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박사하기
4화

한국은 어쩌다 문송한 나라가 되었나

지금, 여기의 인문·사회학계


이우창 앞서 대학원의 문제와 개선 방향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번에는 학계와 인문·사회 분야의 학술장으로 논의의 범위를 넓히고자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이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는 지금도 여전히 한국의 연구자들이 한국 학술장에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본인의 연구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모범적인 연구자인 양 이야기되고는 했으니까요. 혹은 적당히 모두가 공감할 수준의 무난한 불평 정도만 가볍게 꺼내고 넘어가거나 말이죠. 문제는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학계가 겪는 곤경을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도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를 위한 역량도 기르지 못했고요.

정신을 차려보니 학계가 현상 유지조차 쉽지 않은 난국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무슨 문제를 왜 겪고 있는지 진단하고, 무엇을 목표로 문제를 풀지 이야기할 수 있는 담론과 도구는 거의 구축되지 않은 거죠. 그런 의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도 좀처럼 보이지 않고요. 이런 상황이 하루아침에 해소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럴 때일수록 지금 우리와 같이 새롭게 학계에 진입하는 단계에 있는 연구자들이 스스로가 경험하고 분석한 바를 자유로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정석 루트가 된 유학

강수영 저는 일단 제가 속한 분야의 유학 가는 풍토에서 출발해 보고 싶어요. 저는 석사 졸업 이후 막연하게 ‘박사 유학을 가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석사 논문을 제출하고 교수님들께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세 분 모두 저한테 유학 가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한동안 다른 선생님들한테도 ‘유학 언제 가냐’라는 말을 인사처럼 들었네요. 한국에서 석사를 하고 미국에서 박사를 하는 것이 소위 정석 루트로 느껴졌는데요. 지리학이나 도시 공학 분야 교수님들 이력을 쭉 훑어보면 미국 유학을 다녀오신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한국의 교수 임용 시장도 그렇지만, 유학 가 있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영미권 대학원의 연구 환경이 한국 대학원보다 훨씬 체계적이라고 느꼈어요. 물론 학교마다 편차가 상당하겠지만, 장학금은 물론이고 논문 지도나 진로 선택, 다양한 학생들 간의 교류를 위한 제도적 지원 같은 것들이요. 예전에 해외에서 일하던 한 교수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동료들이 “왜 변방에 가려고 하느냐”면서 만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한국 학술장이 논의의 변방인 것 역시 유학 가는 풍토의 한 원인이겠지요. 대학원, 특히 박사 과정에 진학한다는 것은 큰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일인데요. 어차피 시간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연구의 지평을 넓히고 싶고, 향후 교수를 업으로 삼고 싶은 학생들에게는 가능한 한 유학을 택하는 것이 좋은 선택인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그 상황 자체가 문제적이기도 합니다. 제가 속한 분야는 사회과학 중에서도 지리학으로, 특정 지역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제대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언어에서 출발해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이해해야 하죠. 그래서 많은 학생이 유학을 가더라도 한국을 연구 대상으로 삼습니다. 유학 중인 한 지인은 현지 친구가 ‘한국을 연구하는데 왜 미국으로 왔느냐’고 물어봤다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어요. 동시에 유학은 인종적 소수자의 삶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 분야에서는 수많은 학생이 유학길에 오르는 상황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한테 유학을 가라고 하셨던 선생님들의 말씀에 애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요. 그럼에도 공부를 하려면 미국 유학을 가야 한다는 말이, 소위 해외 박사와 국내 박사의 위계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한국 학술장을 개선하기 위한 집단적인 노력을 보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 후학으로서는 굉장히 아쉽습니다. 결국 유학길에 오른 대부분의 사람이 다시 한국 학술장으로 돌아오는 상황인데 말이죠. 국내 학술장에서 학문적 재생산이 어렵다는 인식이 자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유체 이탈 화법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시안적인 국가사업

더해서 참여했던 한국연구재단의 연구 지원 사업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요.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지금으로부터 10년, 15년 전만 해도 석사 학생이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교수님들께 엄청 무례한 일이었대요. 그런데 BK21사업 양적 평가에 학문 후속 세대인 학생들의 발표나 논문 게재가 기준에 포함되면서 굉장히 빠른 시간에 학생들의 연구 참여와 발표를 장려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 문화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에 입학했고, 학위 논문 작성 외에도 학술 대회 발표나 논문 게재 등 프로젝트 참여를 많이 지원받았던 것 같아요. 학생 때부터 다양한 연구 활동 참여를 독려받은 경험이 연구자들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평가하기 어렵지만, 일단 확실한 평가 지표가 있다 보니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큰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양적 평가가 질적 성장을 동반하기도 합니다만, 전준하 선생님께서 《과학뒤켠》에서 짚어 주신 것처럼 학계의 가속화를 부추기고 있기도 하죠.[1] 획일화된 지표는 연구 내용보다 논문 점수가 우선되고, 현장 연구처럼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연구 방법론이 외면당하는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앞서 말씀드린 제 석사 과정의 사례처럼 학술장에서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많아진 것 같기도 합니다.

비슷하게 제가 석사 졸업 후 약 4년간 연구 보조원으로 참여했던 SSK사업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SSK사업은 말 그대로 사회과학 연구 집단을 지원하는 사업이고, 한 연구 집단은 길게는 10년 동안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참여한 연구 집단은 SSK사업의 극 초반부인 2011년에 소형 단계를 시작한 곳이었고, 저는 2017년부터 합류해 대형 단계 4년간 함께 했어요. 이 사업 덕분에 저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제가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는 인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업 자체가 연구자 네트워킹 사업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아쉬운 점들도 있었는데요.

한국연구재단에서 직접 결론을 내린 바와 같이, SSK사업은 ‘수도권 소재 대학과 남자 정교수 중심의 연구 수행’과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등 일부 전공의 비율이 높아지는 경향이 심화하고 있습니다.[2]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사업의 성패가 연구 책임자가 가진 자원에 깊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연구가 선정되면 연구 책임자가 소속된 학교를 통해 돈이 집행됩니다. 그렇다 보니 연구 책임자의 소속이 불안한 상황에서 사업을 시작하기도 어렵고요. 사업의 단계가 올라가면 공간을 직접 마련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공간 각축전이 벌어지는 대학에서 내 사업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석·박사 연구진과 행정 인력을 구하는 것도 수도권 대학이 아니면 만만치 않은 작업이구요. 그대로 두면 자원의 양극화가 점차 심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더해서, SSK사업은 국가 비전의 의제를 설정하는 것이 주 목표인 사업인데, 이것 또한 각 개별 연구단이 알아서 의원들을 찾아가 정책이나 법안 상정 실적도 만들고, 보도 자료도 뿌리고, 홍보도 해야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선정된 사업단에 돈을 주고 실적을 평가하는 것 외에, 그 안의 연구자들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길러 내거나 국가적 의제를 형성하기 위한 별도의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원인은 다양할 텐데요. 대학원뿐 아니라 국가사업도 예산 배정, 실적 평가 외에는 제도가 미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업을 관리하기에는 빈틈이 많은 거죠. 연구자 개인에게 있어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것이 받지 않는 것보다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낫지만, 지원을 받더라도 그저 거쳐 가는 사업이 됩니다. 결국 불안정한 상태는 지속되고 연구의 연속성도 담보하기 어렵죠. 지원 사업의 목표 달성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이고요. 인문·사회 학술장이 국가사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연구자들 스스로 이 체계 자체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질보다 양’의 함정

김보경 강수영 선생님께서 한국연구재단의 연구 지원 사업으로 운을 떼셨으니, 저도 관련한 제 경험과 생각을 나눠 보고 싶습니다. 앞서 대학원생의 생계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나눈 바와 같이 현재 인문·사회계 대학원생들이 연구 활동을 유지하는 데 연구 지원 사업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큽니다. 그런데 인문·사회계에 대한 지원액의 규모는 열악한 편이죠. 수혜 비율도 낮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가 한 번쯤은 선정될 만한 연구 주제를 찾거나 모종의 내용적인, 형식적인 규격에 주제를 맞추어 지원서를 작성해 보셨을 것 같습니다. 또 정부가 바뀌거나 고등 교육 예산 관련 기사라도 접할 때면 이런 지원 사업들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학진 체제 이후 연구자의 역량과 실적이 등재지 논문을 게재한 횟수에 의해 평가되는 것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각각의 연구마다 들이는 시간과 노고가 다를 테고, 연구자마다 생애 주기나 연구의 호흡이 다를 텐데요. 또한 연구마다 존재하는 다양한 질적 차이는 사실상 양적 평가에 있어서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연구자들은 더 많은 논문을 써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러한 지적 자체도 저희 세대에서는 익숙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한편으로는 논문 편수 늘리기 경쟁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비판하는 일 자체가 대안 없이 반복되는 것이 피로하기도 합니다. 인문·사회 학술장이 처한 문제의 원인이 대학의 기업화, 신자유주의화라는 단일하고 거대한 단위로 환원될 때, 실질적으로 학술장을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나 상상력이 오히려 위축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또 이는 앞서 지적된바, 대학원생들이 피해자로만 소환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고요.

