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돈을 더 많이 번 사람
완결

죽어서 돈을 더 많이 번 사람

미디어의 시대, 퍼블리시티권은 유명세를 돈으로 번역해 내는 일반적인 방법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51년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Photograph: Arthur Sasse/Bettmann Archive
2003년 7월, 물리학자이자 퓰리처상 후보[1]에 오른 작가였던 토니 로스먼(Tony Rothman)은 자신의 편집자로부터 달갑지 않은 소식이 담긴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자신의 새 책 출간이 몇 주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과학의 역사에서 많이 오해받는 이야기들을 친절하게 바로잡고 있는 이 책의 제목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Everything’s Relative)》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theory of relativity)을 자연스레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로스먼은 함께 이 책의 출간을 준비하던 출판사 와일리(Wiley) 측에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과학자의 사진을 표지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이메일에는 “문제가 생겼다”라고 적혀 있었다. 로스먼의 편집자는 아인슈타인의 유산 관리인이 “극도로 공격적이며 소송을 일삼는다”고 그 전부터 경고해 왔다. 편집자는 출판사가 아인슈타인의 이미지 사용에 대한 대가로 거액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한, 자신들이 고소를 당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로스먼은 경악했다. 그는 이메일로 이렇게 답변했다. “저는 이게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유산 관리인이 아인슈타인의 이미지를 사용한 모든 사람들을 쫓아다녔다면, 그들에게는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전혀 없었을 겁니다. 애초에 그들이 사진을 소유하는 게 맞긴 한가요?” 로스먼의 편집자는 법적인 세부사항들에 대하여 조사하는 것을 꺼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출판사는 이렇게 적대적인 상속자들을 마주한 사례가 처음이 아니라고 하며 어두운 기색으로 20세기 미국을 상징하는 작가들 중 한 명의 문학 유산을 관리하는 “탐욕스런 자칼들”을 언급했다고 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55년에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유언장 13항에서, 비서였던 헬렌 두카스(Helen Dukas)와 의붓딸이었던 마고 아인슈타인(Margot Einstein)[2]이 죽으면, 그의 “원고, 저작권, 출판권, 인세 ⋯ 그리고 다른 모든 저작 자산들은” 1918년에 자신이 공동으로 설립한 교육기관인 예루살렘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에 전달될 것이라고 서약해 놓았다. 아인슈타인의 유서에는 책이나 상품, 광고 등에서 그의 이름이나 생김새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에는 이런 것들이 퍼블리시티권(publicity rights)[3]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인슈타인이 유언장을 작성하던 당시에는 법적으로 그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2년에 히브리대학교가 아인슈타인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을 때, 퍼블리시티권은 매년 수백만 달러의 가치에 이를 정도로 치열한 법률적 전장이 되어 있었다.

1980년대 중반에 이 대학교는 아인슈타인의 이름과 생김새를 누가 얼마의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결정할 권리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용권 허락을 받고자 하는 이들은 제안서를 제출해야 했으며, 그 제안은 익명의 중재인들에 의해 비공개로 심사됐다. 아인슈타인 브랜드 기저귀? 안 돼. 아인슈타인 브랜드 계산기? 좋아. 이러한 절차를 따르지 않거나 이 대학교의 결정에 불복하는 이들은 누구라도 법적 조치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을 테마로 만든 티셔츠, 핼러윈 의상, 커피콩, SUV 트럭, 화장품 등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 대학교의 타깃은 시장에서 잡동사니를 파는 노점상에서부터 코카콜라, 애플, 월트디즈니와 같은 다국적 기업들까지 다양했다. 월트디즈니는 2005년에 자사의 유아용 장난감 제품군에 ‘베이비 아인슈타인(Baby Einstein)’이라는 이름을 50년 동안 사용하는 대가로 266만 달러를 지불했다.

아인슈타인은 이제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IAS)에 근무할 당시에 받은 급여는 1만 달러(현재의 가치로 약 18만 달러)였는데, 이는 해당 연구소가 미국의 그 어떤 과학자들에게 책정한 급여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 당시에 아인슈타인도 “그건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라고 물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생전 수입은 그가 사후에 벌어들인 금액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그는 포브스(Forbes)에서 선정하는 “사망한 유명인들(dead celebrities)”, 즉 최고소득 역사적 인물 10인 명단에 매년 이름을 올렸다. 아인슈타인은 라이선스 비용으로 히브리대학교에 매년 평균 1250만 달러를 벌어다 주고 있었으며, 이는 이스라엘의 대학교들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아인슈타인의 사후에 이 대학교가 벌어들인 금액은 현재까지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2억 5000만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비록 이 대학교가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과의 소송에서 연이어 이기고 있더라도, 아인슈타인이 과연 이런 일들을 원했을 것인지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생전의 그는 자신의 인격을 상업화하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그랬던 그가 왜 그 입장을 사후에 바꾸겠는가? 미국의 한 법학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해당 대학교 및 그와 유사한 기관들을 “새로운 도굴꾼들(the new grave robbers)”이라고 묘사했다. 주식회사 타임(Time Inc.)[4] 측의 한 변호사는 이 대학교 측의 대리인들을 두고 “부족의 사람 사냥꾼 그룹(group of tribal headhunters)”이라고 불렀다. 이 대학교의 입장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업체들 중에는 아동용으로 신기한 아인슈타인 의상을 만드는 제조사가 있다. 이 회사는 관련 사안을 취재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대학교는) 사망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권리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대학교 측은 수상쩍은 제휴 관계로부터 아인슈타인의 명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단지 법적인 권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의무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 사안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대학교 측은 이 글을 위한 나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지만, 중재자를 통한 이메일 질문에는 응하기로 했다. 그들의 답변은 간결했다. 사실에 기반을 둔 질문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알지 못함(not known)”이라고 답변했다. 다른 질문들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법적인 권리를 집행할 자격이 있으며 추가적인 세부 사항은 공개하고 싶지 않다는 답변을 반복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 조지워싱턴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 로스쿨의 로저 셰크터(Roger Schechter) 교수는 사후 퍼블리시티권에 대한 법률이 “완전히 엉망진창”이라고 설명한다. 브라질, 캐나다, 프랑스, 독일, 멕시코는 사후 퍼블리시티권의 정의 및 기간을 명시하는 국가 차원의 법률을 갖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각각의 주마다 법이 다르다. 사후 퍼블리시티권에 관한 공식적인 법령이 있는 주는 24곳에 불과한데, 그 기간마저도 당사자의 사후 20년(버지니아)에서 100년(오클라호마, 인디애나)에 이르기까지 들쭉날쭉하다. 따라서 캘리포니아에서 죽은 유명인의 권리는 뉴욕에서 죽은 사람의 권리와 다르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사망한 곳인 뉴저지는 사망한 유명인의 퍼블리시티권에서 수익을 취할 권리에 제한을 두지 않는 17개 주 가운데 하나다. 이는 히브리대학교가 그들의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을 상대로 무제한의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것을 허용하는 근거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셰크터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제가 로스쿨의 기말 시험에서 학생들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문제를 고른다면, 아인슈타인이 제격일 겁니다.”

