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를 만져야 알 수 있는 것
완결

이끼를 만져야 알 수 있는 것

만져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끼가 머금고 있는 지구의 기억 같은 것들 말이다.

잉글랜드 데번 지역의 이끼로 덮인 나무들. ⓒPhotograph: Adam Burton/Alamy
2021년 초겨울 무렵, 나는 옥스퍼드의 우리 집 근처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벤치 옆에서 나는 우연히 이끼에 덮인 통나무를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잔뜩 흐린 하늘 아래에서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끼의 잎은 마치 최고급 자수처럼 작고 섬세했으며, 비닐 랩처럼 얇았다. 나는 이끼의 미세함과 정교함에 경외심을 느끼며 솜털 같은 표면을 문질러 본 다음 십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끼를 마지막으로 만져본 게 언제였을까? 처음은 언제였을까? 내 기억 속에 나무, 강과 산은 있었지만, 이끼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마치 이 거대한 수목의 사촌들 사이에서 이끼가 자신의 근엄함과 아름다움에 주목하라며 나를 소환하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이끼가 나에게 뭔가를 말했던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사실 접촉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자연과의 접촉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공원과 풀밭이 많은 도시에 살고 있지만, 자연과의 접촉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보이는 것들은 잘 가꿔진 자작나무와 도시의 운하, 그리고 울타리의 장미꽃이었다. 여름이 되면 나는 친구들과 헤엄을 치기도 하고, 모래사장이나 풀밭에서 일광욕을 하고 굴러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청결한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자연과 아무런 접촉이 없는 삶을 지속해 나간다. 나는 약을 복용하는 것처럼 적정하게 소량으로 위생적인 자연을 찾고 있었다.

진정한 접촉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겨울뿐이다. 겨울에는 아무리 효율적으로 갖춰 입더라도, 빗물이 몸에 스며든다. 우리를 둘러싸는 안개는 얼굴에 특유의 습기를 남긴다.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로 인해 입술이 갈라진다. 숨을 들이쉴 때면 이슬이 콧구멍과 기도의 안쪽을 건드린다. 귓등으로는 겨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겨울의 물리적 성질은 모든 곳에 손길을 뻗친다. 그런데 이끼는 겨울철에 가장 열심히 일한다. 이끼는 모든 통나무와 암석과 바위틈에서 자라며 빛을 낸다.

바로 그런 겨울의 와중에 나는 도시의 어디서든 이끼와 접촉할 수 있었다. 오솔길과 담벼락에서, 버드나무의 껍질에서, 금속제 하수구 뚜껑에서, 묘비에서, 선상가옥의 지붕에서, 버려진 자전거에서, 철교의 아래에서 그들을 마주했다. 이끼는 그늘과 수분만 충분하다면 어디에서든 잘 자랄 수 있다. 비관다발식물인 이끼는 뿌리에서 싹으로 이어지는 정교한 구조가 없다. 뿌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이끼는 단세포 잎으로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는데, 그 잎은 자신의 무게보다 30배나 더 무거운 물을 붙잡을 수 있는 특별한 설계로 만들어져 있다. 겨울에 이끼 무더기를 발견했을 때 잠시 멈춰서 그 표면을 만져 보면, 마치 축축한 스펀지를 만진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리고 이끼 무더기의 첫 느낌은 부드럽지만, 또한 다양한 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을 것이다. 손가락 등 부분으로 이끼 무더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 작은 줄기 같은 것이 나를 간지럽힌다. 이끼의 잎사귀 밖으로 튀어나온 이 줄기들은 포자체(胞子體)라는 것이다. 각각의 포자체는 맨 끝부분에 포자낭(胞子囊)을 갖고 있다. 여기서 바람과 물이 포자를 가져감으로써 이끼가 증식한다. 포자체는 잎사귀층보다 더 높게 자라는데, 그럼으로써 포자를 더욱 멀리까지 보내 새로운 공동체, 즉 새로운 가족이 시작되는 것이다.