이런 문제의식 아래에서 좀 더 생산적인 개선책을 고민해 보자면, 저는 양적 생산성을 기준으로 삼은 연구 실적 평가에 대한 비판이 좀 더 뾰족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자의 역할 중 하나가 지식을 생산하는 일이라고 할 때 이 생산성의 개념을 좀 더 세밀하면서도 확장해서 다룰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먼저 학계는 논문을 생산하기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과 위치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생산성을 측정해야 합니다. 젠더, 계급, 나이, 지역, 출신 대학 등의 요소가 그러한 예에 해당할 텐데요. 다양한 요인에 따라 연구·교육 기회와 접근성에 차이가 존재할뿐더러, 출산이나 육아 등과 같은 신체적·사회적 경험의 차이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맥락들이 고려되지 않은 채 생산성이 모든 연구자가 좇을 수 있는 보편적인 목표이자 모든 연구자를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처럼 제시됩니다. 또한 유무형의 보상이 분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조리나 차별을 목격하면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도 꺾이죠. 이는 결국 연구자가 학계에서 이탈하거나 지식의 질적 저하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또 연구자에게 실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등재지 게재 논문으로 한정돼 있다는 점에서도 생산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협소한지 알 수 있습니다. 연구자의 역량이 연구를 통해 증명돼야 하고, 그 연구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형식이 논문이라는 사실은 동의합니다. 하지만 등재지 논문 수가 유일한 기준이 된다면 그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활동이 유효한 실적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번역이나 칼럼, 평론, 대중 강연 등의 활동이 있겠죠. 그러다 보니 연구자들도 자진해서 이러한 활동들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가령 단행본은 논문 한 편보다 들여야 하는 시간과 호흡이 길어서, 효율성을 생각한다면 시간을 덜 들이고 실적으로 인정받는 논문 한 편을 쓰게 되죠. 번역 작업도 학계 전반의 연구 역량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품이 들어가는 것에 비해 보상이 거의 없기도 하고, 연구로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는 국제화 지수를 높여야 한다고 운운하지만, 정작 번역과 같이 국내외 연구자들의 지식이 교류되는 가장 기초적인 활동의 학술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제화 지수를 높인다는 목표는 어불성설이죠. 연구 성과를 측정하는 잣대가 획일화된다면 연구가 양적으로는 풍부해져도 질적인 다양성이 축소되는 것은 아닌지, 학계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비평 활동을 하고 있어서, 앞서 언급한 방외 이력을 쌓고 있는 장본인이기도 한데요. 저는 평론이 전문화된 연구와 대중 지향적인 저널리즘 사이쯤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등재지 논문만을 성과로 인정하는 현 학술 제도하에서는 논문과 대중적 글쓰기 사이의 거리는 더욱 벌어지기 쉬워요. 결국 이는 인문·사회계 학술장이 시민 사회와의 소통 능력을 잃고 게토화되는 것을 가속하지 않을까요. 사실 현 시스템에서 연구 역량의 평가 요소를 다양화하는 일은 오히려 연구자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가 좀 조심스럽긴 한데요. 궁극적으로는 연구의 질적 다양성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퍼지고 대안을 모색한다면 연구자들이 스스로 학술장의 대중적 소통 방식을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생산성이라는 기준을 폐기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어렵다면, 생산성의 측정과 작동 방식, 여러 권력 관계를 고민해 내부의 차이를 반영하고, 동시에 연구 형식 자체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승희 저도 학술 논문 출판에 대해 할 이야기가 좀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주로 하고 있는 현장 연구 방법은 ‘18개월 현장 조사’가 마치 황금 법칙처럼 버티고 있어요. 18개월 정도 현장 연구를 하면 어느 정도 충분히 연구했구나 싶고, 그거보다 짧으면 제대로 안 했다는 지표가 된다는 얘기죠. 그런데 제가 다니는 이공계 대학은,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일 년에 해외 저널 한 개는 마땅히 써내야지!’라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된 환경이에요. 현장 연구자에게 1년에 논문 한 편을 꼬박꼬박 출판하기는 애초에 꽤 버거운 요구인데, 이공계의 템포를 따르려다 보니 많이 버겁다고 느꼈죠. 저는 이 현상이 이공계 대학에서 과학기술정책, 과학기술학, 과학기술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특히 많이 겪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저도 SCI급, 또는 SSCI급 논문이 아예 졸업 요건으로 못 박혀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다른 분들 말씀을 들으며 생각을 해보니, 이게 비단 이공계 대학에 소속돼 있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만이 겪고 있는 게 아닌 것 같네요. 이공계만큼이나 인문·사회 학술장도 점점 논문 개수를 실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인문 계열 현장도 이공계의 논문 실적을 따라가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들어요. 졸업해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선배들 이야기도 들어보면, 국내 일자리에선 무조건 논문 개수와 지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교수에 임용되려면 해외 박사 후 연구원은 기본이고, 좋은 해외 저널을 포함해 논문 세 편 정도는 들고 있어야 하고요. 전 가장 어이없었던 게 국내 여러 직장에서 해외 저널에 유효 기간을 둔다는 것이었는데요. 몇 년간의 대학원 생활을 바쳐서 쓴 해외 저널 논문이 있어도, 유효 기간이 있어서 5년 전에 쓴 논문이면 서류에도 못 넣게 되죠.

학생이 받는 교육과 취업 요건 사이의 괴리 중에 가장 큰 것도 논문이라고 봐요. 제가 배우고 있는 교수님들께서는 주로 미국에 위치한 해외 대학에서 유학하고 오셨는데, 학생 때부터 긴 연구 기간 끝에 좋은 책 한 권을 출판하는 것, 또는 몇 년을 바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을 제시하는 저널 논문 한 편을 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환경에 계셨던 분들이 많아요. 그러니 교수님들은 대학원 수업을 진행하실 때나 학생들을 지도하실 때 궁극적으로 책을 출판할 수 있는 학생을 육성하는 것을 많이들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았어요. 물론 박사 논문이 책만큼 길어서 그러시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때그때 쓸 수 있는 짧은 연구를 빠르게 써서 출판하겠다는 학생이 오면 언짢아하시거나, 돌려보내시는 교수님들도 아주 여러 번 봤어요. 학생이 여러 편의 짧은 논문을 출판하기보다는, 10년, 20년 잡고 길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를 찾길 더 원하시는 것 같고요.

한국 인문 학술장이 장기적인 연구보단 단기적으로 논문을 많이 찍어낼 수 있는 연구자, 임팩트 팩터가 높은 연구자만 추구하다 보면, 결국 가장 위협받는 건 연구와 연구자의 지속 가능성일 것 같아요. 인류학 분야에서 테뉴어(Tenure·종신 재직권)를 받으신 한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보통 테뉴어를 받기 전까지는 두 번째 현장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거였어요. 현장 연구자가 교수가 되면 현장 연구를 하기 어려운,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한다는 거죠. 박사 과정 중인 학생 입장은 졸업 이후 대학원에서 진행한 현장 연구로 논문을 더 쓰고, 이후에는 새로운 현장에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죠. 천운이 따라서 교수가 된다고 해도, 교수 신분으로 새로운 현장 연구를 하기란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저처럼 현장 연구를 하는 한 동기는 현장 연구를 못할 바에야 차라리 독립 연구자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삶이 불안정하더라도 본분인 현장 연구를 할 수 있는 길은 대학에 남는 것이 아니라 독립 연구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친구의 말이 좀 슬프게 들리기도 했어요.

파편화된 학계를 파고드는 가짜 학회

전준하 2018년 여름, 제가 회사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뉴스타파에서 이른바 ‘가짜 학회’의 실태에 대한 첫 탐사 보도를 했습니다. 학술 대회나 학술지의 형식만 갖춘 채 주제나 내용에 대한 아무런 검증 없이 연구 발표나 논문 게재를 해주는 ‘와셋(WASET·World Academy of Science, Engineering and Technology)’과 같은 사이비 학회의 존재와 더불어 얼마나 국내 연구자들이 부실 학술 활동을 얼마나 자주 활용하는지를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보도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적지 않은 후속 기사와 더불어 각 대학과 연구소별로, 또 연구 재단과 교육부에서 대대적인 조사가 진행돼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징계를 받았으니까요.

전부터 같은 문제를 추적해 오던 저는 이때다 싶어 조사한 내용을 언론에 제보했습니다. 기존 기사에서 언급된 것에 비해 부실 학술 활동의 규모와 범위가 훨씬 크고 넓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뉴스타파가 처음 폭로한 사례들이 주로 해외에 적을 두고 있는 이공계 및 의학 계열 부실 학술 단체여서 오히려 국내 인문·사회학계에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어물쩍 넘어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국내 교수들로 구성된 집단이 ‘인문사회과학기술융합학회’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이름의 학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여러 부실 학술 대회와 학술지를 운영하는 소위 ‘다단계 학회 사업’ 역시 기사화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바라던 대로 해당 내용이 밝혀지면서 분야를 막론하고 부실 학술 활동이 얼마나 만연한지 드러났죠.

학계 바깥에서 그 이후 과정을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살펴봤던 것 같습니다.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 후 누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 또 자정이 일어날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언제나 그래왔듯 뒤늦게 정부 주도의 토론회가 몇 번 개최되고, 교육부나 한국연구재단에서 기사에 언급된 학회와 학술지만을 겨냥하여 형식적 제도를 변경했을 뿐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물론 부실 학술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경각심이 생기긴 했죠. 하지만 이처럼 문제가 심각해지기까지, 또 문제가 불거진 이후에도 학계에서 아무런 자정 노력이 없는 것을 보면서 크게 허탈했습니다. 자기 규율이야말로 학술장을 구성하는 문화와 제도의 근간이 되는 전제인데 그게 안 되고 있으니까요.

