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박사하기
3화

떠나고 싶은 대학원, 남고 싶은 대학원

‘대학원생 밈’ 너머의 대학원생


조승희 저는 언젠가 한번 ‘대학원생 밈’을 좀 톺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지금 저희가 이야기 나누는 주제와도 관련이 깊을 것 같고요. 대학원생 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The Simpsons)〉에서 나온 유명한 장면이네요. ‘바트’라는 캐릭터가 긴 꽁지머리를 한 박사 과정 학생을 흉내 내면서 “하하! 난 대학원생이다, 작년에는 60만 원을 벌었지!”라고 하며 희화화를 하자, 바트의 엄마가 “바트, 대학원생 놀리지 말거라. 그들은 단지 인생에서 형편없는 선택을 한 사람들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죠. 처음엔 이게 대학원생만 쓰는 자학 개그인 줄 알았는데, 점점 이게 대학원 내부의 밈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대학원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대학원생 불쌍하다”, “대학원생은 사람도 아니다”라는 농담을 듣기 시작하니 기분이 묘해질 때도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게임에서 도서관에 등장하는 해골 유령들을 보고, 졸업하지 못한 대학원생이라고 농담하는 사람도 봤습니다.

어쩌다 학부생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게 잘못된 선택이 되었을까, 그리고 왜 이런 인식이 퍼지게 되었을까가 늘 궁금했습니다. 그냥 저 혼자 소설을 써보자면, 이 밈에 탑승해 본 사람들 중 대학원을 경험한 적 없는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요? 대학원생이 연구를 위해 학계에 남거나 더 전문적인 커리어를 쌓으려는 것은 물론 다 알지만, 그 과정이 너무 길고 힘들어 보이니까 괜히 놀리는 경우. 아니면 사실은 이제 대학원 스펙이 별 소용이 없는 세상이 온 것 같은데 왜 굳이 가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돼서, 정말로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로 좁혀질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엔 첫 번째 부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는데, 후자를 생각하는 분도 꽤 많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분명 대학원에 갈 때는 석사와 박사 이력이 꼭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막상 들어오고 나니 오히려 대학원 오래 다닌 사람 꺼린다는 얘기도 들리고요. 하지만 직장을 다니다가 ‘역시 연구를 하고 싶다’고 대학원에 들어오시는 분이 꾸준한 걸 보면, 잘못된 선택은 아니라고 전 믿고 있습니다.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지만요.

현수진 저도 조승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심슨 가족〉의 그 장면을 웃픈 마음으로 봤답니다. 어제는 인터넷에서 이런 일화를 봤어요. 학부 2학년생이 실수로 4학년 수업에 들어가 시험을 쳤는데 사실 그 시험이 어려웠고, 겨우 시험을 푼 그 학생은 교수님의 연구실로 오라는 부름을 받았다는 유머 글이었습니다. 해당 학생은 “살려 달라”고 표현했고, 댓글들은 “대학원에 가게 되어 불쌍하다”는 반응을 내보였죠. 〈대학원 탈출일지〉라는 네이버 웹툰[1]이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기도 하고요. 최근 대학원이 ‘대학생이 잘못하면 가는 곳’, ‘탈출해야 하는 곳’과 같은 이미지로 소비되는 게 상당히 일반적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시선이 꼭 대학원 외부에서 제기되는 것만도 아니더라고요. 대학원 내부에도 자신의 대학원 생활을 회의하고 후배들에게 대학원 진학을 만류하는 분위기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조승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 같은, 일종의 자학 개그랄까요.

저는 처음에 이런 이야기들을 접했을 때 좀 속상했습니다. 왜냐면 전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할 때 얻게 되는 장점이 분명 많은 것 같았거든요. 저는 랩실에 출퇴근하지 않는 인문계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게 엄청나게 큰 장점이었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연구자들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담긴 책을 읽고, 이해하고, 비평하는 훈련 과정은 대학원 바깥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을 계발하고 결과물을 글이나 말로 풀어내는 능력도 대학원에 다니면서 얻은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대학원 바깥에서 얻을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어쨌든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사고력과 창의력, 판단력, 논리력, 표현력 같은 역량을 상당히 키웠던 것 같아요. 지금도 키우고 있고요. 세상을 단편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지 않으려고 늘 노력하는데, 이것도 대학원에서 배운 것 같네요.

그렇지만 대학원생으로서 대학원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데 분명 공감 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제가 방금 전에 말씀드린 대학원의 장점과 바꾼 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일 거라고 생각해요. 이공계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인문계 대학원생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연구비를 받는 경우가 많지 않거든요. 제가 다닌 학과는 BK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받는, 인문계에서 얼마 안 되는 곳 중 하나였어요. 그마저도 항상 수혜자는 한정돼 있었고 늘 바뀌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다음 학기에 연구비를 받을 수 있을지 늘 전전긍긍하죠. 그렇다고 해서 취직하기도 쉽지 않고, 취직을 해도 일과 공부를 병행하기 쉽지 않아요. 박사까지 졸업한다 해도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자리를 잡기는 더더욱 어려우니 여러모로 사면초가에 갇힌 셈입니다. 학자금은 학자금대로 남아 있고요. 제가 경험한 바는 아니지만 랩실에서 일은 일대로 하고 연구비도 떼이는 데다 자기 논문을 교수나 선배한테 뺏기는 경우도 허다하더라고요. 공력은 공력대로 들이면서 매번 불안함과 불합리함을 느끼는 삶을 살고 있으니 불쌍한 대상이 되는 거 아닐까요.

강수영 저도 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심슨 밈을 정말 많이 본 것 같아요. 처음에는 저도 자학 개그라고 생각하고 웃고 지나갔는데, 요즘에는 약간 씁쓸한 기분이 들어요. 대학원생이 불쌍한 대상이 되는 것에는 여러 구체적인 이유가 있는데, 밈이 그것을 퉁치고 넘어가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요.

현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저도 대학원이라는 공간의 장점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박사 과정에 진학한 것이기도 하구요. 먼저 학위라는 것 자체가 특정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인 측면이 있죠. 개인적으로는 지식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된 것이 대학원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지식을 획득할 수 있지만, 대학원이 지식을 얻고 생산하고 나누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라고 봅니다.

저는 굉장히 나이브하게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지만, 따져 보면 대학원에 가겠다고 결정하는 게 정말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한국처럼 특정 나이에 달성해야 하는 도전 과제가 명확히 정해진 나라에서 ‘미생’으로 오래 견뎌야 하잖아요. 이 문제로 주변의 압박을 받아보신 분들은 많이 동감하실 것 같은데요. 또 학위 논문은 정말 스스로와의 싸움인데, 슬럼프에 빠졌을 때 잡고 올라올 것도 많지 않고, 발전 과정이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인정 욕구를 채우기도 어려운 것 같아요. 한 선생님께서는 “학계에서는 못난 인간이 되기가 너무 쉽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도 뭔가 해봐야겠죠.

김보경 앞 선생님들의 말씀처럼 다들 대학원에 진학할 때는 대학원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학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적 호기심의 충족이든 지식 생산자로서의 효능이든 말이에요. 문제는 막상 대학원에 와서 기대가 좌절되거나 전에는 몰랐던 문제들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일 텐데요. 혹은 어려움을 예상하고 왔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생각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요. 저는 대학원에 와서 전에는 몰랐던 문제들을 알게 되며 좌절을 겪은 케이스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좌절의 경험과 별개로 대학원 밈이나 자조 유머는 별로 즐기지 않고 듣는 것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우선은 패배주의적이거나 냉소적인 태도가 현실을 인식하거나 개선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니 멀리하려고 하는, 제 나름의 굳건한 가치관이 있고요. 두 번째는 그러한 패배주의적인 분위기가 그 안에서 나름대로 의욕을 갖고 연구하고 문제를 개선하려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안겨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치회를 처음 조직하며 동료들을 설득할 때에도 제가 가진 문제의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문제의식에는 공감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여기가 바뀌겠냐는 반응이 더욱 속상했던 기억이 있어요.

또 제 경험상 이러한 자조 유머는 문제를 공적으로 문제화하는 시도로 이어지기보다는 그저 술자리 소재나 가십으로 소모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유머와 밈을 통해 대학원생이 겪는 문제에 대한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측면도 있고, 이를 소비하는 대학원생 입장에서도 현실의 어려움을 잠깐이나마 가벼운 것으로 느끼게 되는 유머의 순기능은 있겠지만, 때때로 유머로만 소비되면 안 되는 문제들을 유머로 뒤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강수영 선생님 표현을 빌리자면 밈이 퉁치면 안 되는 문제들을 퉁치고 넘어가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짚고 싶네요.

전준하 저는 ‘대학원생 밈’뿐만 아니라 학계 전반에서 통용될 수 있는 농담과 짤을 적극적으로 즐겨 사용했는데요. 심슨 밈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만 저는 〈Ph.D Comics[2]를 즐겨 봤습니다. 물론 저는 척척 석사일 뿐이지만요. 유독 ‘대학원생 밈’은 웃픈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 밈을 우리가 같이 이해한다는 것, 더 나아가 같은 감정을 갖고 같은 반응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대학원생이 공통적으로 처한 모순이 분명 존재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두가 피식 웃고 얼마 못 가 한숨을 쉬며 자조하는 데 그치는 건 좋지 않겠지만, 굉장히 짧은 순간에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모순의 존재를 분명히 알리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심슨 밈과 같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명짤’은 예나 지금이나, 또 해외나 국내나 대학원과 학계 상황이 별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요.

