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복을 걸친 인공지능

9월 5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인공지능이 과학‧기술 영역에 뛰어든다. 중요한 건 인간처럼 변할 인공지능이 아닌, 인공지능처럼 생각하는 인간이다.

  • 미국 에너지부(DOE)의 아르곤국립연구소가 수천 개의 태양광 흡수체를 실험하기 위해 인공지능의 머신 러닝 기능을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 과학‧기술 연구 분야에도 인공지능이 활발히 도입되고 있다. 어쩌면 과학계에도 필터 버블이 생길지 모른다.
  • 인공지능 시대, 우리에게 실험과 실패, 목적과 우연은 무슨 의미일까?

DEFINITION_ 태양열 흡수체 실험

현재 태양 전지의 주요 흡수체는 실리콘 혹은 카드뮴 텔루라이드(Cadmium Telluride)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재료지만 면적당 흡수할 수 있는 양이 적어 넓은 부지가 필요하다. 과학자인 마리아 챈(Maria Chan)은 가장 효율적인 흡수체를 찾는 실험 과정에 있어서 머신 러닝 기반의 인공지능이 주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지능은 수많은 화합물을 실험 가능한 범위로 좁히고, 인간의 개입 없는 실험을 이어갈 예정이다.
ANALYSIS_ 인공지능의 실험

머신 러닝 인공지능에게 필요한 것은 대규모 데이터와 알고리즘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긴 시간에 걸쳐 처리해야 하는 데이터를 빠른 시간 안에 학습할 수 있다. 이후 답을 산출하기 위한 알고리즘에 따라 짧은 여정을 마친 후 가장 효율적이고 실패 가능성이 적은 몇 가지 답을 내놓는다.
STRATEGY_ 효율성

아르곤국립연구소에서 태양 전지의 흡수체에 가장 적합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 수백 개의 화합물 구성에 대한 데이터를 인공지능에게 학습시킨 후, 가능한 모든 테스트 조합을 시행한다. 그 조합 중 추가로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경우의 수를 400여 가지로 줄였다.
  • 추가 실험을 통해 인공지능의 예측을 실제로 테스트하지만 이때에도 인간은 투입되지 않는다. 폴리봇(Polybot)이라는 이름의 로봇을 사용해 실험을 진행하며 ‘가장 튼튼하고 효율적인’ 태양 전지를 위해 실험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양의 데이터를 검토하고 현실의 문제에 빠르게 답할 수 있다. 아르곤국립연구소가 진행하는 태양 전지 흡수체 발명이 그렇다. EU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태양광 발전에 필요한 토지는 EU 도시의 50퍼센트 이상, 한국의 75퍼센트 이상이다. 기후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무엇보다 빠르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말이다.
NUMBER_ 6배

2020년 〈네이처〉가 공개한 인공지능 로봇 화학자는 한 번에 몇 주도 쉬지 않고 작동한다. 인공지능 화학자는 8일간 688개의 실험을 수행하며 광촉매 혼합물 활성화 식별에서 인간보다 여섯 배 더 나은 작업 효율을 보여 줬다. 결과에 유리한 것을 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했기에 가능했다. 최근에는 몸값이 비싼 데이터 과학자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자동화 머신 러닝 기술인 오토ML이 떠오르고 있다.
RECIPE_ 합목적성

인공지능은 적은 인력으로 짧은 시간에 많은 경우의 수를 관찰하고 설정된 과제에 가장 알맞은 답을 내놓는다. 알고리즘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법한 절차는 시도하지 않는다는 뜻과도 같다. 인공지능의 실험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에서 합목적적이다. 답에 맞지 않는 데이터는 걸러진다. 무수한 계산과 로직이 뒤섞인 블랙박스를 열어 알고리즘의 계산식을 따라갈 수도 없다.
RISK_ 발명과 발견 사이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발명 과정은 합목적과는 거리가 있었다. 때때로 세상을 바꾼 발명은 우연한 발견에서 태어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냥이다. 영국의 화학자 존 워커는 발화를 연구하던 중 염소산칼륨과 황화안티모니를 반죽해 난로 옆에 두었다가 우연히 성냥을 개발했다. 물론 그 반대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전달하는 매개물이었던 ‘에테르’를 파기하고 새로운 전제를 발명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기존의 데이터와 이론을 폐기했기에 가능했다. 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의 이종필 교수는 과학을 “혁명과 전복의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EFFECT_ 과학과 기술 사이

