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줄다리기

9월 1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문해력 논란이 잊을 만하면 반복되고 있다. 이는 세대 갈등이란 문제를 읽어내지 못한 우리 사회 전체의 문해력 부족을 뜻한다.

  • ‘심심한 사과’를 ‘지루한 사과’로 오해하는 해프닝이 문해력 논란으로 번졌다.
  • 반복되는 문해력 논란을 바르게 읽으면 세대 갈등이 보인다.
  • 세대 갈등을 해결할 열쇠는 과연 디지털 문해력 교육인가.

BACKGROUND_ 심심한 사과
  • 심심한 사과가 지루한 사과가 됐다.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는 사과문이 온라인 상에서 문해력 논란을 불러왔다. ‘심심(甚深)’은 매우 깊고 간절하게 마음을 표현한다는 뜻이다. 이를 ‘지루하다’는 의미로 오해한 누리꾼은 사과가 적절치 못하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언론은 ‘심심한 사과’ 논란을 조명하며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란 의제를 다시 띄웠다.
  • ‘심심’ 이전에 많은 단어들이 있었다. 2019년엔 ‘명징’과 ‘직조’, 2020년엔 ‘사흘’, 2021년엔 ‘금일’과 ‘무운’이 문해력 논란을 촉발했다. 4년째 같은 논의가 반복되는 건 우리가 사회현상을 오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심심한 논의에 마침표를 찍을 때다.

NUMBER_ 75퍼센트

문해력 논란이 일 때마다 언론은 실질문맹률 75퍼센트라는 수치를 강조한다. 우리나라 산문문해력, 수량문해력은 OECD 평균이었다. 언론이 인용하는 실질문맹률 75퍼센트는 문서문해력에 한정된 수치다. 큰 숫자는 쉽게 사람들의 관심을 산다. 75퍼센트가 가리고 있는 건 이뿐 아니다. 이 조사가 2001년에 진행된, 다시 말해 21년이나 지난 자료라는 사실도 가리고 있다. 문해력은 측정 기준은 다음과 같다.
  • 산문문해력 ; 시, 소설, 기사 등 줄글을 읽는 능력
  • 문서문해력 ; 도표가 포함된 공문, 보고서 등을 해석하는 능력
  • 수량문해력 ; 금전출납, 대출이자 계산 등 숫자를 이해하고 계산하는 능력

ANALYSIS_ 문서의 시대? 디지털 시대!

그렇다면 문서문해력에서 높은 실질문맹률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언론은 왜 이 자료를 인용할까? 답은 한자어에 있다. 디지털이 발달되기 전엔 문서의 시대였다. 일상 속 모든 업무는 문서를 통해 처리됐다. 공공기관에서도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공적인 문서엔 표준어를 쓰는 것이 사회적 합의였다. 한자어는 곧 기득권의 언어였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표준국어대사전’ 전체 44만여개의 단어 가운데 한자어는 57퍼센트를 차지한다. 자연스럽게 문서에 한자어가 많이 쓰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문서의 시대는 지났다.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며 문서라는 전통의 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짧은 글로 그림으로 영상으로, 문서가 아니어도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세대에게 한자어는 몰라도 되는 것이 되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새로운 단어를 만들면 된다.
CONFLICT_ 언어 주도권 싸움

언어는 기존 사회의 가치와 질서를 담고 있다. 언어는 또한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진다. 사회의 가치와 질서가 변하면 언어도 변한다. 디지털 시대에서 한자어는 주목 받지 못한다. 한자어가 편한 기성세대는 한자어 교육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쉽고 편리한 디지털 문법에 익숙한 세대는 기득권의 단어를 강요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신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저서 《언어의 줄다리기》에서 언어 표현의 줄다리기는 사실 이데올로기의 충돌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문해력 논란은 언어의 줄다리기, 즉 언어를 둘러싼 세대 간 주도권 싸움이다.
REFERENCE_ 귀남이

한 단어를 놓고도 세대 간의 해석이 달라진다. 중앙일보는 밀레니얼 사전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언어를 소개한다. 그 예가 ‘귀남이’다. 귀남이는 4050세대에겐 귀한 아들, 1020세대에겐 빌런이다. 1990년대 초 방영된 MBC 드라마 〈아들과 딸〉엔 이란성 쌍둥이가 등장한다. 아들은 귀남, 딸은 후남이다.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 귀남이는 남아선호 사상이 깊은 집안에서 귀하게 대접받는다. 그렇게 과거에 귀남이는 귀한 아들을 뜻하는 단어였다. 반면 요즘은 귀남이 하면 〈지금 우리 학교는〉 속 빌런을 떠올린다. 지금 통용되는 ‘귀남이’의 의미는 힘이 어느 곳으로 기울었는지 말해준다. 이제는 기성 세대가 새로운 ‘귀남이’의 뜻을 배워야 하는 시대가 됐다.
EFFECT_ 문해력 논란

기성 세대로선 판을 뒤집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전통 언론은 기성 세대가 쥐고 있다. 2012년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 따르면, 한국의 16~24세 청년의 문해력 수준은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에 해당한다. 반면, 45~54세 문해력은 하위권, 55~65세 문해력은 최하위권에 속한다. 2001년 조사와 2012년 조사는 완전히 엇갈리고 있다. 언론은 전자를 택했고, 젊은 세대의 문해력 논란을 이용해 기울어진 힘을 다시 되돌리려 했다.
RISK_ 디지털 문해력

결과적으로 우리는 문해력 부족 사회가 맞다. 디지털 문해력에 한정해서 보면 말이다.  언론이‘심심한 사과’ 논란을 만든 배경, 즉 세대 갈등을 읽어내지 못한 우리 사회 전체의 문해력 부족이다. 실제로 세대를 막론하고 디지털 문해력에서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디지털 문해력이란 온라인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취합한 정보를 활용해 더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만 15세에 해당하는 한국 학생의 디지털 문해력은 OECD 회원국 중 하위권이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중장년, 노인층의 디지털 문해력은 오랜 화두였다. 미디어의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세대 별로 각자 유리한 대로만 해석하는 필터버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INSIGHT_ 언어가 만나는 공간

필터버블은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의 언어를 분리하는 과정에도 큰 역할을 한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세대별 SNS 이용 현황’ 6월 보고서를 보자. 베이비붐 세대는 네이버밴드, X세대는 페이스북·카카오스토리,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인스타그램을 주로 이용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서로 다른 플랫폼에서 각자만의 언어 문화를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언어는 나누면 나눌수록 닮아간다. 공통의 언어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사실상 없다는 건 언어의 줄다리기가 계속 이어질 거란 예고기도 하다.
FORESIGHT_ 새로운 언어는 코딩?

교육부는 디지털 문해력 향상책으로 코딩을 주목했다. 2022 개정 교육과정 시안에 코딩 교육 의무화를 포함했다. 코딩은 컴퓨터의 언어다. 디지털 세대에게 중요한 역량이지만 지금 이어지고 있는  언어의 줄다리기를 해결하지 못한다. 반복되는 문해력 논란은 결국 문해력 부족의 결과다.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탓할 것이 아니다. 기성 세대는 이미 갈등의 한 축이다. 이 사실을 읽어내지 않는 한, 언어의 줄다리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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