같은 대학원생이더라도 너무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만큼 다양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지만, 또 개별 사례들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공통점이 보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훌륭한 밈이 짚어 내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제 경우, 이공계와 달리 수강해야 하는 강의 목록인 코스웍을 제외하고는 불안하리만치 모든 게 제 선택에 달려 있었고, 장학금 덕에 다른 인문·사회계 대학원에 비해 학비 걱정이 없는 상태에서 공부에 집중하고 연구 과제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교수님들을 만나 직접 인권을 침해당한 적은 없지만, 원총 활동과 연구 과제를 통해 정말 안타까운 사례를 적잖이 접하기도 했고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대학원생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포착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그저 제3자가 아닌 적극적인 관찰자가 되어 같은 대학원생들이 처한 상황에 공감할 수 있었던 건 그 모든 차이가 상당 부분 운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계기나 선택 하나로 대학원이라는 공간에서의 경험, 대학원생으로서의 삶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다름 속에서 같음을 찾는 것이 무기력하게 자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연대하고 행동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유현미 각 년도 고등 교육 통계[3]를 확인해 보면, 2010년대부터 대학원생 수는 30만 명 언저리를 매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정한 인구 규모를 형성한 것이죠. 1990년대 후반부터 전문 대학원, 일반 대학원 모두 급증했고, 꼭 학위를 따지 않더라도 여러 이유에서 대학원 과정을 경험하는 경우도 늘었습니다. 대학 교육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비해 대학원 과정이 대중화된 측면이 있다는 거죠. 대학원생 밈 역시 그 속에서 학계 사람들의 애환과 일상다반사를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고 봅니다. 특히 인문·사회계열 대학원생의 경우, 과정을 끝내고 논문을 쓰기까지, 즉 수료 기간이 이공계에 비해 긴 편인데 이때 학계 위계의 맨 아래층에 위치한 구성원으로서 여러 불합리한 경험들을 많이 하죠. 그 경험을 아주 정확하면서도 선구적으로 다룬 책이 2015년에 출간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4]입니다.

저는 대학원생들이 피해자로서나마 자신들의 이야기나 경험을 말하는 것은 초기에는 필요하고, 어쩔 수 없다고 봐요. 또한 피해자 정체성은 급진적인 정치나 변화의 출발점이기도 하죠. 그럼에도 자신의 피해자 정체성에만 고착될 때, 그 이후를 고민하고 함께 다른 대안으로 변화시키지 않을 때, 학계의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정당화되는 것 같습니다. 2010년대 중후반 갑질과 같은 용어를 통해 대학원생의 위치가 드러나고 여러 밈을 통해 피해자 위치에 대한 대중적 공감을 이끌어 냈다면, 이제는 그 이후와 그 너머를 말할 때라고 봅니다.

이송희 분명 대학원에서의 경험 자체가 대중화된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저는 사실 대학원생 밈이 학계 구성원들 내부의 자조와 공감을 넘어서 대학원 밖에서까지 소비되는 현상이 다소 우려됩니다. 사실 사회 전체로 시야를 확장해 보면 대학원생들은 어떻게 보나 고학력이라는 권력을 보유한 계층입니다. 기본적으로 4년제 대학 졸업자이고, 보다 나은 커리어를 위해 대학 졸업 이후에도 몇 년을 더 자신에게 투자할 결심을 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경제적 배경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의 지원이 있든, 혹은 장학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해결할 만큼 능력과 자신감이 특출하든지 간에요. 최소한 가족의 생활비를 대기 위해 급박하게 취직을 할 필요는 없는 사람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선택을 한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농담을 하는 건 학계 내부에서야 통용될 수 있지만, 이런 대학원생 밈이 학계 밖까지 넘쳐 날 경우 어느 순간 오히려 공감대를 잃을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비판이 종종 있지만 밈의 유행이 끝나는 시점이 오면 대학원생의 호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위험성이 높고, 그 순간 대학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대학원생은 피해자라는 것을 핵심에 두는 전략은 무력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연구자들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권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성찰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피해자나 패배자로 인식하는 건 더욱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고요.

이우창 개인적으로는 대학원생 밈을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2015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대학원생 인권실태 조사보고서 작성에 참여했고, 그에 관련된 언론 인터뷰도 적지 않게 한 바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자료를 만들고 제도를 개선하는 게 목표였습니다만, 그 시점엔 한국에 대학원생 기본권에 관한 인식 자체가 없다시피 했으니 자연스럽게 대학원의 후진적인 실태를 지속적으로 고발하게 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죠. 돌이켜 보면 스스로가 대학원생 밈이 성행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데 일조한 면도 있나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질문을 제기하고 싶어요. 대학원생 밈이 널리 퍼지는 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핵심은 대학원에 간 사람이든 아니든 대학원의 환경과 대학원생의 삶을 그다지 권장하고 싶지 않다는 거겠죠. 지금 학부 졸업생들이 특별히 과거보다 지식을 천시한다거나 공부를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지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대학원이 덜 매력적인 선택지가 돼버리고 있다는 게 진짜 문제인 거죠. 대학원 생활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이 축적되면서 이런 밈이 퍼지는 저변이 만들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학원에 가면 더러운 꼴을 당한다, 이런 수군거림은 분명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몇 년 사이에 그게 전(全) 사회적으로 대학원 생활을 대표하는 지배적인 이미지가 돼버린 겁니다.

지난 몇 년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원에서도 정원 미달 사태가 지속되면서 대학원의 미래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죠. 이제는 오래된 핑계를 넘어서 “왜 학생들이 대학원에 오지 않는가?”, 조금 더 정확하게는 “학생들이 대학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살피고 그에 맞는 대책을 세울 때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솔직히 대학원 처우가 안 좋다, 대학원에 가도 제대로 된 공부를 하기 힘들다는 식의 불만은 벌써 몇 년째 전국적으로 나오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런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과연 대학원 운영진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가를 물어보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물론 개별적으로 노력하시거나 장학금을 확충하기 위해 애쓰고 계신 분들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미지 개선을 위한 노력이 부재했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워요. 한 마디로 대학원생 밈이 이렇게 퍼지고 기정사실이 될 때까지 대학원에서 구경만 한 측면이 있는데, 이제는 좀 대처 방식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죠.

 

왜 대학원을 피하는가


이우창 자연스럽게 이번 주제는 제가 이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학원 문제 하면 사실 아주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 기존에 계속해서 제기돼 온 문제들이 있겠네요. 가령 대학원생 인권 문제나 진로의 불확실성, 학업에 집중하기에는 부족한 장학금처럼 개인의 학업을 지속하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들이 있습니다.

둘째, 대학원이 얼마나 가고 싶은 곳일 수 있는지, 즉 대학원이 대학원생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입니다. 현재 청년 세대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직장의 기준은 과거에 비해 크게 높아졌고, 이는 대학원에도 적용됩니다. 이때 기준이 꼭 장학금의 액수 같은 즉각적이고 정량적인 보상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학원이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때 기본적인 매너가 보장되는 공간인지,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투입할 만큼 충분한 지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환경인지, 대학원에서 습득한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진로와 연결될 기회가 제공되는지 등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죠. 즉 대학원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긍정적인 가치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적어도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 중요한 대학원 문제인 것입니다.

셋째, 한국의 대학원이 상기한 문제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하기 위한 거버넌스 역량을 어느 정도나 갖추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간단히 말해 제도와 기구의 사건 해결 및 자기 진화 역량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특히 인권 침해 이슈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한국 대학원의 느린 일처리나 학생 방치 문제는 악명이 높고,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사회의 여러 변화에 한국의 대학원이 충분히 잘 대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대응을 할 수 있는 조직인지 같은 의구심이 있죠.

물론 모든 대학원이 이렇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점은 사실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런 평가가 누적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평가를 교정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매우 국지적이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대학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대학원 문제가 하나의 문제라는 사실을 빨리 받아들이고, 어떻게 변화한 조건에 맞게 대학원과 대학원의 이미지를 개선할 것인지를 찾고 적용하는 게 현실적인 해법입니다. 어쩌면 대학원 문제의 진정한 핵심에는 여전히 한국이 고등 교육과 대학원, 연구자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잘 모르는 사회라는 현실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대학원의 교육 공백

전준하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철이 없었지만 별 고민 없이 대학원 이름인 ‘과학기술정책’을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연습 문제를 푸는 대신 책과 논문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새로운 공부 방식에 한 학기 동안 적응을 하고 나니 지도교수를 선정해야 한다더군요. 다학제적인 접근을 택하는 대학원이었기 때문에 교수님들의 분과 학문이 모두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별 고민 없이 제가 생각하는 과학기술정책에 가장 가까운 연구를 해오신 교수님께 지도를 요청드렸고, 그렇게 국제정치학자의 학생이 됐습니다. 선배들로부터 교수님의 자유 방임형 지도 방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혼자 잘하면 그만 아닌가?’라는 근거 없는 자만심과 함께요. 대학원에 함께 들어왔던 동기들과 저는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종류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구 방법론이나 연구 주제의 범위와 같이 학생이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선택한 요소부터, 교수의 성격, 소통 방식, 졸업 요건과 같이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았어요.

저는 제가 교수님의 자유 방임형 지도 스타일을 충분히 감안했다고 생각했는데요.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학위 논문을 위한 연구를 시작하고야 알았습니다. 여러 강의를 들으면서 논문을 어떻게 읽는지를 배우고 그에 대한 논평을 쓰는 정도는 익혔더라도 제 연구를 해나가는 건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연구 주제 선정과 연구를 어떻게 구성할 지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부터 실제로 논문을 작성하기까지의 과정은 끊임없는 고민의 연속이죠. 때문에 숙련된 누군가가 어떻게 하는지를 어깨너머로라도 보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암묵지에 해당하는 휴리스틱(heuristic)을 익히려면 직접 보거나 경험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른 대학원생들이 매주 지도교수 및 학생들과 모여 앉아 같이 논문을 읽고 쓰며 해당 분과 학문의 언어를 배워 간다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혼자 방금 인쇄한 이 논문을 읽는 게 맞는 건지도 헷갈리는 상황이었고, 논문의 어딘가 이상한 논리 전개를 누구한테 물어보지도 못하고 머리를 꽁꽁 싸매야 했으니까요.

