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선 정신병원
완결

법정에 선 정신병원

마음에 찾아오는 병도 적절한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그 적절한 치료 방법이란 무엇일까?

©Photograph: Phillip Reed/Peerless Rockville Historic Preservation Ltd/Getty/Guardian Design
미국 최고의 정신병원 가운데 하나인 체스넛로지(Chestnut Lodge)[1]에 입원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레이 오셔로프(Ray Osherof)는 카리스마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의사로, 전형적인 아메리칸 드림 속 인물이었다. 그는 버지니아 북부에 세 군데의 투석 센터(dialysis center)를 열었으며, 출간되지 않은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의 심경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그전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매우 새로운 무언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성공에 대한 명확하면서도 뚜렷한 전망이었다.” 그는 전화벨이 울리는 걸 좋아했다. 전화벨 소리는 새로운 환자와 사업 확장을 알리는 신호였고, 이는 곧 그가 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감각을 깨워줬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이 로켓처럼 솟아올랐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41세에 이혼과 재혼을 연달아 겪은 뒤 그는 동력을 잃은 것 같았다. 전 부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이주하자, 그는 아이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망쳐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생각은 반복되기 시작했다. 비서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근방을 계속해서 몇 번이고 걸어야 했다”라고 한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해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또한 했던 말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바람에 사람들을 지겹게 만들기 시작했다.

새 아내와 결혼식을 올린 지 2년도 되지 않아서 새로운 아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레이는 너무나도 무관심해진 나머지 그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여기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지나간 일뿐인 것 같았다. 그는 동종 업계의 경쟁자들로 인한 스트레스에 점점 더 압박받았고, 결국 더 큰 투석 업체에 자신의 사업 일부를 매각했다. 그 후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내렸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매각을 완료한 이후 그는 이렇게 썼다. “밖으로 나가서 차에 탔을 때, 내가 나뭇가지 한 조각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는 마치 유독 가스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레이는 자신이 훌륭한 삶을 주도면밀하게 만들어 왔다고 생각했다. 이 삶은 자신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은근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일련의 충동적인 결정들로 인하여 그것을 전부 날려버린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의 상실에 대하여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는 게 전부인 것 같았다.” 입에 넣는 것은 바닷물에 푹 적셔진 것처럼 썩은 맛이 낫다. 섹스를 해도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그 행위들에 “기계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썼다.

레이는 자살하겠다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 아내는 그가 병원에 입원하지 않으면 이혼 소송을 청구하겠다고 대응했다. 레이는 마지못해 동의하고, 1964년에 출간된 조앤 그린버그의 베스트셀러 《난 너에게 장미정원을 약속하지 않았어》에 등장한 체스넛로지에 입원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설에서 조앤 그린버그는 체스넛로지에 입원해 회복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자연스럽게 이 작품은 정신 분석학적인 통찰력의 힘에 대한 일종의 송가(頌歌) 역할을 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이러한 증상들은 나름의 필요에 의해 나타난 것이며, 그 나름의 많은 목적이 있다. 그래서 그걸 없애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이다.”

체스넛로지 입원 초기였던 1979년에 레이의 정신과 주치의였던 마누엘 로스(Manuel Ross)는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라며 레이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레이는 그저 “더 후퇴했고, 더 멀어졌고, 더 반복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로스는 레이의 강박적인 후회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상실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방편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가 상실한 것은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는” 다른 삶이었다.

로스는 레이의 분별력이 나아지기를 바라며, 그가 자기연민에 빠질 때 끼어들어 “그런 건 그만둬요!”라고 말했다. 레이가 자신의 인생을 비극처럼 설명하면 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비극은 없어요. 당신은 비극의 주인공이 될 만큼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에요.”

그가 입원한 지 몇 달 후에 열린 직원회의에서, 한 심리학자는 레이를 상담한 뒤에 깨질 듯한 두통이 생겼다고 말했다. 한 사회복지사도 동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른 환자 10명을 한 번에 상대하는 것 같아요.”

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여성들은 자신의 불안감을 담아 두는 저장 용기이자, 자신을 받아 주며 고통스러울 때마다 손을 쓰다듬어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저에게도 그렇게 대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몰라요. 어떻게 저에게 이럴 수 있어요?’라고 말이죠.”

