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펜, 멜로니에 이어 영국에서도 여성이 우파의 새 얼굴이 됐다. 현지시간 9월 6일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의 뒤를 이어 영국의 78대 총리가 된 리즈 트러스(Liz Truss)다. 언론은 보수적 색채가 짙은 그를 ‘제2의 마거릿 대처’로 부른다. 트러스는 독특한 인물이다. 반(反)대처 성향이던 학창 시절을 지나 보수당에서 데뷔했고 교육 장관, 환경 장관, 법무 장관, 재무 장관을 거치며 정치 이력을 골고루 쌓았다. 존슨 전 총리가 사임하며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리시 수낙과 경선 결선을 벌였는데, 결국 보수당 당수가 됐다. 자신을 ‘정통 보수’로 소개한 트러스는 극우 성향은 아니지만 우파 포퓰리즘의 일부 문법을 답습했다. 그는 부유층 감세, 에너지 가격 상한제,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 등의 의제로 수낙 전 장관을 눌렀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임기 시작부터 세계 경제를 충격에 빠뜨린 감세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STRATEGY _ 미니 버짓
트러스 내각은 ‘Mini Budget’이라 불리는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했는데 1972년 이후 가장 파격적인 감세안이다. 전체 감세 규모가 약 450억 파운드(70조 원)에 이른다. 영국 신임 재무장관 쿼지 콰텡은 감세를 통해 2.5퍼센트의 성장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뿐만 아니다. 에너지 부문에서 6개월간 600억 파운드를 지출하는 대규모 지출안을 함께 발표했는데 재원으로 영국의 국채인 ‘길트(gilt)’가 거론되고 있다. 즉, 감세와 차입으로 성장을 유도하려는 경기 부양책을 선택한 것이다. 감세 정책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 2023년 4월부터 소득세율 19퍼센트로 1퍼센트포인트 인하.
- 2023년 4월부터 고소득자에 적용되는 소득세 최고 세율 40퍼센트로 5퍼센트포인트 인하.
- 주택 구입 시, 부동산 인지세[4] 부과 기준 상향.
- 법인세 25퍼센트로 인상하려는 계획 폐지 후 현행 19퍼센트로 유지.
- 영국 노동자들에게 지난 4월부터 부과된 국민보험료 1.25퍼센트 추가 인상 분 올 11월 6일부터 폐지.
MONEY _ 돈의 매운 맛
멜로니와 트러스, 세계 무대에서 이제껏 보아 온 여성 리더들과는 사뭇 다른 두 여성 지도자는 새로운 리더십으로 자국과 유럽을 구할 수 있을까? 이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돈이다.
- 이탈리아 ; EU의 이단아가 될지 모를 이탈리아지만 당장 독자 행동을 하긴 어렵다. EU가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회원국을 위해 마련한 7500억 유로 규모의 ‘경제 회복 기금’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코로나19 피해가 가장 큰 나라 중 하나다. 경제 지원이 절실한데, 이 경제 회복 기금 중 무려 약 2000억 유로(276조 원)가 이탈리아에 배정됐다. 문제는 이 기금이 2026년까지 이탈리아에 분할 지급된다는 점이다. 국가 부채 비율이 국내 총 생산(GDP)의 150퍼센트에 달하는 이탈리아는 EU의 개혁 조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경화에 대한 우려는 줄어들지만 EU의 압박 수위에 따라 멜로니 내각의 입장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 영국 ; 영국의 경제 상황은 심각하다. 지난 8월 영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9.9퍼센트를 기록하며 40년만에 가장 가파르게 상승했다. 영국 중앙 은행인 잉글랜드은행(BOE)은 인플레이션으로 신음하는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빅스텝을 밟는 등 금리 인상에 주력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정부는 돈을 풀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이 불협화음을 내는 것이다. 파운드화 가치는 브렉시트 이후 계속 떨어지고 있고 영국의 국채 금리는 급격한 매도로 인해 현지시간 27일 기준 5퍼센트를 돌파하는 등 가격이 폭락하고 있는데 트러스 내각의 감세안·지출안은 여기에 불을 지핀 꼴이 됐다. 정부의 신뢰도가 감소하며 재정 건정성에 의구심이 제기되는 상황이다.[5] 국제통화기금(IMF)은 현지시간 9월 28일 트러스 내각의 정책이 인플레이션과 불평등을 부추긴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INSIGHT _ 위기의 리더십
세계 정치 무대의 현대 여성 지도자들은 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왔다. 성장 일변도의 신자유주의 속에서 외면 당하던 기후 위기와 불평등, 다양성 등의 의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는 글로벌 거버넌스가 실종된 21세기에 많은 국가가 국제적으로 협력을 도모해볼 만한 쟁점들이다. 그러나 르펜, 트러스, 멜로니로 이어지는 최근의 유럽 여성 정치 지도자들은 우파 포퓰리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고 있다. 여성 리더십의 대표성과 가치는 우파 포퓰리즘 안에서 쉽게 훼손될 수 있다. 여성 지도자의 탄생이 세계의 후퇴를 의미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들은 녹록지 않은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지만 분열하는 세계에 필요한 포용적 의제는 위기의 리더십에서 나오지 않는다.
FORESIGHT _ 약한 고리와 새로운 얼굴
극우 포퓰리즘은 약한 고리를 파고든다. 실제 이들 정당의 의제가 실제 표를 준 모두에게 소구된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많은 유럽의 의원내각제 국가들은 정강·정책이 아닌 기술 관료 중심으로 구성된 ‘테크노크라트 내각(Governo Tecnico)’의 성격 때문에 정치 공학이 강조된다. 상대적으로 극우 정당이 득세하기 쉬운 것이다. 게다가 멜로니는 경제통
[6]임을 자랑하던 드라기 총리가 이탈리아 경제를 수습하지 못한 것의 수혜를 입었다. 트러스의 경우처럼 그 역시 이탈리아의 경제 위기가 당선에 호재로 작용헸다. 가장 주효했던 것은 기존 정치인이 아닌 새로운 얼굴을 바라는 국민의 염원이다. 《폴리티코》 유럽판의 한 논평은 항상 민주당(PD)에 투표해 오던 진보 성향 지역 ‘레드 벨트’의 주민들이 멜로니에 표를 준 이유를
밝힌다. “그들은 더 이상 서민과 노동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기성 정당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성 정치가 포섭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은 쉽게 극단화되거나 새로운 얼굴을 찾게 된다. 지금의 유럽 상황을 보면 그 새로운 얼굴은 또 다른 여성 정치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