국내 인문·사회 학술장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저는 이 사례에 상당한 함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느꼈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학술장이 파편화돼 있다는 사실이었는데요. 여기서 파편화란, 학계가 일부 교수들의 인맥으로 운영되는 동호회와 같은 형태, 심지어 공동체라고 할 것 없이 연구자 개개인이 단위로 구성되며 그 사이에서 유의미한 학술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파편화된 각각의 공간이 계속해서 사유화된 나머지 부실 학술 활동이라는 학술장 전체가 갖고 있는 공통 문제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 나갈지 불분명한 상태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앞서 언급한 언론에 제보한 부실 학술 활동 사례는 가장 충격적인 일부 사례일 뿐이었습니다. 관련 조사를 하면서 제가 목격한 현상 중 하나는 바로 학술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학회나 학술지 규모가 양극단으로 나뉜다는 점이었어요. 한쪽에서는 도저히 어떻게 이렇게 다양하고 수많은 연구자들과 연구 주제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도떼기시장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같은 이름과 비슷한 주제만이 반복되는 구멍가게가 근근이 운영되고 있었고요. 어느 쪽이든 유의미한 학술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고 보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분명 좋지 않은 사례만을 골라 악평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그런 곳에 이름을 올리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거치며 특정 주제나 담론, 사조에 대해 모여서 토론하는 곳이라고 믿었던 학술장이 단지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이력서의 한 줄을 위한 공간이 됐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이런 상황에 처한 우리를 ‘철창 속 일차원적 연구자’라고 칭한 적이 있는데요. 학계에 남아 그런 연구자가 되느니, 아예 바깥에 직접 공간을 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해나가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에 필요한 금전적 지원 역시 학계 바깥에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취직을 한 후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해야겠죠.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떠났습니다.

가속화된 학계

유현미 강수영 선생님께서도 언급해주셨지만, 전준하 선생님이 일차원적 연구자를 논의하는 글에서 체코의 이론사회학자 필립 보스탈(Fillip Vostal)이 제안한 ‘가속화된 학계’ 개념을 소개해주셨어요. 한정된 연구비와 정규직 지위를 두고 벌어지는 경쟁 속에서 연구자들이 느끼는 시간 압박을 담고 있는 개념입니다. 교수님들이나 선배님들을 만나면 늘 정신없이 바쁘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 주변 선배들 중에는 박사 논문 쓰고 나서 한 번, 교수 임용되고 나서 한 번, 크게 아픈 경우들이 있더라고요. 아마 가속화된 학계에서 지친 몸이 한 단계를 거칠 때마다 신호를 보내는 거겠죠? 그럼에도 한 번 올라탄 자전거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계속 발을 움직이듯, 지친 몸을 이끌고 속도 경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가속화된 학계의 문제는 역사적으로는 1995년 5.31 교육개혁안 이후 ‘지식 기반 경제’라는 담론 아래 연구 중심 대학 정책을 강화한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고부가 가치 산업을 진흥한다는 경제적 목적에서 연구 활동의 생산성을 강조하고, 그에 집중하는 정책이 나왔죠. 이때부터 수도권의 대형 종합 대학을 중심으로 연구 중심 대학을 지원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연구 자원의 분배와 사회적 인정에 있어 일명 ‘명문대’의 독점 체제가 심해졌죠. SSK사업의 SKY 편중도 이 구조에서 나왔습니다. 더불어 연구 성과가 산학 협력에 유리한지, 해외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지의 문제로 구분되면서 이공계 전공, 상품성 있는 지식, 해외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 상단에 위치하는, 지식 간 서열화도 심해집니다. 2016년 〈대학 연구활동 실태 조사 분석 보고서[3]에 따르면, 대학 연구비에서 인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2.4퍼센트, 예술체육학은 1.4퍼센트, 사회과학은 7.6퍼센트에 불과합니다. 공학과 의·약학은 43.9퍼센트, 20.4퍼센트로 두 분야를 합치면 과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대학원 정책은 대부분 이공계 육성이자 과학기술 산업에 대한 투자 목적으로 등장해 이어져 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인문·사회계열 지식이 가졌던 사회적 위상은 사회 운동과의 연계 속에서 획득된 정치적 주도성과 담론적 영향력이었다고 생각해요. 거리와 광장에서 생산된 지식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사회 운동이나 학생 운동과의 연계 고리가 약해지고, 각 운동들 역시 약화되면서 인문·사회 학술장의 어떤 총체적 지향이 없어졌다고 보입니다. 물론 사회 변화에 참여하는 지식인의 상은 필요한 때가 있지만 전문화된 학계에서 유일한 모범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전문가로서 어떤 역할 모델이나 훈련, 진로가 다양하게 자리를 잡은 것 같지도 않아요. 낡은 것은 갔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인 거죠.

신진 연구자들과 대학원생은 계속 뭔가는 해야 하고, 또 하고 있는데 정작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 상태로 학계의 속도에 휩쓸리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연구 분야의 동향을 따라가기 바쁘고, 자리 잡지 못하면 결국 튕겨 나갈 것이라는 불안 속에서 시야가 좁아지는 건 아닐까요. 흔히 신진 연구자들에게 기대하는 패기라든지, 총체적인 개념화의 시도가 더욱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문·사회계 구성원들을 묶어주던 공통의 가치나 기준이 사라지면서, 전준하 선생님이 말씀하신 학술 활동의 동호회화가 더욱 심화된 것 같습니다. 더불어 2000년대부터 논의된 인문·사회계의 위기나 교원 고용 구조의 비정규직화는 명백히 성별로 구분된 현상입니다. 현재 대학에 여학생은 많지만 여교원은 적고, 그나마 있는 여교원은 비전임 비율이 높습니다. 또한 직급이 낮은 위치에 분포해 있죠. 그리고 연구 사업과 개발비가 많이 할당되는 이공계열에는 여학생과 여교원 모두 여전히 적게 진입해 있습니다.

2018~2019년 기준 공학계열 여성 대학원생 비율은 20퍼센트가 되지 않고, 공학계열 여교원 비율은 약 5퍼센트로 극소수입니다. 과거에 비해 학계에 여성들이 많아졌지만, 여성 연구자는 낮은 직급이나 변방에 주로 분포해 있는 것을 여러 통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0년 기준 여성 대학원생은 전체 대학원생의 51.2퍼센트지만, 전임 여교원 비율은 24.7퍼센트입니다. 또한 2018년 기준 여성 부교수 비율은 28.6퍼센트, 정교수 비율은 16.7퍼센트로 소수입니다.[4] 이런 현실에서,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의 낮은 사회적 위상과 열악한 대학 내 입지는 인문·사회계 여성 구성원들의 생존 문제와 직결돼 있기도 합니다. 페미니즘의 대중화 흐름도 그래요, 학부 수준에서는 그나마 교양 강의나 자치 활동으로 페미니즘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부침이 있더라도 계속돼 왔죠. 하지만 대학원 교육과 연구 활동에 젠더에 관련된 관점이나 여성 연구자를 키울 제도적 지원이 제대로 정착하거나 시도된 적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들 중에는 차라리 박사 논문 쓸 때가 좋았다고 평하는 분들도 있는데요. 전문직의 특성 자체가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전문직 노동 시장으로서 학계의 경쟁과 승자 독식 구조는 법조계나 의료계에 뒤지지 않게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기업이나 직장의 워라밸을 꿈꾸기는 더더욱 쉽지 않고, 임신, 출산, 양육이나 돌봄의 역할을 수행하면 성과를 못 내는 2등 구성원이 될 것이라고 말하죠. 남성이어도 양육과 같은 가족 내 재생산 노동을 한다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반응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재생산 노동에서 면제될 수 있는 일부 남성 위주로 성과를 쌓을 수 있는 공간이 학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근 번역된 《아이는 얼마나 중요한가》[5]라는 책에서는 미국 대학의 사례를 통해 학계가 테뉴어를 획득하려면 아이를 낳지 않거나 늦게 낳을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된 영역임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를 낳을 계획이 아직 없기는 합니다만, 아이를 낳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공간, 자신과 타인을 돌볼 여유나 지원이 없는 공간은 매력적이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학계 구성원들이 함께 살피고 풀어 나가야 할 중요한 공동의 의제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대중화에 무관심한 학계

현수진 결국은 학계가 여러 층위에서 위계화된 현 상황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 같아요. 저는 다양한 위계의 문제들 중에서 재원의 문제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현재 인문·사회학계에 투입되는 재원은 국가라는 극소수의 주체와 몇 가지 사업으로 축소돼 있고, 그 지원은 소수의 수혜자에게만 닿죠. 인문학이 직접적인 재화를 생산하는 학문이 아니다 보니 재원을 철저하게 외부에 기대야 하는 특성이 있다는 점을 앞서 말씀드렸는데요. 애초에 파이가 작은데 그 파이를 배분하는 방식에 철저하게 위계가 반영되어 있다 보니, 결국 아래층을 차지하는 연구자가 살아남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출신 학부가 극소수 명문대가 아니라면, 출신 학과가 다르다면, 여성이면서 공부와 돌봄, 때로는 생계까지 책임져야 한다면 더욱 그렇죠. 물론 위계의 위층에 계신 분들의 상황도 녹록지 않지만요. 당장 눈앞의 프로젝트와 논문 마감에 숨차게 달리고 있으실 겁니다.

제가 신진 역사 연구자 단체인 만인만색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만인만색은 이런 학계의 구조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학계 내에서 돈 나올 곳이 너무 적어서 문제가 된다면, 학계 바깥에서 재원을 끌어오는 방법을 모색해 보자고 했죠.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를 수료한 연구자들, 즉 훈련받은 연구자들이 먹고살 방법이 없는 현상을 타개하고자 했습니다. 신진 연구자들이 연구자로서 기초 소양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을 활용해 먹고 살지 못한다는 게 슬펐거든요. 그래서 만인만색은 시민 강연, 교양서 출판, 팟캐스트와 유튜브 제작 등 이른바 역사 대중화, 혹은 공공 역사라 불릴 수 있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저는 미디어 팀 팀장으로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책의 기획과 실무를 맡았고, 팟캐스트와 유튜브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나름의 성과도 쌓았습니다. 《달콤살벌한 한·중관계사》는 2쇄를, 《만인만색 역사공작단》은 3쇄를 찍었습니다. 인문학 분야에서는 드문 사례죠. 현재 433화까지 제작된 팟캐스트 ‘역사공작단’은 회당 2만에서 10만 회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은 사회에 재미있고 쓸모 있는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인문학의 효용을 설득하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역사학계의 최신 성과를 요약하고 가공해서 내놓으면 많은 분들이 역사를 그려내는 과정의 논리적 사고를 즐기시더라고요. 역사를 통해 나와 사회의 관계를 비판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는 분들도 계시고요. 한국에서 만인만색 활동을 할 때는 모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나 역사학자가 왜 대중화에 힘써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들을 들었는데요. 영국에 와보니 역사학자가 본인의 전공 지식을 책이나 다큐멘터리, 팟캐스트 등으로 소개하는 활동이 아주 활발했습니다. 또 그런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민도 아주 많아요.