법조인들이 관련 법률의 모호함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히브리대학교는 아인슈타인의 이름과 생김새, 심지어 그의 실루엣으로부터도 계속해서 수익을 취했다. 지난해 영국 정부는 스마트 에너지 계량기 홍보 목적의 TV 방송 및 온라인 광고에서 아인슈타인을 활용했지만, 이를 위해 지불한 구체적인 액수는 공개되지 않았다. 히브리대학교는 현재 일리노이주에서 아인슈타인 상표권을 침해한 것으로 여겨지는 100곳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진행 중인데, 일리노이는 유명인의 생김새에서부터 “몸짓 및 버릇”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100년 동안 보호하는 법령을 갖고 있다.

다시 2003년으로 돌아가서, 로스먼은 아인슈타인 이미지 사용 권리를 히브리 대학교가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책 표지에 아인슈타인을 넣을 수 없다는 출판사 측의 이야기에 납득하지 못했다. 교육에 전념해야 하는 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한 조직이 그런 방식으로 유명 인사의 이미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출판사는 거액의 법정 다툼을 감행하려 하지 않았다. 로스먼은 책 표지 시안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의 이미지는 사라져 있었고, 그 자리는 토머스 에디슨으로 대체됐다.

로스먼은 이메일로 편집자에게 “디자인이 구리다”라고 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저는 원안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출판사의 입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히브리대학교의 평판은 그들을 단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가 마침내 서점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책의 표지는 구름 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식인 E=mc2이 떠올라 있는 모습이었다. 이 공식을 만든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화가인 폴 이가르투아(Paul Ygartua)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서리(Surrey)에 소재한 어느 사업체의 벽면에 그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벽화. ⓒPhotograph: Canadian Press/REX/Shutterstock

 

1. 가장 사랑받은 과학자,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이미지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생애 전반에 걸쳐서 그는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엘리베이터, 번개 치는 폭풍우 속을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차, 휘어진 표면을 기어가는 눈 먼 딱정벌레 등 간단한 장면들을 활용해서 복잡한 아이디어들을 설명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이런 농담을 했다.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는 1분은 1시간처럼 느껴지지만, 예쁜 여성과 함께 앉아 있는 1시간은 1분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천재라는 불가사의한 성질이 가장 순수하게 구현된 존재로서, 그 자신 또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아인슈타인은 가망이 없는 아이였다. 1879년에 갓난아기였던 아인슈타인의 머리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처음 본 외할머니는 이렇게 외쳤다. “너무 두툼해! 너무 두툼해!” 가정부는 아기 아인슈타인을 “데어 데페르테(der Depperte, 얼간이)”라고 불렀다. 아인슈타인은 말문이 트이는 데에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바람에, 그의 부모는 아이에게 문제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의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학교 선생님은 아인슈타인이 이제껏 가르쳤던 학생들 가운데 주의력이 가장 산만하며, 그가 절대로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연방공과대학교(ETH Zürich)에서 수학 학위와 교원 자격을 취득하여 졸업한 후 여러 중등 교직에 지원했지만 거절당했다. 스위스 베른의 특허청 직원, 또는 그의 말에 따르면 “나라의 고매한 잉크 뿌리개(respectable federal ink pisser)”로 일하던 당시, 그는 과학 이론들을 정립해 나가면서 26세이던 1905년부터는 일련의 논문들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중에 특수 상대성 이론을 포함하여 물리학에 혁명을 일으킨 저작들이다. 다른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발상이 가진 중요성을 금세 알아차렸고, 1909년에 그는 취리히대학교(University of Zurich)[5]의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비로소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된 것은 1919년의 일이었다.

그해에는 일식 현상이 있었다. 이때 영국의 천문학자인 아서 애딩턴 경(Sir Arthur Eddington)은 아인슈타인의 이론들 가운데 하나를 검증하기 위해 사진 촬영 실험을 수행했다. 그것은 바로 중력이 멀리 떨어진 빛을 휘게 만든다는 가설이었는데, 이는 간단한 주장 같으면서도 은하계를 재배치해야 할 수도 있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밤하늘의 모든 별들과 위성들과 행성들의 위치를 다시 계산해야만 했다. 당시에 영국의 과학자들은 독일의 과학자들을 무시하거나 폄하하곤 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영국에서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11월 6일, 런던의 왕립학회(Royal Society)에 기라성 같은 거물들이 모여들었다. 에딩턴이 수행한 실험의 결과를 듣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아침, 더 타임스(The Times)는 세계에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과학계의 혁명.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론. 뉴턴의 생각이 뒤집히다.”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아인슈타인의 발견이 “아마도 인류 사고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기사의 제목은 “빛은 모두 하늘에서 휘어진다”였다. 한때의 얼간이가 세계의 중심축을 강타한 것이다.