연구자가 되기 위한 여정이 수많은 시행착오로 점철돼 있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분명 부딪혀야 배우는 것이 있는 만큼 각자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겠죠. 하지만 연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원을 만들었다면 어느 정도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대학원이라는 제도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대학원은 모든 것을 교수에게 의존한 채로 운영돼 어느 대학원을 가느냐보다 어느 지도교수를 만나느냐가 더 중요해졌죠. 순탄치만은 않았던 제 경험도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교수에게 인권을 침해당한 채 학계를 아예 떠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까지 제 말이 지도교수님을 원망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어요. 빈말이 아니라 저는 교수님으로부터 제 연구 분야는 아니더라도 다른 영역에서 굉장히 많은 것을 배웠고, 마음속 깊이 교수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수님을 통해 대학원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제도의 교수 의존성을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대학원생 입장에서는 당장 연구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교육이 가장 시급하지만, 대학원과 교수, 나아가 학계는 사회로부터 다양한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연구자를 키워내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연구를 계속해야 하고, 연구를 통해 쌓은 지식을 보다 직접적으로 활용하기도 해야 합니다. 교수에 의존하는 대학원 제도는 이 다양한 역할과 기능, 책임을 그대로 교수 개개인에게 전가합니다. 교수도 사람이기에 모든 일을 다 잘할 수는 없겠죠. 결국 교수 역시 살아남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을 마련할 테고, 다시 돌아와서 대학원생 역시 지도교수에 따라 천차만별인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교수 개개인을 문제 삼고 비판하는 건 쉬워요. 어떤 연구실은 교수 한 명 밑에 대학원생이 수십 명이고, 연구 과제 여러 개를 돌리면서 공장처럼 논문을 찍어 내요. 그런 곳에서 교수는 전체 조직을 관리할 뿐 개별 대학원생에 대한 지도를 하거나 직접 연구를 하진 않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교수가 대중 강연이나 방송 활동에 시간을 쏟느라 마찬가지로 대학원생에게는 소홀하고요. 여기서 두 교수 모두에게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바꾸려면 다른 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수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을 때, 대학원이라는 제도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앞서 언급한 교수가 짊어진 여러 역할과 기능, 책임 중 교육이 교수 입장에서 가장 소홀해지기 쉬운 영역이라는 건 분명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연구나 대외 활동 실적은 명실상부한 교수의 평가 기준으로 자리 잡았지만, 교육, 특히 대학원생 지도는 일종의 제도적 공백이 있는 영역입니다. 대학에서 강의 평가는 해도 연구 지도 평가는 하지 않으니까요. 정부도 대학도 건드리지 못하던 지점을 유일하게 ‘김박사넷’이 시도했을 뿐입니다. 굉장히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죠. 저도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교수 집단에 대한 비판과 대학원생을 비롯한 대학원 전체가 교수라는 직군에 과하게 의존하고 있는 현 제도에 대한 비판은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바라건대 저희 논의는 후자에 조금 더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연구자를 기르는 환경의 고민

현수진 저는 대학원의 본질적인 기능이 연구자 양성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저는 ‘대학원이 연구자를 길러 내는 역할을 잘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앞서 전준하 선생님이 대학원 경험과 생활에서의 전적인 교수 의존성을 언급해 주셨는데요. 인문·사회계와 이공계를 막론하고 한국의 대학원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의 핵심을 짚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익혀야 하는 여러 가지 기술이나 방법들, 문제의식을 끌어내는 방법까지도 선생님에게, 선배에게 배워서 익혀야 하는 도제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홀로 문제의식을 개발하고 연구 방법을 찾아내는 건 어렵습니다. 이런 도제적인 교육 방법은 사실 상당히 효과적인, 그리고 전통적인 교육 방식입니다. 문제는 교육의 질이 교수 개개인의 학술적 자질과 인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죠. 교수에게 잘 보여야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다는 세간의 이야기는 이런 측면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대학원 교육 제도와 교육 과정 자체에서 해당 학문의 전문가를 길러 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죠.

역사학계는 공동 연구가 많지 않고 대부분 개별 연구 중심입니다. 석사 논문부터도 개인의 이름을 걸고 개인의 아이디어가 담긴 논문을 써야 하고, 교육의 초점은 개인의 연구 역량을 향상하는 데 맞춰져 있습니다. 저희 대학원 수업은 크게 연구사 비평과 사료 읽기로 구성돼 있고, 각 수업에서는 매번 자기 연구 주제로 소논문을 씁니다. 한 학기에 두 편에서 세 편의 소논문을 써야 하는 셈이죠. 그 외에 학과 차원에서 논문 구상 발표회가 열리는데요. 논문의 제목과 목차, 개요, 참고 문헌 등을 학과 교수님들 전원과 많은 동료들 앞에서 발표하고 비평을 듣는 자리입니다. 그 외에 교수님들에 따라 여러 종류의 분과별 세미나를 운영합니다. 학생들은 이 과정을 거치며 학위 논문을 써내는 능력을 기릅니다. 저는 제가 연구자로 성장하는 데 이런 체계적인 교육 과정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구성원들이 어떻게 하면 좋은 연구자를 길러 낼 수 있는지 고민하고 토의해 그 결과를 실질적인 교육 과정에 반영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대학원이 연구자를 양성할 교육 제도와 문화를 잘 갖추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좀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보고 싶습니다. 제 한정된 경험상 대학원 교육 과정은 연구자 양성이라는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었지만, 대학원의 그런 기능을 저해하는 요소가 도리어 학부 교육의 정체성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현재 대한민국 대학교 중에서 학부가 이른바 취업을 위한 공간으로 운영되지 않는 곳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부 교육과 대학원 교육 사이의 이질성이 큽니다. 학부 때까지는 기본적으로 수업 출석을 잘 하고 내용을 암기하면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데, 대학원부터는 갑자기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과업을 요구받는 거지요. 그것만 하면 다행인데, 사학과의 몇몇 전공은 석사 과정 1학기 때부터 갑자기 일본어, 중국어 논문을 읽고 한문 사료를 읽어야 합니다. 종종 영어로 된 글도 읽어야 하고요. 보통은 한국어 논문 읽는 연습도 제대로 안 돼 있는데 매우 당황스럽죠. 학술적 글쓰기도 거의 새로 배우다시피 해야 하고요.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석사 과정 동안 여러 언어를 배우고, 다른 사람 연구를 제대로 독해하고, 글쓰기를 익히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이런 기본기를 닦는 데 시간을 쏟다 보면 자기 연구 주제를 잡고 논문을 쓰는 데 시간이 더 걸리게 되는 게 당연지사고요. 그래서 사학과 같은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졸업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한국 전근대사는 석사는 3년, 박사는 7년에서 10년씩 걸리는 일이 다반사인 것 같아요. 이보다 많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고요. 물론 대학이 학부부터 온전히 학문 수학을 위한 기관이 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지만, 적어도 공부를 업으로 삼고 싶은 학생들에게 미리 방향을 알려 주고 그에 맞는 추가적인 교육을 제공한다면 대학원에 진학하자마자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될 것 같아요.

강수영 저도 학위 과정에 진입한 가장 큰 이유는 지적 성장을 기대했기 때문이었어요. 이번에 환경대학원 박사 과정을 한 학기 다녀 보니까, 여기는 전문 대학원이기도 하고 조경, 건축, 도시계획 등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각 수업의 체계가 비교적 잘 잡혀 있는 것 같아요. 짧은 경험이긴 하지만 토론보다는 지식 습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학부 수업 같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어요.

그럼에도 아쉬운 부분은 커리큘럼 구성에 있어서 역시 지도교수에 대한 의존성이 강하다는 점이에요. 저 같은 경우에는 석사 과정 이후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저한테 어떤 과목이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잡혀 있는 편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는데, 제가 석사 때 정말 어려웠던 점이 추천 커리큘럼이 없다는 것이었거든요. 선생님들끼리 다음 학기 강의를 계획하면서 논의를 하셨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각자 선생님들이 그 학기에 관심 있는 것을 가르치는 식이었어요. 그래서 특정 분야의 현재 동향은 알 수 있었지만 그걸 왜 배우는지에 대한 맥락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요즘 유행하는 이론을 하나 배우고 한 학기가 끝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저는 동일한 학과의 학부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현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학부와 대학원 교육 사이의 이질성이 매우 크다는 데 동의해요. 가장 큰 차이점은 지식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화한다는 점일 텐데요. 적어도 석사 과정에서는 이를 공통으로 훈련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이 길을 잃는 것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고, 선배가 없는 타 대학 출신 학생이나 외국인 학생에 대한 불평등 완화에도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대학원생의 생계 문제

현수진 대학원의 교육 환경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대학원생들의 생계 문제를 언급하게 되네요. 비약일 수 있겠으나, 학부 교육과 대학원 교육의 연속성이 약하기 때문에 대학원에서 보내야 할 시간이 늘어나고, 수료나 졸업이 늦춰지고, 그동안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학생들이 탈락하게 되는 구조가 있다고나 할까요. 졸업 후에 뚜렷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학업 의욕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거고요. 대학원생들의 생계 문제를 논의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전문적인 연구를 생계를 위한 일과 병행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대학원생들은 공부에 전념하는 동안 생계를 어떻게 유지할까요? 인문계 대학원생들은 랩실도 없고 프로젝트도 거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알아서 생존해야 합니다. 저희 학과는 BK21 장학금을 받는 인문계 학과였는데요. 예산 규모로 인해 한 학생이 석·박사 과정 동안 매 학기 장학금을 받지는 못합니다. 장학금 액수는 석사 과정 기준 한 학기 등록금보다 조금 적고요. 등록금을 학자금 대출로 충당한다면 부모님 집에서 통학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생활비 정도 할 수 있는 수준이죠. 타 지역 출신 학생들은 월세를 내면 거의 끝일 거고요. 그나마 이 장학금이 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이어갑니다. 이런 BK21 장학금을 받는 인문계 학과 자체가 소수이기 때문에 저희 학과에는 입학생이 늘 많습니다. 자교, 타교와 상관없이 대학원 진학에 관심 있는 학부생이 참여할 수 있는 예비 대학원 제도를 통해 입학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고요. 진짜 문제는 석사 2년, 박사 4년이라는 코스웍을 수료하고 나서 생깁니다. BK21 장학금은 과정 중에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사학과는 코스웍 기간 내에 졸업하는 경우가 흔치 않고 학위를 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수료 이후 공부와 생계를 병행할 방법을 개별적으로 찾아야 하는 거죠. 사학과 중 BK21 장학금이 있는, 전국에 몇 안 되는 저희 학과가 이런 상황이라면 별도의 장학금이 없는 인문계 학교 및 학과의 상황은 더욱 열악할 것이라 예상합니다.