로스는 레이에게 그전에 이미 이렇게 경고했다고 한다. “당신의 파괴 성향 병력을 보면, 조만간 당신은 저와의 치료도 망치려 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스는 “그가 입원해서 5년에서 10년 정도 치료를 받으면,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다른 정신과 의사도 “5년에서 10년 정도면 적당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1. 그 병원의 고집스러운 믿음


체스넛로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와 활동의 목표는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 병원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 어느 하나라도 그 단어의 원래의 뜻보다 파악하기 어렵거나 정서적인 의미가 더 많이 담겨 있는 건 없다.”[2] 정신과 의사인 알프레드 스탠튼(Alfred Stanton)과 사회학자인 모리스 슈워츠(Morris Schwartz)[3]가 체스넛로지를 연구하여 1954년에 발표한 《정신 병원(The Mental Hospital)》에서 쓴 내용이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획득함으로써 그 자체로 일종의 신앙(spirituality)이 되었다. “이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일종의 집단 평가(collective evaluation)였다. 이러한 체계 속에서 신경증이나 질병은 악으로, 정신적인 건강은 궁극의 선으로 여겨졌다.”

거의 40년 동안 체스넛로지의 병원장이었던 덱스터 불러드(Dexter Bullard)는 자신의 병원이라면 미국의 다른 병원에서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바로 환자들이 현실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든 간에, 모든 환자의 정신을 분석해내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입원비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전제였다.) 약리학의 가능성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정신 분석가였던 자신의 기풍이 발현되는 기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만약 어떤 환자가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면, 그 기관은 실패한 것이었다. 그곳의 의사들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환자가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환자들이 아픈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1954년에 불러드가 한 동료에게 했던 말이다. “그걸 알아내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그들이 만성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할 권리가 없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정신분석연구소(Frankfurt Psychoanalytic Institute)를 설립한 프리다 프롬-라이히만(Frieda Fromm-Reichmann)[4]은 ‘체스넛로지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그녀는 체스넛로지의 부지 안에 작은 집을 지어 그곳에서 살았다. 그녀는 외로움이 정신병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외로움이 너무나도 심각한 위협이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자신들도 외로움에 물드는 것이 두려워서 그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회피한다고 서술했다. 외로움이라는 경험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그것은 일종의 ‘발가벗은 존재(naked existence)’였다.

프롬-라이히만을 비롯한 체스넛로지의 정신분석가들은 ‘대체 엄마(substitute mother)’의 역할을 한다. 젊은 치료사들은 형제간의 경쟁(sibling rivalry)이라고 부르는 과정을 통해 일하면서 그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그곳의 의사들도 모두 정신 분석을 거쳤으며, 하나의 가정에 통합되어 있다고 느꼈다. 한 정신과 의사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 자신은 “문제 가정(dysfunctional family)의 일원”[5]이었다. 환자가 약속된 면담을 위해 복도를 걸어갈 때면 다른 사람들은 “좋은 시간 보내세요!”라고 외쳤다. 미국정신의학협회(APA)의 회장이었던 앨런 스톤(Alan Stone)은 체스넛로지를 가리켜서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깨어 있는 병원”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곳은 마치 신들이 거주하는 발할라(Valhalla) 같았습니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심리학과 정신 의학이 가진 잠재력에 대한 믿음은 한계가 없어 보였다. 심리과학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틀을 제공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정신과 의사 브록 치점(Brock Chisholm)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세계는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고통받아야 했던 질병들은 주로 인간의 왜곡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심리학자에 의해 구원받거나 구원받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체스넛로지에서 레이는 하루에 여덟 시간씩 걷기 시작했다. 입술을 내밀고 크게 숨을 쉬면서, 그는 체스넛로지의 통로를 거닐었다. 그는 당시 슬리퍼를 신고 하루에 약 29킬로미터를 걸었다고 추정했다. 한 간호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다니면서 사람들과 빈번히 부딪혔지만 “그럴 때조차도 그들과 물리적인 접촉을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레이는 걸으면서 그와 아내가 즐겼던 호화로운 휴가를 떠올렸다. 그들은 외식을 굉장히 자주 해서,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직원들이 그들을 바로 알아볼 정도였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다리 움직임은 자기 최면의 메커니즘이 되어 걷기만 하면 예전의 생활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의 발은 물집으로 뒤덮여 잡역부들이 그를 발 치료사에게 데려갔을 정도였고, 발가락은 각질 때문에 시커멨다.

