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잡을 태워 봄을 그리다

10월 12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한 여성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란의 히잡 거부 시위가 반정부 시위로 번지고 있다. 이 시위의 의미와 여파는 거대하다.

  • 이란의 쿠르드인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은 이란 전역에 반정부 시위를 불렀다.
  • 여성 인권 문제를 넘어 다양한 차원으로 시위가 격화한 데에는 국내외적 사정이 있다.
  • 이 시위는 ‘이란의 봄’과 ‘이란 핵 합의’에 결정적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KEYPLAYER_ 마흐사 아미니
ⓒBBC
히잡 착용 불량[1]과 스키니진 착용. 현지시간 9월 13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마사 아미니(Mahsa Amini)’라는 22세 쿠르드인 여성이 위 이유로 이란의 도덕 경찰(morality police)에 체포 및 구금됐다. 그는 사흘 만인 9월 16일 사망했다. 사인은 주장에 따라 심장 마비 혹은 뇌사, 원인은 불명이다. 구치소 연행 도중 경찰이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쳤다는 목격담도 있고, 구타가 아닌 질환에 의한 사망이라는 의사 소견도 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분명 체포·구금은 중요한 변인이다. 이란 전역에서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2]
DEFINITION_ 이란의 봄?

이란에서 여성 인권 침해는 일상다반사다. 이란의 시위가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이 시위를 바라보는 세계 전문가들의 견해는 심상치 않다. 이란 이슬람 정권의 전복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방송사 CNN은 현지시간 10월 7일 〈이란의 ‘여성 혁명’은 베를린 장벽과 같은 순간이 될 수 있다(Iran’s ‘women’s revolution’ could be a Berlin Wall moment)〉라는 제목으로 이를 엄중히 경고했다. 이 시위는 무엇이 다르고 어떤 이유로 커졌기에 ‘이란의 봄’[3]이 거론되고 있을까? 이 시위의 의미와 여파를 제대로 보려면 몇 가지 키워드가 필요하다.
RECIPE_ 변인들

《월스트리트저널》은 10월 4일, 해외 기업에 이란의 사업 전략을 조언하는 테헤란의 사업가 모스타파 파자드의 발언을 실었다. 그는 이 시위의 원동력으로 “여성, 기술, 빈곤의 삼각관계”를 꼽았다. 이 시위가 보이는 특징도 여기에 기인한다. 먼저 10대를 포함한 MZ 세대의 참여율이 높고, 가부장 사회임에도 남성 역시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있으며,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띤다. 여기에 아미니의 배경에서 기인한 소수 민족 갈등 및 분리 독립 문제, 빈곤의 배경이 되는 미국과의 갈등이 얽혀있는 복잡한 문제다. 특히 미국과의 갈등은 이란 핵협정이 주축이다. 최근 중국, 러시아, 북한이 핵 사용을 언급했고, 중동 내 이란의 적성 국가들이 다시금 핵 무장에 나설 가능성이 있어 그 여파를 잘 살펴야 한다.
RISK_ 쿠르드

