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스트 크라운

9월 19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며 영연방이 흔들리고 있다. 대영제국의 잔상도 영면에 들고 있다.

  • 1952년부터 재위해 온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며 한 시대의 막이 내렸다.
  • 세계가 애도를 표하는 가운데 영연방 국가들에서는 탈군주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브렉시트, 새로운 총리, 에너지 위기와 경기 침체로 영국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다.

NUMBER _ 70
©BBC
70년의 재위 기간, 제2차 세계 대전부터 15명의 총리와 함께한 인물이자 조지 6세의 딸, 영국 윈저 왕조의 4대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에서 서거했다. 향년 96세, 남편 필립공이 사망한 지 1년 뒤였다. “London Bridge Is Down”이라고 알려진 암호를 통해 영국은 분주하게 국왕의 죽음을 맞았다. 약 12일간의 애도 기간을 걸치며 예정된 문화 행사 등은 모두 취소되고, 10~12일 차는 국경일이 되어 금융 시장 및 관공서 등이 문을 닫는다.
KEYPLAYER _ Queen

엘리자베스 2세는 살아있는 권위이자 죽은 권력이었다. 신비주의로 일관한 왕실의 전통을 깨고 1953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치러진 대관식을 TV로 생중계하며 그는 국민들의 안방에 들어왔다. 몰락한 대영제국의 현신으로서 영국인들의 긍지가 되어준 그는 영국의 소프트파워 그 자체였고 많은 영국인들은 그를 사랑했다. 영국의 여론 조사 기관 유고브(YouGov)에 따르면 영국인의 76퍼센트가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에 속상함을 표했으며 85퍼센트는 그가 영국에 도움이 되었다고 평했다. 이는 군주제에 대한 지지(64퍼센트)로도 이어졌다.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몰락과 함께 많은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 몰락했지만 ‘해가 지지않는 나라’ 영국의 해는 장장 70년이 넘게 더 떠 있었다.
EFFECT _ 영연방

영국인들만의 왕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2세를 군주로 섬기는 곳은 ‘영연방 왕국(Commonwealth Realm)’ 14곳이 더 있다. 인구를 모두 합치면 1억 3500만 명이다. 이들 국가는 영국과 동군연합(同君聯合)이다. 대표적으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있다. 여기에 미국과 영국을 더하면 영미권의 군사 동맹 기구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가 된다. 넓게는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이라는 국제 기구가 있는데 여기에는 54개국이나 소속돼 있다. 과거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구로 따지면 25억 명,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이른다. 영국 본토와 식민지 자치령의 동등한 입지를 천명한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헌장(Statue of Westminster)’에 따라 만들어졌다. 엘리자베스 2세는 즉위한 지 1년 만인 1953년, 약 7개월 간 호주와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영연방 13개국을 순방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했다. 그는 영연방을 지탱하는 힘이었고, 영연방은 곧 영국의 힘이었다. 
STRATEGY _ 커먼웰스
©CBC Sports
만약 일왕이 광복 이후 한국을 방문해 가칭 ‘일연방’으로의 가입을 제안한다면 수긍키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영연방에는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을 포함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던 나라까지 가입했다. 이들은 어쩌다 영연방에 모이게 되었을까? ‘공동의 부’라는 의미를 상기시키는 영연방의 영문 표기 ‘커먼웰스’에 답이 있다. 영연방은 회원국끼리 무역 비용이 21퍼센트 절감되며 국가 간 투자도 비회원국 사이에서보다 27퍼센트 높다. 이들 국가는 전세계 GDP의 1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니 엄청난 시장이다. 게다가 ‘DFID(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라는 매해 20조 원 규모의 영국의 해외 지원 사업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과거에는 특별 비자 제도로 이주가 쉬웠으며, 런던 유학도 지원됐다.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암묵적으로 상호 방위에도 협력한다. 4년간 한 번 열리는 스포츠 대회 ‘커먼웰스 게임’은 올림픽의 영연방 버전이다. 영연방을 지탱해 온 힘은 실리였으며 엘리자베스 2세는 그 약속이었다.
ANALYSIS _ 지킬 앤 하이드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명작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인간 본성의 선악을 이중 인격으로 표현한 명작이다. ‘신사의 나라’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불리는 근현대사 속 영국과 닮았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지탱하는 자본주의와 의회 민주주의를 보급한 선진국이지만 높은 ‘실크 햇(Silk Hat)’에 감춰진 악행은 나치 독일에 비견된다. 영연방은 그 이중성의 결과물이다. 제국주의 시절, 직접 통치를 선호하던 여타 열강과는 달리 대영제국은 식민지를 시장으로 보고 토호 세력에 자치권을 주며 간접 통치했다. 식민지가 독립을 원하면 명예혁명 때와 같이 최대한 무혈 독립을 추구했고, 이후엔 영연방을 통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식민지였던 국가들의 반발심이 크지 않던 이유다. 그러나 영국이 모든 ‘하이드’를 숨기진 못했다.
CONFLICT _ 무너진 동상
©MBC
2021년 7월 1일, 국경일을 맞은 영연방 소속 캐나다 전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위니펙시에서는 지방 의회에 설치된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2세의 동상이 무너져내렸다. 과거 가톨릭교회가 운영한 원주민 기숙 학교 세 곳에서 1100구에 이르는 유해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대부분 어린이들로 캐나다 원주민 아동에 대한 학대 및 학살의 근거로 떠올랐다. 이 유해는 1800년대 이후 유럽 문화 주입을 위한 캐나다 정부의 강제 동화 정책 당시 부모로부터 격리된 원주민 아동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숙 학교들은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캐나다를 통치한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 당시에 세워졌다.
REFERENCE _ 제국의 그림자

