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처방받을 수 있는 대부분의 향정신성 의약품은 ‘오피오이드(Opioid)’ 계열로 모르핀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진통, 진정 마약이다. 과학 저널리스트 사라 드위어트(Sarah DeWeerdt)가 지적한
오피오이드 위기의 근원은 다름 아닌 병원과 약국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오피오이드 계열 약물 처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시기를 거친 2010년대는 ‘오피오이드 전염병(Opioid Epidemic)’의 시대로 불린다. 2015년 미국은 100년 만에 처음으로 기대 수명이 감소했고, 2017년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공중 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말기 암 환자나 수술 직후의 환자들에게 처방되던 오피오이드 계열 진통제는 이른바 만병통치약이 됐다.
MONEY_ 19조, 50조, 5조 원
마약은 어떻게 만병통치약이 됐을까? 현지시간 11월 1일, 월마트‧CVS‧월그린 등의 미국 거대 약국 기업들은 오피오이드 중독 사태와 관련해 총 138억 달러, 한화 19조 6000억 원을 합의금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당국이 현재의 오피오이드 대량 확산 사태의 책임을 약을 판매한 기업에게 물은 것이다. 이 확산 사태의 주인공은 ‘옥시콘틴(Oxycontin)’으로 불리는 약물이다. 1892년 미국에서 설립된 제약 회사 ‘퍼듀 파마(Purdue Pharma)’는 1952년 새클러 가문에 인수된 후 공격적인 제약 마케팅을 벌인다. 1996년 시판되기 시작한 옥시콘틴은 350억 달러, 우리 돈 50조 원의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오피오이드 사태의 중심이 된 퍼듀 파마는 2021년 5조 원의
파산 합의금을 냈고 2021년 9월 해산된다.
KEYPLAYER_ 새클러 가문
미술계와 학계 자선 사업으로 널리 알려진 새클러 가문의 재산은 15조 원에 달했다. 비법은 옥시콘틴을 유통시키기 위한 공격적인 마케팅이었다. 새클러 가의 퍼듀 파마는 정치인과 의학계를 끌어들이기 위해
1조 원이 넘는 로비를 쏟아 부었다. 이는 당시 총기 관련 로비 자금의 8배에 달하는 규모였고, 오피오이드 처방을 막으려는 단체가 쓴 금액의 200배에 맞먹었다. 옥시콘틴을 처방하는 의사에게는 여행을 선물했고, 영업사원에게는 처방 수량에 따라 막대한 보너스를 줬다. 중독성이 없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옥시콘틴의 마케팅 영상은 만성 통증으로 고생하는 관절염 환자의 인터뷰를 담았다. 돈과 접근성 등으로 인해 병을 ‘치료’할 수 없는 이들은 통증을 ‘완화’하길 원했다. 그들은 조용히 마약에 중독됐지만 의사의 권유와 공격적인 마케팅은 그 심각성조차 인식할 수 없게 했다. 더 많은 약을 원하지만 처방량을 늘릴 수 없는 이들은 불법 마약으로 눈을 돌렸다. 필라델피아의 켄싱턴 거리는 그렇게 ‘
좀비 거리’가 되었다.