한때는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여러 경험을 거치며 현재는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학자들이 대중화에 뛰어든 것 치고는 상당한 성취를 거두었다고 자평할 수 있지만, 대중화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언가는 아직 이뤄 내지 못한 것 같아요. 우리 신진 역사학자들이 역사 지식으로 먹고살며 공부를 지속하는 구조를 만들어 보자는 본래 목표도 사실상 달성하지 못했고요. 입시 강사로 출발했다가 많은 인기를 얻은 설민석 씨나, 학교 선생님이셨다가 인기 강사가 되어 책도 쓰고 방송도 하시는 최태성 씨의 경우를 보면 사회에 역사학이나 인문학에 대한 수요는 아주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동료들이 7년이라는 나름 오랜 시간 동안 애를 써와도 먹고살 정도의 일자리를 얻기는 어려웠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시민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사와 연구자 집단이 생각하는 역사가 다르고, 연구자 집단이 시민 사회에 다가가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민석, 최태성 씨가 어떻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각각 입시 학원 강사, 학교 교사였던 두 분은 교과서에 기반을 둔 한국사를 다뤘다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두 분은 한국사 교과서라는 정해진 내용을 바탕으로 강의를 하기 때문에 대중들이 그 내용에 이미 익숙한 상태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좀 더 쉬운 것 같고요. 무엇보다 역사에는 정답이 있다는 경향 아래에서 역사를 단정하고 답을 내려 주는 형태의 콘텐츠에 사람들은 더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또 광개토 대왕과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처럼 민족적 감정을 건드리는 콘텐츠, 한국인들이 원하는 ‘위대한 민족의 서사’를 보여 주는 콘텐츠들이 인기가 많죠.

그런데 연구자 집단은 이런 식으로 역사 콘텐츠를 제작하지 않습니다. 역사학의 근간은 정해진 역사 서사가 없다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구자 집단은 연구사의 맥락을 정리해서 역사적 사고력과 창의력 그 자체를 보여주는 형태로 대중화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런 서사와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고, 그래서 연구자 집단이 유명 강사처럼 인기를 얻기는 어려움이 있죠. 그렇다고 해서 연구자가 유명 강사처럼 강의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고요. 이 사고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자 시도하고 있으나 아직은 헤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사회 활동에 대한 학계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들 수 있겠습니다. 학계 내에는 우선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대중화 활동은 제대로 된 공부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사실 저조차도 다양한 역사 콘텐츠 제작을 하며 배우는 바가 많지만, 새로운 역사 지식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역사 지식을 가공한다는 측면에서는 이런 활동을 이른바 제대로 된 공부라기보다는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면이 있습니다. 공부와 실천, 생계를 병행하는 게 쉬운 것도 아닌데 지지받지도 못하니 동력이 희미해진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해합니다. 공부에 집중할 시간도 부족한데,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 시선이 분산되고 공부에 집중할 에너지가 부족해지기 마련이죠. 저만 해도 박사 논문 집필에 집중할 동안에는 여타 활동을 잠시 접어두려고 하고 있고요. 그렇지만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상황에서 인문학 연구자들 스스로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우리와 우리 후배들을 구해줄까 싶습니다. 분명 이런 대중화 활동이 연구자의 질적인 역량 중 하나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설명하지 못한다면 학계와 연구자들은 존중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회적 효용에 대한 설득이 재원을 모으고, 재원이 모여야 학생들이 오고, 학생들이 모여야 학문이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한 다음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바도 있겠지만, 지금 공부 단계에서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있고 그 나름의 가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인문사회과학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이송희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으니 저도 이미 익숙해져 버려 무심코 지나쳤던 학계의 구조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네요. 저는 인문·사회계열 연구자들의 자기 증명이라는 문제를 학계 안팎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됐어요. 지금 우리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담론을 생산해 내는 힘을 잃고, 결국 사회적 투자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자원이 부족하니 공동체가 파편화되고, 그 안에서 생존 위기에 놓인 연구자들은 실적 지표를 향해 야생마처럼 달리기만 하는 것 같아요. 악순환이죠.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해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연구 성과를 사회적 필요와 연결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문제는 학계 안팎으로 인문사회과학계가 신뢰를 구축하는 데 실패해 왔다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학계 바깥에서는 인문·사회계열의 전문성이나 사회적 효용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자에게 실천하는 지식인이라는 역할을 기대하면서도, 연구자의 전문성을 인정하기보다 교양인으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늘어놓는 한량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특히 인문학은 그저 대화를 위해 알아두면 좋을 잡지식이나 취미의 일종인 교양으로 간주되고는 하죠. 교양의 생산자는 사회적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리게 마련이고요.

사람, 사회와 멀어진 인문사회과학

인문학의 위기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는 하지만, 민주화 이후 국내 연구자들이 사회적 담론의 생산자로서의 동력을 급격히 잃어버리게 된 것은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자들이 전문성 없는 교양인으로 취급받게 된 현상은 자초한 부분이 없잖아 있는 것 같아요. 80년대까지 인문학자 혹은 사회과학자들은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며 현대사의 주요 국면마다 목소리를 내는 일을 의무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실천이라는 게 지루한 관성적 형태로 남은 것 같아요. 단적으로 연구자들이 대중 독자와 만나는 주요 통로이자 귀한 지면인 언론사 칼럼만 봐도 전문성에 바탕을 둔 식견보다 시사에 대한 비전문적 논평으로 채워질 때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인상을 저만 받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학계 밖에서 바라볼 때는 인문학자들이란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아무 말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한편, 2000년대 이래로 인문학의 위기를 직면한 학계에서 시민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이나 인문학의 대중화와 같은 캐치프레이즈에 동조하며 정당성을 찾으려 하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문·사회학계의 주요한 최신 성과들은 정작 대중과 만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가령 민족주의나 역사발전론, 정상성에 대한 비판과 같은 주제는 학계 밖에서는 여전히 잘 알려지지 못한 것 같아요. 기껏 연구자들이 스스로를 갈아가며 만들어 낸 결과물은 학계라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만 머물러 있고, 반대로 기존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하는 상식들만 인문학이라는 포장으로 팔리고 있는 셈입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생산성이 지금, 여기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해석의 언어를 제공하는 것에서 온다면 이러한 상황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과학기술이나 응용학문과 달리 우리가 속한 세계에 대한 해석과 담론을 생산함으로써 현재와 미래를 구성하는 다양한 선택에 기여합니다. 그런데 그 생산물이 사회에 닿는 통로가 막힌다면 정말 쓸모가 없어지는 거죠.

인문학의 대중화라는 슬로건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사실 우리 모두 그 지점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의 언어와 담론 그 자체인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정작 사회와 괴리되면 생명력을 부지하기 힘드니까요. 다만 이제는 막연히 진보적인 의제에 목소리를 내는 것, 혹은 학계의 성과와도 거리가 있는 안전한 교양을 재생산해내는 것 이상의 전략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사회가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의제를 설정하고 담론을 형성하는 것에 있어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전문가 집단으로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음을 인정받아야 하니까요. 연구자의 앎과 실천의 일치란 바로 그런 의미로 해석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연구자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학계의 평가 시스템과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학계 내부의 평가 시스템이 권위와 공신력을 인정받아야 사회의 신뢰도 따라올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약탈적 학술지와 같은 학계의 부조리가 드러나는 순간 학계 전체의 신뢰도가 큰 손상을 입는다는 사실은 기사 댓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공계의 경우는 경제적 가치나 신기술 개발 같은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는 경우 만회가 됩니다. 하지만 국내 인문·사회계열의 경우는 신뢰할 만한 평가 시스템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양적 지표가 유일한 표준으로 작용하는 현상이 불가피해 보이기도 합니다.

양적 평가의 문제점은 이미 많이 논의했는데요. 양적 평가 제도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대안이 질적 평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국내에 신뢰할 만한 질적 평가 시스템이 구축돼 있거나, 구축할 방안이 있냐는 물음에도 아마 대부분 부정적인 답을 하실 겁니다. 국내에 대체로 좋다고 평가받는 학술지는 물론 존재합니다. 하지만 편집부가 독립적인 권위와 방향성을 가지고 학술지의 질적 수준을 철저하게 관리하며, 그 결과물에 대해 학계 구성원들이 모두 수긍하는 정도의 학술지는 극히 드문 것 같습니다. 편집부의 영향력이 적거나 거의 없으니 논문 출판은 개별 심사 위원에 따라 좌우되는 운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고, 논문으로서의 최저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은 논문들이 출판되는 일 역시 왕왕 있고요. 반대로 충분히 유의미한 연구가 게재 불가를 받은 경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이 무척 좁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 현 상황을 개선할 방안도 사실 딱히 보이지 않고요.