듣기로는 선생님들, 선배들은 박사 수료 후에 강의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며 학위 논문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아직까지도 그런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박사 과정 17학번이었던 제 세대 연구자들 중 저를 포함해서 박사 수료 후에 강의를 하는 분들을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학계 환경이 급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2019년 8월에 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에서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시행됐습니다. 흔히 강사법이라고 부르죠. 본래 강사법의 취지는 대학 시간 강사의 교원 지위를 보장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사의 재임용 기간을 3년까지 보장하고 방학 중 임금을 지급하는 것 등이 골자였죠.[5]

그런데 강사법은 제정 당시부터 본래 취지와 다르게 대학의 인력 구조 조정을 위한 계기로 활용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대학들이 강사법 시행에 따른 재정 부담을 이유로 강사 자리를 대폭 없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강사법 시행 1년 뒤에는 강사 자리 2만 개가 사라졌고,[6] 만 3년이 지난 현재에는 인문 계열 신규 박사 취업률이 2016년 58.1퍼센트에서 2020년 26.4퍼센트로 31.7퍼센트포인트 급락[7]했다고 합니다. 비정규직 연구자들에게 강사법 시행 이후 소득의 안정성 향상으로 연구 환경이 제고됐는지를 묻자 70.1퍼센트가 “개선되지 않았다”고 대답 했고요.[8]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강의 자리를 찾기 힘든 마당에, 박사 수료생들이 강의를 하며 생계를 유지할 방안을 찾는 것은 더욱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전에는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거나 수료한 학생들이 조교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요즘은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2016년 말 동국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가 조교의 근로자성을 인정해달라는 취지에서 학교를 노동부에 고발한 것[9]을 계기로 조교, 학회 간사 등 대학원생의 노동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고용노동부는 대학원생 신분의 조교도 노동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단[10]을 내렸고, 대학들은 대학원생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면 근로 조건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즉 재정 부담이 강화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죠. 2018년 초 대학원생 행정 조교 70여 명을 사실상 해고 통보한 성균관대학교의 조치[11]는 이런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려는 움직임이었다고 봅니다. 즉, 대학원생들의 생계 문제는 학생 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재정 부담을 축소하려는 대학의 이해관계와, 대학의 본질적 목적인 교육 및 연구를 위한 환경을 갖춰 달라는 연구자의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현시점의 구조적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인문계 석·박사 학생 개개인은 일을 병행해야만 했습니다. 업무가 전공과 관련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많은 경우는 전공과 관련 없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 그 과정에서 안 그래도 늦어지는 졸업이 더 늦어지고, 그래서 전공 관련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그런 악순환 속에 있습니다.

결국 대학원생들이 생계를 유지하며 연구를 수행해서 좋은 연구자가 되기까지의 난관이 매우 큰 셈입니다. 예로부터 인문계 대학원 입학 면접 때 “부모님이 도와주실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전통 아닌 전통이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는 거죠. 그렇지만 가난해도 공부하고 싶다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이상주의자입니다. 공부에만 집중할 여건이 안 되는, 사실은 많은 수를 차지하는 그런 학생들도 공부를 하고 싶은 의지만 있다면 함께 공부해 나갈 수 있다고,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어요. 그러나 어쨌든 인문학 공부는 직접적인 재화를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외부 재원에 기대야 한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고, 근본적으로 그 재원의 전체 파이가 매우 작다는 데 문제가 있는 거죠. 이 작은 파이를 나누려니까 힘이 드는 것 같아요. 그러면 원론적으로 재원의 파이를 늘리거나, 있는 재원을 최대한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분배하거나,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강수영 저는 직업 선택과 같은 장기적인 계획 없이,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턱대고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대학원에 입학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에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시급했고요. 생활비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상경하면서 집을 해결해야 했고 학비에 대한 부담도 있었어요. 석사 과정을 선택할 때 여러 학과를 두고 고민했는데요, 지리학과에서 BK21 장학금을 주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다른 학과를 선택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때 환경대학원에 다니는 박사 과정 선생님 한 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곳은 파트타임 학생이 많고 장학금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돈을 들고 와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그때가 제 기억으로는 2014년 말 즈음이었고 벌써 8년이 지났는데요. 올해 환경대학원 박사 과정으로 입학해 보니 분위기가 많이 변했더라고요. 교수님들도 많이 바뀌었고, 입학하는 학생들도 대부분 풀타임이고 연구실별로 자체 프로젝트를 굉장히 많이 돌린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이것도 ‘랩 바이 랩’이고, 지도교수님이 프로젝트를 아예 안 하면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거나 따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반대로 프로젝트를 많이 하면 경제적으로는 좀 나을 수 있겠지만 본인 연구에 집중할 시간이 없는 등의 또 다른 제약이 생기는 거고요. 그러니까 많은 대학원생들이 입학 후 처음 마주치는 어려움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대학원 거버넌스의 부재

강수영 석사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다른 어떤 전공 수업도 아니고, 한 교수님께서 주최하셨던 대학원 여학우 모임이었어요. 딱 한 번, 굉장히 짧게 진행된 모임이었는데요. 학업이나 진로를 비롯해 결혼, 육아 등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겪고 있는 고민들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주최하신 교수님께서 한 시간 정도 당신이 그 자리에 가기까지 겪었던 이야기, 당신이 생각하는 연구하는 법 등을 공유해 주셨고, 모임이 끝난 이후엔 또래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러 갔던 기억이 나요. 일단 나만 어려웠던 게 아니라는 공감이 컸고, 선배가 실제로 부딪혔던 어려움들을 들으면서 미래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에서 당장 진로 설계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어렵다면, 선생님들의 연구 역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제공할 수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로서는 “유학을 가라”는 조언 외에 제 진로와 관련해서 구체적인 상담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었던 것 같아요.

아무튼 그 모임은 제게 꽤 인상적인 경험이었지만, 소리 소문 없이 한 회차로 끝났어요. 당시에 그 모임을 잘 발전시켰다면 학과 내에서 공통으로 겪는 문제를 좀 더 공식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아쉽습니다. 현재 일반 학생 입장에서 문제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창구는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아요. 학부 때는 학생 활동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하기도 했고, 문제가 생겼을 때 얘기할 수 있는 창구가 대학 본부로 어느 정도 정리된 느낌이었는데, 서울대학교, 특히 대학원의 경우에는 자치 조직도 약하고 학교 조직도 단과대로 분리돼 있어서 어디에 말해야 문제가 해결될지 전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아요. 학생들을 포함하는 학내 거버넌스 체계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송희 사실 인문·사회계 대학원이 활력을 잃어가는 문제의 상당 부분은 투자와 재생산이라는 선순환이 끊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대학원 내에서 이루어지는 인권 침해나 노동력 착취 같은 것은 윗세대에서 훨씬 더 심했잖아요.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의 경우 대학의 팽창기와 구직 시기가 맞아 떨어져서 학위를 받으면 교수로 취직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성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매미가 땅속에서 버티듯 대학원 생활 10여 년을 견디면 미래가 보장돼 있다고 생각하니 버틸 동기가 있었겠지요. 물론 그때도 다들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고 잘 풀리지 않은 케이스들도 많았지만, 최근 학위를 받았거나 학위 과정 중에 있는 신진 연구자들은 자신이 교수가 되어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애초에 잘 믿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불안정한 미래를 감수하고서라도 연구자로서 살겠다는 결심을 한 귀중한 사람들인 셈입니다. 이미 미래 소득을 포기하고 인문·사회계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대학원에 오니 이런저런 그림자 노동은 기본에 심한 경우 인권 침해까지 경험한다면 여기 있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최근 몇 년간 대학원 내 부조리에 대한 공론화가 이루어진 것도 한편으로는 대학원이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인문·사회계 대학원에 자원이 부족해진 것은 그만큼의 사회적 수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동안 정부 R&D에서 인문·사회 분야의 예산 비중이 1퍼센트에 불과하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는데요, 이는 인문·사회계가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투자해야 할 분야로 전혀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에 잘 팔리지 않는 순수 학문 분야에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 학령 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 통폐합까지 점쳐지는 상황이니 연구자들의 미래는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인문·사회학계와 대학의 거버넌스 능력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원래 가난한 것이니 대학에서 정원을 축소하면 어쩔 수 없다, 연구비를 안 주면 어쩔 수 없다 한탄하고만 있을 게 아니라, 대학 내에서의, 그리고 정부의 자원 배분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목소리를 모아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생산성을 대학과 정부, 사회에 설득하기 위한 담론 전략도 꼭 필요해 보입니다.

김보경 앞선 분들께서 지적해 주신 대학원 거버넌스, 커리큘럼의 교수 의존성이나 대학원생 생계 문제, 강사법 도입 후의 부작용 등에 크게 공감합니다. 저는 대학원에 가면,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대학원에 대한 모종의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인문대 대학원이 풍기는 약간의 낡고 고지식한 분위기마저도 제게는 그곳이 시장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고 삶과 세계에 대한 더 나은 지식을 꿋꿋이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인상을 줬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진학해 보니, 인문대학원이 워낙 자원이 한정돼 있고 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부에서 경쟁이나 인정 투쟁도 심하고, 많은 이들이 성과에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 과정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대학원에 대한 인상이 순진한 환상이었다는 생각과 그러한 환상이 대학원의 기능 부전 상태를 직시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학교나 단과대, 개별 학과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인문대 대학원 특유의 보수성이 현수진 선생님이 지적해 주신 대학원 내 교육의 도제적 운용에서도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는 혼자 하는 일이고, 대학원은 최소한의 뒷받침만 할 뿐 개인이 알아서 좋은 연구를 하면 좋은 연구자가 될 것이라 말하며 대학원 제도나 정치에 대한 개입을 삼가는 분위기 안에서 ‘좋은 연구자’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갈려 나가는 건 결국 대학원생들인데요. 그런데도 대학원 제도나 정치에 관심을 보인다든지 개선하려 하면 연구자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는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 대학원생들은 더욱 파편화되고 개인화됩니다.