EFFECT_ 마약과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을 선언한 리처드 닉슨 정부는 처벌과 감옥으로 공공연했던 마약을 저지하려 했다. 한편으로 전쟁 선포는 닉슨 정부의 정치적 계산 결과기도 했다. 닉슨 정부 당시의 백악관 법률 고문이었던 존 에를리크만(John Ehrlichman)은 1968년 닉슨의 주적을 “
반전 좌파와 흑인”이라고 표현했다. 마약을 범죄로 규정하는 행위는 주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일종의 합법적인 불법화였던 셈이다. 공공연하게 퍼져있던 마약이 범죄가 되자 감옥은 마약사범으로 가득했다. 출소한 이들은 금방 다시 마약에 손을 댔고, 제약 회사는 공격적인 오피오이드 마케팅을 펼쳤다. 사회적 맥락으로 인해 흑인과 히스패닉은 더 가혹하게, 더 자주 검거됐다. 불법화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지만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계속해서 중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ANALYSIS_ 의료 체계
합법과 불법 사이의 간극에는 미국의 가혹한 의료 체계가 있다. 2017년 마약성 진통제 남용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 중
35.8퍼센트는 담당 의사에게 통증 관리를 위해 합법적으로 처방전을 받았던 환자들이었다. 미국의
건강 보험은 회사의 복리 후생 품목인 경우가 많다. 때문에 보험 혜택을 받는 이와 보험료를 납부하는 이가 분리됐고, 민간 보험사는 구매자를 설득하기보다 기업을 향한 마케팅과 판매량에 집중했다. 보험의 문제 뿐 아니라 공공 의료 시스템의 구축 이전에 설립된 영리 병원도 한 몫을 했다. 2020년 기준 의료 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미국인은 전체 인구의 8.6퍼센트다. 2800만 명의 미국인이 보험 혜택 없는 치료비를 지불해야 한다. 관절염 치료 비용은 1만 2000달러부터 시작하지만 옥시콘틴은 1mg당 1달러의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10달러면 당장의 통증을 줄일 수 있다는 말이다. 1만 2000달러가 없지만 오늘 당장 일해야 하는 사람에게 옥시콘틴은 유일한 선택지이자 마지막 희망이다.
FORESIGHT_ 한국
그렇다면 공공 의료 시스템이 익숙한 한국은 합법적인 마약으로부터 안전할까? 2010년대 이후 한국 의료계는 ‘필수 의료’ 인력의
붕괴를 목도하고 있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의 의사는 점차 줄었고 안과, 피부과, 성형외과를 선택하는 의사는 점차 늘었다. 《
의사들은 왜 그래?》의 김선영 저자는 필수 의료 전공의 품귀 현상의 원인으로 대형 병원의 팽창으로 인한 의사 과잉 공급과 비급여 진료 경향 강화를 짚는다. 과잉 경쟁 시대에서 의사들은 영양 수액, 피부 관리, 도수 치료 등의 비급여 진료로 도피했고 낮은 수가에 기반을 둔 시스템은 3분 안에 진단과 처방을 끝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식약처는 비급여 항목인 마약 확산을 막고자 마약류 의료 쇼핑 방지 정보망을 시행하고 있지만
의무 사항은 아니다. 최근 5년간 마약성 진통제 처방 현황에 따르면 마약성 진통제 처방은 지속적인
증가 추세에 있다. 특히 펜타닐의 경우 2018년 89만 건에서 2020년 148만 건으로 67퍼센트 증가했다. 팽팽히 당겨진 끈은 작은 상처에도 쉽게 끊어진다. 합법적 테두리 속 마약 중독자는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볼 때다.
INSIGHT_ 약의 이유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수능을 앞두고 식약처는 ‘
공부 잘하는 약’으로 광고되는 약물 297건을 적발했다. 수험생들 사이에서 ‘페니드’로 불리는 ‘메틸페니데이트’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의 치료에 쓰인다. 집중력과 수면의 질을 높이지만 심혈관 질환의 위험성을 높이고 시력 장애 및 시야 혼탁이 발생할 수 있다. 심한 경우 환각과 망상성 사고도 나타난다. 식욕 억제제인 이른바 ‘
나비약’은 10대 청소년 사이에서 유행이다. 불안한 이들은 마약의 첫 번째 타깃이 된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는 자본과 상황, 주체에 따라 언제든 달라진다. 인식과 문화, 접근의 신중함이 그 유동성을 떠받치지만 공통의 인식마저도 흩어지고 있다. 전 세계가
오락용 대마 합법화에 눈길을 돌린다. 산업을 부흥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관광 산업을 활성화하고, 세수를 늘리기 위함이다. 국가가 허용하고, 의사가 처방했다는 믿음에 제동 장치가 없다면 옥시콘틴의 유령은 계속해서 우리 주위를 맴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