대중매체의 첫 번째 개화기였던 이 시기에 유명 인사로 재탄생한 아인슈타인에게는 팬레터가 급류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지옥에서 불타고 있으며, 우체부는 악마다.” 에딩턴의 발표 4주 후에 그는 “숨쉬기 힘들 정도로” 언론의 취재에 시달리고 있다며 이처럼 불평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계속해서 인터뷰를 진행해 나갔고, 핵심을 이해하기 쉽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그의 재치와 재능은 기사의 문구로 쓰기에도 제격이었다. 그는 전국 단위의 신문에 글을 기고했으며, 화려한 인사들과의 친분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의 유명세에 어리둥절했던 뉴욕 주재 독일 영사는 1931년에 이렇게 적었다. “정확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인슈타인의 개성이 일종의 집단적인 흥분 상태를 촉발시킨다.”[7]

아인슈타인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지성이었지만, 그를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든 것은 그의 외모였다. 그의 연구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4000명의 청중은 아인슈타인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인쇄물과 텔레비전이라는 최신 기술을 통해서 확산된 그의 이미지는 누구든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꾀죄죄한 점퍼를 입었으며, 콧수염은 애벌레처럼 보였고, 턱살은 초라했으며, 슬프고 반짝이는 두 눈을 갖고 있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논문집(The Collected Papers of Albert Einstein)》의 편집자였던 로버트 슐만(Robert Schulmann)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저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자, 그게 좋은 방향으로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미지는 그가 온 세상에서 사랑받게 해줬고, 고차원적인 문제들에 너무나도 열중해 있기 때문에 머리를 빗을 생각조차도 못한다는 인식을 만들어 냈다.

인도주의자, 철학자, 평화주의자, 반인종차별주의자로서 아인슈타인의 활동은 평생에 걸쳐서 지속되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차지하자 망명자 신분이 된 아인슈타인은 독일 시민권을 버렸고,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브란덴부르크의 카푸트(Caputh)에 있었던 그의 여름 별장은 히틀러유겐트(히틀러 청소년단)가 사용하게 됐다. 그는 난민들이 나치의 억압을 피해 탈출하는 걸 도왔고, 미국 흑인들의 시민권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으며,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원자 폭탄이 개발된 뒤에는 평화주의자가 되어 목소리를 높였다. 레이저에서부터 우리 손바닥의 스마트폰을 가동시키는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현대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기술에서 아인슈타인의 손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대중의 인식에 가장 또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미지이다.

1951년 3월 14일, 아인슈타인이 뉴저지의 프린스턴 클럽(Princeton Club)에서 자신의 72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떠나던 순간이었다. 그의 시선이 미국의 사진 기자인 아서 새스(Arthur Sasse)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발견했다. 아인슈타인이 렌즈를 보면서 혀를 내밀었다. 새스가 이 사진을 아인슈타인의 편집자들에게 보냈을 때, 그들은 이것을 공개해야 할지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이 사진이 저명한 피사체(인물)의 분별력이 흐려진 순간을 포착한 장면이 아닐까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공개 이후 이 과학자의 가장 오래 기억되는 유명한 이미지가 되었다. 한 시대를 정의했던 천재가 동시에 친근한 조커가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사진을 아홉 장이나 주문했다.

아인슈타인은 4년 뒤인 1955년 4월 18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사후에 우상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직한 친구이자 경제학자였던 오토 나탄(Otto Nathan)에게 유산 집행인의 지위를 맡기며 지시 사항을 남겼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서 대서양 연안의 델라웨어강에 뿌려 달라고 했다. 자신을 추모하는 사원(shrine)을 만들어서는 안 되고, 그의 연구만이 유일한 유산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두뇌가 도난당하는 걸 막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사망한 병원의 수석 병리학자였던 토머스 하비(Thomas Harvey)가 그의 두뇌를 적출하여 보관했던 것이다. 하비의 아들인 아서(Arthur)는 다음 날 아침 학급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가 그의 두뇌를 갖고 있다”고 자랑까지 했다. 하비는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 낸 가장 감격적인 신체 기관을 계속해서 연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미래의 가치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하비는 잘못된 유물을 선택했다. 세상이 원했던 것은 아인슈타인의 두뇌가 아니라 그의 얼굴이었다.
사망한 유명인의 퍼블리시티 산업을 발명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널리 평가받는 변호사이자 대리인인 로저 리치먼, 1985년 자신의 할리우드 사무실에서. ⓒPhotograph: Paul Harris/Getty Images

 