국문학 전공자인 제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저희 전공은 논문의 생산이 대부분 국내 학술장 내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SCI급 논문이나 피인용지수(Impact Factor·IF)와 같은 지표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른바 등재지로 분류되는 학술지 내에서도 질적 관리가 안 되다 보니…. 저는 다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양적 평가에 의존하는 현 상황에 순응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사회에 제출할 수 있는 지표라는 점에서요. 저희 필드의 경우에는 대체로 논문의 질을 해칠 정도의 편수를 요구하는 분위기는 아니라서 가능한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학계의 재생산이 위기에 처하면 논문 생산성이 있는 연구자를 일정 규모 이상으로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해집니다. 그래야 학계가 존속할 수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질적 향상은 양적 규모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렵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개인 연구 경향이 강한 인문학 연구라고 하더라도 동료 없이 홀로 성장해 훌륭한 성과를 내는 연구자는 나오기 힘들다는 건 다들 공감하실 텐데요, 좋은 성과가 나오려면 먼저 학계 공동체와 동료 집단이 있어야 하고, 공동체가 형성이 되려면 일정 규모 이상의 사람이 모여야 하고, 사람을 모으려면 연구비가 있어야 하고…. 연구비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관계 부처를 설득하는 데 가장 접근성 좋은 기준이 양적 지표라면 일단 거기 맞춰서라도 학계 규모를 유지하고 재생산을 해나가는 선택이 실무적으로는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해요.

결과적으로는 그 실무적 선택들이 모여 학계의 가속화 현상이나 연구 생산성의 젠더 차이와 같은 문제를 낳은 것이겠죠. 논문 편수라는 양적 지표가 이렇게 절대적 기준이 된 것은 사회에 우리의 존재 가치와 전문성을 증명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의 존재 의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죠. 구체적인 내용은 앞서 선생님들의 말씀에서 충분히 나온 것 같아요. 넓은 독자를 상정하는 콘텐츠 생산, 혹은 학계 공동체에 기여하는 여러 활동들이 연구 외적인 일이나 그림자 노동으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의 중요한 활동 영역으로 인정받을 날이 곧 오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이 몰락해온 과정

이우창 지금까지 생생한 경험에 근거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으니, 이번에는 반대로 거시적인 관찰을 이야기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한국의 대학과 고등 교육의 핵심은 등록금 액수, 학과별 신입생 충원율, 졸업생 취업률, 연구자 논문 편수, 분야별 국가 R&D 배분 비율, 이렇게 다섯 가지 수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점은 각각의 값이 실제로 얼마인가가 아닙니다. 이것들이 우리의 국가와 사회가 대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척도라는 뜻입니다.

한국의 시민 사회가 이해하는 대학은 학력과 학벌을 통해 사회적 신분을 가질 수 있는 수단입니다. 대학의 위기론이 언급되면서 지금은 대학 졸업장이 필요 없는 사회라는 목소리가 제법 커졌습니다만, 바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나, 그분들의 자제들을 포함해 한국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좋은 학벌을 보유하고 있거나 그걸 얻으려 하고 있죠. 특히 90년대 학번 이후의 거의 모든 세대에서 대학 진학자가 다수를 점하고 있고, 특수한 직군을 제외하면 대학 외에 개인에게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경로가 없는 한국에서 대학을 향한 수요가 사라질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한국의 시민 사회 주류가 대학을 이해하는 방식이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시민 사회는 ‘좋은’ 대학 교육을 구성하는 게 무엇이며, 연구자와 지식을 생산하는 중심부로서의 대학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게 보면 실용적이고 나쁘게 보면 개인의 이해관계 이상을 보지 못하는 거죠. 시민 사회의 대학 논의가 기껏해야 등록금이 얼마인지, 어느 대학과 학과가 유망한지를 판별하는 정도에서 수십 년째 머물러 있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대학이 수행해야 하는 다양한 역할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충분한 이해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국가는 대학과 연구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정부의 시각을 보려면 크게 세 가지 개념을 지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등록금과 예산 지원 체제가 하나, 입시 제도가 둘, 연구 개발 예산 분배 방식과 평가 제도가 셋입니다. 큰 요점만 짚어보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예산 지원 체제를 중심으로 대학의 등록금과 입시 제도를 통제해 시민 사회에 최대한 싼값으로 대학 교육을 공급하여 유권자들의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하고, 평가 및 지원 체제를 통해 대학과 학계, 연구자를 정부가 필요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특히 2011년 반값 등록금 정책으로 대학의 등록금 수입을 사실상 묶어 놓은 상황에서 정부는 한국의 대학과 학계의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행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를 단순히 국가의 학계 장악이라고 나쁘게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1990년대 이래 한국 대학의 교육 기능이 발달하고, 학자들이 열심히 논문 생산에 매진하게 되는 진전은 정부 정책이 없었다면 이토록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대학의 국제적 경쟁력을 위해 필요한 양에 비해 정부의 고등 교육 재정 지원이 충분히 늘어나지 않고 있으며, 동시에 등록금 인상을 막으니 대학은 인건비 투자를 줄이고 인력을 쥐어짜는 형태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대학원생 및 연구자들이 호소하는 어려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죠.

둘째는 교육부와 연구 재단 등 한정된 인력만을 가진 일부 기구에서 전체 대학과 학술장을 전부 컨트롤하려다 보니 행정 비용이 상승하고 이른바 관료화가 심해지는 필연적인 전개입니다. 저는 교육부나 한국연구재단이 악의를 가진 양 말하는 건 문제를 풀어 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들이 보유한 인적 역량을 넘어서는 역할과 권한이 부여돼 있고, 이것이 비효율을 낳을 뿐인 거죠.
셋째는 대학과 학계가 국제 표준을 따라가도록 하는, 이른바 선진화 과정이 일부 이공계 학계의 기준을 전체 영역에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한편으로 국가 산업과 연결된 특정 분야에 예산이 집중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여러 학문 분야에 한 가지 표준이 강요되면서 비효율적인 연구 환경이 만들어지기도 했고요. 제도적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의 핵심은 큰 방향을 잡고 미세 조정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한국의 학술 제도는, 적어도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조정 과정이 잘 이뤄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국의 인문·사회학계는 스스로의 의제와 제도를 구축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연구 생태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공계 엘리트 및 교육 관료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내어 줬습니다. 1980년대까지의 한국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엘리트 시민을 위한 교양 지식을 전수했고, 전문 지식의 측면에서는 사회가 마주한 문제를 설명하는 분석의 언어를 제공했습니다. 소수의 인문사회과학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고급 지식과 대중 지식 사이의 위계가 명확했던 사회였죠. 그러다 보니 인문·사회학 종사자들은 자신의 학문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구축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학문의 가치는 자명했으니까요.

핵심은 한국 인문·사회학계를 이끄는 이들이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와 학술장에 닥칠 변화를 충분히 이해하지도,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가 맞이한 변화는 크게 세 가지를 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흔히 민주화와 선진화로 요약되는 진보가 실제로 이뤄지면서 이전 시대의 인문사회과학적 패러다임이 더는 지식의 위계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유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입니다. 둘은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 유학파가 대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상승하고 한국 학술장이 북미 학술장의 중력에 강한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국내산 연구자’들의 발언권과 영향력이 계속해서 축소돼 왔다는 사실입니다. 셋은 방금 말씀드렸듯 1990년대 이래 국가 기구를 중심으로 학술장의 제도를 정비하고 연구 양식을 규율하는 장치들이 빠르게 갖춰지면서 제도적 의사 결정에 있어 소수의 중심부가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변화에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을 포함해 포괄적인 의미의 인문사회과학 지식이 이전과 같은 위상과 권위를 유지할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05학번인 제 또래로만 와도 문학은 일종의 취미이지 과거와 같은 고전 교양이 아닙니다. 또 미국 학술장의 영향권 내에서 80년대까지의 인문사회과학 연구는 순식간에 낡은 것이 되었습니다. 1990년대부터는 북미에서 유행하는 연구 모델을 가져다가 적용하는 게 곧 한국을 설명하는 지식이 됩니다. 새로운 조건 속에서 인문사회과학의 정당화를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런 요구가 제기돼도 빠르게 묻혔죠. 오늘날의 위기는 인문·사회학계가 스스로의 발전과 존립을 제도화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지도, 또 그를 위한 정당한 논리를 만들어 내지도 못한 것에서 기인합니다.

그 결과는 오늘날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이미 익숙한 광경입니다. 일부 국학 계열 연구 분야를 제외하면, 우리 연구자들은 영어권 중심의 학술지에 영어 논문을 게재하는 게 가장 중요한 학문적 업적이 됐습니다. 이전 세대 연구자들이 억지로 끌려가듯이 썼다면, 이제 젊은 미국 유학파 연구자 중에서는 정말로 영어권 학술지만이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경우가 많죠. 물론 많은 분야에서 영어권 학술지가 좀 더 충실한 논문의 비중이 높고, 영어권 학술 논문과의 조우가 한국 연구자들의 학문적 기준과 다양성을 끌어올리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한국 사회에서 전문 연구로서 인문사회과학이 존재할 이유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인문학자들이 한국 학술장 및 사회와 교류하고 그에 기여하는 정도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죠. 영문학의 예를 들면,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페미니즘 연구 같은 분야를 포함해 영문학 전공자들이 중요한 학술 서적을 번역해 한국의 학술 문화 및 사회의 담론 형성에 참여하는 광경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그런 열망이 상당히 줄어든 것 같아요.

