다수도 전쟁을 반대하며 그로 인해 국가로부터 압력을 받는 경우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상상하기조차 힘든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있다. 러시아에 대한 뜨거움과 전쟁의 폭력성은 전혀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타국을 침범한 국가의 국민으로 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9월 21일의 부분 징집 발표는 치명적이었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본인이 그토록 반대했던 전쟁에 총알받이로 끌려갈까 두려워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자신의 고향에서 도망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로 하여금 그런 치욕을 겪게 하는 나라가 밉고 원망스러웠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사랑하는 러시아인들’이 가장 큰 희생자로 느껴졌다. 아무리 양가적 감정이 요동쳐도 중심을 잃을 순 없었다. 실제로 침공을 겪고 있는 이들도, 희생자도, 일차적으로 러시아인이 아닌 우크라이나인이다.

현재 러시아에서 활동 중인 자원봉사자들이 잊지 말자며 반복해 되뇌이는 말이 있다. 이들은 러시아 남성들이 징집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인데, 그 활동의 의미는 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수십만 명의 러시아 군인들이 새롭게 소집될 경우 뒤따를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의 희생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외부의 시선으로는 가치 판단에 어려움이 없지만 이처럼 러시아 국민의 감정은 복잡하다. 나 역시 스스로 계속 리마인드하기 위해 자원봉사를 멈출 수 없다.

《전쟁일기》가 한참 출간 준비 중일 때 러시아의 유명 반정부 기자인 유리 두즈의 〈Man during war(전쟁 중의 사람)〉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접했다. 헝가리에서 우크라이나 난민을 돕는 나스차 추코프스카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스차는 워낙 러시아 미디어에서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기에 그전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인터뷰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가 하는 말들이 심장에 박히는 듯했다.

“20세기 세기 소련 문학은 아픔이 가득하다. 1930년대 스탈린의 탄압, 굴라크(Gulag) 수용소, 전쟁 등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때때로 ‘이름 모를 누군가’가 등장한다. 모든 게 끝난 것만 같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름 모를 누군가.’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스카프를 건네주거나, 안전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거나, 빵 한 조각을 나눠주거나, 위험한 순간 편들어 주고 지켜 준 누군가 말이다. 주인공도 아니고, 이름이 누구인지, 어디에 살고 왜 그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심지어 그는 도움을 주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그 ‘이름 모를 누군가’가 되어야만 한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라면 낭만적이고 다소 허풍스러운 말로 들렸을 터다. 그러나 전쟁 상황에서 접한 나스차의 이 발언은 나침반이자 가치관이 됐다. 다큐멘터리를 접한 이후 나스차가 헝가리에서 펼치는 우크라이나 난민 지원 활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게 됐고, 북저널리즘과 소통하며 바로 떠올린 사람 또한 나스차였다.

다섯 명의 인터뷰이 중 유일한 러시아인인 그녀는 확고하다. 자원봉사를 통해 ‘선한 러시아인’이 되는 것도 우크라이나인들을 도와줌으로 인해 일종의 ‘신분 세탁’을 하는 것도 싫어한다. 피난민을 돕는 각종 프로세스를 마치 거대한 공장처럼 유능하게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많은 걸 배웠다.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되기도 했다.

《전쟁을 짊어진 사람들》 종이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크라이나를 위해 일하는 민간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해준 북저널리즘과 담당 에디터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이 책이 하나의 반전의 목소리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에는 하르키우의 자원봉사자이자 첫 번째 인터뷰이인 안드레이가 있다. 그는 나에게 우크라이나의 얼굴이자 아픔, 영웅이다.

전쟁 초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로 안 좋은 뉴스가 들릴 때마다 안부를 묻거나 그곳 상황에 대한 질문을 그에게 해댔다. 귀찮을 법도 했을 텐데 그는 늘 인내심을 갖고 답해주었고 본인이 심적으로 더 힘들었을 테지만 외려 나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어줬다. 전선에 인접한 가장 위험한 지역에 살면서도 누군가를 돕는 일을 멈추지 않는 그를 보며 하르키우는 나에게 상관없는 먼 곳일 수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민간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를 알리고자 결심한 것 또한 안드레이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를 위해 일하는 자원봉사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위험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고, 러시아어로 그들에게 말을 걸어온 나를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줘서 미안하고 고맙다. 부디 하루빨리 전쟁이 종식되기를, 그 날까지 《전쟁을 짊어진 사람들》의 인터뷰이 모두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기도한다.

끝으로 전쟁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다. 지난 4월 《전쟁일기》를 번역할 때 가장 가슴 아팠던 부분이 있다. 작가가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단 10분 만에 자신의 예전 삶을 모두 정리하고, 아이들과 함께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어머니 그리고 남편과 생이별하는 장면이다. 이런 무섭고 참담한 결정은 누군가의 인생에서 단 한 번 찾아와도 많다고 생각했다.

출간 이후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전쟁이 이어지며 작가의 상황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나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찾아왔다. 동원령으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집을 떠나게 됐으니 말이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다. 지금도 전쟁을 짊어지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고 그들은 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무게를 버티고 있다.

러시아에 남아있는 이들이 부디 외롭거나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전 세계의 수많은 ‘전쟁을 짊어진 사람들’ 또한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러시아에 자유를.

번역가 정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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