또한 대학원 사회에서는 젠더나 국적, 나이, 지역, 출신 대학 등 다양한 변수들이 얽혀서 자원 배분이 불균형하게 이뤄지는데요. 예컨대 국·공립대 임용 교수 비율에 관한 최근의 교육부 지침에 따르면 다른 성별이 최소 25퍼센트가 되도록 하고 있으나[12] 이조차 달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전공의 경우 여성 대학원생 비율이 절반이 훌쩍 넘는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사정은 더 심각해 보입니다. 문제를 제기해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사안이지 조정과 개입은 필요치 않다는 응답을 듣기도 했습니다. 종종 불거지는 대부분의 대학원생 성폭력 문제가 구조적 위계와 성차별을 배경으로 발생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요. 더욱이 경험상 대학원에서 사실상 진로 설계가 거의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여성 대학원생들이 느끼는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대학원생의 진로가 강사나 교수 트랙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송희 선생님 말씀대로 최근 신진 연구자들은 교수가 될 가능성도 믿지 않는 것이 사실일 텐데, 여성 연구자들에게 상상할 수 있는 미래가 더 제한돼 있다는 점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대학원의 거버넌스 역량에 대해서도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질문에서 이우창 선생님께서 언급해 주신 것처럼 대학원생 인권 침해 이슈가 발생했을 때 그 처리 속도가 매우 늦다는 문제는 대학원 기구의 사건 해결 능력이 낮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저는 이로 인한 피해가 피해 당사자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짚고 싶은데요. 저희 학과의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전 P교수의 표절 문제가 공론화된 것이 2017년 초였고, 2019년 말에 해임 징계가 내려졌는데요. 이후 여러 법적 분쟁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 현재 시점까지 약 6년간 해당 자리가 공석이 되어 교과목이 개설되지 않고 지지부진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뿐만 아니라 대학원생들이 겪은 학습권 침해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특히 사법 절차로 넘어가게 되면 학내, 원내 거버넌스 주 결정권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관할이 아니라는 이유로 문제를 방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학원생 인권 침해 문제가 단지 가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구성원이 얽힌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이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학계의 노동과 능력주의

유현미 저 역시 사회에 기여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전문가로 성장하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학부로는 사범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왜 안정적인 교사 생활을 시도하지 않았는지, 혹은 인문·사회계열 학생들이 많이 시도하는 고시나 취업에 왜 뛰어들지 않았냐는 반응도 많이 접했어요. 저는 이력에서 드러나듯 시민 단체에서 일하거나 사회 운동에 참여해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과 지식 생산을 연계시키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비판적 지식 생산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기업이나 공무원 생활에 잘 맞는 인간 유형이 못 된다는 판단과,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어떤 결기 혹은 치기가 있었지요. 직무 수행의 자율성을 다른 직종보다 많이 보장받는 연구직, 교수직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강사법이 시작되기 전에 박사를 수료하고 강의를 꽤 해왔지만, 아시다시피 평균 시급 5만 원에서 7만 원 정도 되는 한국 사립 대학의 강사료로는 2학점에서 3학점짜리 강의 한두 개를 해서는 생활 임금을 벌 수 없습니다. 때문에 강의 경험은 교육자로서의 경력을 쌓는다는 의미가 더 컸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여러 연구 프로젝트의 연구 보조원, 전일제 조교, 학내외의 장학금 지원, 일시적인 학계 알바인 행사 지원, 번역, 자료 코딩, 학회 간사, 과제 채점 등에 기대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와 제 대학원 동료들은 학계를 굴리는 온갖 미세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스스로의 현실을 ‘알바천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요. 이건 불안정 노동자로서 대학원생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었어요. 이런 노동들을 통해 학계가 겉으로 드러난 연구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현재의 전임 교원 위주의 의사 결정 구조나 자원 배분 구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실제적 노동과 기여를 삭제하고 축소하고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저는 연구와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잡무로 불리는 학계를 유지하는 활동과 노동으로부터 대학원생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가사 노동에 대한 무시처럼 학계 내 재생산 노동, 유지 노동에 대한 가치 절하가 계속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좋은 대학원 제도를 만드는 것에 그런 요소들을 좀 더 평등하게 분담하고,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됐든 한국 사회에서 여러 지적, 물적 자원이 몰려 있는 곳에서 대학원을 다녔기에 얻은 것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세미나나 수업, 도서관 서비스나 지원금 제도 등을 통해 여러 학술적 자료나 자원에 쉽게 접근하고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죠. 연구자가 되는 데 명시적 지식뿐만 아니라 암묵지적 습관, 태도를 습득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하지만 뭐랄까요, 지금까지 여러분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지도교수에 의존하고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없는 불안정한 특성으로 인해 대학원 생활이 막막하다는 인상은 계속 받았습니다. 또한 박사 이후, 독립된 전문 연구자가 되고 나서 어떤 것을 설계하고 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도 제공받지 못했고요. ‘논문 많이 써라’, ‘너무 나대지 않으면서도 자기 어필을 잘 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나 연구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복잡한 현실에서 실용적인 문제 해결 방법과 어떠한 가치를 지향하고 견지해야 할지에 대한 롤 모델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워커홀릭이거나, 지나친 자기 자랑 혹은 자기 비하적인 모습, 그러니까 반면교사는 많이 본 것 같아요. 전임 교원들도 성공하고 명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죠.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뭘 같이 할 수 있지? 다들 자기 억울한 거나 자기 잘났다는 이야기 말고 뭐가 되나….

사회를 분석하고 이리저리 조언한다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 자신이 속한 환경이 처한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하는 역량은 부족하다고 생각했죠. 다들 능력이 부족해서 대학원의 어떤 구조적 문제들이 계속되는 건가? 아니죠.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똑똑해서 참으로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게 됐는데요. 너무 가감 없이 말한 감도 있지만, 정리하자면 협력과 연대를 조직하기 어려운, 공통의 의제나 추진력을 형성하기 어려운 것은 대학원생이란 인구 집단이나 청년 세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학계의 능력주의적 조직 특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실력과 업적을 위해서 어려움은 어쩔 수 없다거나 어려움을 느끼는 건 능력이 부족한 개인 탓이라는 개별화된 대처 방식이 제도적으로나 구성원들의 인식 속에나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적극적 주체로서의 대학원생

조승희 저는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이 모든 것을 묶어 거버넌스라고 명명하는 지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얕게 이해하기로 거버넌스란 국가나 정부 단위의 거대한 힘이 한 시스템을 잘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그럼 ‘대학원 거버넌스’라는 것이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그 거버넌스의 주체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장 저희 토론 내에서도 아주 여러 종류의 거버넌스 주체가 언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크게는 우리나라 교육 정책을 담당하는 정부 기관, 작게는 대학이나 학과 단위의 대학원, 더 작게는 교수 개인까지. 대학원 거버넌스의 책임은 여러 층위에 나누어져 있고, 저희는 그 다양한 곳들을 잘 가리킨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대학원생으로서, 나와 내 동료들은 대학원 체계 속에서 어떤 존재일까, 자문해 보고 싶어요.

대학원 전반의 문제를 거버넌스로 접근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논의가 ‘대학원 거버넌스의 어느 부분이 잘못됐기에 대학원생이 이렇게 불만이 많을까?’라는 논의와 같은 말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대학원생으로서 교육과 트레이닝을 받고 싶은 것은 물론 정당한 요구이고, 대학원이 대학원생들에게 최소한의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큰 문제이지요. 하지만 수혜자 위치에 있는 대학원생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과장해서 대학이 좋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학원 같은 기관이라고 해도, 교육 서비스의 개선이 대학원 문제의 해결은 아니잖아요? 저는 충실한 수혜자로서 대학원생의 위치를 논하는 것이 오히려 대학원생을 폄하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지금 대학원은 미래를 보장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미래를 희생해 가면서 연구를 하고자 한 사람들이 많이들 가는 곳이죠. 모든 사람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교수가 되진 못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연구를 지속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고요.

저는 대학원 거버넌스라는 구조 안에 어디에 결함이 있고, 누가 책임이 있는지 묻는 것도 필요하지만, 적극적 주체로서의 대학원생은 어떤 일을 하는지 더욱 많이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대학원생도 대학원 문제에 대해 모종의 책임을 지자는 말이라기보다, 수동적이고 불쌍한 대학원생의 모습이 오히려 대학원생 문제를 설득하는 데 더 어려움을 준다는 뜻입니다. 대학이 대학원생의 학위와 미래를 인질로 잡고 있는 권력 기관 같겠지만, 사실 대학원생의 등록금, 노동, 지식 생산 없이는 대학이 굴러갈 수 없잖아요? 대학원생의 본분은 학생이지만, 하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논문을 쓰고, 조교를 하고, 행정 노동을 하고, 연구실 인프라를 관리하기도 하죠. 사실상 대학은 교직원뿐만 아니라 대학원생의 노동으로도 운영되고 있는 겁니다. 요약하자면 대학원생이 받는 것보단 대학원생이 주는 것에 대해 많이 말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대학원 거버넌스는 대학원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고 대학원 문제를 사회가 공통으로 겪는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원은 교육과 노동이 혼합된 공간,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생계도 해결해야 하는 공간이라는 특수한 성격이 있는 곳이기도 하죠. 그래서 대학원생 밈에서 보이듯이, 많은 사람이 ‘나랑은 아무 관련 없는 일’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대학원 문제를 이야기할 때 대학원생이라는 불쌍한 특정 이익 집단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 더 넓게는 한국 사회의 교육 시스템과 지식 생산의 장이 겪는 일이라는 문제 제기도 필요해 보입니다. 생계 문제도 대학원만의 문제라고 보기엔 한국 노동 문제, 인권 문제, 여성 문제 등 보편적인 사회 문제와의 관련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고요.

 

남고 싶은 대학원 만들기


이우창 남고 싶은 대학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역시 세 가지 방향에서의 접근법을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첫째, 정상적인 교육 및 연구 활동에 지장을 주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 둘째, 대학원생의 교육 연구 경험 및 관련 환경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을 어떻게 원활히 작동하게 할 것인가? 셋째, 대학원 및 유관 기관의 거버넌스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여기에는 대학원생의 참여 문제나, 반대로 대학 내에서, 혹은 좀 더 크게 사회 혹은 국가 단위에서 대학원의 환경을 어떤 방식으로 구축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도 포함되겠지요. 꼭 이 분류가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저는 사회자로서 여러분들의 말씀을 먼저 듣고 그 다음에 제 생각을 덧붙일까 합니다.