반년 뒤, 레이의 모친은 체스넛로지에 있는 그를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레이의 상태가 더 악화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자라 있었다. 그는 목욕 가운의 벨트를 사용해서 바지를 붙들어 매고 있었다. 몸무게가 18킬로그램이나 줄어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는 한때 엄청난 독서광이었으나, 이제는 책 읽는 걸 완전히 중단한 상태였다. 그는 또한 음악인이었고, 체스넛로지에 들어오면서 수트케이스에 많은 악보를 챙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거의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떤 간호사가 그를 ‘오셔로프 박사님(Dr. Osheroff)’이라고 불렀을 때, 그는 이렇게 정정했다. “‘오셔로프 씨(Mr. Osheroff)’라고 불러주세요.”

레이의 모친은 그에게 항우울제를 처방해 달라고 체스넛로지 측에 요청했다. 그러나 체스넛로지의 정신과 의사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약물 요법은 문제에 대한 통찰이 결여된 피상적인 방식이며 싸구려 치료 행위에 불과했다. 레이의 주치의였던 로스는 약물이 “일부 증상을 완화시켜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가 ‘이봐요, 나는 괜찮아졌어요. 나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단단한 상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로스는 레이가 그저 ‘예전의 상태’로 되돌려 줄 수 있는 약물을 찾는다고 결론 내렸다. 그가 보기에 레이가 그리워하는 예전의 성취는 환상에 불과했다.
메릴랜드 록빌의 체스넛로지 병원. ©Photograph: Phillip Reed/Peerless Rockville Historic Preservation Ltd

 

2. 약물 치료의 결과


체스넛로지에 실망한 레이의 모친은 그를 코네티컷의 뉴 케이넌(New Canaan)에 있는 실버힐(Silver Hill) 병원으로 전원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항우울제의 사용을 승인하고 있었다. 실버힐에서 레이의 새로운 주치의가 된 조언 너래드(Joan Narad)는 그에게 즉시 두 종류의 약품을 처방했다. 하나는 불안감과 불면증을 진정시키기 위한 소라진(Thorazine)이었고, 다른 하나는 1960년대에 발견된 엘라빌(Elavil)이었다. 그녀에게 레이의 첫인상은 “두 아들과의 관계를 절실하게 원하는 나약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실버힐에서의 첫날 밤, 레이는 한 간호사에게 자신의 결혼반지를 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에겐 더 이상 이게 필요하지 않아요.” 다음 날 아침, 그는 자신의 모친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이 병원과 수많은 약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요.” 그는 자신이 “정해진 방향 없이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일곱째 날, 그는 간호사들에게 이름을 바꾸고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다고 말했다. 여덟째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앞으로 1~2년 정도만 더 살 겁니다. 자다가 관상동맥이 막혀서 순식간에 죽었으면 좋겠어요.”

3주가 지나자, 레이는 아침에 일어나서 팔걸이 의자에 앉은 다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되었다. 신문도 읽었다. 그런 다음에는 주치의를 자신의 병실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요. 뭔가가 바뀌었어요.”

그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끔찍한 슬픔”을 느꼈다. 그는 거의 1년 동안이나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결국 울음을 터트렸는데, 그것도 몇 달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아이들과의 이별을 슬퍼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전의 감정은 지금 느끼는 슬픔처럼 생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것이 “감정을 넘어선 것. 그것은 감정의 완전한 부재(total absence)였다.”라고 기록했다.

2주 사이에 레이는 유머 감각을 되찾았다. 한 간호사는 그가 “기질적으로 따뜻하며 세심한 측면이 있는데, 특히 자신의 아이들을 향한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다”라고 적었다. 그의 주치의인 너래드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레이는 동년배의 여성 환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외박 허가를 받으면 레이는 버스를 타고 뉴 케이넌의 중심가로 나갔다. 그리고 샴페인 한 병을 사서 그 여성의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두 사람은 그날 밤을 함께 보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굉장히 성적이거나 생물학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도전 행위이자 우리의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손 뻗기, 더듬거림, 붙들기였다.”