대영제국의 그림자는 영국이 식민 지배했던 아프리카 국가들과 직접 통치했던 인도, 독립을 추구해온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뻗어있으며 중국과 미얀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종차별의 본산인 노예무역, 청과의 아편전쟁, 북아일랜드 분쟁, 아일랜드 대기근, 이란의 모하마드 모사데크 축출 및 팔레비 왕조 지원, 이-팔 분쟁의 계기가 된 사이크스-피코 협정 및 맥마흔 선언, 뱅골 대기근, 쿠르드족 학살, 보어군과의 전쟁 당시 보어군 집단 수용 및 탄압, 미얀마의 소수민족 로힝야를 이용해 민족 분쟁을 만든 것 등 전부 나열하기도 어렵다. 대영제국의 특기인 ‘손을 더럽히지 않는 교묘한 통치술’은 현대 영국에 와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둔갑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에 많은 정치 지도자가 조의를 표한 것과 별개로, 아픔을 간직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분노한 이유다.
RECIPE _ 코이누르와 컬리넌

엘리자베스 2세가 그 모든 악행의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영국 왕실과 왕권을 상징하는 고결한 상징물에는 제국의 잔상이 남아있다.
©CNN
  • 코이누르 ; 16~19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호령한 무굴 제국에는 ‘코이누르(Koh-I-Noor)’라는 10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나타났다. “소유자는 세상을 지배할 수 있지만 남성의 경우 최악의 불행을 경험한다”는 전설이 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에서 약탈한 이 보석은 대대로 영국 여왕의 왕관을 장식해왔다. 1억 파운드(1740억 원)의 가치를 갖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오랫동안 반환 운동을 벌여왔는데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와 동시에 소셜 미디어에 #KohinoorDiamond라는 해시태그로 다시 한 번 반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 컬리넌 ; 평시 국왕이 쓰는 ‘영국 제국관(Imperial State Crown)’의 하단부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317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컬리넌 II’가 박혀 있다. 190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발견된 ‘아프리카의 별’, 컬리넌(Cullinan) 다이아몬드를 세공한 아홉 조각 중 하나다. 1907년 에드워드 7세가 당시 남아공 트란스발 정부로부터 15만 파운드에 구입했지만 남아공 국민들은 이를 사실상 지배력을 이용한 강탈로 여긴다.
  • 대영박물관 ; 《가디언》은 대영박물관을 ‘세계 최대의 도난 물품 보관소’라고 비난한 바 있다. 사실상 약탈의 역사가 전시된 대영박물관은 1963년 대영박물관 법에 의해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유물을 처분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지난 5월 22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독일의 과거 식민지였던 나미비아에서 수탈한 유물 23점을 반환한 것과 대비된다.

RISK _ #NotMyKing

구체제는 저물고 군주제에 대한 의문은 계속돼 왔다. 건재했던 건 엘리자베스 2세뿐이다. 곧바로 즉위한 찰스 3세는 다이애나 스펜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소셜 미디어에는 #NotMyKing이라는 해시태그가 빗발치고 공화국주의자들은 군주제의 몰락을 점친다. 이와 같은 흐름은 영연방 국가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공화국이 결국 뉴질랜드가 향해야 할 길”이라고 말한 바 있으며, 호주에서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공화국 전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자메이카, 바하마, 벨리즈 등의 카리브해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공화국 전환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영연방의 영향력 때문도 있지만 그에 따라 바꿔야 할 국가의 상징물이나 화폐 등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문학적 비용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현대사에서 처음 맞는 국왕의 교체는 영연방 해체 논의의 마중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INSIGHT _ 영국몽(英國夢)

영국이 브렉시트를 감행할 수 있던 배경에는 영연방이 있다. EU를 벗어나 영연방의 인프라, 미국과의 유대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던 영국은 예견되어 있던 국왕의 죽음을 맞았다.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도에는 일종의 ‘영국몽(英國夢)’이 읽힌다. 제국의 잔상이 영면에 드는 순간이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 이후로 새로이 영국을 이끌게 된 리즈 트러스 총리는 장례가 모두 끝나고 나면 아직 다 수습되지 않은 브렉시트의 여파와 인플레이션, 에너지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독립을 원하는 스코틀랜드, 고결함이 사라진 로열 패밀리와 함께 새로이 역사를 써야 한다. 《가디언》은 유럽 저널리스트들의 여러 논평을 소개하며 “애도가 끝나면 현실이 무겁게 들이닥칠 것”이라 제목 붙였다. 현실의 문제에 더해 지난한 과거사의 청산이 이뤄질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한다.
FORESIGHT _ 다극체제

호주와 뉴질랜드의 영연방 탈퇴 움직임, 영국에 대한 인도의 반감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세력 균형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장기화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EU 각국과 미국의 동상이몽이 드러나고 있고, 영연방이 흩어질 조짐을 보이며 세계는 신냉전이 아닌 ‘다극체제(multipolar system)’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인도가 2022년 1분기 GDP에서 세계 5위에 오르며 영국을 처음으로 제쳤고, 커다란 시장 가치를 인정받으며 새로운 현상 변경 세력으로 점쳐지고 있다. 영국의 소프트파워 부재는 영연방이란 이름 아래 가려져 있던 수많은 중견국의 부상을 이끌어내며 국제 관계의 지형 변화를 야기할 것이다.


최근 영국 정치의 흐름이 궁금하다면 〈쇼는 계속되지 않는다〉를, 노예 제도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백인주의의 발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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