2. 프리미엄이 붙는 원리


로저 리치먼(Roger Richman)은 뉴욕의 워싱턴 마을에 있는 부모님 댁 거실에 들어갈 때면 언제나 그의 아버지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함께 서 있는 사진이 걸려 있는 걸 본다. 리치먼의 아버지 폴(Paul)과 아인슈타인은 1930년대에 독일의 유대인들이 알래스카와 파라과이, 멕시코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함께 하면서 친구가 됐다. (당시에 나치의 억압을 피해 떠나온 유대인들에게 미국 문호는 대부분 닫혀 있었다.) 리치먼의 아버지는 1955년 아인슈타인이 죽고 세 달 뒤에 사망했지만, 리치먼 가족은 아인슈타인의 유산 관리인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리치먼은 변호사가 되었고, 1978년에는 영화와 TV에 간접광고(PPL)를 전문으로 집행하는 대행사를 설립했다. 이듬해, 미국의 코미디언이었던 고(故) W. C. 필즈(W. C. Fields, 1880-1946)의 상속인들이 그의 사무실로 연락을 해왔다. 그들은 리치먼이 그들의 대리인이 되어주기를 원했다. 놀라운 요청이었다. 필즈가 사망한지 벌써 32년이나 흘렀기 때문이다. 필즈의 상속인들은 기저귀만 걸친 몸통 위에 필즈의 머리를 겹쳐 놓은 모습의 포스터 판매를 금지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법에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유명인의 퍼블리시티권이 법적으로 상속인들에게까지 확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련 법령을 조사하던 리치먼은 영화 〈드라큘라(Dracula)〉의 주연으로 가장 잘 알려진 헝가리계 미국 배우인 벨라 루고시(Bela Lugosi)의 아들이 연관된 사례를 발견했다. 1966년에 루고시의 아들이 유니버설픽처스(Universal Pictures)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는 부친의 초상권이 영화사가 아니라 자신과 그의 의붓어머니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루고시의 아들은 해당 소송에서는 승소했지만, 고등 법원에서는 그의 부친이 생전에 자신의 이미지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판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기존의 판결을 뒤집었다. 그러자 리치먼은 이렇게 추론했다. 생전에 자신의 이미지를 ‘판매한 적이 있는’ 유명인의 상속인들은 그들의 퍼블리시티권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이다.

몇 달 뒤에 그의 가설을 검증해 볼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우정공사(USPS)가 W. C. 필즈의 탄생 10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우표를 제작하려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리치먼이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루고시의 사건에 대한 고등 법원의 판결을 언급하면서 고소장을 제출했다. 첫 반론 이후, 우정공사는 결국 사망한 유명인의 유산에 대하여 최초의 라이선스 비용을 지급하게 되었다.

곧이어 리치먼의 클라이언트 명단에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고인들이 들어가게 됐다. 대표적으로는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등이 포함됐다. 유명인의 후손들은 리치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뻐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랑했던 가족의 유산을 더럽히는 사례를 막으면서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광고주들 역시 고인과 협업하는 걸 원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달리 새로운 스캔들에 휘말리지도 않았고, 비싼 촬영 현장에 나타나지 않거나, 거액의 계약 재협상을 요구하는 경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치먼으로부터 법적 고지를 받는 사람들은 회의적이었다. 베이비 아인슈타인의 공동설립자인 윌 클라크(Will Clark)의 말에 의하면, 명예 훼손이나 저작권, 상표권 등 확실하게 인정받는 법률을 잘 준수하던 기업들은 “개략적이며 확실치 않은 법률적 주장으로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리치먼이 할리우드에서 쉽게 공감을 얻을 만한 흥미로운 법률적 개념을 ‘발명했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가파른 언덕 위쪽으로 거대한 바위를 밀어올리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했습니다.”

리치먼은 스스로를 언더독(underdog)[8]이라고 여겼다. 출간되지 않은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때때로 나는 반대편의 힘과 영향력에 낙담하게 된다. 나는 메이저 광고 대행사와 방송국, 영화사, 제조업체, 출판사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이곳은 전쟁터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도덕적인 명분이 있다는 생각에 힘을 얻었다. 리치먼은 이렇게 썼다. “시중에서 대통령 모양의 딜도(dildo)[9]를 없애고 싶지 않은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는가?”

W. C. 필즈의 손자인 에버릿(Everett)은 자신의 위협에 법적인 무게감을 더하기 위하여 리치먼에게 유명인 권리법 초안 작성을 제안했다. 리치먼은 처음에 이 아이디어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주의회의 윌리엄 캠벨(William Campbell) 상원의원이 이 법률의 초안 작성에 관심을 표출하자, 리치먼은 “유명한 위인들의 미망인과 자손들”에게 80통 이상의 편지를 써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예전 아내인 프리실라(Priscilla), 빙 크로스비(Bing Crosby)의 미망인인 캐스린(Kathryn) 등의 강력한 지지자 집단을 규합했다. 두 차례의 부결 이후, 1985년 1월 1일에 캘리포니아 유명인 권리에 관한 법률(California Celebrity Rights Act)이 통과됐다. 그리하여 이제 적어도 캘리포니아에서는 상속인들이 이곳에서 사망한 유명 선친들의 퍼블리시티권을 합법적으로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이렇게 법적인 선례를 확립한 리치먼은 다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구원해 줄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아인슈타인은 살아생전에 자신의 이름이나 생김새를 프로모션용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시도와 계속해서 싸웠다. 그는 심지어 미국의 브랜다이스대학교(Brandeis University)가 학교의 이름을 아인슈타인대학교(Einstein University)로 개명하겠다는 제안처럼, 겉으로 보기에 우호적인 기관들이 그렇게 하려는 것도 금지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죽은 후에는 그가 원했던 게 무엇인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1980년대에는 아인슈타인의 이미지가 온갖 종류의 상품과 서비스에 부착되어 있었다. 프리스비에서부터 스노우볼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미지가 사용되어 어디에든 지적인 매력을 더해줬다. 그러나 죽은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현실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기업이 그를 이용하여 수익을 창출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유명인 권리에 관한 법률이 통과된 뒤, 리치먼은 아인슈타인의 모습이 담긴 광고들을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동차 광고에서부터 미용실 광고에 이르기까지 스크랩한 모든 자료를 아인슈타인의 유산 집행인이었던 오토 나탄에게 보냈다. 동봉한 편지에서 그는 “이러한 유형의 괴롭힘을 방지하기 위하여” 연락해야 하는 담당자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나탄은 이 스크랩 자료를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 측에 전달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미지 사용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감지한 대학교 측은 1985년 7월 1일에 리치먼을 아인슈타인의 “전 세계 독점 대리인”으로 지명했다. 프린스턴 소재의 신문사인 유에스원(U.S. 1)은 훗날 그를 두고 “히브리대학교가 지명한 고르곤(gorgon)[10] 같은 감시견”이라는 다른 별명을 붙여 줬다.