체계적인 교육이 제공되는 곳

전준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제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을 했는데요. 다학제적인 학과를 나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지도교수님께서 제 연구에 대해서는 사실상 방임하다시피 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제출한 학위 논문은 대학원에서 들은 강의나 지도교수님의 연구 분야와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논문을 쓰면서도 계속 ‘이게 맞나?’ 싶었고, 심사를 잘 통과하고 나서도 학위를 날로 먹은 것만 같은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같은 학과에서도 다른 학생들은 지도교수로부터 특정 학문에 대해 뭔가 배웠다는 느낌과 함께 졸업하는 것처럼 보인 반면, 저는 의무 이수 학점에 맞춰 이런저런 강의를 듣고 교수님과 함께 정책 연구 용역 과제 몇 개를 수행했지만 모두 개별적인 경험일 뿐 무언가가 쌓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단적으로, 저 자신을 학자라고 부르거나 특정 학문을 전공했다고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석사를 졸업한 후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대학원에 남아서 부족한 공부를 마저 끝마칠 것인지, 아니면 남아 봤자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반복하고 연장할 뿐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으니 다른 곳으로 떠날지를 고민했습니다. 물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도 많은 것을 바란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따져 보면 배운 게 없지 않으니까요. 매주 혹은 매 강의가 끝날 때마다, 또 논문 자격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여러 논문과 책을 종합 분석한 논술문을 작성하면서 나름의 학술 글쓰기 문법을 익혔습니다. 비슷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겠다고 참석한 여러 학회에서 유의미한 조언도 많이 구할 수 있었고요. 그래서 지금이야 대학원을 들어간 것도, 석사만 마치고 나온 것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때는 정말 매일 고민하며 지냈습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저는 대학원이 남고 싶은 곳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생이 졸업할 때 최소한 자기 만족할 수 있도록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의 본질이 연구자를 양성하는 기관이자 제도인 만큼 연구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교육 과정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대학원에 가는 이유가 다양해졌다 한들 최소한 이 정도는 대학원의 존재 목적으로 우리가 합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장학금을 받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등록금까지 내면서 대학원에 온 사람들이 몇 년 동안 이런 걸 배우고, 쌓고 간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죠. 어느 대학원을 가든 학위가 가지는 최소한의 의미는 보장돼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교수에 의존하지 않는 교육 커리큘럼이 필요한 것 같아요. 특히 학위 논문과 같이 대학원에서만 할 수 있는 핵심 경험은 지금과 같은 도제식을 넘어서는 방식을 시도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혼자서 혹은 지도교수와 둘이서만 이러쿵저러쿵 작업한 후 마지막에 가서야 심사 위원 몇 분을 섭외해서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세미나나 학회와 같은 기회를 통해 중간 단계에서부터 연구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다른 연구자들과 의견을 교환하는 게 대학원생에게 더 좋은 교육 과정이 아닐까요?

한편 지금의 대학원은 최소 기준에는 무관심한 채 경쟁적으로 학계에서 살아남을 소수를 선발하기 위한 제도가 돼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질적인 관리가 어렵다는 비판을 받는 동시에 뛰어난 연구자들조차도 지쳐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건 자기 생산이 필수적인 대학원 입장에서도 지속 가능하지 못하고, 다양한 곳에서 필요로 하는 연구자 교육을 대학원에 맡긴 사회 입장에서도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에요.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들은 각자의 다양한 커리어 속에서 대학원에서 쌓은 연구 역량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거꾸로 새로운 사람들이 그것을 기대하고 대학원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럽게 연구자 양성이라는 대학원의 본질 이상의 요구를 도출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바로 대학원 안팎의 교류를 활성화해서 대학원생들에게 교수가 아닌 다양한 커리어와 롤 모델을 제시해 줘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존경할 만한 교수를 만났다면 교수가 훌륭한 직업임에는 틀림없으니 롤 모델로 삼아 계속해서 학업에 정진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 하지만 교수가 하는 강의를 듣고, 교수의 지도 아래 연구를 하고, 그 이상의 일거수일투족을 교수 옆에서 경험하는 대학원에서는 분명 교수로의 편향이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입니다. 대학원에 들어온 모두가 교수가 되고 싶고, 또 그럴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변화가 필요해요. 교수가 아닌 다양한 연구자들이 대학원에 들어오고 나가며 참여해야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사회적 역할을 다하지도 못하는 이 제도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대학원생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고요.

안정적으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곳

현수진 우선, 저는 대학원생의 정상적인 교육 및 연구 활동에 지장을 주는 가장 큰 부정적인 요소가 과정을 밟는 도중과 수료 이후의 생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많은 인문학 연구의 재원은 국가에서 나옵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학술적 수준 향상과 문화적 역량 향상을 목적으로 연구비를 지원합니다. 문제는 인문계에 제공되는 연구비의 규모가 이공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박사 과정 때 한국연구재단의 ‘글로벌박사양성사업(Global Ph.D. Fellowship)’을 받고 연구를 했는데, 장학금 규모가 3년간 등록금과 생활비를 전부 충당할 정도여서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선정된 2018년도 당시 장학금 수혜자는 200여 명으로 전체 대학원생에 비해서는 매우 적었고, 예술과 체육을 포함한 인문·사회 분야와 과학기술 분야의 비율이 3:7으로 인문계 수혜자의 수가 이공계에 비해 매우 적었습니다.[13] 지금은 이 제도마저 사라져 현재 인문계 박사 과정을 밟는 학생이 국가에서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 경로는 거의 없어진 상황입니다. 최근 한국연구재단에서 학문 후속 세대의 안정적인 연구를 위해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A유형은 5년 동안 연간 4000만 원을, B유형은 1년 동안 연간 1400만 원을 제공합니다. 이 제도를 통해 많은 인문계 박사 수료 및 박사 졸업자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찾게 되었지만, A유형은 선발 인원이 많지 않고 B유형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연구 설계가 어렵다는 문제점[14]을 안고 있죠.

그렇지만 왜 인문계 대학원생들에게 연구비를 주지 않느냐고 무작정 따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의무 교육이 아닌 대학원을 국가가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고, 이공계 대학원은 쓸모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는데 인문계 대학원은 그렇지 않으니 지금의 대우가 당연하다는 사람들도 많죠. 그러면 우리 인문계 연구자들은 인문학이 이 사회에 어떤 쓸모가 있는지, 국가에서 인문학 연구를 왜 지원해 줘야 하는지를 증명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대학원생들이 적어도 학위를 받기 전까지 넉넉하지는 않아도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것을 걱정하지는 않을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비로소 남고 싶은 대학원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대학원생의 교육 연구 경험 및 환경을 구성하는 요인을 더욱 잘 작동하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학부와 대학원 교육의 학문적 연계성을 강화하자고 제안하고 싶어요. 학부의 학문 교육 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여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는 학부 때 어학이나 독해력, 비판적 사고력, 학술적 글쓰기의 기본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대학원 진학 여부와 무관하게 학부생은 학문의 기본 소양을 익히는 과정에서 근거와 논리를 통해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자의 길을 지망하는 학생들로서는 학부 때 학문의 기초 소양을 닦음으로써 대학원 입학 후 졸업까지의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수료 후 생계 문제도 지금보다는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 또 어떤 대학에서든 학문의 기본을 익힌다면, 대학원을 어디로 옮기든 바로 연구에 착수할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출신 대학교와 상관없이 자기 전공과 맞는 교수를 찾아 대학원에 진학하는 분위기도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학부와 다른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그곳에 존재하는 가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차별 등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많으니까요.

물론 이런 이상적이고 보기 좋은 꿈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상을 품고 어떻게든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지금 현실에서도 대학이나 학과, 학생회 차원에서 연구에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필요하다면 교육까지 하는 기회를 만듦으로써 조금씩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학부, 대학원 학생회가 연계하여 인문계 대학원 교육 과정 및 진로에 대한 대담 자리를 만들고, 대학이나 학과가 취업 박람회 같은 대학원 박람회를 열고, 학회가 학부생 및 석사 과정 초보 연구자들을 위한 간담회나 세미나를 적극 여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아요. 이런 모임이나 세미나를 게시판에 홍보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요즘 방식으로 홍보하면 더 좋겠고요. 코로나19를 계기로 신문물에 대해 보수적인 역사학계에도 ‘줌(Zoom)’을 활용한 화상 세미나가 강제적으로 활발해졌으니, 이런 접근 방식이 좀 더 쉬워지는 환경이 조성됐다고도 생각합니다.

학생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

강수영 전준하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이거 완전 제 얘기다 싶었어요. 석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고 나서 논문으로 출판하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는데, 결국 하지 못했어요. 정확한 문제의식과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요. 배운 지식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진행해야 하는 퀘스트를 깼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설령 전자의 느낌이 환상일지라도 말이에요. 나중에는 어떤 학문적 훈련은 둘째 치고, 러프하더라도 스스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가진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이런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교육 과정이 제대로, 성실하게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과 내에 교육 과정 협의회 같은 것들을 공식화할 수는 없을까요? 별개로, 지도교수 외에 학내에 진로와 학업 상담을 위한 별도의 창구가 마련되면 좋겠어요. 유학 간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지도교수와의 마찰이 있거나, 생활비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하는 등 문제들이 생기면, 이것을 상담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교원이 따로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개인이 그것을 온전히 책임지거나, 문제가 된 당사자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누군가와 논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학교 차원의 독립적인 학생 서비스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

더해서 학과마다 정보가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공개되면 좋겠어요. 저 석사 다닐 때만 해도 교수님들이 비공개로 장학생을 선정하거나, 학생 당사자의 의중과 상관없이 조교로 차출하는 일들이 있었거든요. 외국인 교수나 학생들을 위한 영어로 된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라 영어를 잘하는 친구가 봉사를 하는 일도 허다했어요. 몇몇 외국인 동기들은 요건을 공지받지 못해 졸업이 밀리는 상황까지 있었고요.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진행하는 일은 홈페이지 등을 통해서 외부에 공개하도록 하고, 필요한 정보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 등은 학교 차원에서 예산을 따로 배정해 진행했으면 해요.