레이는 병원의 정신 의학 열람실에서 글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의 특파원이었으며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전까지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퍼시 노스(Percy Knauth)가 1975년에 출간한 회고록 《지옥에서 보낸 한 철(A Season In Hell)》[6]을 읽고 전율했다. 이 책에서 노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한 주 만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년여 만에 처음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의 불균형 때문에 고통받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책이 나왔던 시기에만 하더라도 노르에피네프린 불균형은 우울증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여겨졌지만, 그 이후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울증이 화학적 불균형 때문이라는 이론은 1965년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의 과학자였던 조셉 쉴드크로트(Joseph Schildkraut)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그가 발표한 논문은 미국 정신의학저널(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문헌이 되었다. 쉴드크로트는 항우울제에 대한 연구와 동물과 사람을 대상으로 시행된 임상 시험을 검토했다. 이를 통해 그는 항우울제가 두뇌의 수용체 부위에서 인간의 기분을 조절하는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등 신경전달물질의 가용성(availability)을 증가시킨다고 추측했다. 그는 여기서 반대의 명제를 세웠다. 만약 항우울제가 그런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에 관여한다면, 우울증은 그런 물질의 결핍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다. 그는 이 이론을 하나의 가설로 제시하며 “생물학적으로 매우 복잡한 상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 기껏해야 환원주의적인 이론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은 자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냈다. 인간 기분의 뿌리에 뇌 속 화학 물질의 증감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무엇이 자기 인식을 구성하는지를 재정의했다. 훗날 영국의 사회학자인 니콜라스 로즈(Nikolas Rose)는 이것이 “자신의 모습은 자기가 여기기 나름이라고 생각했던 인간 존재론에 있어서 하나의 변화”였다고 서술했다.

체스넛로지에 머물 당시의 레이에게는 분별력이 없었지만, 질병에 대한 다른 모델이 널리 퍼져 있던 실버힐에서의 그는 자신의 상태를 열심히 탐구했다. 그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집필을 위해 우울증에 대한 의학 문헌들을 읽었고, 우울증이 “완전하게 치료 가능하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지난 2년 동안의 삶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레이는 치료 석 달 만에 실버힐에서 퇴원했다. 제도권의 울타리 밖에서 살아온 지 거의 1년 만이었다. 그는 빈집으로 돌아왔다. 새 아내는 그와의 이혼을 결정했고, 아들과 함께 세간의 대부분을 가지고 이사를 나간 뒤였다.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유럽에 있었다.

레이는 미리 알리지 않고 자신의 투석 클리닉에 모습을 드러냈다. 환자들이 그를 껴안고 악수를 했다. 몇몇 간호사들은 그에게 환영의 키스를 했다. 그러나 레이가 떠나 있던 동안 새로 채용된 직원들은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가 정신병원에 있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휴게실에서 수간호사는 레이가 ‘미치광이’이며 ‘무능력자’라고 설명했다. 비서 한 명은 그가 투석 기계의 작동 방법에 대한 초보적인 질문들을 하는 걸 목격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사업을 이끌어 왔던 동료는 레이가 체스넛로지에서의 치료를 끝마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실버힐 병원이 그저 ‘땜질 처방’을 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그는 레이의 클리닉을 그만두고 같은 건물에서 경쟁 업소를 열었다. 레이가 돌보던 환자와 직원 상당수도 그곳으로 떠나갔다.

레이의 병세 및 동료들과의 불화에 대한 소식이 의학계 전반에 퍼져 나갔고, 그에게 들어오는 환자 위탁이 중단되었다. 때로는 환자가 너무 없어서 업무 일지에 적을 내용이 없을 때도 있었다. 아이들과 이별하고 일거리도 사라지면서, 레이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확인시켜 줬던 요소들”을 잃어버린 듯하다고 느꼈다.
코네티컷의 실버힐 병원. ©Photograph: Bryce Vickmark/Getty Images

 

3. 법정에 선 정신병원


실버힐에서 퇴원하고 1년 뒤인 1980년에, 레이는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 전문을 읽었다. 이 책의 3판인 《DSM-Ⅲ》가 막 출간된 시점이었다. 이전의 두 판은 얇은 소책자였으며, 특별히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3판에서는 미국정신의학협회(APA)의 위촉을 받은 위원회가 우울증이 ‘내적 갈등’에 대한 ‘과도한 반응’이라는 생각과 같은 정신 분석 학파의 설명들을 삭제하면서 더욱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설명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의약품의 효과를 확인한 이후, 어떤 상태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험은 그 상태와 관련성이 덜한 것으로 보이게 됐다. 정신 질환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들에 의해, 즉 행동 증상(behavioural symptom) 평가 항목에 의해 재정의됐다. APA의 의료감독관(medical director)은 《DSM》의 새 버전이 “관념에 대한 과학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DSM-Ⅲ》의 임상적 언어는 레이의 고독감을 완화시켜 줬다. 그가 느끼는 절망감은 하나의 질병이었으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와 동일한 고통을 안고 있었다. 그는 우울증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고방식에 너무나도 크게 고무되어 회고록을 위한 연구의 일환으로 대표적인 생물학적 정신과 의사들과 면담 일정을 잡았다. 이 책에 그는 ‘상징적 죽음: 미국 정신 의학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스캔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나에게 일어났던 일)’라는 제목을 붙였다.