그들은 대학교 측에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대학교 측은 모든 라이선스 계약으로부터 65퍼센트를 가져가며, 권리 침해자를 상대로 법적인 조치를 취하여 거둔 수익금에 대해서는 50대 50으로 나누기로 했다. 일부에서는 리치먼을 기회주의자로 여기기도 했으나, 그 스스로는 자신의 작업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우상들의 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도덕적인 캠페인이라고 생각했다. 리치먼은 일련의 가이드라인을 작성했고, 대학교 측도 여기에 동의했다. 그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담배, 술, 도박과는 관련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인용구나 공식에 대해서는 조작을 하지 않아야 했다. 광고주들은 아인슈타인의 이미지 위에 말풍선을 그리고 거기에 그들의 말이나 아이디어를 채워 넣어서 그것이 마치 아인슈타인의 생각인 것처럼 꾸밀 수 없었다. 리치먼은 “이것이 기본사항이었다”라고 썼다. 그는 아인슈타인과의 개인적인 연줄 때문에 “물리학자, 인도주의자, 철학자, 평화주의자의 품격에 어울리는” 제휴 관계만을 허용하겠다는 자신의 결의가 더욱 강해졌다고 이야기했다.

리치먼은 아인슈타인을 불법적으로 사용한 사례를 찾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래서 대학교 측은뉴욕에 있는 히브리대학교의 미국 친구들(American Friends of the Hebrew University)이라는 단체의 자원활동가인 에후드 베나미(Ehud Benamy)에게 쇄도하는 요청을 처리할 권한을 위임했다. 이 단체는 미국에서 발전 기금을 모으고 인지도를 높이기 위하여 설립된 히브리대학교의 연계 조직이었다. 리치먼은 라이선스와 관련한 모든 제안서를 베나미에게 보냈고, 베나미는 상당수의 요청을 거부했다. 베나미는 아인슈타인이 혀를 내밀고 있는 장면을 찍은 아서 새스(Arthur Sasse)의 유명한 사진이 “천박하다”고 보는 리치먼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사진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여러 광고주의 요청을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히브리대학교는 아인슈타인이 “스스로 잘 알면서도 일부러 세상을 향해 보여준” 표정에 대하여 전면적인 거부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탈리아의 오븐 제조업체에 대한 라이선스를 불허했다. 이 업체와 제휴를 맺으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컴퓨터 제조사는 특히 자신들의 제품을 아인슈타인과 연관시키고 싶어 했다. 1989년에 소니(Sony)는 광고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대가로 마지못해 6만 3000달러를 지불했다. 1997년에 리치먼은 애플(Apple)이 자사의 맥(Mac) 컴퓨터 광고에 “다르게 사고하라(Think Different)”라는 문구와 함께 아인슈타인의 사진을 사용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다. 리치먼은 60만 달러를 적정 가격이라 책정하고 금액을 제시했다. 이후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그에게 할인해 달라는 전화를 했다. 리치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는 잡스에게 만약 그 가격이 지나치게 높다고 생각한다면, 대신에 메이 웨스트(Mae West)에 대한 라이선스를 얻어 “그녀도 다르게 사고했다.”를 쓰라고 했다. 잡스는 결국 높은 가격을 지불했다.

리치먼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심각하게 모욕적인” 제품들이 시중에 출시되고 있었다. 리치먼은 유니버설시티스튜디오(유니버설픽처스)가 소유한 체인점에서 “E=mc2: 불상사는 일어난다(Shit Happens)”라는 문구가 적힌 러닝셔츠를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이 셔츠의 판매를 금지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여기에 더해서 유니버설 측이 피해보상액으로 2만 5000달러를 지불하게 만들었다. 이후 리치먼은 일렉트로닉아츠(EA)에서 1995년에 출시된 비디오게임 시리즈 〈커맨드 앤 컨커(Command & Conquer)〉를 보고 불쾌하게 여겼다.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에서 “몇 번의 클릭만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죽이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치먼은 EA가 제품의 상자에 반유대주의적인 내용에 대한 경고를 담은 스티커를 부착하기를 원했다. EA는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First Amendment)에 보장된 권리, 즉 표현의 자유이며, 이것이 사후의 퍼블리시티권보다 우선한다며 맞대응했다. 양측은 소송을 진행하지 않고 합의에 이르렀다.

리치먼은 자신이 법정과 언론에서 “마케팅 악마(marketing ghoul)”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는 “특히 내가 모든 이들의 삶에 슬며시 침투하는 (사악한) 뱀을 막아주는 법안을 작성했기 때문에” 그것이 상처를 주는 표현이라고 서술했다. 리치먼은 자신이 유대인 사업가로서 돈을 긁어모으는 기회주의자로 표현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리치먼이 히브리대학교와 그 자신을 위하여 가장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베이비 아인슈타인 측에서 월트디즈니에 회사를 매각하려고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리치먼이 알게 됐을 때는 이전에 합의했던 라이선스 비용의 인상을 요구했다. 대학교 측이 이 과정에서 266만 달러라는 라이선스 비용을 공개했다. 베이비 아인슈타인의 공동 설립자인 윌 클라크는 이렇게 비용을 공개한 이유가 “아인슈타인의 이름에 라이선스를 받는 것, 그리고 그만큼의 돈을 지불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성공에 더욱 대담해진 리치먼은 이제 아인슈타인과 별다른 관련성이 없더라도 그의 이름을 사용하기만 하면 그 기업들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 브로스 베이글(Einstein Bros. Bagel)이라는 회사는 심지어 창업자들의 이름을 따서 회사명을 지은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측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히브리대학교의 한 학자가 보기에도 리치먼의 이러한 공격적인 입장은 골치 아픈 윤리적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었다.
1954년 3월 14일, 자신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Photograph: AFP/Getty Images

