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가 배출한 이산화탄소 가운데 파키스탄이 차지하는 양은 단 0.4퍼센트다. 기후 재난은 불공정하다. 그리고 그 불공정은 이미 예측되어 있었다.
CONFLICT_ 책임소재
파키스탄은 탄소와 멀고 빈곤과 가깝다. 지난해 파키스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500달러에 그쳤다. 먹고 살 걱정을 하기에도 바쁜 처지다. 재해 예방에 예산이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기후재해는 파키스탄의 빈곤을 더욱 심화한다. 악순환의 고리가 시작된다. 누구의 책임일까? 적어도 파키스탄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KEYPLAYER_ 공범들
그렇다면 이 기후재난의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수치적으로만 따지면 시선은 중국을 향한다. 지난 2019년 기준,
중국의 탄소 배출량은 전 세계 총량의 27퍼센트로, 4분의 1이 넘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공범이다. 전 세계가 사용하는 호사스러운 기술들은 중국산 탄소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 기술에도 예외는 없다. 그린 에너지인 태양광 발전을 하려고 해도 패널의 핵심 원료인 규소를 광산에서 파내야 한다. 중국의 광산에서 파낸 원료, 중국의 공장에서 생산된 부품과 조립된 기계를 누리며 우리는 그린을 찾는다.
INSIGHT_ 무시된 경고
“매년 전 세계에서 석탄 20억 톤이 태워진다. 그리고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 70억 톤을 배출한다. 이는 장막이 되어 지구를 뒤덮고 기온을 올린다. 수 세기 안에 영향이 매우 커질 수 있다.” 요즘 시대 너무도 흔해 보이는 이 문장은 1912년 8월 14일에 발행된
한 신문의 기사다. 110년 동안 우리는 경고를 받아왔지만 듣지 않았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100년 만에, 1000년 만에. 기후와 관련된 보도에서 너무 자주 눈에 띄어 이젠 무감각해진 단어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단어는 100년에 한 번, 1000년에 한 번 들어야 한다. 말의 뜻이 그러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시대다. 세기를 뛰어넘은 재난이 일상이 되어버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
REFERENCE_ 시카고
좁고 짧게 보자면 우리 사회의 안전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승섭 교수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시카고의 폭염을 다뤘다. 1995년, 닷새간의 폭염으로 7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던 시카고는 그로부터 4년 뒤 비슷한 기후재난을 겪게 되었다. 달라진 것은 사망자 수였다. 110여 명으로, 급감했던 것이다. 기후재난을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재난’으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았던 결과다.
FORESIGHT_ 3.5퍼센트의 희망
길고 넓게 보면 어떨까? 기후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뜨거워지는 지구의 온도를 돌이킬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전문가 집단 안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불행하게도, 돌이킬 수 있다는 쪽의 이야기조차
희망적이지는 않다. 배출된 온실가스가 대기 중에서 사라져도 이 영향은 장기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변화를 체감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얘기다. 기후가 회복되는 속도 또한 적도 인근 지역이나 극 지역에 위치한 경우 상대적으로 더 느리다고 한다. 아프리카나 인도, 파키스탄 지역 등이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희망적이지 않은 전망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시카고에 답이 있다. 시카고는 재난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재난의 크기를 줄였다.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했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관점의 기후변화도 국가 단위에 책임을 지워서는 해결할 수 없다. 내가 산 신형 스마트폰이 파키스탄의 홍수를 불러오는 구조 속에서 국가 단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없는 것이다. 정치를, 경제를 넘어 인류 단위로 고민할 방법부터 찾아야한다. 뻔한 결말에 절망하기는 이르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리카 체노워스는 인구의
3.5퍼센트가 행동하면 사회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우리는 지금, 3.5퍼센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