레이는 자신의 회고록 초안을 정신과 의사인 제럴드 클러먼(Gerald Klerman)에게 보냈다. 당시는 클러먼이 미국 연방 정부의 알코올, 약물 남용, 정신 건강 관리국(ADAMHA)[7] 국장직을 사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클러먼은 자신이 “약리학적 칼뱅주의(Calvinism)”라고 부르는 것을 비판하는 저술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약리학적 칼뱅주의란 “만약 어떤 약물이 당신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이거나, 의존증, 간 손상, 염색체 변화 또는 다른 신의 응징으로라도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는 믿음이다.[8] 레이는 클러먼이 그에게 자신의 원고가 “매력적이며 설득력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클러먼의 인정에 더욱 용기를 얻은 레이는 태만과 의료 과실 혐의로 체스넛로지를 고소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클리닉과 의학계 내 개인적 평판의 문제, 그리고 아이들의 양육권을 잃게 된 이유는 체스넛로지가 자신의 우울증 치료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레이의 친구인 앤디 시월드(Andy Seewald)가 말하길, 레이는 그 자신을 소설 《모비 딕(Moby-Dick)》의 주인공인 에이헙(Ahab) 선장과 자주 비교했다고 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체스넛로지가 그에게는 흰 고래 모비 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무력하게 만든 그것을 쫓고 있었습니다.”

법정 소송에서는 정신 질환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지배적인 설명 두 가지가 서로 충돌했다. 미국정신의학협회(APA)의 회장이었던 앨런 스톤에 의하면, 정신 의학계의 의료 과실 소송에서 레이의 사건에서만큼 저명한 전문가 증인들이 많이 나온 사례는 없었다고 한다. 그가 말하길, 이 사건은 대표적인 생물학적 정신과 의사들이 “그들의 의제를 밀어붙이는 조직적인 산란지(organising nidus)”가 되었다.

이 사건을 본격적인 소송으로 진행할지 결정할 중재위원회가 개최되기 전에 열린 심리에서, 체스넛로지 측은 우울증을 치료하려는 레이의 노력을 책임의 방기라고 주장했다. 로지 측의 전문가 증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하버드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토머스 구타일(Thomas Gutheil)이 서면으로 증언한 바에 의하면, 대부분 레이 스스로 작성한 소송 문건의 언어 사용을 봤을 때, 그가 외재화(externalisation)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관찰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한 사람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경향”을 말한다. 구타일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자신의 문제가 생물학적인 특성 때문이라는 레이의 주장은 단지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제를 그 자신으로부터 떨어트려 놓으려는 또 다른 시도로 보인다. ‘그건 내가 아니라, 나의 생물학적 특징 때문이야’라는 것이다.”

체스넛로지 측의 전문가들은 실버힐에서 레이가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 여성 환자와의 로맨틱한 어울림 때문이었으며, 그것이 그에게 한 줄기의 자존감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해 레이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건 모욕적인 발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증상학(symptomatology)과 정신 질환의 타당성을 그냥 완전히 불신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체스넛로지 측의 변호사들은 레이가 체스넛로지에 입원했을 때에도 피아노를 연주할 때처럼 즐거워하는 순간이 있었다며 우울증에 대한 그의 설명을 하나씩 무너트리려 노력했다.

레이는 이렇게 대응했다. “병동에 있는 낡아빠진 피아노를 기계적으로 쾅쾅 내려치며 옛날 음악을 연주하는 건 창의적이고 즐거운 행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위 행위에 가까웠습니다. 제가 탁구를 하거나, 피자를 먹거나, 미소를 짓거나, 혹시 농담을 했다거나, 예쁜 여성을 보고 눈길을 줬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로 즐거운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저는 이렇게 되뇌곤 했습니다. ‘나는 살아가고 있지만, 살아 있는 건 아니야’라고 말입니다.”