 

3. 잘 팔리는 천재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아인슈타인 아카이브(Einstein Archives)의 큐레이터였던 제에프 로젠크란츠(Ze’ev Rosenkranz)는 1990년대 내내 캘리포니아의 베벌리 힐스에 있는 리치먼의 사무실로부터 매달 약 30통 정도의 팩스를 받았다. 각각의 팩스에는 항생제에서 컴퓨터, 카메라에서 소프트드링크에 이르기까지 온갖 분야의 회사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름이나 생김새를 사용하고 싶다는 제안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각각의 제안에 축복을 내릴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의 여부는 젊은 학자였던 로젠크란츠에게 달려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보존하는 업무를 해왔기 때문에, 이 과학자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매우 친숙해져 있었다. 로젠크란츠는 최근에 그 업무가 “지나칠 정도로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저는 역사학자이지 비즈니스맨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대학교는 이 일이 저의 역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업무는 에후드 베나미가 1990년 말에 사망하면서 로젠크란츠에게 떨어진 것이었다. 그는 학자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각각의 요청서들을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만약 아인슈타인이라면 무엇을 원했을지에 대한 자신의 추정과 명백하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제휴 관계를 승인하라는 리치먼의 압력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건 기본적으로 취향의 문제였습니다. 때로는 검토 중인 제품, 혹은 그것의 디자인이나 거기에 첨부된 텍스트가 충분히 ‘고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안을 거절하면 분노에 직면하는 경우도 많았다. “기업들은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었고, 그들에게는 권리가 없다’고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을 주제로 만든 자사의 제품이 실제의 아인슈타인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로젠크란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유행했던 ‘아인슈타인’이라는 워드프로세서가 있었습니다. 그 제조사는 심지어 제품의 마케팅에서 ‘천재’라는 단어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제조업체는 아인슈타인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물리학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회사의 창업자인 스튜어트 아인슈타인(Stuart Einstein)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젠크란츠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이 성공해서 이 회사는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았다고 한다.

리치먼이 그들의 수익을 위해 전투를 치르고 있는 동안에도 대학교 측은 그들이 특별히 주목받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로젠크란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때 사람들이 이 학교의 역할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리치먼은 협상 과정에서 독종이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대학교 측에는 그것이 이득이었습니다.”

로젠크란츠는 자신의 역할이 편치 않았다. 그는 만약에 아인슈타인이었다면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마케팅 제휴에 대해 반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것이 순전히 상업적인 것이라면, 그는 대체로 거기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리치먼은 훨씬 더 많은 제안을 승인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로젠크란츠는 자신이 하기스(Huggies) 기저귀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리치먼이 특히나 불만스러워했다고 회상했다. 로젠크란츠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그에게 있어서 수익을 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건 비즈니스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학계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쉽지 않은 사안이었습니다.”

리치먼은 자신의 대행사와 그곳이 보유한 “죽은 레전드들”의 목록을 2005년에 사진 에이전시인 코비스(Corbis)에게 매각했다. 그 전에 그는 히브리대학교 측이 아인슈타인과 연관된 상품들에 최대한 많은 상표권을 신청하도록 설득했다. 이렇게 하면 기존의 상표권법을 이용해 법적인 영역 전반에 걸쳐 그들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더욱 쉬워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학교 측은 곧바로 거의 200개에 달하는 별도의 상품들에 대하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라는 상표권을 확보했다. 여기에 포함된 항목들로는 금속 탐지기, 우산, 아케이드 게임,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잠자리채, 물을 뿜는 장난감, 카드보드 등신대까지 다양했다.

로젠크란츠는 2003년에 이 대학교에서의 직위를 사임하고 캘리포니아 남부로 이사 가기 전까지 라이선스 제안을 검토하는 업무를 계속했다. 그에게는 트레이드마크 표시의 도입이 굉장히 불쾌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의 이름 위쪽에서 작은 크기의 ‘TM’ 표시를 처음 봤을 때, 정말이지 너무 신경이 쓰였습니다. 상업화나 상품화에 대하여 그것보다 더욱 명백한 표시는 없지 않나요? 하지만 변호사들은 이 모든 것이 권리를 확실히 보호하기 위해서 정말로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전 세계에 통용되는 상표권을 갖게 됨으로써, 히브리대학교는 이제 사후 퍼블리시티권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도 권리 침해의 소지가 있는 사례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처리방식에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로젠크란츠뿐만이 아니었다. 2011년 초, 아인슈타인의 입양 손녀인 70세의 에블린(Evelyn)[11]은 히브리대학교를 고소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그녀는 이 대학교가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 지나치게 도를 넘는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큐레이션 활동으로 시작했던 것이 그녀의 관점에서 일종의 착취로 발전해 있었다. 에블린은 뉴욕포스트(New York Post)의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괜찮다고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부 자료들 때문에 정말로 불쾌합니다.” 에블린의 친구인 앨런 윌킨슨(Allen Wilkinson) 변호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히브리대학교 측이 저작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아인슈타인 버블헤드(bobblehead)[12]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기념품들로부터 수익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에블린은 히브리대학교 측에 자신이 판매 수익의 일부를 취할 수 있게 해 달라며 합의를 요청했지만 그 요청이 무시당했다고 했다. 그녀는 이 돈으로 자신의 의료비를 충당할 생각이었다.