도시의 주거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끼 중 하나는 바로 토르툴라 무랄리스라는 학명(學名)의 벽나사 이끼다. 다른 초보자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내가 처음 알아볼 수 있었던 종류도 바로 이것이었다. 어느 날 비 온 뒤의 밝고 파란 하늘 아래, 나는 벽돌담에서 자라고 있는 벽나사 이끼의 포자체가 일반적인 크기의 거의 세 배로 부풀어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깜짝 놀랐고, 아직까지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이끼가 성장하는 과정의 또 다른 단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이끼에 맞게 눈높이를 낮춘 자세로 포자체 한 개를 향해서 손가락을 뻗었다. 하지만 내 손은 그 중간에서 저절로 멈췄다. 내 눈이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약간 걸리기는 했지만, 그 이끼들의 포자낭이 전혀 부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각각의 포자체는 마치 작은 물풍선, 혹은 임신부의 배처럼 그저 주위의 작은 물방울을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갔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물방울이 더 많이 떨어지며 이끼에 스며들었다. 이끼 앞에서의 그 순간이 사소하지는 않았지만, 그날 하루가 조금은 이상한 느낌으로 시작됐다고 기억한다. 그 당시에 이끼가 나에게 처음 가르쳐준 교훈은 바로 ‘우리는 시간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인간의 시간도, 심지어 포유류의 시간도, 지구의 시간도 만질 수 없다. 몇 시간 뒤에 내가 다시 도시의 일상 속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그 포자체는 그대로 있었고, 여전히 물을 머금고 있었다. 이끼 무더기는 겨우 1인치(2.54센티미터) 자라는 데에 25년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끼는 최소한 3억 5000만 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했고, 처음으로 수중에서 육지로의 여정을 시작한 종 중 하나였다. 식물생태학자인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가 《이끼와 함께(Gathering Moss)》라는 책에서 상기시키듯, 이끼는 우리의 나이 많은 친척이다. 이끼는 도시와 아파트에 함께 사는 종이며, 우리 인간의 시간과 그 시간의 파멸적인 속도에 대한 목격자이다. 이끼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이끼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르헨티나 미시오네스(Misiones)의 산타마리아 라 마요르(Santa María la Mayor) 유적에서 이끼로 뒤덮인 고대의 돌담. ⓒPhotograph: Sebastian Jakimczuk/Alamy

 

1. 만져야 열리는 세계


아리스토텔레스는 촉감이 가장 보편적인 감각이라고 말했다. 최근에 나는 자연과 다시 연결되기 위해서는 자연을 만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맨발로 걷기헤엄치기 등 우리의 몸으로 인간이 아닌 개체를 느끼는 활동이 비인간계와의 정서적이며 윤리적인 관계를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도 많다.

철학자인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인간의 인지에 대해 사고하고 집필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우리가 신체의 감지와 감각에 의해서 세계를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는 자신의 몸에서 어떤 물체가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 커다란지 작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시각이 중요하긴 하지만, 촉각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

촉각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근원적인 상태를 재확인하게 만든다. 인간과 비인간을 비롯한 타자(他者)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무언가를 만지는 순간은 대부분 가장 취약한 상태기도 하다. 반대로 그 대상이 우리를 만지는 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 사후 1964년에 출간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The Visible and the Invisible)》에서 그는 이렇게 유추했다. 나의 한 손이 다른 이를 만질 때, 둘 중에 누가 만지고 있는 것이며 누가 만져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는 눈꺼풀이 있다. 우리는 코를 틀어막을 수 있고, 귀를 닫을 수 있다. 그러나 피부를 가리는 자연적인 덮개는 없다. 촉각을 꺼버릴 수는 없다. 세상 속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촉각을 이용하는 것이며, 우리 신체의 땀구멍 하나하나로 언제나 무언가를 만지고 만져지는 것이다.

