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겨울

12월 19일 - FORECAST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유럽은 이번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까? 진짜 에너지 위기는 지금부터다.

  • 한파가 몰아치며 유럽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 러시아는 에너지를 넘어 추위를 무기화하고 있다.
  • 만반의 준비에도 유럽은 춥고 어두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다.

REFERENCE_ 한파

한파가 매섭다. 북극의 찬 공기를 가둬두는 제트 기류가 느슨해져 북미, 유럽, 동아시아를 덮쳤기 때문이다. 대만에서는 이번 한파로 인해 이틀 동안 99명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전례 없는 기온 낙폭에 전기와 난방 수요도 늘었다. 한국전력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4일 순간 최대 전력 수요가 올겨울 최고치를 경신했으며 전력 공급 예비율은 12퍼센트를 밑돌아 올겨울 들어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주택용 열요금[1]은 국제 가스 가격 인상의 여파로 지난 8개월 동안 37.8퍼센트 올랐다. 내년에는 전기료와 가스비가 올해 대비 두 배 안팎으로 인상될 예정이다. 전쟁으로 유가 및 가스 현물 가격이 급등한 것에 더해 한국전력공사와 한국가스공사의 경영 정상화를 위함이다. 고된 겨울이 되겠지만 차라리 한파는 잠시다. 세계를 잠식한 겨울은 삼한사온이 아니었다.
BACKGROUND_ 겨울

세계 경제는 이미 겨울을 경험하고 있었다.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으로 인해 증권은 주저앉고 기술 기업을 중심으로 해고 칼바람이 불었으며 스타트업은 IPO를 미뤘다. 성장 일변도였던 국내 기업들 역시 ‘계획된 적자’를 멈추고 수익성 개선에 집중했다. 대표적으로 쿠팡이 흑자 전환을 하며 시장을 놀라게 했다. 웹 3.0도 겨울이었다. 안 그래도 위축되던 투자 심리에 ‘루나 사태’와 ‘FTX 파산’이 결정타를 먹이며 ‘크립토윈터(Crypto-winter)’를 불렀다. 이 모든 겨울의 직·간접적인 원흉으로 지목되는 것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그의 군대가 쏟아부은 화력은 전 세계에 눈을 내렸고 러시아 가스 회사들이 잠근 가스 밸브는 에너지 가격의 천장을 열었다. 그가 동원령을 내려가면서까지 전쟁을 장기화한 것은 곧 겨울이 온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짜 겨울이 왔다.
NUMBER_ 85

가장 큰 피해자는 유럽이다. 몇 주 전만 해도 에너지 위기를 이유로 유럽의 겨울을 걱정하는 보도가 많았다. 유럽은 기후 의제를 선도하는 만큼 화석 연료를 탈피하고 재생 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브릿지 연료[2]로서 천연가스와 원자력을 활용한다. 유럽은 러시아에 전체 가스 공급의 40퍼센트를 의존한다. 재생 에너지 비율이 높은 독일은 재생 에너지 의 수급 불안정성을 천연 가스로 해결해 왔다. 원전 강국인 프랑스는 원전 56기 중 26기가 원자로 마모로 가동을 멈춰 원자력 생산량이 3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유럽은 이번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을까? 놀랍게도 12월 16일 기준 유럽연합(EU) 국가 전역의 가스 저장량은 84.59퍼센트에 이른다.
STRATEGY 1_ 사재기

어떻게 가능했을까? 러시아산 PNG(파이프라인 천연가스)가 막혀버린 EU의 선택은 배로도 수송 가능한 LNG(액화 천연가스)였다. #PNG와LNG의차이점 사들일 수 있는 LNG를 싹쓸이하며 필사적으로 저장고를 채웠다. EU의 집행위원회(EC)는 지난 3월 25퍼센트에 불과하던 저장량을 겨울철 수요를 대비해 11월 1일까지 80퍼센트까지 끌어올리기로 했다. 가격 협상력을 위해 이른바 ‘공구’를 진행할 수 있는 ‘EU 에너지 플랫폼’도 설치했다. 6월에는 가스 저장 시설을 중요 인프라로 간주해 가스 저장소의 인증 절차를 강화했다. 11월 중순 EU는 당초 목표를 훨씬 앞당겨 저장소의 95퍼센트 이상을 채웠다. 날씨가 추워지며 저장량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매우 안정적인 수준이다.
STRATEGY 2_ REPowerEU