에블린은 법정에서 본격적으로 소송이 진행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망한 직후인 2011년 4월에 캘리포니아에서 어떤 사건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어쩌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2021년 9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로봇컨퍼런스(WRC)에서 선보인 아인슈타인과 닮은 얼굴을 갖고 있는 휴머노이드(humanoid) 로봇. ⓒPhotograph: VCG/Getty Images

 

4. Einstein.biz


2009년 11월, 제너럴모터스(GM)는 피플(People) 매거진에 근육질의 몸통에 아인슈타인의 얼굴을 덧붙인 이미지의 광고를 게재하면서 이런 문구를 함께 실었다. “아이디어도 섹시하다.” 그러자 히브리대학교는 이렇게 반발했다. “팬티를 입은 아인슈타인 박사의 모습은 ⋯ (우리 대학교가) 세심하게 보호해 온 이 유명 과학자의 이미지와 생김새에 대한 권리에 손상을 가하고 있다.”

2012년 3월 16일, 히브리대학교는 GM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의 의도는 “만약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사망할 당시에 그러한 퍼블리시티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는 뉴저지의 법령에 의해 자신의 사후 퍼블리시티권을 양도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GM은 이러한 논리를 거부하면서, 설령 히브리대학교가 퍼블리시티권과 관련한 아인슈타인의 의중은 물론이고 그 권리를 GM이 위반했다는 사실까지도 전부 입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인슈타인이 사망했던 1955년 이후로 충분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러한 논점이 무효화된다고 주장했다.

이 소송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사건의 심리는 캘리포니아 소재의 연방 법원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주심 판사인 하워드 매츠(Howard Matz)는 이 사건에 아인슈타인이 사망했을 당시의 관할 지역이었던 뉴저지주의 법률을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캘리포니아의 법령에서는 개인의 퍼블리시티권을 사후 70년 동안 보호하고 있지만, 뉴저지는 그러한 권리에 대한 구체적인 기간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매츠 판사는 일곱 달이 지나서야 평결을 낼 수 있었다. 그는 판결문에 이렇게 적었다. “아인슈타인의 페르소나(persona)는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 아주 깊이 뿌리내려 있다. 그가 사망하고 거의 60년이 지난 현재, 그의 페르소나는 그것을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무의미한 광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타임스 오브 이스라엘(The Times of Israel)은 “히브리대학교가 아인슈타인의 이미지에 대한 소송에서 패소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얼핏 확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판결은 명확한 결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지워싱턴대학교 로스쿨의 셰크터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극히 불만족스러운 해결안으로 종결된 기이한 사건입니다. 캘리포니아의 판사가 엄밀한 해석이 존재하지도 않는 뉴저지의 법령을 추정했습니다. 지금은 어떤 법원에서도 이 판결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대학교는 판결에 항소했고, 이 사건은 추가적인 절차를 위해 하급 법원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그러다 갑자기 양측이 합의했다. 이와 관련하여 셰크터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사후 퍼블리시티권의 존재 여부 및 기간에 대한 뉴저지주의 법령이 무엇인지를 제게 묻는다면 어떨까요? 글쎄요, 우리에게는 명확한 의견이 부재한 사안에 대하여 뉴저지 외부의 판사가 내린 나름의 추측이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미국 의회가 개입하여 나라 전체에 적용되는 단일한 법규를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됐다. 셰크터는 “의회에서 법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변동성이 매우 크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미국 이외의 나라들에서도 관련 법령은 제각각이다. 브라질에서는 사후의 권리가 상속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유지된다. 독일에서는 그 기간이 70년이다. 반면에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퍼블리시티권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전혀 없다. 그래서 개인의 이미지와 인격을 보호하려는 법조인들은 어느 기업의 표현처럼 “법적 권리의 누더기 상태”에 의지해야만 한다.

2013년에 리치먼이 사망한 후, 그가 아인슈타인의 퍼블리시티권을 매각했던 코비스(Corbis)라는 사진 에이전시는 그린라이트 라이츠(GreenLight Rights)로 사명을 바꾸었다. 이곳은 현재 아인슈타인만이 아니라 엘비스 프레슬리, 찰리 채플린, 마릴린 먼로의 권리도 관리하고 있다. 그 이후로도 아인슈타인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비즈니스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린라이트는 특별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업체들과 협업하여 온라인상의 불법 상품과 권리 침해 사례를 식별해내고 있다.

이제 라이선스 요청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외로운 학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모든 요청은 예루살렘히브리대학교에서 승인과 거부 권한을 가진 전문가 위원회로 보내진다. (이 위원회는 상업적 제휴 요청을 심의한다. 그리고 본지 가디언과 같은 언론 매체들이 이번 기사에서처럼 아인슈타인의 사진을 이용하려면, 히브리대학교가 협약을 맺은 게티(Getty)와 같은 사진 플랫폼을 활용하면 된다.) 각각의 신청서는 그 자체의 장점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예루살렘히브리대학교의 부총장 겸 CEO인 이샤이 프렌켈(Yishai Fraenkel)이 그린라이트의 대리인을 통해 내게 이메일로 답변한 바에 의하면, 어떤 회사가 아인슈타인의 입을 통해서 발언하는 것처럼 만들 수 있는 말풍선은 리치먼이 작성한 가이드라인 원안에 따라서 항상 거절된다고 한다. 히브리대학교 측은 “개인의 이름을 제시하는 것이 적절하거나 합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며, 심의를 위한 전문가 위원회가 얼마나 자주 소집되는지, 또는 해당 위원회의 구성원은 누구인지에 대한 진술을 거부했다.