시위의 시작은 9월 18일 아미니가 살던 ‘코르데스탄(Kordestān)’주의 사케즈와 주의 수도 사난다즈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사실 코르데스탄은 페르시아어 표현으로, 아랍어로는 ‘쿠르디스탄(Kurdestān)’[4]이다. 이곳은 이란 북서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튀르키예 정부가 골머리를 썩는 그 쿠르드족이 모여 사는 곳이다. 쿠르드인은 조사 기관마다 다르지만 전 세계 약 3800만 명 정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튀르키예로 1500만 명 정도가 살고, 이란 코르데스탄의 약 150만 인구 중 대부분이 쿠르드인이다. 튀르키예의 쿠르드족은 ‘쿠르드노동자당(PKK)’이라는 무장 단체를 중심으로 분리 독립을 요구하고 있으며 튀르키예는 쿠르드족을 탄압해왔다. 이란은 쿠르드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코르데스탄에서 쿠르드인들의 자치를 암묵적으로 허용하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마사 아미니의 사망은 이 불문율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란의 쿠르드족이 집단 행동에 나설 경우 이란 역시 분리 독립 문제에 휘말릴 수 있다. 이 시위의 숨겨진 위협이다.
BACKGROUND_ 히잡의 진짜 의미
ⓒJTBC News
이 시위에서 눈여겨 볼 것은 단연 히잡이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여성의 신체를 가리는 다양한 복식 중 하나다. 코르데스탄에서 시작한 시위는 곧 수도 테헤란으로 번지며 여성 운동의 양상으로 변했다. 시위대는 히잡을 찢고 불태우며 ‘여성, 생명, 자유(woman, life, freedom)’라는 구호를 외쳤다. 히잡 착용 거부 의사는 일견 여성 해방의 레토릭을 가지지만 과거 1979년 이란 혁명을 돌이켜보면 숨겨진 의미의 변화가 있다. 이란은 1936년 히잡 착용 금지법이 있던 나라다. 서구화를 추진하던 권위주의 전제군주정인 ‘팔레비 왕조’ 시절엔 이 히잡이 군주제, 서구화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됐다. 1979년 이란 혁명을 통해 신권 통치(theocracy)로 회귀한 이란에서는 다시금 히잡 착용 논의가 피어올랐고 1983년 히잡 착용을 강제하는 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5] 결국 이란의 여성들은 또 한 번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율법에서 히잡이 지니는 성차별적 요소보다, 이란 여성이 주목한 것은 히잡 착용의 ‘선택권’이다. 이는 2004년 프랑스 등에서 벌어진 ‘부르카 착용 금지법’을 둘러싼 논쟁과도 상통한다.
ANALYSIS_ 현대, 이슬람, 여성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있다. 특히 여성 인권에서 그렇다. 히잡을 둘러싼 이란의 역사와 별개로 국제적으로 히잡은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통한다. 현재 히잡을 강제하는 나라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뿐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개혁 의지 아래 2018년에 히잡 강제법을 폐지했다. 역사적으로 종교에 대한 간섭은 세계사의 굵직한 전쟁을 만들어냈지만, 세계는 더 이상 도덕 경찰 같이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인권 침해를 참지 않는다. 미국캐나다 등 서방 국가들은 즉각 이란에 경제 제재를 가했고 각국의 셀러브리티와 정치인들은 이란 시위대에 연대의 의사를 표하고 있다. 미국이 철수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새로운 지도 세력이 된 탈레반도, 말뿐이지만 ‘여성 인권 존중’을 약속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를 가속하는 것은 기술 발전이며 여기에서 시위의 또 다른 특징이 대두된다.
NUMBER_ 30.7
ⓒKBS시사
기술 발전은 시위의 연령도 바꿨다. 이란혁명수비대(IRGC)에 따르면 최근의 시위에 이란 역사상 가장 어린 연령대의 시위대가 모이고 있으며 10월 5일 시위에서 체포된 시위대의 평균 연령은 15세로 알려졌다. 이란의 디지털 네이티브는 사회 변화에 민감하고 서구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이는 성별을 가리지 않았고 젊은 남성들도 시위에 적극 참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여기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바로 세대 변화다. 김혁 한국외대 이란학과 겸임교수가 KBS에서 발언한 바에 따르면 현재 이란의 중위 연령은 30.7세다. 서구화와 군주제를 반대하며 일어난 이란 혁명은 1979년이므로 중위 연령을 대입하면 이들은 혁명 이후에 탄생한 세대다. 따라서 이란 혁명 당시의 문제 의식과는 다소 상이한 인식을 가진다. 서구의 문명 침공과 군주정에 대한 반대보다 이들은 순수한 ‘자유’ 그 자체를 열망한다. 이란 혁명 당시엔 군주제의 대체제 같았던 신권 통치도 지금의 세대에겐 억압으로 보이는 것이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보수적 정치 노선 역시 현 정부에 부정적 이미지를 씌웠다. 반정부 시위로 비화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다만 여기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MONEY_ 인플레 50

현재 이란의 물가상승률은 50퍼센트다. 이로 인해 가장 타격이 큰 것은 중산층이다. 이란의 화폐인 ‘리알’화는 현재 사상 최저치다.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 교착으로 폭락하여 6월 12일 기준 달러당 33만 2000리알이다. 2015년 핵합의가 이뤄지던 당시 달러당 3만 2000리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열 배 넘는 폭락이다. 2015년 당시 인구의 20퍼센트에 불과했던 빈곤 인구는 이란의 3분의 1로 늘었으며 지난 40년간 인구의 60퍼센트로 성장했던 중산층은 현재 절반 이하가 됐다. 빈곤의 출발은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당시 미국, 소련, 중국, 유럽 등을 포함, 대부분의 아랍 국가가 이라크를 지원하며 이란은 국제적으로 고립됐다. 저유가 시대를 지나 이란이 핵 개발을 자행하며 미국의 경제 제재가 시작됐고, 이란은 지속적인 경제난에 시달리게 됐다. 혁명 세력을 믿었던 이란 국민의 마음엔 의구심이 커졌다. 2015년 미국 오바마 정부와의 핵합의로 잠시 숨통이 트이나 했지만 트럼프 정부가 이를 파기하며 이란은 다시 경제난에 봉착했다. 눈앞의 빈곤은 국제 관계보다는 부정 부패가 심한 자국 정부로 총구를 겨눴다. 크고 작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이 시위가 반정부 시위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INSIGHT_ 위기의 전조

