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칼이 될 때

9월 28일 - FORECAST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쌀값이 껌값보다 싼 시대다. 그러나 여전히, 한 줌 쌀이 생명이다.

  • 정부가 쌀을 사는 데에 1조 원을 쓴다. 쌀값을 떠받치지 않으면 농촌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 쌀소비는 줄고 있지만 식량 주권을 빼앗길 수는 없다. 상황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농촌 고령화에 있다. 인구 구조조정을 준비해야 식량 안보를 지킬 수 있다.

MONEY_ 1조 원

정부가 1조 원을 쓴다. 45만 톤의 쌀을 ‘시장’으로부터 ‘격리’시켜 쌀값 폭락을 막아보겠다는 의도다. 이번 달 쌀 산지 가격은 20킬로그램당 4만 원대다. 전년 대비 무려 25퍼센트 가까이 폭락했다. 인플레이션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이례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생산량이 늘었다. 2020년 태풍과 장마로 흉년이 들면서 쌀값이 오른 데다가 논에서 벼가 아닌 다른 작물을 재배할 경우 지원금을 주는 제도도 2020년 3년 만에 종료되었다. 때문에 2021년, 20년 만에 처음으로 벼 재배면적이 증가했다. 게다가 풍년까지 들었다. 반면 쌀 소비량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이 일 년 동안 소비하는 쌀의 양은 2000년 93.6킬로그램이었지만 지난해에는 56.9킬로그램을 기록했다. 반토막이다.
NUMBER_ 4분의 1

이번 수확기 시장격리 외에 매년 실시되는 공공비축이 따로 있다. 시가대로 쌀을 사들여 비축하는 제도로, 2005년부터 매년 시행되고 있다. 이 역시 사상 최대량인 45만 톤을 사들일 예정이다. 즉, 올해 정부는 총 90만 톤의 쌀을 시장격리하게 된다. 전체 생산량의 약 4분의 1에 해당한다.
CONFLICT_ 식량안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쌀값은 안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너무 높아도, 낮아도 안 된다. 쌀값이 터무니없이 오르면 굶는 사람들이 생긴다. 식생활 다변화가 진행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주식은 쌀밥이다. 세대나 경험에 따라서는 쌀밥을 먹어야 제대로 식사를 했다고 여기는 인구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반대로 쌀값이 너무 낮아지면 농촌이 무너진다. 2019년 기준, 전체 농가 중 벼농사를 짓는 농가의 비율은 절반이 넘는다. 쌀값 폭락을 그대로 두면 농촌 절반이 주저앉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만 쌀값 폭락이 반복된다. 사실, 2017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 바 있다. 2018년에 논 타작물 재배지원 제도가 도입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RECIPE_ 시장격리 vs 작물전환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쌀값 안정화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두고 맞서는 중이다.
  • 더불어민주당 ; 야권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역점 법안으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현행법상 정부는 쌀 생산량이 예상 수요량의 3%를 넘어서거나 가격이 전년보다 5% 이상 하락하면 초과 생산량을 매입할 수 있다. 민주당의 개정안은 정부의 매입을 강제화하는 것이다.
  • 국민의힘 ; 반면 정부 여당은 시장격리 의무화보다는 ‘전략작물 직불제’를 도입하겠다는 입장이다. 밀이나 콩, 조사료 등과 같은 전략작물을 재배하는 농가에 대해 직불금을 지급하는 방법이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벼농사에서 다른 작물로 전환하도록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물론, 여야의 방안 모두 완벽한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RISK1_ 쌀 예외주의

먼저 민주당이 주장하고 있는 방안은 계속해서 추가 생산되는 쌀을 정부가 떠안아 시장격리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세금으로 계속해서 쌀값을 떠받치자는 얘기다. 사실, 이러한 방안이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쌀시장 개방이라는, 세계화의 파고가 있었다. 쌀을, 그중에서도 밥쌀을 수입산에 잠식당해서는 안 된다는 정책적 선택이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다. 한국인에게 쌀이 상징하는 바는 먹을 것 그 이상이었고, 때문에 다른 농축산물은 희생하더라도 쌀은 지켜내야 한다는 쌀 예외주의가 싹텄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는 “쌀 한 톨이라도 개방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라고 공약한 바 있을 정도다.
RISK2_ 고령화