체스넛로지에서 레이의 정신 분석을 담당했던 마누엘 로스는 여덟 시간을 넘게 증언했다. 그는 레이의 회고록 초안을 읽은 다음, 레이가 항우울제 덕분에 치료됐을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는 레이가 여전히 과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회복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애도와 멜랑콜리아(Mourning and Melancholia)》를 언급하며 “그게 바로 1917년의 글에서 언급된 우울증(melancholia)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체스넛로지에서 레이의 분별력이 나아지기를 바랐다며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진실한 도움입니다.” 그는 레이가 유명한 의사이자 관련 분야에서 가장 부유하며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학이라는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존재”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길 원했다.

레이 측의 변호인이자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시민권 변호사 중 하나였던 필립 허시코프(Philip Hirschkop)는 로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정신 분석가로서 당신은 가끔씩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드는 감정을 무시하지는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를 들여다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요.” 로스가 답했다.

허시코프가 물었다. “급여 상승 외에는 승진도 하지 못하고 19년 동안 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던 당신은 과거에 많은 돈을 벌다가 지금은 여기에 당신의 환자로 와있는 이 남자에게 약간 화가 나지는 않았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로스의 말이다. “그것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수행하는 자체적인 심리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것을 부러워하고 있나? 아니면 내가 단지 질투와 악의 때문에 과대망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정하게 말해서, 당신처럼 똑같은 자리에 19년 동안 꼼짝없이 머물러 있었던 사람에게는 어떤 야심이 결여됐을 수도 있다고 추론할 수 있을까요?”

로스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허시코프 씨.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저는 이 일이 끊임없이 자극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1983년 12월 23일, 중재위원회는 체스넛로지가 진료 기준을 위반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제 이 사건은 본 소송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다. 캐나다 맥길대학교(McGill University)의 정신 의학 교수인 조엘 패리스(Joel Paris)는 “오셔로프 사건의 결과가 북아메리카 대학의 모든 정신 의학과에서 논의되었다”라고 썼다. 뉴욕타임스는 “만성 우울증은 질병이 아니라 그저 성격적 결함이라는 관습적인 믿음이 있어 왔고, 심지어 일부 의사들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오셔로프의 사건이 이러한 믿음을 뒤흔들었다”라고 썼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The Philadelphia Inquirer)에 따르면, 이 사건은 “미국에서 정신 의학 진료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대단히 크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본 소송에 들어가기 직전인 1987년에 체스넛로지는 합의를 제안했다. 그 당시에 레이는 정신 분석학자의 미망인이었던 고등학교 동창과 사귀고 있었다. 그녀는 레이의 사건에서 정신 의학의 한 학파가 다른 학파를 상대하여 맞서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지나친 단순화였습니다. 하나의 학파가 다른 학파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레이는 합의하고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미국의 가장 저명한 정신과 의사들은 계속해서 이 사건을 정신 분석학에 대한 최후의 심판으로 취급했다. 《프로작에게 듣는다(Listening to Prozac[9])》의 저자인 정신과 의사 피터 크레이머(Peter Kramer)는 훗날 이 사건을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10]과 비교하며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라고 했다. 정신 의학 타임스(Psychiatric Times)의 표현에 의하면, 이 사건은 “두 가지 지식 유형 사이의 결전”이었다.

실버힐에서 레이의 주치의였던 조언 너래드가 말하길, 자신은 사람들이 레이의 이야기에서 끌어내는 결론 때문에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그 사건은 대립각을 키우는 데 이용됐습니다.” 그녀의 말이다. 미국정신의학협회(APA)는 1989년의 연례 컨퍼런스에서 레이의 사건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는데, 레이는 이 자리에 다시 만난 자신의 큰아들 샘(Sam)과 함께 참석하여 방청했다. 너래드도 그곳에 참석하여 샘에게 레이의 진료기록을 보여줬다. “저는 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저 너희 아빠가 너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는 걸 너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아빠는 너를 사랑했고, 너를 너무나도 보고 싶어 했어.’라고요.”