세부 계획을 살펴보면 저 숫자가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5월 18일 EU는 ‘리파워 EU(REPowerEU)’ 계획을 발표한다. 연말 전까지 러시아산 가스 수요의 3분의 2를 줄이는 게 목표였다. 2027년까지 총 2100억 유로의 추가 투자가 예상되지만 러시아의 화석 연료에 계속 의존하면 연간 1000억 유로가 든다. 골자는 공급망 다변화와 에너지 절약이다.
  • 공급망 다변화 ; ‘EU 대외 에너지 전략(External Energy Strategy)’을 통해 에너지 수입처를 다변화한다. 신재생 에너지의 보급 역시 확대한다. 유럽 그린 딜 법안 ‘핏 포 55(Fit for 55)’에서 2030년까지 40퍼센트로 목표한 재생 에너지 비율을 45퍼센트로 상향하고 태양광 발전 용량을 두 배로 늘린다. 수소 에너지 역시 크게 확대한다.
  • 에너지 절약 ; 핏 포 55에서 규정한 에너지 효율 목표를 9퍼센트에서 13퍼센트로 확대한다. 각 가정과 산업에서도 캠페인을 통해 가스 및 석유 수요를 5퍼센트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REPowerUkraine ; 우크라이나를 위한 지원 방안도 포함됐다. 정작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낼 곳은 다름 아닌 우크라이나다. 《전쟁을 짊어진 사람들》의 공동 저자이자 번역가 정소은에 따르면 발전기를 구매해 우크라이나에 전달하려는 단체도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을 돕는 러시아인들의 재단 ‘Russians for Ukraine’다. 전 모스크바 시 여성 의원들이 영국, 폴란드 등지에서 도매 구입 후 발송한다고 한다.

EFFECT_ 2023

노력은 일부 결실을 보았다. 지난 8월 26일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 지표인 네덜란드 TTF 거래소 선물 가격은 메가와트시(MWh)당 340유로를 돌파하며 전년 1월 대비 26배로 뛰었지만 11월 중순에는 108유로로 떨어졌다. 유럽의 에너지 위기는 지나간 걸까? 그렇지 않다. 국제에너지기구(IEA·International Energy Agency)의 새로운 보고서는 EU가 2023년에 연간 소비량의 7퍼센트 규모인 270억 입방미터의 천연가스 부족에 놓일 것으로 봤다. 이유는 세 가지다.
  • 러시아가 2022년 한 해 동안 EU에 보낸 천연가스는 600억 입방미터인데 내년엔 이 공급을 완전히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
  • 올해 겨울은 그나마 따뜻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내년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 중국이 코로나19로 인한 봉쇄를 단계적으로 해제하며 천연가스 수요가 급등할 수 있다.

RISK 1_ 죽음의 전기료

보유량이 많다고 안심할 수 없다. 천연가스 가격은 예전 평균인 30유로의 3배가 넘는다. 전기료는 역시 전년도에 비해 4배 높은 수준이다. 절약이 중요한 이유다. 유럽은 바닥 난방을 하는 한국과 달리 대부분 전기나 가스를 이용해 공기를 덥히는 히터를 난방기기로 쓴다. 전기료 인상은 취약 계층 혹은 겨울철 심혈관 질환에 약한 노년층을 파고들게 된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는 현지시간 11월 26일 기사에서 다양한 예측 모델을 공개했다. 기사에 따르면 유럽의 전기 요금이 지금과 같이 상승한 채로 유지되고 올겨울이 예년과 같이 추울 경우 최소 14만 7000명의 추가 사망자가 나올 수 있다. 예년보다 혹독할 경우는 18만 5000명, 예년보다 포근할 시 7만 9000명의 추가 사망자가 나온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사망자를 총 6만 명으로 추산할 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추위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아질 수 있는 것이다.
RISK 2_ 영국, 둥켈플라우테