자연과의 접촉이 종간 경계를 이어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직감적으로 이해된다. 식물의 왕국에서 이끼를 비롯한 선태류(蘚苔類)만큼 접촉이라는 성질을 확실하게 담고 있는 존재가 있을까? 이끼는 접촉이다. 이끼는 자신을 만지는 대상의 피부를 찌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끼가 달라붙어 자라는 대상에게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 따라서 이끼는 기생식물이 아니다. 그러나 이끼는 나무를 부드럽게 만들고, 토양의 침식을 방지하며, 너무 작아서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동물들에게 쉴 곳을 제공한다. 이끼는 지구는 물론이고 우리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존재와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다. 우림 속에서 그리고 도시의 포장도로 위에서, 이끼는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다.
영국 데번의 위스트먼스 우드(Wistman’s Wood) 국립자연보호구역. ⓒPhotograph: Mike Read/Alamy

 

2. 이방인과 이끼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옥스퍼드대학교의 900년 역사에서, 이끼의 손길은 수많은 사람을 매혹시켜 왔다. 그러나 역사학자인 마크 롤리(Mark Lawley)가 지적했듯이, 영국에서는 17세기 말까지도 이끼에 대한 별도의 연구가 시작되지 않았다. 영국 이끼의 다양성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했던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은 바로 독일의 식물학자인 요한 야코브 딜레니우스(Johann Jakob Dillenius)였다. 딜레니우스는 의학을 공부했지만, 기센대학교(University of Giessen)에 다닐 당시에도 식물학에 강한 흥미를 품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자신의 첫 번째 주요 연구 논문인 〈기센 주변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식물들의 카탈로그(Catalog of Plants Originating Naturally Around Giessen)〉(1718)를 썼다. 이 논문의 ‘민꽃식물(Cryptogams)’ 항목에서 그는 다수의 이끼와 균류를 언급한다. 민꽃식물이란 씨앗이 아닌 포자(胞子)를 통해서 번식하는 식물을 의미하며, ‘하등식물(lower plant)’이라고도 알려져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동물들은 똥과 오줌을 싸놓는 더러운 땅바닥을 손으로 직접 만지면서 일과를 보내려고 했던 식물학자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딜레니우스는 그렇게 했고, 그의 연구는 영국의 대표적인 식물학자였던 윌리엄 셰라드(William Sherard)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셰라드는 그 직전에 현재 튀르키예의 이즈미르(İzmir) 지역에 해당하는 스미르나(Smyrna)에서 자란 식물을 많이 확보해 그것의 분류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는 딜레니우스에게 런던 근교의 엘섬(Eltham)에 있는 자신의 정원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딜레니우스는 1721년 영국으로 이주해 셰라드의 식물 컬렉션과 영국의 이끼를 연구하고, 영국 식물에 대한 피나크스(pinax, 삽화가 그려진 카탈로그) 작업을 하게 된다.

영국에서의 처음 7년 동안, 딜레니우스는 런던에 있는 자신의 하숙집과 엘섬을 오가며 살았다. 1724년, 그는 영국에서 자신의 첫 번째 책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은 식물학자이자 박물학자였던 케임브리지의 존 레이(John Ray)가 1670년에 처음 저술한 《영국 생물종의 체계적 개요(Synopsis methodica stirpium Britannicarum)》의 3판이었다. 이 책의 2판(1696)에서 레이는 80가지 종류의 이끼를 소개했다. 조지 클래리지 드루스(George Claridge Druce)의 계산에 의하면 딜레니우스는 여기에 40가지의 균류와 150종류 이상의 이끼, 그리고 200여 종의 종자식물을 추가했다고 한다. 딜레니우스는 민꽃식물을 ‘균류(fungi)’와 ‘선류(musci)’로 구분하고, 여기에서 양치식물(fern)과 쇠뜨기류(equisetum)는 배제했다.

이는 아마도 역사상 처음으로 누군가 오직 ‘하등식물’에게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연구한 것이었다. 18세기의 한 신사가 하루에 몇 시간씩 영국의 이끼를 만지고 수집하면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는 생각이 나를 매료시켰다. 딜레니우스의 내면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하지만, 그의 편지를 보면 그가 이끼를 사랑했으며 동료들과의 생활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 보내는 생활은 어땠을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3년의 연구 끝에 레이의 《영국 생물종의 체계적 개요》를 자신만의 버전으로 출간했지만, 이 책에는 딜레니우스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았다. 해당 출판사와 셰라드는 영국인들이 자신들 땅의 이끼를 연구한 책에 외국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는 걸 싫어할까 봐 두려워했다. 딜레니우스는 영국의 또 다른 대표적 식물학자이자 동료였던 리처드 리처드슨(Richard Richardson)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 생물종의 체계적 개요》를 익명으로 출간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책을 리처드슨에게 공개적으로 헌정하는 기회를 갖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밝혔다. 그 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누락되긴 했지만, 그는 리처드슨이 셰라드를 설득해 자신의 꿈인 《이끼의 역사(the History of Mosses)》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길 원했다.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제가 말하는 건 《이끼의 역사》입니다. 물론 제가 그걸 끝낼 시간이 있다면 말입니다. (중략) 혹시 당신께서 (중략) 제가 일주일에 하루를 여기에 투자할 수 있도록 그를 설득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쭙니다.”