그러나 샘과 그의 남동생인 조(Joe)는 그들의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의 삶이 경로를 벗어난 이유에 대해서 그가 잘못된 설명에만 매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빠에게는 사교적이고, 친절하고, 훌륭한 측면이 있었지만, 자신의 문제는 결코 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만 반복했어요.”
2009년 화재 발생 다음날의 체스넛로지. ©Photograph: The Washington Post/Getty Images

 

4. 치료되지 않은 남자


레이의 사건 이후, 체스넛로지는 그곳의 거의 모든 환자에게 약물을 처방하기 시작했다. 체스넛로지의 정신과 의사였던 리처드 와거만(Richard Waugaman)은 “우리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늘 실제로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혹시 모를 또 다른 소송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1950년부터 1975년 사이에 그곳에서 치료를 받은 400명 이상의 환자들을 추적한 연구가 1984년에 《일반 정신의학 아카이브(Archives of General Psychiatry)》[11]에 공개되고 나서야 비로소 체스넛로지의 의사들은 잘못을 깨달았다. 체스넛로지에서 치료받은 조현병 환자들 중 겨우 3분의 1만이 개선되거나 회복되었다. 이는 같은 기간 동안 어떤 치료 환경에 놓이든 회복세를 보인 환자들과 거의 동일한 비율이었다. 500명의 의사가 참석한 심포지엄에서 이 연구의 공동 저자이자 체스넛로지의 정신과 의사였던 토머스 맥글래션(Thomas McGlashan)은 이렇게 선언했다. “여기에 데이터가 있습니다. (우리의)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체스넛로지의 환자들은 오랫동안 치료 비용을 민간 보험 상품의 적용을 받아 충당했다. 그러나 90년대 초에는 관리 의료(managed care)[12]가 보험업계를 장악했다. 보험 회사들은 비용을 억제하기 위해 의사들에게 검토용 치료 계획을 제출할 것과 환자들이 나아지고 있다는 수치적인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환자들의 고통에 대한 장문의 우아한 서술은 증상에 대한 체크리스트로 대체됐다. 정신건강은 협업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되어야만 했다.

체스넛로지에서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마법에 걸린 유대관계라고 여겼지만, 그것은 기업 문화의 언어로 재구성됐다. 정신과 의사들은 의료 서비스의 ‘제공자’, 환자들은 ‘소비자’였다. 환자들의 고통은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에 의한 진단으로 요약되었다. 인류학자인 알리스테어 도널드(Alistair Donald)는 2001년에 발표한 〈미국 정신의학의 월마트화(The Wal-Marting of American Psychiatry)〉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광기는 시간에 맞게 효율적이며 합리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산업화된 상품이 되었다. 현실의 환자는 그들 행동의 설명으로 대체되어 이름 모를 존재가 되었다.”

체스넛로지에서는 나이 든 분석가들이 은퇴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의사와 사회복지사들을 채용했다. 그들은 의약품의 활용을 더욱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체스넛로지의 사회복지 업무 책임자였던 캐런 바쏠로뮤(Karen Bartholomew)는 직원들이 앞선 시대의 정신의학을 무시하면서 “우리 병원도 이제 아주 많이 나아졌다”라고 말했을 때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체스넛로지의 환자들이 대여섯 가지의 약품을 한꺼번에 복용하는 사례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그중에서 어떤 게 효과가 있는지를 누가 알 수 있을까요?”

1995년에 체스넛로지는 공중 보건 분야의 비영리 단체에 매각된 후 곧바로 파산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90년대 말이 되자, 체스넛로지의 건물들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체스넛로지에 근무했던 한 정신과 의사에 의하면 병원의 3층에 있던 환자의 얼굴에 벌꿀이 뚝뚝 떨어졌다고 한다. 천장에 벌집이 있었던 것이다.

병원의 운영 마지막 날이던 2001년 4월 27일에 그곳에 남아 있던 환자는 겨우 여덟 명에 불과했다. 미국의 많은 정신 병원과 마찬가지로 체스넛로지는 결국 버려졌다. 어느 지역 신문은 이 부지를 두고 “초자연 현상을 비롯한 망령들의 이야기”에 이끌린 “유령 사냥꾼(ghost hunter)”들의 집결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던 2009년 여름, 여러 확인되지 않은 추측이 무성한 가운데, 체스넛로지의 본관 건물이 화재로 무너져 내렸다.

레이는 소송을 합의로 마무리한 뒤 새 아내와 뉴욕의 스카스데일(Scarsdale)로 이사했다. 그러나 몇 년 뒤, 그는 그들의 관계에 ‘내용이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이혼했다. 레이는 회고록의 초안에서 우울증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이렇게 수정했다. “이것은 질병도 아니고 아픔도 아니다. 단절의 상태이다.” 그는 정신 분석학자를 다시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 분석가를 “좋은 아버지”라고 표현했다. 반면 체스넛로스의 정신 분석가였던 로스는 “나쁜 아버지”라고 표현했다. 레이는 만약 자신이 체스넛로지에서 의약품을 처방받았다면 치료 요법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뭐라도 구축할 수 있는 기틀을 잃어버렸다”라고 서술했다.