아인슈타인이 사망한 지 60년이 흘렀음에도 그의 수입은 전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수요가 여전히 높다는 사실은 그의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함과 잊을 수 없는 외모, 그리고 그에게 체화된 가치들이 모두 변수로 작용하는 일종의 함수 관계이다. 다양한 집단에서 아인슈타인은 언제나 쉽게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인슈타인은 키가 작았고, 난독증이 있는 건강염려증 환자였으며, 박해받는 소수 민족 출신이었다. 그의 모순적으로 보이는 위치 때문에, 심지어 그와 반대되는 집단에서도 그를 자신들의 상징적 수장으로 여기는 것이 가능했다. 예를 들자면,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 국가의 건설에 반대하면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피해를 겪는 현실에 크게 슬퍼했지만, 그러면서도 시오니즘(Zionism)[13]의 대의를 위해 기금을 모금했다. 또한 그는 신이 계시를 내린다는 생각을 거부했지만, 한편으로는 신의 존재를 믿었다.[14]

만약에 아인슈타인이 21세기의 텔레비전 화면과 광고판, 포스터, 티셔츠 등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과연 히브리대학교가 자신의 유산을 관리하는 것에 만족했을까? 살아 있을 때의 그는 (세상이) 보이지만 들리지는 않는다고 느끼곤 했다. 언젠가 그는 “(내가) 이렇게나 널리 알려졌지만 이토록 외롭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아인슈타인 브랜드의 연필이나 아인슈타인 브랜드의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에 대해서 과연 아인슈타인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를 헤아리면서 12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로젠크란츠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아인슈타인은 히브리대학교가 자신의 생김새를 이용하여 재정적인 수익을 거두는 것에 기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일부에 있는 마초적이며 허세스러운 측면 때문에 그냥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로젠크란츠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어쩌면 그를 신경 쓰이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글쎄요, 과연 그가 기뻐했을 것인지에 대해서 제가 뭐라고 확신할 순 없습니다.”

죽은 사람의 바람이 뭐였든 간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누구의 소유인가, 그리고 그 기간은 얼마나 오랫동안인가에 대한 질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2020년 말, 셰크터는 워싱턴에 사는 동료 한 명이 뉴저지의 입법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업무는 뉴저지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사후 퍼블리시티권 기간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퍼블리시티권 관련 법령의 초안을 작성하고 제정하는 것이었다. 셰크터는 뉴저지의 주의회에 출석하여 증언하기로 했다. 하지만 세 달 뒤에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쳤고, 법안 제정은 연기됐다. 리치먼은 언제나 사후 퍼블리시티권의 기간을 저작권법에서 정하고 있는 사후 70년과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뉴저지가 법안 제정을 재개하고 저작권법처럼 비교적 관대한 사후 권리를 채택한다면, 셰크터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2025년에 아인슈타인의 라이선스가 만료된다면, 그로 인한 분쟁이 이어지는 것은 앞으로 2년 정도일 겁니다.”[15]

그때까지는 아인슈타인 사업이 계속해서 돈을 벌어들일 것이고, 히브리대학교의 평판은 점점 더 강력한 억제 효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 가운데 한 곳에서 큐레이터로 일했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는 한 동료의 조언을 받고 홍보 자료에 있던 아인슈타인의 이미지를 모두 삭제했다고 한다. 본 기사가 발행되기 전에 히브리대학교의 여성 대변인은 이렇게 경고했다. “해당 기사가 우리의 상업적 제휴 관계, 명성, 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의 명성을 훼손한다면, 본 대학교는 권리를 지킬 준비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그린라이트 라이츠는 이 절차를 간소화하고 관련된 우려를 누그러트리기 위하여 라이선스 획득을 고려하는 이들이 아인슈타인의 이름, 생김새, 발언 등의 사용을 신청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신청서는 1차적인 검토 후에 히브리대학교의 정체 모를 위원회에 전달되어 최종적인 결정이 이루어진다. 이 사이트의 이름은 Einstein.biz[16]로, 상당히 직설적이다.
[1]
《매디슨가의 물리학자(A physicist on Madison Avenue)》 (1991)
[2]
마고는 아인슈타인의 사촌누나이자 두 번째 부인이었던 엘사 아인슈타인(Elsa Einstein)이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이다.
[3]
개인의 이름이나 이미지 등을 상업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
[4]
타임(Time), 라이프(Life), 피플(People) 등의 매거진을 발행하던 기업으로, 2018년에 메러디스코퍼레이션(Meredith Corporation)에 인수되었다.
[5]
취리히연방공과대학교(ETH Zurich)와는 다른 대학이며, 연방(federal) 대학이 아닌 취리히 지방정부의 관리를 받는 곳이다.
[6]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이 전자기학을 통일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고, 조지프 존 톰슨(Joseph John Thomson)이 전자의 존재를 밝혀냈으며, 그의 제자인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가 원자의 구조를 밝혀내는 등 전 세계의 물리학계를 이끌고 있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상대성 이론)이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양자물리학) 등 물리학의 근간을 완전히 뒤흔드는 독일 출신의 천재 물리학자들이 등장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7]
아인슈타인은 1921년부터 미국을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미국에서 거의 록스타와 같은 폭발적 관심을 받았다.
[8]
강자에게 맞서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약자
[9]
미국에서는 역대 대통령의 얼굴을 새긴 딜도(dildo)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10]
고르곤(gorgon)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로, 머리카락이 뱀으로 되어 있으며 그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돌로 변했다고 한다. 메두사(Medusa)도 그들 중 하나이다.
[11]
아인슈타인의 아들인 한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입양한 딸이다.
[12]
고개가 까딱거리며 흔들리는 인형
[13]
유대인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상
[14]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교적인 신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철학처럼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주의 진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15]
2025년은 아인슈타인의 사후 70년이 되는 해이다.
[16]
비즈니스 도메인(.biz)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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