딜레니우스는 1732년까지도 일주일에 하루를 빼서 《이끼의 역사》를 저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가 피나크스 작업을 즐겼더라도, 진정한 열정은 하등식물들을 향해 있었다. 약 4년 동안 셰라드의 피나크스 작업을 하는 동안, 그는 단 하루라도 자유롭게 온전히 이끼에 전념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던 중 1728년에 셰라드가 사망하자, 딜레니우스의 운명은 하룻밤 사이에 바뀌었다. 셰라드는 자신이 소장한 책과 식물들을 딜레니우스에게 남겼으며, 옥스퍼드대학교 측에는 식물학 교수직을 유지하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남겼다. 그렇게 해서 셰라드 석좌교수(Sherardian professor)직이 만들어졌으며, 셰라드가 유언장에서 첫 번째 인물로 지명한 사람은 딜레니우스였다.

1728년에 딜레니우스는 옥스퍼드로 이사 가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이곳에는 사망한 윌리엄 셰라드의 남동생 제임스 셰라드(James Sherard)가 있었는데, 그는 딜레니우스를 상당히 싫어했다. 딜레니우스에게 이끼 연구와 피나크스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며, 대신에 《호르투스 엘타멘시스(Hortus Elthamensis, 엘섬의 정원)》(1732)라는 책을 쓰라고 강제했다. 이 작업 때문에 딜레니우스는 재정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호르투스 엘타멘시스》 이후, 딜레니우스는 자신의 커리어와 삶을 이끼 연구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741년에 《히스토리아 무스코룸(Historia Muscorum, 이끼의 역사)》를 출간했다. 576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85개의 삽화가 들어 있는, 어마어마하게 상세한 이 책은 이끼와 균류, 지의류(地衣類), 조류(藻類), 우산이끼류, 뿔이끼류, 석송류(石松類)를 포함하여 모두 661 종류의 하등식물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끼를 초롱이끼, 털깃털이끼, 솔이끼, 참이끼, 물이끼, 석송의 여섯 가지 속(屬)으로 나눴다. 이 분류는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필생의 임무였던 이 책은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았다. 책의 가격을 낮추면 사람들이 사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한 딜레니우스는 곧이어 요약본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대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탈리아의 피에르 안토니오 미첼리(Pier Antonio Micheli)가 이미 10여 년 전에 민꽃식물 분야를 규정하는 자세한 책을 썼던 것이다. 딜레니우스는 《이끼의 역사》 요약본을 출간하지 못한 채, 1747년에 옥스퍼드의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딜레니우스의 이야기에서 가장 애잔한 부분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영국 선태학(bryology)의 역사에서 그가 기여한 부분이 대륙 식물학자들(Continental Botanists)이라는 항목 아래에 묶여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국인 독일은 물론이고 그가 살았으며 묻혀 있는 영국에서도 추모받지 못했다. 그의 생애는 이민자의 운명이었다. 나는 딜레니우스에게 금세 친밀감을 느꼈다. 이방인이었던 그가 나에게는 친구가 된 것이다. 템스 강을 따라 걸으면서, 나는 그가 그린 놀라운 삽화를 손에 들고 무리 속에서 초롱이끼와 솔이끼를 구별하는 방법을 공부했다. 나는 언제나 나무를 바라보면서 숲에서 부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는 걸 좋아했는데, 그 삽화들은 나의 마음과 감각이 의식적으로 이끼들에게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이끼는 우리를 향해 덤벼들지도 않고, 소나무의 잎이나 참나무의 가지처럼 우리를 붙잡지도 않는다. 그것이 경이로워 보일 때조차도, 자세히 관찰할 정도로 오랫동안 흥미를 가지기는 어렵다. 나는 궁금했다.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이민자였던 딜레니우스 같은 사람이 왜 모두가 그냥 지나치는 식물에게 자신의 에너지와 희망을 전부 쏟아부었던 것일까?