결혼 생활이 무너진 이후, 레이는 뉴저지로 이사해 또 다른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지루하며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느 신장 클리닉에서 일했지만, 1년이 지나자 고용 계약이 갱신되지 않았다.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신입 일자리를 떠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런 모습을 자식이 알게 되었을 때의 부끄러움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들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레이는 첫 번째 아내가 데려간 두 아들을 만나 체스넛로지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망가트렸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했다. 이는 아이들을 질겁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들들에게 회고록의 수정안도 보여줬다. 이에 대해 둘째인 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놈의 책, 책, 책. 아빠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전부였어요.” 첫째인 샘의 첫 아이가 태어나자, 레이는 자신의 회고록 개정안 원고를 가지고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손녀를 만나는 것보다는 자신의 글을 논의하는 것에 더욱 관심이 많아 보였다. 샘은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회고록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거야. 사람들은 이걸 영화로 만들게 될 거야.” 이후로 샘과 조는 아버지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았다. 레이의 가장 어린 아들과는 이미 절연한 상태였다.

회고록은 500페이지 분량으로 불어났다. 예전의 초안은 나름의 특색과 활기가 있었다. 그러나 30년의 수정 작업을 거친 후의 글은 어딘가 억압적이고 솔직하지 않았으며, 한 편의 복수 이야기가 됐다. 거기서 유일하게 나아진 점이 있다면, 예전의 초안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부친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밝혔다.

각각의 수정본에서, 레이는 그가 원했던 삶이 40년이나 일찍 끝나 버린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론을 찾아내려 했다. 어떤 이론에서는 그가 화학적으로 불균형한 사람이었다. 또 다른 이론에서는 그가 바람직한 아버지상을 박탈당한 소년이었으며,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모든 것의 이면에는 결국 아버지를 찾는 아들이라는 주제가 있지 않은가? 이것은 사업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또 다른 세 번째 이론에서는 그가 일종의 만성적 외로움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의 특징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들은 (그것의 본질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고) 오직 방어 기제의 측면에서만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라며 프리다 프롬-라이히만을 인용하여 설명했다.

레이는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 무엇을 더해야 할까? 나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지금의 레이 오셔로프는 누구인가?” 그는 30년 동안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정처 없는 외톨이라고 느꼈다. 그는 “현실의 상태와 현실이었어야 하는 것 사이에 고통스러운 격차가 존재한다”라고 썼다. 그는 “치료되지 않은 남자”였다. 그의 질병은 정신 분석학과 신경 생물학이라는 서로 다른 두 이야기 속에서 치료라는 결론을 얻는 것에 실패했다. 이제 그는 자필 회고록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에 의해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만약 자신이 그 이야기의 틀을 제대로 설정하거나 적절한 어휘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마침내 치유라는 땅의 해안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우울감 등 쉽게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에서 24시간 상담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영국에서 2022년 10월 20일에 출간될 예정인 레이첼 아비브(Rachel Aviv)의 책 《우리 스스로에게 낯선 사람들: 불안정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Strangers to Ourselves: Stories of Unsettled Minds)》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1]
‘밤나무 산장’이라는 뜻
[2]
의사소통을 할 때 평이하고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여 오해의 여지를 없앴다는 의미다.
[3]
작가 미치 앨봄(Mitch Albom)의 스승으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실제 주인공이며, 모리(Morrie)는 그의 애칭이다.
[4]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같은 시대의 학자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독일 출신의 유대계이며 나치의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5]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는 환자들을 가족의 일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6]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의 시집과 동일한 제목이다.
[7]
현 약물남용 및 정신건강 서비스 관리국(SAMHSA)의 전신
[8]
칼뱅주의에서는 금욕과 절제를 강조한다.
[9]
프로작(Prozac)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처방되는 유명한 항우울제이다.
[10]
1973년에 미국 연방대법원이 미국 헌법에 기초한 사생활의 권리에는 낙태의 권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판결한 사건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내린 가장 중요한 판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2022년 6월에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 판례를 번복하는 결정을 내렸다.
[11]
현재는 자마 정신의학(JAMA Psychiatry)으로 명칭 변경, 자마(JAMA)는 미국의사협회저널(The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약칭이다.
[12]
미국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의료의 비용은 줄이고 의료의 질은 개선하는 방식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하는 보건의료 시스템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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