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판타지

10월 25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강원도의 나쁜 선택이 시장에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불신의 문이 열렸다.

  • 레고랜드가 강원도의 힘을 보여줬다. 파괴적인 힘이었다. 금융시장을 뒤흔든 것이다.
  • 강원도는 2천억 원가량의 지급보증을 서놓고 갑자기 약속을 엎었다. 시장은 국가를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 신용경색 국면으로 접어들면 어리고 약한 고리들이 끊긴다. 정치가 민생을 흔들 때 비극이 시작된다.

BACKGROUND_ 레고랜드

우리나라 최초의 글로벌 테마파크이다. 관광자원이 절실했던 강원도는 이 레고랜드를 유치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나라당 출신의 김진선 전 지사가 시작한 협상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최문순 전 지사가 이어받아 올해 어린이날 개장했다. 과정은 너무나 험난했다. 당초 2015년 개장을 목표로 했지만, 제대로 된 첫 삽은 2019년에야 떴다. 진척이 더뎌질수록 계약 조건은 점점 강원도에 불리해졌다. 연 매출 400억 원이 안 되면 강원도는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는 구조다. 겨우 문을 열었는데 빚은 남았고 수익은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DEFINITION_ 강원도의 빚

그렇다면 강원도의 빚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PF(Project Financing, 프로젝트 파이낸싱) 시장의 문법대로 만들어졌다. PF는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 부동산 사업에 쓰이는 대출 기법이다. 부동산 담보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담보를 심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파트라면 간단하다. 시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빈 땅에 시설과 건물을 올려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레고랜드와 같은 사업은 그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 어렵다. PF는 이러한 프로젝트의 가치를 평가하여 이를 담보로 삼아 대출을 일으키는 방법이다. 이때 보통 증권사 등의 금융회사가 주관사가 되어 대출해 주고, 이 대출금은 쪼개어 어음으로 발행한다.
  • 2020년, 레고랜드에서 상수도와 일대 도로 개발을 담당하던 중도개발공사(GJC)가 자금 조달을 위해 SPC(Special Purpose Company, 특수목적회사)인 ‘아이원제일차’를 세움
  • GJC는 아이원제일차로부터 2050억 원을 빌림
  • 아이원제일차는 2050억 원어치의 어음을 발행함
  • 어음의 원활한 판매를 위해 강원도가 보증을 섬
  • BNK투자증권이 주관사를 맡아 해당 어음을 모두 인수한 뒤 쪼개서 판매
이렇게 쪼개져서 판매된 어음을 ABCP(Asset-backed Commercial Paper, 자산담보기업어음)이라고 한다. 이번에 GJC는 지난달인 9월 29일 만기였던 ABCP를 상환하지 못했다. 즉, 2050억 원 빚을 갚지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보증을 섰던 강원도를 믿었다. 약속대로 강원도가 그 빚을 대신 갚아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왔다. 돈을 갚는 대신 법원에 GJC의 회생신청을 하겠다는 것이다. 시장은 이를 지방 정부의 디폴트(채무 불이행)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BNK투자증권은 바로 해당 ABCP의 부도를 발표했다.
CONFLICT_ 고금리 시대

사실, 지자체나 건설회사 등이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는 부동산 PF 시장에 기댈 수밖에 없다. 수백억 원에서 수조 원에 이르는 사업비를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설령 자금이 있다고 해도 가진 돈을 전부 쏟아부어 단 하나의 사업을 굴려서는 성장을 담보할 수도 없을뿐더러 리스크 방어를 할 수 없다. 증권사 등 금융업계 입장에서도 PF는 ‘남는 장사’다. 미래의 가치에 투자하는 만큼 이자가 연 10퍼센트를 웃돌고, 대출 조건에 따라 30퍼센트가 넘는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때문에 돈이 흔한 유동성의 시대였던 지난 3년여간 부동산 PF 대출액은 쭉쭉 치솟았다. 금융권의 부동산 PF 대출 잔액은 지난 6월 기준 112조 원에 달한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고금리 기조에 돈이 마르기 시작한 것이다.
KEYPLAYER_ 김진태

강원도는 이미 1조 원가량의 빚이 있다. 여기에 GJC가 해결하지 못한 2050억 원까지 떠안게 된다면 그 이자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 레고랜드는 착공부터 준공까지 11년이 걸렸다. 그사이에 열린 착공식만 3차례. 완공 시점은 계속 늦춰졌고, 11년 동안 각종 유물비리가 계속해서 발굴되었다. 강원도 재정이 과도하게 투입되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레고랜드가 위치한 중도에 진입하기 위한 춘천대교 건설에 890억 원, 전기 및 상하수도 등 기반 시설과 주차장 등에 1200억 원 등 4000억 원이 넘는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다. 김진태 강원도지사는 당선인 시절부터 레고랜드 유치 과정에 문제를 제기해 왔다. “전대미문의 불공정 계약”이라는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들여다 봐야 한다. 그러나 이와 관계없이 의아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GJC 회생신청 결정이 시장에 어떤 충격을 줄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이었던 김 지사가 정말 몰랐겠느냐는 얘기다.
EFFECT_ 불신의 시대