역사학자로서 나는 몇 가지의 이유를 나열하고 싶다. 과학적 세계관의 부흥, 제국주의, 식물과 사람의 세계를 분류하고픈 충동, 1609년에 독일의 기센(Giessen)에 설립된 식물원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대체 왜 이끼였을까? 왜 이 사람이었을까? 그에 대한 기록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에서 찍은 아이슬란드 이끼. ⓒPhotograph: Murdo MacLeod/The Guardian

 

3. 착취의 식물학


나는 인도 펀자브(Punjab)의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 자랐다. 동네의 구멍가게에 가려면 거의 항상 진흙탕과 고인 빗물을 헤치고 가야 했다. 몬순 시즌이 되면,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내리치는 와중에도 공원에서 친구들과 캐치볼을 했다. 이끼로 덮인 바위에서 미끄러졌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 모두 엉덩방아를 찧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게임을 한 번 할 때마다 카이(kai) 위에서 두 번씩, 때로는 세 번씩 미끄러졌다. 펀자브 언어에서 카이가 정확히 이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하등식물을 번식 방법에 따라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류해 선태류와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인도 북부의 전통적인 치료 체계인 아유르베다(ayurveda)에 관한 고대 문헌 《수스르타 사므히타(Susruta Samhita)》나 《카라카 사므히타(Caraka Samhita)》에서는 식물을 형태, 질감, 외관, 약제로서의 성질, 군락지 등을 기준으로 다양한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밟았을 때 미끄러지거나 넘어지게 만드는 식물, 그중에서도 특히 지면 가까이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카이라고 부른다.

바위에 있는 조류나 지의류, 미끄러운 이끼를 언급할 때 우리는 ‘파타르 우테 카이 자미 호이 하이(pathar utte kai jammi hoyi hai)’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거칠게 해석하면 ‘이끼가 바위 위에 얼어 있다’ 또는 ‘이끼가 바위에 의해 태어났다’가 된다. 이끼에게 바위는, 나무에게 흙과 같은 것이다. 펀자브의 현실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이끼를 뜯어내 판매하는 비즈니스가 결코 생겨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이끼가 가정, 공항, 호텔에서 장식용으로 사용된다. 이탄이끼나 늪지이끼로도 알려진 물이끼는 정원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된다. 물이끼 군락지는 희귀한 야생동물들의 보금자리이며 탄소의 저장고지만, 원예 분야에서는 무분별하게 사용된다. 펀자브 지역이 세계 정치 경제의 복잡한 미궁 속에서 주로 소비가 아닌 농업적 실험과 착취의 공간이었다는 현실 이외에, 혹시 언어적인 차이도 이끼를 대하는 방식에 역사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영어에서는 이끼를 정원에 ‘깐다(carpet)’고 표현한다. 이러한 언어 체계에는 이끼를 장식으로, 자연의 예쁜 부가물로 여기는 생각이 자리한다. 깔다(carpet)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갈기갈기 찢는다’를 의미하는 카르페레(carpere)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물을 깐다는 것은 뜯어내서 덮는 것인데, 덮고 뜯는 이 두 행위가 이끼의 운명을 결정한다.

딜레니우스 사후 몇 세기 동안 다른 어딘가를 덮기 위해 전 세계에서 이끼가 뜯겨 나왔다. 과학과 문명화라는 미명하에, 식민주의자들은 원주민과 외국의 토지와 생태계를 뽑아내고 착취했다. 패트리샤 파라(Patricia Fara)나 자히르 바버(Zaheer Baber)와 같은 과학사학자는 조지프 뱅크스(Joseph Banks)와 같은 영국 및 유럽 과학자의 식물 탐험이 영국의 제국주의적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한다. 식민 관료와 동행한 식물학자들은 전 세계로 탐험을 나가 인도를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수집 행위를 하면서 식물과 농업에 대한 경제, 문화적인 지식을 획득했다.

