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자란다

12월 12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반유대주의’라는 망령이 되살아난다.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쉽게 괴물이 된다.

  • 20세기의 망령, ‘반유대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돈 때문이다.
  • 사회적 위기 상황과 혐오 사이에는 깨뜨리기 어려운 공식이 존재한다.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쉽게 괴물이 된다.
  • 집단주의와 각자도생이라는 시대적 이념 앞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명제를 다시 꺼내 들 필요가 있다.

MONEY_ 354억 원

우리에게는 카녜이 웨스트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뮤지션 예(Ye)가 반유대주의 및 인종차별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유대인들에게 데스콘 3(death con 3)를 가할 것”이라는 트윗을 올린 데 이어 “나치, 히틀러가 좋다”는 발언까지 내놓은 것이다. NBA 스타 카이리 어빙 역시 반유대주의 영화를 트위터에 공유했다. 아디다스, 나이키 등 이들과 협업 및 후원 관계를 이어온 업체들은 당장 ‘손절’에 나섰다. 아디다스는 예와의 파트너십 종료로 올해 순이익 규모가 최대 2천 500만 유로(약 354억 원) 줄어들 수 있다고 밝혔고, 나이키는 어빙에 대한 1천 100만 달러(약 143억 원) 규모의 후원을 중단했다. 공중으로 흩어진 액수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 이 순간의 거대한 흐름을 상징하는 예시에 불과하다.
WHY_ MONEY

2021년 미국 전역에서 발생한 반유대주의 사건은 2천 717건으로 1979년 조사 시작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럽의 경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UN 기구의 분석이 나왔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20세기의 유령 같은 단어, ‘반유대주의’가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돈 때문이다.
RISK _ 위기와 혐오 사이

여기저기서 ‘R의 공포’가 가시화하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recession)에 대한 공포다. 노골적인 신호가 국제 유가에서 감지된다. 간단히 도식화하면, 석유는 공장을 돌리는 데에 사용된다. 따라서 석유의 가치는 우리가 얼마나 돈을 쓸 수 있을지, 그 예측치에 따라 결정된다. 국제 유가가 1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물건을 만들어도 살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위기가 ‘반유대주의’라는 망령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경기 침체와 같은 사회적 위기 상황과 혐오 사이에는 깨뜨리기 어려운 공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REFERENCE 1_ 2020년, 한국

위기가 닥치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은 인간을 한없이 나약하게 만든다.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집단’이다. 심리학에서는 ‘공포 관리 이론’으로 설명한다. 바로 얼마 전, 우리 모두 경험한 바 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고 병원체에 대한 무지와 공포가 가장 극심했던 바로 그 시기, 우리의 집단주의 성향은 증가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그중에서도 집단의 규범과 위계를 중시하는 수직적 집단주의 성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이 정당화되는 흐름이다. 그런데 모순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수직적 ‘개인주의’ 성향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경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각자도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다. 놀랍게도 2020년의 한국과 거의 동일한 경향이 나타난 적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32년 12월, 독일이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 Partei), 즉 나치당이 총선에서 승리했던 순간 말이다.
REFERENCE 2_ 1930년대, 독일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의 경제는 망가져 있었다. 극한으로 몰린 독일인의 선택은 나치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시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독일이라는 집단을 위해 개인은 희생될 수 있다는 믿음의 시대. 각자도생할 수 없는 유약한 존재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의 시대. 그러한 시대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눈을 가려버렸다. 당시 독일 사회를 상징하는 선전물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이 유전병 환자를 살리느라 민족 공동체가 6만 제국 마르크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민족 동지여, 이것은 당신의 돈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민족을 구성합시다.”

사람에 ‘쓸모’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우리는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나치는 ‘안락사 프로그램’(Aktion T4)’이라는 이름 아래 30만 명의 장애인을 학살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바로 다음 해부터 40만 명 이상이 유전병 등을 이유로 강제 불임 시술을 받았다. 인간이 ‘잉여’ 할 수 있다는 발상이 권력에 의해 공식화되는 순간, 학살은 집단을 위한 효율이 되고 희생은 각자도생하지 못한 무능력이 된다.
CONFLICT_ 합법적이며 민주적인

유럽이나 미국의 입장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다. 서구 사회 대부분이 유대인에 대한 반감에 동조한 일이 있으며 지금도 그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반유대주의는 그래서 일종의 지우고 싶은 죄책감인 동시에 가능하다면 언급하고 싶지 않은 가시 같은 것이 되었다. 매체들이 히틀러와 나치의 시대를 집단 광기에 해당하는 어떤 것으로 그리는 이유다. 당시는 이성을 상실한 예외적인 시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우리와는 관계없는, 이성적인 우리라면 결코 하지 않을 선택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왜곡이다. 나치 정권은 독일 국민이 투표를 통해 선출한 정권이다. 합법적이며 민주적인 절차를 밟았다. 나치당은 대중 정당이었고 히틀러는 대중 정치인이었다.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펴나가는 과정은 몹시 차분했다. 제노사이드의 10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나아가며 전적으로 민심의 지지에 의지했다.
DEFINITION_ genocide