현실적으로 인문·사회 분야에서 영어 논문은 내용이나 학술지의 위상에 상관없이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의 인접 분야 연구자 중에서도 이를 굳이 찾아 읽는 사람이 없으니 시민 사회에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지식과 다름없죠. 한국 학술지에도 많은 논문이 실리지만, 연구자들 본인이 한국 학술지에는 소위 힘을 뺀 논문을 써도 된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만큼 정말 좋은 한국어 논문은 점점 드물어집니다. KCI 등재지는 양적인 실적을 채우는 데 쓰고, 질적인 평가는 영어권 학술지에 내는 걸로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즉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제도와 존재 이유가 모순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어권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식으로 제도에서 높은 보상을 받는 행동을 하면 한국 시민 사회에서는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죠. 거칠게 말해, 한국 사회에 아무런 유용성과 의미를 제공하지 않고, 또 그렇다고 이공계 지식처럼 즉각적인 실용성이 있지도 않은 분야에서 왜 연구자를 위해 시민 사회가 세금을 지원해야 하는지 납득시킬 수 없는 겁니다.

단적인 예시로 1990년대 이후 한국 인문·사회 학술장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학계의 존재 이유를 설득할 수 있는 스타를 거의 생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적 지식인을 수행하는 학계의 대변인이 자라지 못하는 구조가 됐죠. 여기서 가장 비극적이고 황당한 지점은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과거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계속해서 논문을 쓴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성실한 연구자들은 예전보다 크게 늘었는데, 학계의 사회적 지분이나 위상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연구의 가치는 하락하는, 그래서 예전의 명백히 덜 성실했던 선배들보다도 미미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가 된 겁니다. 영어 논문을 많이 써서 정교수가 되겠다는 게 유일한 야심이 되는 상황이면 똑똑한 학생들이 안 오는 것도 당연하죠. 학문이 시시한 것이 돼버리면 정말 심각한 거예요. 심지어 지금 이런 상황이 뭔가 문제가 있다고, 학계가 사회로부터 뿌리를 뽑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조차 거의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이걸 자기 객관화 능력의 집단적인 마비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인문사회과학은 언제 필요해지나


이우창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한국 인문사회과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국가의 자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출판 시장의 규모에서도, 전문적인 인문사회과학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독자층의 크기에서도, 한국 인문·사회 분야가 민간 영역의 지원에만 힘입어 자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즉 인문·사회 분야의 생존과 발전은 시민 사회와 국가에 유의미한 존재 이유를 제시하고 설득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전제 위에서 우리의 학계가 나아가야 하는 몇 가지 지향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현대 사회에서 고등 교육과 대학, 전문 연구가 어떤 의미인지 규정하는 담론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떤 고등 교육을 필요로 하고, 또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전문 지식이 왜 필요한지를 제대로 생각해 보자는 거죠. 그래야 대학이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이나 산업을 위한 인적 자원 공급처라는 인식에 갇히지 않으면서 연구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문사회과학의 역할과 정당성 같은 문제를 본격적으로 꺼낼 수 있겠죠.

무엇을 할 것인가

저는 “인문사회과학은 취업에 쓸모가 없으니 폐기 혹은 축소돼야 한다.”는 식의 조악한 경제 논리와 그 반대편에 있는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인문사회과학에는 어쨌든 근본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보존해야 한다.”는 식의 근거 없는 신비주의, 둘 모두와 거리를 둬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취미 활동이 아닌 국가적 자원이 투입되는 제도로서의 학문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인문·사회 분야의 존재 의의, 특히 그것이 현대의 시민 사회 및 국가의 작동에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인문·사회 전공자들은 오늘날 인간 사회가 어떤 과제를 요구하는지 명확히 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국가와 사회가 지속하고 발전하려면 자신을 이해하는 서사를 만들고, 스스로의 문제와 약점을 분석해야 하죠. 이는 이공계에서 수행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닙니다. 당연하지만, 미국에서 유통되는 사회 분석을 참조할 수는 있어도 그걸 그대로 한국 사회에 적용하는 건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두 사회는 제아무리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해도 다른 세계이고,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계의 문제를 질문할 능력을 상실한 것, 그것이 오늘날 한국 인문·사회 학술장이 쇠퇴한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이유입니다. 바꿔 말해 그러한 물음을 던지는 능력을 회복하는 데서 학문의 부활 역시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지향 세 가지를 이야기해 보죠.

첫째, 인문·사회 연구자들은 학술장에 관련된 의사 결정 제도에 좀 더 깊이 연결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다시 네 가지 과제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다수의 연구자가 지닌 문제의식을 대변하고 또 의사 결정 과정을 공유하는 경로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제아무리 많은 연구자가 불만을 품고 있다 한들, 그것이 대표되지 않는다면 영향력이 없습니다. 학계의 의지를 대표하는 기구나 집단을 구축할 수 있겠죠. 다음으로 국가 기구와 소통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넓은 범위의 연구자 집단과 공유해야 합니다. 더불어 학술 관련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연구자들에게 대학원생 시절부터 관련 기구에 참여하는 경험을 체계적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진 연구자부터 중진, 원로까지 학계의 불만 사항을 빠르게 접수하고 이를 학술장의 개선에 반영할 수 있는 여러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합니다. 굳이 제도적이지 않더라도 연구자들의 개혁적 요구를 신속하게 구현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자는 것이죠.

둘째, 인문·사회 연구자의 사회적 역할을 더욱 확장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하나는 직접적으로 대학에서 교수로 취업하는 것 이외에도 연구자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유의미하게 활용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고, 대학원 교육 과정 또한 이를 위해 확장돼야 합니다. 현재 추세에서 대학원 학위를 취득한 모든 사람이 대학에서 일자리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들의 지적 훈련에 투입된 자원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의미한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더불어, 앞서 말씀드린 것입니다만, 한국 인문·사회 학술장도 미국식으로 말하자면 ‘슈퍼스타’를 만드는 게 필요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이자 공적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문제 설정을 주도할 수 있고, 학문의 최전선에 서서 학계를 바꿀 수 있는 지도적인 연구자들이 배태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씁쓸한 일이지만, 학계 외부의 사람들은 스타를 통해 학계의 존재감을 인식합니다. 90년대 학번 이래 스타를 재생산하지 못했고, 따라서 사회의 존경을 상실한 것이 인문사회과학이 맞이한 위기의 원인 중 하나라면, 우리는 다소 불편할지라도 어떻게 사회의 인정을 다시 획득할 수 있는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답이 꼭 슈퍼스타 시스템의 구축일 필요는 없습니다만, 지금처럼 그냥 모범생처럼 튀지 않고 좋은 학벌, 좋은 학술지에 논문을 몇 편 싣는 연구자가 곧 이상적인 연구자처럼 인식되는 현실이 지속된다면 사회가 학계를 존중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상황 역시 심화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인문·사회 학술장은 스스로의 학문적 주도권을 되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학술장이 단지 북미 학술장의 유행을 5년 정도 늦게 받아들이거나, 그때그때 정부와 산업계에서 골라주는 몇 가지 융복합적 주제를 따라가거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학과별 칸막이에 따라 안전하지만 무미건조한 연구만 수행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핵심은 한국어로 구성된 학술장을 혁신적이고 유의미한 질문을 던지는 환경으로 가꾸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먼저 좋은 한국어 학술 논문을 발굴하고 많은 연구자가 주목하게끔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그러한 논문들을 바탕으로 학술적인 논쟁이 진지하게 전개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들을 마련해야겠죠. 매우 커다란 과제일 수 있습니다만, SNS에 재미있게 읽은 논문을 공유하고, 논평을 덧붙이는 일상적인 수준의 실천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강수영 이우창 선생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선들을 잘 짚어 주신 것 같아요. 저는 그중에서 일부를 받아 제 경험과 연결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국가사업이나 대학원 운영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관리의 측면이 강화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가 체계를 촘촘하게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라, 사업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과 장치가 촘촘히 설계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참여했던 SSK사업의 경우에 ‘국가 어젠다 설정’이 큰 목적이라면, 연구단이 그 목적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고 지원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으로 의회에서 정기 토론회를 열든, 정책 자료집을 발간하든지 간에요.

현재는 상대 평가로 연구단끼리 경쟁을 붙이는 것 외에,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특별한 장치가 없습니다. 연구원이 사업단 내에서 연구 진행에 어려움을 겪거나 불합리한 처우를 당하더라도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대학원 운영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수의 대학원생이 진로 설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수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요. 앞서 이우창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학술장의 의사 결정 제도 구축과 연결되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요, 학술장의 운영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집단에게 제도적으로 분배하고, 공통의 개선을 위한 경로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해서 인식과 관련한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요. 인문· 사회 연구자들의 사회적 역할을 확장하는 데 있어서도 학계 내에서의 인식이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짧지만 몇 년간 학교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것인데, 학계 내에만 있다 보면 교수를 정점으로 하는 계급 사회에 익숙해지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작은 사회인지를 종종 잊어버리게 됩니다. 동시에 많은 개인이 진로와 생계 불안에 시달립니다. 예전처럼 교수가 학생을 책임지고 선배가 후배를 책임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고 한다면, 계급 의식을 하루빨리 버리고 각 분야에 적합한 경로 사다리를 함께 개발하고 지원해 학계의 외연을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례로 저는 서울시에 와서 ‘서울 데이터 펠로우십’이라는 사업을 신설해 운영하고 있는데요. 서울시 연구를 진행하는 대학원생 팀을 지원하고 결과를 정책에 반영하는 사업입니다. 작은 사업이지만 전문 연구자들이 공공의 의사 결정에 빠르고 유의미하게 개입할 수 있는 모델을 고민하고 있는데요. 여러 좌충우돌이 있겠지만, 일단 학계라는 가두리를 조금 더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는 연구 집단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제가 속한 분야의 연구자분들과 모여 문제의식을 공유하곤 하는데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결국 변화가 조금씩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힘을 받습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의사 결정 제도를 구축하는 일도 그렇고, 외연을 확장해야 하는 일도 그렇고, 연구 집단을 만들어가는 일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마주침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 것 같네요.