옥스퍼드대학교 식물학과의 제3대 셰라드 석좌교수였던 존 시브소프(John Sibthorp)는 1780년대에 그리스와 오늘날의 튀르키예로 여행을 가서 지의류를 관찰하고 수집했다. 1795년 4월, 시브소프는 현재의 카르다밀리(Kardamyli)에 해당하는 그리스의 카르다모울라(Cardamoula)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여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곳에서 인간의 속성은 본래의 직립 형태를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투르크(Turk)에 예속된 그리스인의 특징인 마음과 신체의 비굴함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당시는 식민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시대였다. 셰라드 석좌교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대 식물학과 그것의 전 지구적인 지배력은 식민주의를 통해 얻은 기회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식물의 과학적 수집 또는 추출과 정복 활동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은 식민주의자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딜레니우스가 죽기 불과 몇 년 전이었던 1744년에 (영국의 식민 개척자였던)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인도에 처음 발을 들였고, 이는 단연코 영국의 아대륙(亞大陸, subcontinent)[1] 식민 지배를 결정짓는 사건이었다. 시브소프는 1794년에 《옥스포드의 식물군(Flora Oxoniensis)》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옥스퍼드셔(Oxfordshire)의 식물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가장 귀중한 설명서다. 그해에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는 이미 인도에서 확고하게 기반을 다진 상태였다.

이끼와의 접촉에 대한 근대의 역사는 엘리트주의,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의 역사다. 옥스퍼드의 오래된 담벼락, 자갈이 깔린 길거리, 문 닫힌 대학에서 이끼를 만질 때면, 이끼와의 접촉은 의도가 아니라 접근성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19세기 영국에서는 노동 계층에도 많은 식물학자가 있었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오랜 시간의 고된 노동을 마친 뒤에 펍에서 라틴어 식물 이름을 외우며 식물학을 공부하곤 했다. 그러나 엘리트 계층에게 선술집에서 식물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완전히 수치스러우면서도 끔찍한 생각이었다. 맨체스터와 랭커셔(Lancashire)에 이러한 장인 식물학이 널리 퍼졌을 때도, 옥스퍼드의 첨탑에서는 그런 문화가 자리 잡지 못했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식민주의는 접촉을 하나의 특권으로 바꿔 놓았다. 식민주의자는 자신들 대신에 원주민을 고용해 인간 너머의 세계와 이끼에 접촉했음에도, ‘현지인’이 접촉한 세계의 지식에 대한 권리는 그들이 가져갔다. 그들은 또한 누군가가 비인간에게 품을 수 있는 감정이나 애착을 인정하지 않았다. 식물은 조사받아야 하는 대상이 됐다. 이끼는 뜯어내 검사해야 하는 카펫이었다. 이끼를 만진다는 것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간다는 것이고, 대학교의 신형 현미경으로 이끼의 구조를 살펴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끼를 만진다고 해서 정말로 이끼와 접촉하는 것은 아니다. 이끼를 만진다고 해서 자연에 존재하는 이끼를 느낄 수는 없었다. 나는 단절을 느꼈다. 순수한 접촉은 없었다. 이끼의 시간도 없었다. 나의 손가락과 이끼층의 포자체 사이에는 수 세기에 걸친 착취와 추출의 시간이 존재했으며, 그러한 시간의 이면에는 인간의 손이, 지나치게 인간적인 손길이 자리하고 있었다.
ⓒPhotograph: Björn Forenius/Getty Images/iStockphoto

 