사실 이것 말고도 굉장히 다양한 문제가 있는데, 그런 문제들을 모아 내려면 적어도 개개인이 문제가 생겼을 때 얘기할 수 있는 창구가 절실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MIT에 방문해서 대학원 총학생회장을 만난 적이 있었거든요. MIT 원총은 아예 학교의 공식 기구 중 하나고, 원총회장이 학교 이사로 임명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학교 행정부나 교수진과 소통하고, 대학원생 OT를 개최하고, 자체 예산으로 대학원생 그룹에 학생 활동을 지원하는 등 학부 학생회와 비슷한 역할을 했어요.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대학원생 대상으로 자체 조사를 꾸준히 하고 있고, 당시 학생회장이 그 데이터를 자신들의 힘이라고 표현한 것이었는데요. 여러모로 바쁘지만 대학원의 공동체가 좀 더 활성화되고 조금씩 목소리를 모아 낸다면, 그만큼 조금씩 더 남고 싶은 대학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동료가 있는 공동체

이송희 저 역시 대학원 사회의, 그리고 더 나아가 인문·사회학계의 공동체가 강화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대학원에서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어느 정도 경제적 어려움 같은 건 각오하고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왜 뛰쳐 나갈까를 생각하면, 저는 경제적인 문제 못지않게 정서적인 문제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는 연구자 간의 유대가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주로 랩실에 출근하는 이공계 연구실과 다르게, 인문·사회계 연구자들은 대학원생 때부터 각자도생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많은 연구자, 심지어는 대학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아 온 현직 교수까지도 외로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외로움은 주로 동료 집단의 부재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연구자들은 늘 자기 연구의 정당성을 설득해야 하고 또 기존 학설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학계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불만을 가지기가 쉬운 것 같은데요,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동료인 것 같습니다. 내 연구의 의미나 방법론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서 때로 쓴 조언도 아끼지 않는 동료가 있으면 설령 좌절하는 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발전적인 방향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그런 동료가 없으면 정서적인 어려움은 물론 학문적인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런 동료 집단은 가장 가깝게는 같은 연구실이나 학과를 중심으로 만들어지지만, 학교나 혹은 분과를 넘어서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아마 선생님들께서도 다양한 공부 모임을 하고 계시겠지만요. 사실 저는 아무리 커리큘럼과 교수의 역할을 보강한다 해도, 대학원 교육의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의 연구 주제가 워낙 다양하고 또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경우 제도적인 교육은 효과적이기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세미나나 발표회 같은 것이 실질적으로 대학원에서의 교육의 주된 부분이지 않을까 싶고, 자체적인 공부 모임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학계 공동체의 대표적인 것은 학회이지만 사실 학회는 중진급 이상이 중심 역할을 하시다 보니 신진 연구자나 대학원생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자리인 게 사실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신진 연구자를 위한 네트워킹 파티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아까 대학원 여학우 모임에 대한 언급도 있었는데, 그런 친목 조직도 학계의 풀뿌리 집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크고 작은 공부 모임들이 활성화될수록 연구자 간의 네트워크도 강해지고, 그러다 보면 단지 연구뿐만 아니라 고등 교육 정책과 제도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모일 수 있는 토대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요.

조승희 저도 동료 집단이 대학원의 시작과 끝, 대학원생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의 경우,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개인적인 동기는 따로 있어도, 진학을 결심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대학원 선배들이었어요. 그 선배들이 함께 잘 지내는 모습이나, 이야기를 하는 방법, 학술적인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선배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고, 이 선배들이 다니는 대학원이라면 나도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도 순진한 생각이었을 수 있지만, 학과 간판이나 교수님 배경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동료 집단의 분위기라고 봅니다. 그 대학원이라는 커뮤니티가 어떤 곳인지, 더 좁게는 그 연구실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대학원 생활을 하다 보면 뭐가 옳은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다양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동료들이 꼭 필요해지는 것 같아요. 처음엔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서 고민이나 나눌 수 있는 직장 동료 같았다가, 갈수록 비슷한 문제의식을 나눌 수 있는 집단으로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같이 공부하는 연구 분야나 대학원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누기도 하고요. 저의 경우, 박사 논문의 많은 부분은 동료들이 써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 박사 논문에서 제안하는 핵심적인 개념 중에 동료가 최초 아이디어를 준 것도 있고, 동료들이 추천해 준 책이나 논문은 셀 수 없이 많아요. 동료가 해줬던 쓴 코멘트에 자극받아 1년에 걸쳐 새로 탄생시킨 부분도 있고요. 단지 같은 학벌 집단으로서 서로 끌어 주고 밀어 주는 계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관계가 아니라, 오랜 기간 문제의식을 공유한 그룹으로서 앞으로도 협업하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큰 힘이 되죠.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는 친구지만 대학원 동기는 경쟁자”라는 말을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 말에 크게 동의가 안 되더라고요. 오히려 앞으로 커리어에서도 이 동료 집단이 평생 학문 공동체처럼 쭉 같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어요. 학과도 비슷한 관점을 나누는 다양한 학생들이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릴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율적인 학문 공동체, 대학원 제도의 내실 갖추기

유현미 저도 함께 하는 사람들의 다양성과 협력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좋은 모델들도 접했습니다.

첫째로는 대학원 내 자치회나 세미나 등을 통해 동료, 선후배와 공부하고, 자신의 문제를 격식 없이 편하게 나누는 자리를 경험할 수 있었어요. 일례로 저희 학과에 있는 ‘도시락과 사회학’이란 행사 모임을 들 수 있겠는데요. 격주나 한 달에 한 번 정도 상황에 맞춰 대학원생들이 밥이나 간식을 먹으며 각자 연구나 학업에서 생겨난 질문, 탐구하고 있는 주제나 부딪친 문제들을 논문 틀이나 완성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나누는 모임입니다. 편하게 서로 조언을 주고받고, 뜻이 맞으면 책이나 논문을 함께 읽고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모임으로 분화하기도 했어요. 연구를 통해 발전시킨 내용이나 흥미로운 지점이 있으면 외부에 공개하기도 하고, 다른 대학이나 타과 연구자를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형성된 네트워크로 이후 학과나 대학원 관련 이슈가 생겼을 때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신뢰를 쌓았고, 문제의식을 공유했기 때문이겠죠.

제가 이해하기로 학계의 자율성은 개인 연구자의 자율뿐만 아니라 서로를 견제하고 발전시키는 동료 집단의 자율성이 핵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학회란 게 개별 학과, 대학, 직급을 넘어선 연구자 간의 소통 공동체일 텐데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뭐랄까요, 연구 재단의 지원을 받아 등재지 학회를 유지하기 위해 학술 행사를 한다거나, 각자의 연구 이력과 실적 추가를 위해 행사가 조직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대학원의 동료 집단은 모셔야 하고 잘 보여야 하는 교수님, 나를 괴롭히거나 경쟁해야 하는 동기와 선후배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에게 피곤한 존재가 되고 있죠. 그러다 보니 교수부터 학생까지 가릴 것 없이 다들 외롭고 힘들다고 하는 외침 속에 피해자가 늘어나는 것도 같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장면 중 하나는 대학원생 인권 지침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인권 지침을 위해 각 단과대 교수님들의 의견을 수합할 때, ‘교수들도 노동자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하나도 못 찾고 있는데 왜 우리가 대학원생 권리 보장의 책임자로만 소환되느냐, 안 그래도 바쁘고 힘든데’라는 반응을 봤습니다. 저는 교수 사회 내 분단과 위계, 고립, 과로의 해소가 대학원생의 여러 고충을 해소하는 것과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원생이 스스로의 역량과 책임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공동체나 제도가 없는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아시겠지만 학부 총학생회나 학생 대표가 각종 대학 내 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있다면, 대학원생은 그렇지 않죠. 학부생들의 대표성이 학생 운동이라는 전통이나 다양한 형태의 조직화를 통해 가능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대학원생 역시 대학 운영의 주체이며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라는 걸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대학원 밖에서도 동료 집단을 만드는 경험을 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대학원생이 쌓은 학술적 표현 능력과 사고방식이 다양한 사회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실험하기에 유용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지도교수나 소속 학과에만 소속된 미생이라는 의식을 조금은 벗고, 다른 한편으로는 겸허해지면서 대학원 밖에서 여러 지적 공동체를 만나 사회적 감각을 익힌다면 공공 지식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학원생들은 속된 말로 자기 효능감을 조금 더 쌓아볼 기회가 필요하고, 대학원 제도 역시 그것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구성될 필요가 있습니다. 일례로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에서 대학원생의 인권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대학원생들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보고 조사를 해봐라 하면서 자치 활동 지원 사업을 했어요. 다양한 전공의 대학원생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결과 대학원생의 현실에 관한 다양한 데이터가 축적됐어요. 이 활동이 대학원 정책에도 조금씩 영향을 끼치는 선순환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거버넌스와 지도 체제를 짚고 싶어요. 대학원생의 진로나 생활에 있어 지도교수 한 명이 책임과 전권을 가지는 지금의 체제는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죠. 교수 집단 간 견제나 책임 분산의 장치를 만들거나, 연구 재단이나 학내 다른 기구의 견제,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를 만들거나, 동료 집단이나 대학원생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대표 조직이나 자치 조직의 장치를 활성화하거나…. 이 모든 것을 결합해 지도교수 중심의 교육, 훈련 체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보경 저는 우선 대학 차원에서 여러 문제점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대학원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위해 제도적 기반을 탄탄히 정비하고 루트를 다양화해야 하겠죠. 저는 앞서 대학원생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그저 구색 맞추기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말씀드렸는데요. 사실 대학원생은 학내 주요 구성원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학교 측이나 교수들이 대학원생이 겪는 문제에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가 실제로 드물기도 합니다. 학내외 고등 교육 관련 주요 법안, 정책, 제도 마련 시 설문 조사나 토론회 등을 통해 대학원생의 의견을 수렴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이렇게 수렴된 의견이 실질적으로 유효하게 활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앞서 강수영 선생님께서 언급해 주신 MIT 원총 사례가 흥미롭게 들렸어요. 대학원 자치 기구가 공식 기구로서 그만큼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대학원생들의 관심이나 참여는 물론이고 학교 행정부, 교수진, 대학원생 등 학내 구성원들 사이의 공감대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관심과 참여가 부족한 것은 대학원생이 대학원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대학원에 환멸을 느낀 경우라면, 그곳의 생리를 바꾸기보다는 빨리 대학원에서 벗어나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원생의 학내외 정치 참여를 통해 교육 환경이나 제도가 개선되는 선순환 작용을 기대할 수 있으려면 소속감의 바탕이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해 주신 대학원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에 크게 공감했어요. 저 역시 때때로 수업에서 배운 것보다 동료들과 함께한 스터디나 세미나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 동료의 경계가 자기가 속한 학교나 학과 대학원의 구성원에 국한된 것이 아닌 만큼, 대학원생으로서의 소속감은 더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감이 대학원생들을 어떤 구체적인 의제로 결집시키고 공동의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데 감정적 자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대학원 제도나 정책을 개선하는 논의에 있어서 대학원생이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젠더, 나이, 국적, 지역 등의 요소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했는데, 이런 서로 다른 위치와 경험의 차이를 고려하는 것은 보다 민주적인 학문 공동체를 마련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지만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관련해 대학원생에 대한 모델이 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서 전준하 선생님께서는 대학원생에게 교수 외의 여러 커리어 모델들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커리어 모델뿐만 아니라 대학원생 모델 자체도 다양해지고 이를 보장하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했어요. 가령 현 대학원 교육 제도는 전업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짜여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전업 대학원생이 아닌 대학원생들의 경우 연구를 지속하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또 이들을 비롯해 연구와 생계 활동을 병행하는 대학원생에게 양적 평가 중심의 실적 평가의 제도적 관행이 불리한 측면도 있고요. 대학원생들이 자신들의 서로 다른 경험을 나누고, 그 다양한 차이를 고려하는 일이 대학원의 미래를 상상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고 싶은, 남고 싶은 대학원을 위하여