연구자들의 조직적인 참여

김보경 처음 논문 투고 시스템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논문 저자가 학회 연회비, 심사료, 게재비 등을 직접 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연회비나 심사료는 그렇다 쳐도, 내 글을 싣는데 저작권료를 받는 게 아니라 게재비를 낸다는 개념 자체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당시에 한 선배에게 이게 말이 되냐고 물었는데, 여기가 원래 이런 곳이라는 자조적인 답을 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나중에야 이러한 회비나 게재비로 학회가 굴러간다는 것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관행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저는 누군가가 그때 제가 던졌던 질문을 제게 던진다면, ‘여기가 원래 이런 곳’이라는 대답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나중에야 지식의 공공성을 증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오픈 엑세스 운동(Open Access·OA)과 같이 학술지 논문 투고, 게재, 사용과 관련한 시스템을 개선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제야 제가 느꼈던 이상함 혹은 부당함이 사소하지 않다는 걸 느꼈어요.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감각을 출발점 삼아 학술장의 생태계를 진단하거나 이를 개선하기 위해 실천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감각의 중요성을 새삼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그러한 낯설게 보기의 감각이 무뎌지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런 문제의식을 연구자와 대학원생 집단으로서 표명하기 어려운 현실적 장벽들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된 생계유지 노동이나 노동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각종 잡무들로 인해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요. 특히 비정규직 연구자의 경우, 실적 압박이 클 수밖에 없어서 다른 활동을 하기에 부담스럽죠. 이런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일단 학술장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반적으로 공유돼야 할 텐데, 그조차 미진한 것 같습니다. 자원과 권한을 많이 갖고 있는 교수들과는 문제의식 공유 자체가 어렵기도 해요. 힘이 빠지죠. 훌륭한 인문학 연구자라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한눈팔지 말고 자기 공부와 글쓰기에 전념해야 한다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듣게 되고요. 이런 상황에서 제도에 대한 성찰은 한눈파는 일이 됩니다.

다소 원론적인 귀결입니다만, 학술장의 한 구성원이자 행위자로서 공동의 책임 의식과 관계성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집단적 움직임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실천이 연구자의 경력을 깎아 먹는 일로 느껴지면 안 되겠죠. 자치회를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동료와 함께 활동할 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하며 기쁨과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이 기반이 되어 학교의 경계를 벗어나서 다른 연구자들을 만나 또 다른 네트워크를 접하는 기쁨도 크고요. 무엇보다 추상적으로 보였던 제도나 정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도 연구에 있어 중요한 경험입니다. 민주적인 연구 생태계를 만드는 과정에 연구자들의 참여를 보장하면서 효능감을 부여하고, 느리게나마 연구자의 모습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다면 각자의 연구 또한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명문대 대학원은 은마 아파트다

유현미 결국 조직화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학계 외부를 겪어본 저 역시도 학계만큼 내부의 위계나 차별 구조에 대해 이렇게까지 개입하지 않는 무능한 조직이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지나친 불평등이나 격차는 내부의 불만과 분열을 낳아서 오히려 비효율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건, 조직 경영의 차원에서나 통치의 관점에서도 상식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대학이나 학계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 같습니다. 지속 가능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고민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관리하지 않아도 저희가 주로 소속된 수도권 종합 대학의 대학원, 아니면 소위 명문 대학이라 불리는 곳에는 학위나 자격증, 그리고 학연을 획득하기 위해 사람들이 어찌 됐든 모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아는 어떤 대학원 동료는 명문대 대학원을 은마 아파트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시설은 낡았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투자 가치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거죠. 그래서 아무도 대학원 교육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고 내부의 문제를 같이 해결하기보다는 각자 풀어 나가려 합니다. 그리고 졸업하면 끝, 자리 잡으면 끝이라는 거죠, 한 웹툰 제목이 〈대학원 탈출일지〉[6]인 것처럼 말이죠. 헬조선 담론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은데요, 학계를 탈출해야 할 미개한 공간으로 인식한다면 이우창 선생님이 말한 학술적 주도권의 역량은 나올 수 없다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전임 교원들이나 학계에서 위계가 높거나 지위가 안정적일수록 연구자 정체성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을 조금 더 가지고 신진 연구자, 학생과 함께 제도를 설계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그들이 먼저 바뀌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죠. 대학원생노동조합이 설립되거나 만인만색 활동처럼 신진 연구자들이 이미 집단이나 조직으로서 스스로의 문제를 인식하고 바꿔 나가는 활동들을 모색하고 있는데요. 이것들을 잘 갱신하고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고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기된 여러 문제들이 노조라는 형태의 모델로만 풀어 나가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에 더해서 자치 모임도 많아지고 학과와 대학을 가로지르는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활성화돼야 합니다. 결국 그러려면 대학원생과 교원 모두에게 이런 활동이 성취로 인정돼야 하죠.

더불어서 학계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젠더 관점의 전면적인 고려가 필요함을 반복해서 강조하고자 합니다. 생물학적 여성에게 혜택을 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쉼 없는 돌봄 노동과 생계 노동에서 벗어난 자들만이 이상적인 연구자로 인정받는 경향을 깨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지금 학계를 굴리지만 저평가되거나 보이지 않았던 노동과 활동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성들이 현재의 체제에서 소수가 되지 않으려면 남성 중심적 네트워크를 넘어설 수 있는 다른 네트워크의 모색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우창 선생님과는 큰 틀에서는 같지만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하는데요. 이우창 선생님은 우리의 유용성을 사회에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회 역시 학계의 위계 구조에 맞춰 우리의 목소리를 선별하고 주목합니다. 학계의 의견을 청취하고 지식을 활용할 때, 그 생산자의 급을 학계 내 지위로 판별하고자 하는 거죠. 그래서 교수나 박사가 아니면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자리, 토론회나 정책 결정의 장에 잘 부르지 않거나 불러도 학생과 청년의 목소리로만 소비해요. 이런 구조하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자신 있게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지식을 생산하고,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들도 잘 대우해달라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학계의 불평등 구조 변화는 외부의 변화와도 함께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사회가 학계 구성원들을 대하는 틀 역시도 세세하게 변화해야만 학계의 창의성이나 새로운 움직임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전준하 여전히 학계에 애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계속 고민하게 되는데요. 반쯤 농담으로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학계 구조 조정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구조 조정도 하나의 방법론일 뿐 방향성이 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교수들이 가진 권력과 자원을 학술장에서 가려진 수많은 구성원에게 분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쯤 되면 지금 권력과 자원을 쥐고 있는 전임 교수들은 더 이상 학술장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게 증명이 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진 연구자에게 책임과 권한을 함께 줘도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방향성을 하나의 원칙으로 둔 채로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봐요.

앞서 대학원 제도의 과도한 교수 의존성을 문제 삼았는데, 범위를 넓혀서 학계 전체를 보더라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안정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주로 전임 교수에게만 주어지니까요. 학계에 남고자 하는 연구자들은 결국 전임 교수로 임용되기 위한 경주에 참여하게 됩니다. 앞서 언급했듯 그만큼의 책임도 함께 떠안게 되지만 교수가 얻을 수 있는 제도화된 상징 권력을 갖고자 노력하는 것이죠. 이미 상황이 이럴진대 학술 정책이 계속해서 교수 의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을까요? 실제 학술장을 구성하는 많은 구성원들, 강사 등 비전임 교원, 대학원생, 대학 바깥 연구자들의 존재와 기여를 인정하고, 이들이 전임 교수로 향하는 경주에 참여하는 일원이 아닌 그저 연구자로서 학술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적절한 권리와 책임이 주어져야 합니다.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와 같은 주제로 열리는 토론회에서 무릇 나오는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 그 지원이 누구를 통해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시 강조하자면 학술 및 연구 정책이 지금의 전임 교수들이 아니라 그들 뒤에 가려진 다양한 학술장의 구성원들에게까지도 가닿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은마 아파트처럼 오랜 기간 미뤄온 재건축 작업을 시작해야지요. 물론 그로 말미암은 이익을 특정 집단만이 독차지하지 않도록 하면서요.

이공계 모델을 복붙하면 곤란하다

이송희 저도 대학 교원의 경우 오히려 연구자 정체성을 내려두는 게 좋을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특히 대학 전임 교수는 대학 제도 내 행위자로서의 책임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한 자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요즘 들어 하게 되는데요. 당장 인구 절벽에 따른 학령 인구 감소로 인해 입학 정원 미달 사태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속 학과가 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경우 역시 많을 겁니다.

인문학의 위기 타령이 등장한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선배 세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간 동안 대학 교수의 권위와 자원을 갖고 있었다면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죠. 모두가 투사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도권 내의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행위자로서 자신의 역할과 권한을 자각해 주셨으면 해요. 제3자의 일인 듯 관망하며 인문학의 위기를 통탄할 것이 아니라, 보다 실효적으로 정부와 사회를 설득할 담론 전략을 모색하고, 실제로 우리의 필요와 요구 사항이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여러 차례 언급됐듯 예산 규모도 그렇지만, 국가 연구비 처리 기준이 이공계 모델을 표준으로 두면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문·사회학계의 정치력 부재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랩실 단위로 움직이는 이공계 모델은 개별 연구자의 독립 연구 위주로 이루어지는 인문·사회학계의 생태와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논문 출판 주기도 다르고, 연구비 예산 항목도 전혀 다르죠. 이공계 모델에 맞추려 하면 할수록 인문·사회학계의 다름은 열등함으로 보일 겁니다. 그런데 이공계 모델이 인문·사회학계에 그대로 적용되기까지 사실상 저항이 없었고, 지금 우리는 그 침묵의 대가를 치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백번 양보해 예산이 절대적으로 적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연구 수행이나 연구비 처리 방식에서의 특수성을 무시당하는 것은 그것을 설명하고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기자재와 실험 재료 등 설비에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이공계와 달리 인문·사회학계는 인적 자원, 즉 연구자에 대한 인건비 투자가 무척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물론 가장 필요한 건 예산 증액이지만, 현 수준의 예산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와 학술 대회 지원 사업은 모두 인건비 지출을 금지하고 있습니다만, 학술지 지원 사업에서 인건비 지출을 허용하면 심사자나 편집부, 그리고 실무 인력에게 적절한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학계의 그림자 노동을 줄이고 학술지의 질적 제고를 꾀할 수 있습니다. 또 현재 학술 대회 지원 사업은 발표비나 토론비 지급을 금지하고 있어서 현실적으로 지출 가능 항목이 자료집 인쇄비 정도밖에 없는데요. 발표비와 토론비 지급을 허용하는 대신 지금처럼 하루에 열 명씩 욱여 넣는 프로그램보다 소수의 발표를 심도 있게 다루는 학술 대회를 유도한다면 오히려 소기의 목적을 더 잘 달성할 수 있습니다. 발표비가 보장된다면 공모를 통해서 학술 대회 발표자를 선정하는 일도 가능해지고요.

