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팩트 투자, 투자의 미래
2화

프롤로그 2; 추의 궤도 중앙에 서다

1990년 경제학 석사를 마치고 삼성경제연구소에 입사했다. 20대 중반을 갓 넘은 나이에 지금이라면 입사 원서를 낼 용기도 없었을 것 같은 대기업 경제 연구소에 입사하면서 앞길이 창창하게 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직장에 휴직계를 냈다. 아내를 설득해 돌쟁이 첫째를 데리고 캐나다 토론토로 신학 공부 길에 올랐다. 신학을 공부한다고 신앙이 깊어지는 것이 아님을 2년 공부가 끝날 즈음에 깨닫고 돌아왔을 때가 1994년이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복직해 일을 시작했지만, 지루했다. 경제와 시장의 데이터만 쳐다보는 일에 답답함을 느꼈고 시장이라는 현장을 보고 싶었다. 마침 삼성생명의 주식 운용 본부에서 이코노미스트를 찾고 있다는 소식에 얼른 손을 들었다. IMF 금융 위기라 불리는 아시아 외환 위기 바로 1년 전이었다. 자본 시장 초년생인 나는 선배들도 겪어 보지 못한 금융 위기에 국가 부도 사태까지 겪으면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그리고 삼성생명이 자회사로 인수한 삼성자산운용으로 이직했다. 펀드 매니저로 일을 하다 글로벌 운용 본부로 옮겨 세계 시장에서 뛰었다.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졌다. 금융 위기가 해외 펀드 사업에 초래한 문제들을 수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10여 년 전에 겪었던 아시아 외환 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사악함과 인간 탐욕의 민낯을 마주하면서 금융 시장판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이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금융 위기의 태풍으로 해외 펀드 운용 자산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룹 차원에서 구조 조정의 여파가 밀려왔고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떠났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던 것은 그리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추악함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경제, 금융 분야에서만 20여 년을 일한 나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것 같았다. 선한 투자, 선한 자본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 옛날 신학을 공부하겠다며 회사를 떠났던 때처럼 고민이 깊어졌다. 답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포기하려던 때, 운명처럼 다른 길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사회 투자였다. 서울시 사회 투자 기금의 운영을 맡은 재단법인 한국사회투자에서 기금 융자 사업을 맡을 사무국장을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투자라는 방법으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사회 투자의 개념은 기존 자본 시장의 어두운 면에 회의감을 가진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투자하는 직업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투자사의 절반도 안 되는 연봉을 받아들이게 했다.

전혀 새로운 영역에서 전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 기업 등 그동안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사회적 경제와 그 주체들을 접했다. 그러나 사회 투자 기금 융자는 대부분 금리가 2퍼센트 수준에 불과했다. 중간 지원 조직을 경유해서 나갈 경우에는 4퍼센트까지 올라가지만 신청 기업들의 신용 수준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다시 말해 금리 산정 과정에서 비즈니스 리스크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환 가능성이 있고, 사회적 가치 창출이 뚜렷하다고 판단되는 기업이라면 일률적으로 금리를 적용하고 있었다.

사회 투자 기금 융자 사업에 신청을 해오는 사회적 경제 기업들 중에서 재무적으로 탄탄한 업체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원금 상환 능력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사회적 경제 기업 융자 사업을 통해 경쟁력 있는 시장 수익률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에 염증을 느껴 이 분야로 넘어오긴 했지만, 시장 수익률을 추구하기 어려운 임팩트 우선 사회 투자도 아쉬웠다. 임팩트를 만들어 내는 투자는 자본 시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인가? 수익과 임팩트를 양쪽 끝에 두고 그리는 추의 궤도, 그 중앙에는 진정 설 자리가 없는 걸까?

사회적 경제에 대한 더 깊은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재단을 떠나 성공회대의 협동조합 경영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경제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국내외 협동조합, 양적·질적 방법론 공부는 매우 흥미로웠다.

박사 2년 차를 앞둔 2017년 또 한 번의 운명을 만났다. 아크 투자 자문의 이철영 회장으로부터의 전화였다. 10여 년 전에 관여했던 가나난포럼에 사회 책임 투자 연사로 초청한 것이 인연이 되어 가끔 우연한 자리에서 만나면 서로 인사하고 안부를 묻던 분의 갑작스런 연락이었다. 아크 투자 자문이 임팩트 투자로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관심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관심은 있었지만 자본 시장에 소속된 전문 운용 회사가 그 치열한 시장에서 임팩트 투자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 회장은 글로벌 임팩트 투자 네트워크인 토닉(Toniic)의 콘퍼런스에 참여해 보고 다른 지역의 임팩트 투자자와 임팩트 자산 운용사들을 만나 보자고 제안했다. 가슴 뛰는 계획이었다. 그해 4월 우리는 임팩트 비전 트립을 통해, 임팩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양호한 투자 수익으로 연결되는 투자 기회가 세상 곳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이다. 사회적, 환경적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투자 수익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대단한 위안이었다. 마침내 수익률과 임팩트 사이를 오가는 추의 궤도 중앙에 설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시장 기능과 혁신이 개입되면 그 둘은 상쇄 관계(trade off)가 아니라 상승 관계(trade up)가 될 수 있음을 여러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상승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의 치열한 자본 시장에서 임팩트 투자로 출사표를 던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타락한 자본주의의 전령처럼 여겨지는 투자가 아니라, 책임 있는 자본주의로서의 투자를 말하고 싶었다. 시장으로 혁신과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전달된다면 좋겠다.

임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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