이우창 지금까지 선생님들께서 해주신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는데, 남고 싶고, 또 가고 싶은 대학원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을 듯합니다. 먼저, 대학원이라는 기구는 학생의 어떤 수요에 부응해야 할까요? 우리의 답변은 물론 대학원이 학생의 교육적 수요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 즉 학생이 한 명의 전문 연구자로 훈련받을 수 있는, 혹은 그에 준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교육적 환경 및 체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다음 질문은 입학부터 졸업 및 이후의 진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역량이 무엇이며, 대학원은 이를 어떻게 제공해야 하는가가 되겠지요. 여기에 수업 및 논문 지도의 충실성이나, 연구에 필요한 정보와 자원에 원활하게 습득할 수 있는 높은 정보 접근성이 담보된 환경, 뛰어난 연구자와 교육자의 확보 등은 당연히 포함되겠지만, 저는 그 외에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각각의 학과 및 전공에서 학생이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 또 졸업 후 학생의 적절한 진로 선택을 위해 어떤 요소가 필요한지 공들여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의 무사 졸업을 위해, 그리고 졸업 이후의 생존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체계화된 형태의 지식으로 확보한 학과는 한국 인문·사회학계에서 극히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 다들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대부분 교수 개인의 경험에 기초한 암묵지로 남아 있죠. 예전에는 그래도 됐습니다만, 지금과 같은 인문사회과학의 위기 상황에서 대학원이 자신의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식의 체계적인 수집이 필요하겠죠. 솔직히 이런 요구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둘째,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고도의 전문 능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전통적 분과를 넘어서길 요구하는 문제가 계속해서 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문제를 먼저 제기하고 창출하는 능력이 연구자에게 일상적으로 요구됩니다. 이를 인지하고, 그러한 조건에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대학원 스스로 묻고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지난 수십 년간 학계에서 가속화된 전문화와 분업화에의 대응도 포함되겠지요. 저는 그런 점에서 전공 적합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학문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주장은 취업 시장의 단기적인 수요밖에 생각하지 않는 입장만큼이나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원은 연구자들의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서라도 현재 학술장 안팎의 변화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해서 저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대학원이 기존에 주어진 학과의 장벽을 넘어 다른 대학원의 연구자들, 인접 분야 및 학과의 구성원들과 좀 더 적극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제도적 기제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학술장의 전문화 추세와 한국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작은 규모를 고려할 때 어차피 어느 한 대학의 학과에서 모든 중요한 분야를 적절하게 커버하는 인적 역량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엔 대학원이 기존의 전임 교원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범위의 인적 자원과 접촉하고 이를 대학원생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통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없다면 발전하는 학계에 대비해야 하는 학과의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학계의 성장에 발맞추지 않으면 학과의 수준은 금방 뒤처지게 됩니다. 가용한 인적 자원의 한계를 고려한다면 결국 학과 바깥의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실질적인 연구 협력 및 교육 지도에 활용하는 게 현실적인 해결책입니다.

실제로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University of Oxford), 케임브리지대학교(University of Cambridge), 런던대학교(University of London)의 경우, 대학원생 및 연구자들이 필요에 따라 타 대학 소속의 전문가들과 접촉하고 실질적인 지도를 받는 것도 흔합니다. 한국처럼 물리적으로 좁은 공간 내에 수많은 대학들이 붙어 있는 나라에서 이 밀집성을 활용하지 못하는 환경은 심각하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서로 지적인 자극이 되죠. 막말로 종신 교수 받고 본인 학과에서 누구의 반론도 받지 않는 왕처럼 살면서 지적으로 정체되는 것보다는, 각지의 연구자들을 보면서 경쟁심도 느껴야 실적용 논문을 써내는 것 이상의 유의미한 지적 추구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대학원을 운영하는 것에 있어 대학원생의 참여를 어느 정도 공식화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대학원생의 수요를 효율적으로 가시화하고 선별해 필요한 사항을 빠르게 제도에 반영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교수들이 2020년대에 대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얼마나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요? 지금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대학원생들, 갓 졸업하고 진로를 위해 고투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은 그 자체로 효율적인 대학원 운영을 위한 생생한 정보의 보고와 같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그 자체로 중요한 정보를 산출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대학원생들이 학문 공동체를 결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적절한 제도적 자극이 필요합니다. 한국 인문사회과학부는 대략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세미나 문화가 사실상 사라졌다고 보면 됩니다. 간단히 말해 지금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들, 앞으로 대학원을 다닐 학생들은 아주 특별한 소수를 제외하면 20대 때부터 학술적인 세미나를 조직하는 걸 해본 적도 없고 그걸 조직하는 행동 양식도 몸에 배어 있지 않다고 보면 됩니다. 근데 다들 아시다시피 연구자는 세미나를 안 하는 순간 지적 성장의 효율성이 급격히 하락합니다. 수업 듣고 지도받으면서 논문 쓸 때까지는, 특히 모범생 타입의 학생들은 세미나가 없어도 그럭저럭 성장하는 데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박사를 마치고 나서, 임용이 되고 나서 제대로 된 세미나에 참여하지 못하면 그때부터 이끼가 낀 돌처럼 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이걸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대학원은 학생들에게 세미나 문화를 이식하거나, 적어도 그런 문화가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유인책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 결국 교원에게 대학원생 지도를 위한 제도적 인센티브를 어느 정도 줘야 합니다. 물론 보람과 의무감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을 수십 년쯤 봤으면 이제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죠. 특히 가면 갈수록 교원에 대한 실적 및 수업 압박이 늘어나는 추세임을 감안하면, 교원들이 대학원생 지도를 방기하는 건 제도적으로 아주 당연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물론 학술지에 논문 쓰는 일이 중요하긴 하겠습니다만, 대학에서 대학원생 지도가 그 자체로 유의미한 업적이 될 수 있도록 교수 평가 및 보상 체계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저는 대학원 자체의 수요는 계속 존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는 이미 그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분야에서 고도화된 지적 능력을 평생 업데이트할 것을 요구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고, 제아무리 무료로 볼 수 있는 자료나 사교육 시장이 커진다고 해도 규모와 역할에서 대학원을 대체하는 건 매우 한정적인 영역에서만 가능합니다. 사교육에서 학위와 같은 라이선스를 발급하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한국의 대학원은 단기간에 팽창했고, 때문에 제대로 된 조직 모델을 갖추기 어려웠습니다. 또 그런 모델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고, 대학원 및 연구자 집단을 육성하고 관리하는 방법에 대한 국가적 고민도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분야별 공급량과 질적 컨트롤 모두에 실패했고 이것이 지금 학계에 닥친 위기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어차피 단기간에 관료나 정치인들의 고등 교육 이해도가 높아질 가능성을 기대하기 힘든 만큼, 지금은 각각의 대학원 단위에서 어떻게 위기를 풀어 나갈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대학원생이 가고 싶은 또 남고 싶은 대학원을 만드는 것은 대학원 자신의 생존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관계자들이 조속히 깨닫기 바랍니다.
[1]
요다, 〈대학원 탈출일지〉, 네이버웹툰, 2022.
[2]
Jorge Cham, 〈Piled Higher and Deeper(PhD Comics)〉. 
[3]
교육통계서비스 참고
[4]
김민섭,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은행나무, 2015.
[5]
2019년 8월 제정된 ‘강사법(개정 고등 교육법)’의 제정 과정과 쟁점, 한계와 개선 방안 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황주원·이승길, 〈대학 강사의 근로조건의 쟁점과 개선방안-개정 고등 교육법(‘강사법’)을 중심으로-〉, 《사회법연구》, 43, 2021.
[6]
김유신, 〈[단독] 강사법 1년만에… 강사자리 2만개 증발〉, 《매일경제》, 2020.8.4.
[7]
김연주, 〈강의 못맡는 신규 박사들 늘어… “강사법 영향”〉, 《조선일보》, 2022.6.15.
[8]
강일구, 〈인문·사회는 생계부터 불안, 이공계는 고용불안〉, 《교수신문》, 2022.4.11.
[9]
조영훈, 〈“조교도 노동자” …동국대 대학원생, 학교 고발 예정〉, 《오마이뉴스》, 2016.11.29.
[10]
유성열·김하경, 〈서울노동청 “대학 조교도 근로자”… 퇴직금 안준 동국대 총장 檢 송치〉, 《동아일보》, 2017.11.13.
[11]
이지희·장진희, 〈대학원생 조교 해고… 장학금 축소 등 칼날〉, 《한국대학신문》, 2018.2.15.
[12]
교육부, 〈일부개정령안 등 3건 국무회의 통과〉, 2020.
[13]
한국연구재단의 ‘2018년 글로벌박사양성사업 시행 공고문 및 신청요강’을 참조했다.
[14]
강일구, 〈인문·사회는 생계부터 불안, 이공계는 고용불안〉, 《교수신문》, 202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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