반면, 정부 여당의 방안은 현실화에 어려움이 있다. 농촌에서 논벼를 재배하는 비율이 높은 이유가 급격한 농촌 고령화에 있기 때문이다. 논벼는 기계화율이 99%에 육박한다. 집중적인 노동력 투입 없이 논만 있으면 기계로 지을 수 있다는 뜻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농촌 인구 231만여 명 가운데 65살 이상 노인은 103만여 명이었다. 고령화율이 44.7퍼센트에 달한 것이다. 이들에게 기계로 지을 수 있는 벼농사를 포기하고 노동력이 필요한 새로운 작물에 도전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2020년 농업총조사에 따르면 논벼 재배농가 중 70세 이상의 경영주 비율은 46.9퍼센트로 타작목에 비해 많게는 25퍼센트까지 높았다.
RISK3_ 밥쌀이 칼이 될 때

게다가 논벼 농사를 짓고 있는 고령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감소할 수밖에 없다. 벼 재배 면적도 자연 감소한다는 뜻이다. 갑작스러운 흉년 등이 닥쳐 쌀이 부족해졌을 때, 벼농사를 지을 절대적인 논 면적이 부족하다면 장기간 주식을 해외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우리가 먹는 단립형 쌀은 미국 캘리포니아, 일본, 중국, 대만 등에서만 재배된다. 수입해 올 수 있는 지역 자체도 제한적이고, 그나마 정치적인 셈법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들이다. 안 그래도 곡물자급률이 20퍼센트인 마당에 쌀의 자급자족마저 불가능해진다면 언제든, 누구든, 한국을 향해 식량이라는 칼자루를 휘두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REFERENCE_ 양파

쌀값을 지키겠다고 쌀만 보는 정책도 문제다. 지난 2019년의 양파 파동은 한국 농업구조의 균열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앞서 언급한 논 타작물 재배지원 제도가 양파 가격을 급격히 떨어뜨렸던 것이다. 논에 심을 수 있는 벼 이외의 타작물은 콩을 비롯해 양파, 감자, 마늘 등의 대체 작물이다. 농민들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양파 재배 면적이 늘어나면서 풍년은 파동이 되었다. 당시 소비 촉진 캠페인 등이 있었지만 선의에 기대어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정부가 채소와 과일, 축산 등 전체적인 농산물을 두고 식량 생산 계획을 세워야 해결에 다가갈 수 있다. 쌀에만 집중한 정책은 더 많은 농민을 희생으로 내몰 뿐이다. 
INSIGHT_ 기펜재

19세기 중엽, 아일랜드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감자의 가격이 치솟는데, 소비는 오히려 늘어났다. 이는 감자가 최후의 선택지, 구황작물이었기 때문이다. 밀이나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된 아일랜드인들이 결국 감자를 먹어야만 했던 까닭으로 기본적인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깨졌다.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 영국의 경제학자 기펜(Giffen)의 이름을 따서 ‘기펜재’라는 명칭이 생겼다. 가격이 상승하는데 수요가 같이 늘고, 가격이 하락하는데 수요도 줄어드는 경우다. 공급이 수요를 지나치게 초과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그로 인해 쌀에 대한 인식이 취약해진다면, 그래서 만약 쌀이 기펜재로 전락한다면 정부가 쌀값을 받쳐 올릴 방법이 없게 된다. 재고를 처리할 방법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수요와 공급을 맞출 방안이 시급한 이유다.
FORESIGHT_ 가야 할 길

우리는 쌀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쌀 정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고령의 농민들이 은퇴하지 못하고 기계의 힘에 기대어 벼농사라도 지어야 여생을 이어갈 수 있는 현실부터, 쌀을 제외한 농작물은 흉년과 풍년 모두 ‘파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까지. 우리 농촌은 뿌리 깊게 잘못되어있다. 도시에서는 농촌이 보이지 않는다. 깔끔하게 포장된 농산물들이 진열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농촌을 내어주고 도시의 성장을 받는 거래를 반복해 왔다. GATT, WTO, FTA, 모두 그랬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그곳이 우리의 따뜻한 밥상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이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다. 외국인 노동자 정책을 포함한 농촌 인구 구조조정이 시급하다. 경매나 ‘밭떼기’와 같이 왜곡된 유통구조에도 손을 대야 한다. 들여다봐야 할 문제가 쌓여있다. 먼 길 같지만, 지금 당장 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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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산되어 말끔한 모습으로 우리 손에 닿게 되는 음식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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