제노사이드(genocide)란 ‘인종’이라는 뜻의 ‘genos’와 ‘죽이다’라는 뜻의 ‘cide’가 합쳐진 단어로, 1943년 폴란드계 유대인 변호사 라파엘 렘킨이 만들었다. 1948년 12월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이 채택되면서 국제법의 범죄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하나의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 등을 파괴할 목적으로 수행되는 모든 행동을 지칭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종을 멸종시키는 이 엄청난 악행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 타자화, 상징화, 차별 ; 혐오의 대상을 ‘우리’로부터 분리하고 편견을 만드는 과정이다. ‘이대남’과 같은 용어부터 시작해서 ‘한남’, ‘김치녀’, ‘검머외’ 등 혐오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들에 이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위험한 업무를 외주 용역업체로 돌리는 외주화의 관행도 넓은 의미의 타자화라고 할 수 있다. 나치는 독일 사회에 퍼져있던, 유대인은 일하지 않는 고리대금업자이며 사회주의자라는 반감을 십분 활용하여 유대인을 동료 시민에서 탈락시키고 차별의 근거를 마련했다. 1935년 통과된 인종차별법이 그것이다.
  • 비인간화, 조직화, 양극화 ; 혐오를 되돌릴 수 없게 된다. 혐오의 대상을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과정이다. 냉전 시대 선전물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군인들이 종종 늑대로 묘사되었던 경우가 좋은 예다. 때로는 해당하는 집단을 향해 ‘떼를 쓴다’는 식의 용어를 사용해 대등한 논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로 만들기도 하고, 교육 과정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우기도 한다. 나치는 유대인을 쥐나 해충 등에 비유했다. 초중고 교육과정에는 ‘인종학’ 수업이 개설되었다. 이렇게 타깃의 인간성을 삭제하고 나면 다음 단계는 신속하게 진행된다. 증오 집단이 조직되고 이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혐오의 크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 준비, 박해, 몰살 ; 실행단계다. 학살을 위한 목록이 작성되고 희생자들은 분리되어 추방되며 재산을 몰수당한다. 나치의 절멸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300만 명이 넘는다.
  • 부정 ; 그리고 가해자 또는 후세대가 이러한 범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제노사이드의 마지막 단계다.
당시 독일에는 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인간을 효용으로 계산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미국에서, 유럽에서 감지되는 ‘반유대주의’로부터 우리도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이유다.
INSIGHT_ 혐오할 권리

그런데 언제나 혐오를 경계하는 시선에 따라붙는 것이 있다. ‘혐오할 만하지 않으냐’는 질문이다. 유대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지금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보고도 과연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 같은 것 말이다. 나쁘다. 부조리의 원인을 따지고 책임자를 가려내어 비판하는 성의를 들이지 않고 하나의 집단을 통째로 뭉뚱그려 혐오의 기재로 몰아넣는다면 나쁘다. 이 세상에 어떠한 집단도 완벽하게 선하거나 악할 수 없다.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스펙트럼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한 가해자나 피해자는 없다. 우리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지만 소수민족이며, 부유하지만 장애를 갖고 있으며, 백인 남성이지만 정신 질환이 있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그래서 우리 중 그 누구도, 혐오할 권리는 없다.
FORESIGHT_ 다시, 악의 평범성

얼마 전 독일에서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제국시민(Reichsbürger)’이라는 단체다. 인종 차별과 반유대주의 사상을 가진 극우 세력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 연합국이 독일을 비밀리에 통치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믿고 있다. 현직 판사와 군인까지 가담해 독일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독일 뿐만이 아니다. 극단으로 치닫는 경제 상황 앞에서 전 세계에서는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극우 정치세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혐오의 힘이 세지고 있다. 그 힘은 우리를 유혹한다. 특정 집단에 희생을 강요하고, 비난하는 간편한 방법으로 지금의 위기를 회피하고자 하는 유혹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저 엄청난 절대악의 현상은 평범성, 즉 생각하기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 판단하기의 무능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인류가, 또다시 무능해질 수는 없다.


 
혐오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북저널리즘의 인터뷰 콘텐츠, TALK의 〈법학자의 시선으로 본 차별금지법〉을 읽으면서 함께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숙명여대 법학부 홍성수 교수가 차별금지법의 의미와 현재 상황을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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