과학과 기술 사이의 장벽이 사라진 이후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산업 혁명 이전까지 학자로서의 과학자와 테크니션(technician)으로서의 기술자는 분리돼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기술 기업이 등장하고, 기업들은 과학자를 연구원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더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과학은 기술로, 기술은 과학으로 흘러들어갔다. 지금의 과학적 원리는 기술을 만들고, 기술은 다시 과학적 지식을 창출한다. 기술 발명을 위한 실험이 온전히 인공지능의 손에 맡겨진다면 미래의 과학계는 필터 버블을 품을지도 모른다.
REFERENCE_ 인공지능이 되는 인간

버팔로대학교에서 펴낸 책 《기계가 세상을 지배할 수 없는 이유》는 인공지능의 능력과 인간의 능력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다. 기계의 학습은 의지와 의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와 의도는 적정한 시간의 숙성을 거쳐 새로운 의문으로 태어난다.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인공지능처럼 생각하는 시대다. 이미 우리 삶의 상당부분은 알고리즘에 의해 조직됐다. 스트리밍 플랫폼은 내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추천해 주고 소셜 미디어는 내가 관심 있는 상품을 보여 준다. 발견과 발명의 상호작용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대는 최근의 문해력 논란과도 그리 멀지 않다. 다른 생각과 취향과 의문을 만나기 어렵기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논의가 아닌 소모적 논쟁이 이어진다.
INSIGHT_ 에러의 종말

한국계 수학자 최초로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뭘 해야겠다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목표가 구체적일수록 마음이 경직된다. 오히려 목표를 정확히 두지 않으면 지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시도를 할 가능성이 생긴다.” 가속이 미덕이 된 지금, 빠른 문제 해결과 결론 도달은 유일한 가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아이디어의 단초와 불필요한 마주침은 줄어든다. 실패하면 떨어지는 세상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시도를 좇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상상력은 축소되고 성공의 알고리즘이 되풀이된다. 에러를 원천봉쇄하는 시대는 인공지능처럼 생각하는 인간을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FORESIGHT_ 지난한 길

과학과 기술뿐 아니라 도시 계획과 예술, 저널리즘의 영역에서도 인공지능은 분명히 인간의 영역을 ‘축소’하고 있다. 양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악시오스의 비쥬얼 저널리스트들은 달리2와 뉴스 일러스트레이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결론은 이미지 생성 AI가 창의적인 문제 해결 프로세스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원활한 협업을 위해서는 문제를 보고 공통의 믿음을 형성하는 인간이 필요하다. 잠시 눈을 돌려 한국의 상황을 보자. 교육부가 초‧중‧고등학교에 코딩 시험을 도입하겠다고 하자 수많은 사교육 업체가 들썩였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을 코딩 기능인으로 키우는 것이 아닌 미래의 관점을 보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2018년, 융합적 상상력을 갖춘 과학도를 양성하겠다며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내려놓고 포스텍으로 거처를 옮긴 송호근 교수는 최근 학과 중심주의에 가로막혀 사표를 냈다. 진보하기 위해서, 상생하기 위해서 어쩌면 세상에게는 조금 지난한 길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 길은 빠르거나 매끈하지는 않을 지라도 결국 인간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법적 주체로 인간 사회에 나서는 인공지능이 궁금하시다면 《법정에 출석한 인공지능》을 추천합니다. 알고리즘의 자동화 기술이 조직하는 미디어 환경과 편향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알고리즘의 블랙박스》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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