사실 한국연구재단에서도 이런 문제를 모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학회 발표자 인건비 지급 제한을 없애거나, 학술 대회나 학술지 단위로 지원하는 대신 학회에게 지원금을 주는 방안 등 여러 가지 제안들이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언제나 교육부나 기획재정부를 설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예산 지급 대상을 선정하고 정책을 만드는 관료 조직의 기준에 맞추는 동시에 정책 대상자인 연구 현장의 필요에 부응하는 게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학술 제도와 관련된 활동 역시 학계의 존속과 관련된 무척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우창 선생님 말씀처럼 대학 안에서만 20년, 30년 생활한 연구자가 갑자기 국회나 교육부를 설득하기는 어려워요. 정책 활동의 중요성이 공감대를 얻는다면 신진 연구자에게 학술 정책 전문가의 길도 열릴 수 있습니다. 연구자의 진로가 확대된다면 지금처럼 대학에 자리 잡지 못하는 경우 실패한 연구자로 간주되는 풍토를 바꿀 수도 있죠.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학계가 팔방미인 연구자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 대학들은 한 명의 교원이 개인 연구, 연구비 수주, 교육을 모두 잘 수행하길 요구합니다. 이 때문에 사실 전임 교원이 된다고 한들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는 탄식이 항상 들려오는데요. 여기에도 사실 연구자가 학계에 이바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연구 성과뿐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자니까 기본적으로 연구는 해야 하고, 반면에 학과와 학계를 유지하고 후속 세대 양성을 위해 꼭 필요한 활동들은 그저 부수적인 일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사실 노동량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학계에 나온 초짜 주제에 제가 언급할 수 있는 주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예 영역별로 트랙을 나눠 임용하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한 학과에서 사업을 위주로 할 교수와 연구를 위주로 할 교수, 교육을 위주로 할 교수를 별도의 트랙으로 뽑고 그에 따라 별도의 실적 기준을 부과하면 안 될까요? 그게 가능하다면 대학원생이나 신진 연구자들도 자신의 강점을 적재적소에서 다양하게 발현할 수 있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더불어 학계 구성원으로서의 효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지금도 비전임으로 강의 전담 트랙이 있긴 하지만 사실 행정 일도 떠맡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을 보면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이기는 합니다만.

조승희 저는 인구 절벽 문제에 대한 걱정을 교수가 된 지 10~20년이 지난 분들이 아니라, 최근 1~2년 사이에 교수가 된 분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어요. 그 분은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대학원 진학을 홍보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고민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각 대학에서 이미 영향력과 권력을 가진 교수들보다는, 지금 막 임용되기 시작한 교수들이 인구 절벽을 더 강하게 체감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학에서 영향력을 가진 분들은 사실 인구 절벽의 폭풍우가 대학에 채 닿기도 전에 아마 대학을 떠나실 수 있는 분들이고, 지금 막 교수직으로 임용되기 시작한 세대는 그 바람을 온전히 다 맞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 같고요. 학생이 적은 새로운 대학 환경에서 인문학 생태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저희 세대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공계 대학 내 인문대학이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넘어가고 싶어요. 전 이게 꽤 반가운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지속됐으면 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공계 대학의 후속 세대에게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걸 총장과 교수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반증 같습니다. 인문학을 배움으로써 이공계 학생들은 이공계 수업에서 접해 보지 못한 방법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고, 나열된 역사적 사실을 익히기보단 역사에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우고, 윤리적인 행동이 무엇인지 외우는 게 아니라 무엇이 윤리의 영역에 들어가야 하는지 논의하는 법을 배우고, 과학기술의 성과보단 과학기술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삶을 깊이 관찰하는 법에 대해 배울 수 있죠.

저는 솔직히 얘기해서, 이공계 대학 안에 있는 인문·사회학자들이 ‘교양 있는 이공계인’을 육성하는 역할을 맡는 것까지는 아주 큰 불만은 없습니다. 저희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이기도 하고,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 역할을 수행하는 인문학자들이 적어도 대학 안에 있는 동등한 지식 생산자로는 대우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문학자들은 새로운 기술의 윤리성을 논하거나, 아주 최신의 과학기술에서 매우 오래된 아이디어를 찾아냅니다. 때문에 이공계 사람들과 나란한 위치에서 해야 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해요.

수평적 네트워크 만들기

현수진 저는 학술장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인 연구자 집단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이우창 선생님은 인문·사회 연구자들이 국가 고등 교육 정책 및 제도에 목소리를 내고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가지각색의 목적을 지향하는 연구자들 간의 횡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재 연구자들의 대표적인 네트워크는 본연적 기능인 학술 업무를 수행하는 학회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인문학계의 학회 운영은 보수화된 경향이 있습니다. 학회 임원진은 학번 순으로 선출하고, 학회 노동은 봉사 활동이 되죠. 학회라는 네트워크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담기에는 경직됐다고 봅니다. 다소 이상적일 수 있겠지만, 학회가 학술 지식과 담론을 생산하는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학회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학회의 학술 활동에 참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학회 임원진들도 사실은 관습상 그 직책을 맡아야 하기 때문에 맡는 경우가 많고, 실무진도 지도교수나 선배의 권유에 거의 무보수에 가까운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죠. 학회 발표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지적 호기심 때문에 간다기보다는 지도교수를 따라, 선배를 따라가야 해서 가는 경우가 많고요. 학회 임원이 되면 학적 권위와 명예를 얻을 수 있도록, 학회 실무진이 되면 적게나마 생활할 정도의 월급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해 연구자 개인의 지적 관심사에 따라 발표와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너무 많은 학회 수를 줄여 노동 강도를 줄이고 학회 자체의 권위를 높이는 방향과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물론 이를 위해서는 학회 운영과 재정 등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또 생겨나지만요. 어쨌든 의논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런 노력과 함께, 다양한 목적을 가진 수평적인 형태의 네트워크가 많이 조직되고 활발하게 운영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속한 대학의 사학과 학생회 같은 대학원생들의 풀뿌리 조직이 대학원생의 생각을 대변하고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대의 기구로 작동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 대중화 혹은 공공 역사에 관심을 두고 활동한 만인만색처럼 학계와 시민 사회의 소통을 염두에 두고 그 소통 목적과 방식을 고민하는 조직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학계는 시민 사회에게 인문학이 왜 중요한지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사회가 인문학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논의해야 하는 것이죠. 결국 사회와의 소통을 꾀하는 조직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사실 그동안 이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운동을 전개하다 보면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속한 만인만색도 그렇고요. 이런 종류의 횡적 네트워크를 지속해 나갈 때 마주치는 가장 어려운 지점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심한 노동 강도, 쉽지 않은 세대교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의기투합해서 무언가를 시작하더라도 곧 일을 하는 사람만 계속 하게 되는 거죠. 더불어 많은 연구자 네트워크가 새로운 세대를 들여 오고 그 세대의 능동적인 아이디어로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데 실패했다고 판단합니다. 그저 기존의 질서를 만들면, 새로운 세대가 그 질서에 편입되는 식이죠. 결국 기존에 계속 논의됐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문제가 있음을 반복적으로 말하는 데서 그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연구자들의 횡적인 네트워크가 정말로 횡적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반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반성의 시간을 갖는 네트워크를 많이 보지는 못한 것 같아요. 우리 네트워크가 기존의 관습을 편안해하고 그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지는 않은가, 우리 네트워크 내부의 의사 논의 및 결정 과정이 민주적인가, 우리 네트워크가 새로운 구성원의 생각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 네트워크는 새로운 구성원의 유입을 위해서 어떤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등등을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점검 결과 더 이상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는 해당 네트워크가 그동안 쌓아온 역사와 경험을 과감히 버리고 발전적 해체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요. 또 누군가에게 네트워크 운영을 위한 짐을 져달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마련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명감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건비까지 톡톡히 쳐서 조직 운영에 드는 비용을 어떤 방식으로 조달할지 고민하고 논의하고 실현하는 그런 과정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1]
전준하, 〈철창 속 일차원적 연구자〉, 《과학뒤켠》, 2019.
[2]
한국사회과학 지원사업단, 〈SSK 연구 생태계의 구조: 전공영역과 어젠더를 중심으로〉, 2019.
[3]
2005년부터 한국연구재단은 〈대학 연구활동 실태 조사 분석 보고서〉를 발간해 왔다. 2005-2017년까지의 보고서 자료를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유현미, 《대학 성폭력의 지속과 성별화된 능력주의 - 2010년대 한국 대학 사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2, 81-85쪽.
[5]
메리 앤 메이슨 외 2인(안희경 譯), 《아이는 얼마나 중요한가》, 시공사, 2022.
[6]
요다, 〈대학원 탈출일지〉, 네이버웹툰,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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