4. 접촉이라는 구원


이번 에세이를 작성하면서 집 근처의 물푸레나무를 자주 찾아갔다. 그 나무의 줄기에는 두 가지의 이끼가 자라나고 있었다. 하나는 보통줄무늬깃털이끼, 다른 하나는 별 모양의 잎을 가진 주름솔이끼라는 종이었다. 나는 그 이끼를 이틀에 한 번씩 만졌지만,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끼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조용하고 겸손하며 평화로운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접촉’에 어딘가 구원적인 속성이 있는지 고찰하는 건 아마도 터무니없으며, 심지어 어리석은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상호주관적인 인지 감각으로서의 촉각 자체가 퇴화한다면, 언제나 무언가와 접촉하고 있는 우리의 신체와 자아는 어디에 남을까? 나는 이 질문을 끝까지 파헤치고 싶다. 접촉의 역사로 설명할 수 없는 접촉도 있기 때문이다. 촉각에 대한 인간의 능력과 그 능력의 실존적이고 불안정하며 육신적인 속성을 역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딜레니우스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옥스퍼드에서 활기찬 시절을 보낼 수 있게 해줬던 바로 그런 종류의 접촉이다. 작가인 리처드 펄트니(Richard Pulteney)는 1790년에 잉글랜드의 식물학 역사에 대해 쓴 글에서 딜레니우스를 “은둔자”라고 표현했다. 이는 어떤 편지에서 그가 “균류를 그리느라 바쁘다”고 설명한 것이었다. 그는 자연을 만지느라 바빴다.

인간의 몸에 내재된 폭력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접촉도 있다. 그것은 우리를 과거로, 예전의 바위투성이 지형으로 다시 데려가는 접촉이다. 아이였을 때 나는 친구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곤 했다. 이 놀이의 규칙은 술래 한 명이 다른 아이들을 쫓아가서 손으로 터치하는 것이었다. 이 놀이는 친구들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것과 애타는 손바닥으로 친구들을 때리는 것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쉽지 않은 놀이였고, 게임을 할 때마다 몇 명이 다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국 한 가지 묘책을 찾아냈다. 다른 아이를 아프지 않게 건드려야만 터치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서의 접촉도 있다. 우리는 맨살로 타자와 접촉할 때 스스로를 노출시킨다. 인간은 물론이고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도,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그렇다. 메를로-퐁티는 접촉이라는 행위가 인지자(perceiver)와 피인지자(perceived)로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 접촉하고 있으면 나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그 세계로 내던져지고, 그 후에는 매번 접촉하기 전의 자신과 재결합해야 한다. 이처럼 지속적인 분리와 재결합의 과정에는 나 자신이 과거의 나인지, 혹은 미래의 나인지를 확신할 수 없는 생성적 순간(generative moment)이 존재한다. 나는 사람인가? 나는 이 세계의 일부인가? 나는 바뀔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자연과 접촉할 때 단순히 연결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와 연관된, 역사적인, 이상적인 접촉을 하게 된다면, 접촉은 복잡하고 층위적이며 탄력적인 감각 인식으로 다시 개념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접촉이 처음부터 일차원적이며 즉각적인 경험을 제공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와 현재의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접촉이 표면적인 행위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허구다. 비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의 역사가 접촉을, 근본적인 상호성과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모두 고려할 수 있는 접촉의 잠재력을 지웠을 수도 있다. 나는 접촉이라는 것을 비인간 세계와의 소원한 관계에 대한 치유가 아니라, 그 세계와 우리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의 표현으로 배양하고 활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영어의 접촉(touch)은 오래된 프랑스어에서는 토슈(toche)에 해당한다. 이는 세게 때림, 또는 공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억지로 비집어 여는 행위로서의 접촉인 것이다.

봄이 오기 직전, 나는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통나무가 예전보다 더 많이 쓰러져 있었다. 붉은색 줄기와 솜털 같은 잎사귀에서 반짝이며 자라는 종인 나무이끼가 숲의 바닥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션 휴이트(Séan Hewitt)의 〈야생 마늘(Wild Garlic)〉이라는 시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올랐다. “세상은 어둡지만 / 숲은 별로 가득하다.” 집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은 우울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달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재킷에서 열쇠를 꺼내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 은이끼가 열쇠를 품은 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끼는 우리 집 현관에 살고 있는 지구의 기억이다. 나는 그들을 안쪽으로 맞이해야 한다. 이끼를 만지고 나를 되돌려야 한다.
이 에세이는 원래 이언(Aeon)에 실렸다.
[1]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 스리랑카 등을 부르는 이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