김진태 지사의 한마디는 돌이킬 수 없는 나비 효과를 일으켰다. 불신의 시대를 연 것이다.
  • level 1_회사가 빚을 내기 어려워졌다 ; 정부의 보증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는 기업의 자금줄을 말려버렸다. 지난 17일 한국전력공사가 총 4000억 원 규모의 채권을 발행하고자 했다. 연 5.75퍼센트, 연 5.9퍼센트로 이율도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1200억 원치는 유찰되었다. 같은 날 한국도로공사 역시 1000억 원 규모의 채권 발행을 시도했지만, 전액 유찰됐다. 최고 신용등급 AAA 공기업 두 군데 모두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회사채 금리가 지난 주말까지 일제히 급등했다.
  • level 2_건설 회사들이 흔들린다 ; 자금줄이 막히자 당장 부동산 PF의 실행 주체인 민간 지방 건설회사들이 흔들리고 있다. 당장 충남 지역에서 시공 능력 6위에 올라있던 우석건설이 1차 부도를 냈다. 탑티어 건설사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롯데건설은 지난 18일 롯데케미칼, 호텔롯데 등을 대상으로 2000억 원의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결정했다. 계열사에서 자금경색 리스크를 떠안은 것이다. 태영건설도 계열사인 군포복합개발피에프브이에 대한 960억 원 규모의 채무 보증을 직접 서기로 했다.
  • level 3_약한 고리부터 끊어진다 ; 건설시장 자금난은 증권사의 유동성 리스크로 이어진다. 건설사와 마찬가지로 지방의 PF를 취급한 중소형 증권사들부터 흔들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위험신호가 포착되면 투자와 대출에 빗장이 걸린다. 그렇게 되면 큰 회사보다 작은 회사가, 중견기업보다 스타트업이, 기업보다 영세 사업자들이 더 빠르게 타격을 받는다. 혁신에 대한 신규 투자는 씨가 마르고 만기가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해 작은 사업장들이 흑자 도산에 빠질 위험이 치솟는 것이다.
김 지사는 GJC 회생 신청이 빚을 갚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라며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일파만파 번진 뒤다. 이번 사태를 두고 강원도의 변심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최문순 전 지사의 치적이 김진태 현 지사의 지적이 되었다는 우스갯소리가 그저 우습지만은 않은 이유다. 강원도가 보증을 섰던 이번 ABCP에 대해 신용평가사들은 최고에 해당하는 A1 등급을 매겼었다. 채권시장에서는 이제 정치 상황까지 고려해서 등급을 매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터져 나온다.
RECIPE_ 50조 원

결국 정부가 칼을 빼 들었다. 50조 원짜리 칼이다. 정부 돈으로 채권 시장을 받치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게 충분치가 않다. 내년 상반기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규모는 68조 원 이상이다. 게다가 채권시장에 돈이 풀려도 시장의 불안 요소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AAA 등급 채권들이 돈을 빨아들일 위험도 존재한다.
FORESIGHT_ 갈팡질팡

이뿐만이 아니다. 50조 원은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 영국의 영란은행은 금리를 올리며 긴축정책을 펼치고 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트러스 총리가 취임 직후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하면서 파운드화 가치와 국채 가격이 폭락하며 시장이 요동쳤다. 결국 영란은행은 파운드화를 찍어내 영국 국채를 매입해 급한 불을 껐다.
  • 일본 중앙은행은 반대다.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면서 돈을 풀고 있다. 그런데 엔화 가치가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자 재무성이 시장에 개입해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들였다. 유례없는 방식의 심야 시장 개입에 ‘복면 개입’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 우리 한국은행은 사상 초유의 금리 인상을 이어가고 있다. 긴축정책이다. 그런데 이번 레고랜드 사태로 회사채 시장에 경고등이 켜지자 정부가 나서 시장에 50조 원을 풀고 회사채와 어음을 사 주기로 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중앙은행의 권위에 균열이 가고 있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정부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금리를 올려 유동성을 축소하고, 물가를 잡겠다고 결정했다면 어느 정도의 충격을 흡수할 각오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 정부 대책처럼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과 반대로 가는 결정이 반복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시장의 혼란뿐이다. 그래서 미국의 향후 행보에 이목이 쏠린다. 미국 재무부도 국채 바이백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INSIGHT_ risk premium

김진태 지사는 나쁜 선택을 했다. 아르헨티나, 러시아 등과 같이 자신의 신용등급을 팽개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김 지사가 팽개친 것은 김 지사 개인의 신용등급이 아니었다. 강원도민 전체의 신용등급이었다. 앞으로 대체 어떤 투자자가 강원도를 믿고 투자를 할 수 있을까? 설령 투자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강원도의 보증만으로 사업이 진행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는 영국의 최근 상황을 두고 이런 비판을 남겼다. “바보들이 운영하는 경제는 위험 프리미엄을 지불해야 한다(an economy run by morons has to pay a risk premium).” 지금, 부동산 PF 시장이 패닉에 빠졌고 2050억짜리 강원도의 빚은 50조짜리 정부발 유동성이 되어 돌아왔다. 고금리 시대를 힘들게 견디고 있는 서민들의 노력이 무색해졌다. 강원도의 힘이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나비효과가 무서운 까닭은 다음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큰 위기를 준비해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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