이 시위는 현대 이슬람과 이란, 핵합의와 민족 갈등의 중요한 분수령이다. 이란 정부가 느끼는 위기감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석유 및 천연가스 생산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시위에 참여한다는 점인데, 이는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원인이기도 했다. 이들 노조는 페르시아만 등 석유 수출항에 인접한 공장의 노동자들이다. 아직 국가 경제의 상당 부분을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는 이란으로서는 큰 부담이다. 이란은 러시아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천연가스 매장량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자원의 저주’에 시달려온 이란의 운명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이란의 지도부다. 이란 정부가 느끼는 두 번째 위기감은 여기서 나온다.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지원했던 서방의 속내는 자원이었다. 라이시 대통령은 시위 도중 참여한 지난 제77회 유엔총회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 미국의 이주자 인권을 들어 미국이 인권에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있음을 저격했다. 하메이니 역시 이 시위의 뒤에 미국 등 서방이 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일종의 반서방 프로파간다다. 그러나 전술했듯 이란은 상당 부분 세대 교체가 이뤄졌으며 신정 통치 이후 기운 경제에 대한 불만이 지금의 정부를 향하고 있다. 정부의 선택지는 ‘히잡 자율화’와 ‘핵합의 복원’이 유력하다. 바이든 정부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북중러의 핵 위협이 고조되는 이 시점에 바이든 정부에게는 이 시위가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FORESIGHT_ 이란의 봄, 이란의 Bomb

이란의 봄은 올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낮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의 중동 이슬람 연구 권위자인 이희수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나는 내부적으로 너무 강력한 폭압 정권이라는 점, 또 하나는 미국 역시 사우디·이스라엘과 협력 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어 이란 정부의 전복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이를 ‘적대적 공생 관계’로 표현했는데, 실제 바이든 정부는 최근 국제 유가의 상승으로 사우디에 방문해 OPEC+의 증산을 요청한 바 있다. 이스라엘과는 ‘아브라함 협정’을 지지하며 중동 내 미국의 영향력과 외교적 성과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섣불리 이란이 붕괴할 경우, 자원을 노린 어떤 세력이 그 자리를 꿰찰지 알 수 없다. 특히 이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러시아에 명분을 줄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하면 이란의 봄은 요원해 보인다. 다만 이란 정부가 경제 제재를 회피하며 유화책의 하나로 핵 합의 복원 의지를 다시 내비친다면 이란의 핵 개발은 다소 지연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국제 사회는 하나의 시름을 덜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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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잡을 쓴 상태에서 머리카락이 살짝 보였다고 한다.
[2]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유가족에 위로의 말을 전하며 진상 조사를 약속했지만 시위에 대해서는 진압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이란 정부는 시위 초부터 군과 경찰을 동원해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이는 악수(惡手)가 되고 말았다. 사망자가 늘어갈수록 시위가 격화됐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비영리단체 ‘이란 인권(IHR)’에 따르면 10월 8일 기준, 시위 과정에서 약 185명이 사망했고 이중 최소 19명은 어린이다.

현지시간 9월 28일 시스탄·발루체스탄 지역의 도시 자헤단에서는 차바하르(Chabahar)의 한 경찰서장이 15세 여성을 성폭행한 것에 대한 규탄 시위가 열렸다. 아미니 시위와 함께 격화된 이 시위는 유혈 진압 과정에서 90명이 사망했다. ‘자헤단 피의 금요일(Zahedan's Bloody Friday)’로 불리는 사건이다. 위 사망자 숫자 중 자헤단의 유혈 진압 사건이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인스타그램에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사진을 올린 여성이 또 체포된 일도 있었다. 시위가 커지자 정부는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고 검열을 강화했다.
 
[3]
중동 지역의 민주화 물결을 의미하는 ‘아랍의 봄’을 차용한 표현이다.
[4]
쿠르드족이 모여 사는 땅(-스탄)을 의미한다.
[5]
1920년, 군인이던 레자 칸은 쿠테타로 권력을 잡았다. 이후 그는 왕을 의미하는 ‘샤’라는 칭호를 얻어 레자 샤(팔레비 1세)가 됐고 전제군주제인 팔레비 왕조를 열었다. 팔레비 왕조의 이란은 세속 국가를 지향했다. 그 일환으로 1936년에 히잡 착용이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BBC가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이란의 여성들은 종교 문화적 여파로 “수치심과 함께 노출된다는 느낌을 지닌 채 베일을 쓰지 못하고 외출해야 했다”고 한다. 착용 선택권의 박탈이었던 셈이다. 

1951년 팔레비 2세 통치 시절엔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가 석유 국유화를 추진하며 득세했다. 이로 인해 이란은 서방의 눈 밖에 났다. 팔레비 2세는 모사데크를 축출하며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했는데 이 과정에서 본격적인 서구화를 꾀하는 ‘백색혁명(1963)’이 있었다. 여기엔 미국 케네디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팔레비 2세는 토지 개혁, 문맹 퇴치와 더불어 이란 여성의 사회 참여도 늘리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전제군주제를 벗어나려던 당시 국제 분위기와 더불어, 반서방 기치 아래 종교와 문화를 사수하고자 했던 반대파와 충돌하는 계기가 됐다. 이란의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를 위시한 이란 혁명(1979)이 성공한 이후, 이란은 급격히 종교적으로 보수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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