EU가 아닌 영국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44일만에 총리직에서 사임한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지난 9월 ‘미니 버짓(mini budget)’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했고 그 이후 통화와 채권, 주식 가격이 급락하며 금융 시장의 대혼란을 맞고 있다. 심각한 경제 위기 속, 따뜻할 것이라 예상됐던 이번 겨울에 한파가 들이닥쳤다. 영국 기상청은 현지시간 13일, 2010년 12월 이후 영국에서 가장 추운 날이 될 것이라며 일부 지역에 기상 경보를 발령했다. 비싼 난방비로 인해 빈곤층은 난방비 부담과 죽음의 선택지에 놓였다.
  • 비정부기구(NGO)인 ‘연료 빈곤 중단 연대(End Fuel Poverty Coalition)’는 춥고 축축한 집안 환경 때문에 매년 1만여 명의 초과 사망자가 발생한다고 밝혔다.
  • 아동 복지 기관인 ‘조셉론트리파운데이션(Joseph Rowntree Foundation)’은 250만 저소득 가구 중 5분의 1이 음식과 난방 없이 지내고 있다고 추산한다.
게다가 영국은 2020년 기준으로 재생 에너지가 전체 영국 전력의 42퍼센트를 차지하며 화석 연료 비중을 넘어선 나라다. 12월에 접어들어 춥고 흐리며 바람이 불지 않아 재생 에너지 생산이 불가능한 ‘둥켈플라우테(dunkelflaute)’ 상태가 지속되며 에너지 위기를 악화하고 있다. 영국은 결국 12월 초 30년 만에 신규 탄광 개발을 허가하며 환경 단체의 빈축을 샀다.
INSIGHT_ 어두운 크리스마스

완벽에 가까운 천연가스 비축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겨울은 춥고 어두울 전망이다. 매년 겨울을 수놓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올해도 어김없이 열렸지만 많은 아이스링크장은 롤러스케이트장으로 바뀌었고, 많은 상점이 일찍 문을 닫거나 조명을 몇 시간 더 일찍 끈다. 대표적으로 아이스링크가 유명한 프랑스 서부 도시 투르(Tours)가 그렇다. 투르의 에너지 및 환경 담당 부시장 마틴 코헨(Martin Cohen)은 《가디언》에 “크리스마스가 더 이상 눈, 얼음, 큰 크리스마스 트리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샹젤리제는 크리스마스 조명을 에너지 절약형인 LED로 바꾸고 전시 기간 역시 7주에서 6주로 단축하며 매일 2시간 일찍 소등하기로 결정했다. 거리는 더 어두워졌지만 파리의 주민들은 긍정적이다. 에너지 위기를 촉발한 것은 전쟁과 기후 위기이지만 그 두 가지가 위기가 된 원인을 생각해 볼 시점이다. 영국의 상황 역시 에너지 빈곤과 기후 정의가 배치되는 착시를 일으킨다. 해결해야 할 것은 에너지 과소비와 에너지 불평등일 수 있다.
FORESIGHT_ 청구서 앞에 사분오열
  • 청구서 ; EU는 주로 미국과 카타르 등에서 LNG를 사왔다. 미국은 엄청난 반사이익을 누렸는데 선박을 통한 한 번의 배송마다 2억 달러의 이익이 발생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는 미국의 배를 불리고 유럽을 더 가난하게 한다. 에너지 가격으로 국가 경제가 휘청일뿐 아니라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서민 경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블룸버그》는 유럽의 1조 달러짜리 에너지 청구서가 위기의 시작을 알린다고 보도했다. 위기는 지금부터다.
  • 사분오열 ; 푸틴의 목적 중 하나는 서방 세계의 분열이다. 유럽은 벌써 각개 전투에 들어갔다. 현지시간 11월 29일 독일은 카타르와 15년간 연 200만 톤의 LNG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2026년 발효다. 미국의 LNG 개발 및 수출 업체인 셈프라 인프라는 이미 독일의 에너지사인 RWEAG, 영국의 화학사 아이네오스, 폴란드의 국영 O&G 회사 PGNiG와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 가격상한제 ; EU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천연가스 가격 상한제 역시 진통을 앓고 있다. 네덜란드 TTF 선물 가격이 1메가와트시당 275유로가 넘은 채 2주간 지속하고 글로벌 가격과의 격차가 58유로를 초과한 채 10일 이상 지속 시 상한제를 발동하자는 제안이다. 각국의 입장 차로 상한제 논의가 지연되고 있는데 여기에 인터콘티넨털익스체인지(ICE)가 상한제 발동 시 천연가스 거래 허브를 유럽 외 지역으로 옮긴다고 제동을 걸며 통과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EU의 분열이 가속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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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방과 온수 사용료의 합산
[2]
전환 과정의 다리와 같은 연료를 의미한다. 재생 에너지는 친환경이지만 경제성이 부족하다. 화석 연료보다는 확실히 탄소 배출이 적은 액화 천연가스(LNG) 등이 브릿지 연료로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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