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하루
4화

망망대해를 누비는 항해사를 위한 하루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바다에는 방향이 없습니다. 어떠한 표식도 없는 무한한 바다에서, 옳은 방향을 선택해 목적지에 닿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한편으로, 지금 지구의 모습을 그려낸 대항해 시대의 탐험가들은 목적지의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바다를 헤맸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장애물을 만나기도, 아무도 몰랐던 목적지를 찾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발견과 목적 없는 부유가 일상화된 시대입니다. 아침부터 정보의 바다에서 선로를 개척해 나가고, 때로는 복잡하게 얽힌 하이퍼 링크의 탄탄한 그물 사이에서 점프를 이어나가기도 하죠.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귀찮게도, 방향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귀찮음이 챗GPT의 선풍적인 인기를 설명해 주기도 하죠.

그러나 때로는 챗GPT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가 아닌 ‘나를 둘러싼 세계와 관계’를 봐야 할 때입니다. 챗GPT는 이웃에게 보낼 따듯한 안부 인사의 대본을 적어줄 수는 있지만, 괴팍한 이웃의 성미를 맞추며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법을 알지는 못하거든요. 항해사가 바다에 가상의 길을 만들고 배 안의 못 하나까지를 살피는 것처럼, 일상적인 항해 시대에 놓인 사람들은 모두 세계와 관계 속에서 방향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입니다.
매일 맞이하는 새로운 국면에서 길과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북저널리즘의 콘텐츠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번 연휴 중 하루에는 막막함과 그 막막함을 헤쳐 나가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하루를 추천합니다. 복잡해 보이고, 불규칙해 보이는 바다에도 물길이 있는 것처럼 때로는 막막함 속에서 새로운 발견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아침 ; 익명의 공간, 망망대해


1. 라나 델 레이의 이상한 앨범
ⓒLana Del Rey
때때로 귀성길은 같은 풍경의 반복을 마주하게 합니다. 언제 내린지도 모르는 축축한 회색 눈을 밟는 버스, 얼룩진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지겹도록 똑같은 풍경은 지금 내가 지나는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게 하죠. 그래서 버스 속에서 만나는 길은 익명의 공간처럼 보입니다.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데, 이 곳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죠. 꼭 망망대해 같습니다.

미국의 유명 싱어송라이터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가 2021년 초봄에 발표한 앨범 〈Chemtrails over the Country Club〉은 그런 답답한 시공간을 연상시키는 앨범입니다. 모든 트랙 속 화자는 평범한 중산층 여성의 삶을 살지만, 풀밭에서 조지가 체포되던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가사를 한 줄 한 줄 음미하다 보면, 라나 델 레이가 분한 앨범 속 화자가 과거라는 액자 속에 갇힌 채 지금을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다채로운 나뭇잎의 색이 없는 겨울에는 특히 더 듣기 좋습니다. 나무의 이름으로도 공간을 정의하기 어려워지니 말입니다.

2. 올라퍼 엘리아슨의 사진 연작

2016년, 리움 미술관에서 열린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liasson)의 전시 ‘사라지는 시간의 형상’은 거대한 구조물과 새로운 시각적 실험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 눈에 담기지 않는 거대한 구조물 사이에는 다양한 사진 연작들이 놓였습니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사진 작업은 연결이라는 가상의 개념 안에서 불일치하는 틈을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해가 뜨고 지는 과정이 연결된 것처럼 표현돼 있지만, 실상은 그 안에 몇 시간이 흘렀는지, 며칠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죠. 그런데도 꼭 하루처럼 보이는 건 사진들이 나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스물 네 장의 사진으로 가상의 움직임을 만들 듯, 올라퍼 엘리아슨은 서른 장의 사진으로 가상의 일출과 일몰의 시간성을 만듭니다. 떨어져 있기에 만들어지는 연결, 이 역설이 없다면 새로운 사건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이 연작에서 떨어져 나온 사진 한 장은 아름다울 수는 있어도 연작과 같은 일출과 일몰이라는 사건, 그리고 그 사이에 있을지 모르는 무한한 시간은 못 만들 테니까요.

지금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업을 실제로 볼 수는 없지만, 작가들의 포트폴리오 홈페이지는 생각보다 유용합니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사진 작업들은 ‘공간을 인간처럼’ 만드는 그의 작업 철학의 기본 전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공간을 인간처럼 보는 건, 지금 세상이 마주한 여러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기도 하죠.
‘사라지는 시간의 형상’ 전시 사진

점심 ; 산책과 방황


3. 로베르트 발저와의 산책

잠이 올 듯 말 듯 한 오후에는 로베르트 발저의 단편 모음집 《산책자》를 읽어 보는 건 어떨까요? 로베르트 발저의 삶은 쓸쓸했습니다. 책을 읽고 있자면, 자기 자신과 세상이 겪는 쓸쓸함에 대한 끝없는 경계와 의심, 그럼에도 쓸쓸하게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고집이 묻어나옵니다. 발저의 작품은 걷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걸으면서 때로는 모르는 이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기도 하며, 자신이 가상의 화자가 되어 다른 이에게 자신의 생을 의탁하기도 하죠. 요컨대 발저의 글에는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발저는 자신의 자아를 텅 비우고, 산책하며 만난 수많은 것들을 그 안에 담습니다. 그릇이 되기 위한 산책에 가까워 보여요. 이런 모습의 산책은 항해하는 이의 마음가짐과 닮아있습니다. 역사 속 항해사들은 우연한 만남 속에서 발견을 마주쳤습니다. 우연이 없다면 그들의 항해는 산책보다는 경주에 가까웠을 테죠. 모두가 자기 자신에 골몰해 타인을 돌보지 못할 때, 발저의 자아에 대한 끝없는 의심은 낯설 정도로 고독합니다.

내 이름은 헬블링. 아무도 내 이야기를 글로 써주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여기서 내가 직접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인간들이 고도로 세련되어진 오늘날 한 사람이,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이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하는 것은 조금도 특별하지도 이상하지도 않다. 내 이야기라고 해봐야 간단하다. 나는 아직 젊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한참 더 남았으므로 내 이야기는 종결지을 수가 없을 테니까. 내게서 두드러지는 점이라고는 아주 심하게, 거의 과도할 정도로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 나는 무수한 인간들 중 하나이며, 바로 그 점을 나 스스로 기이하게 여긴다.” 
- 〈헬블링 이야기〉, 《산책자》 

4. 기묘한 관광, 웹 서핑

얕은 낮잠 후에는 활기찬 서핑도 가능할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추운 겨울, 바다에 들어가기 어렵다면, 하이퍼 링크 파도를 타고 웹 서핑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위키의 수많은 링크를 타고 움직이다 보면 전혀 몰랐던 사실에 당도하기도 합니다. 독일의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의 영화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는 미스터리한 사람인 카스파 하우저를 다룹니다. 영화를 보다가, 카스파 하우저를 검색했다가, 하이퍼 링크의 파도에 갇혀 기묘한 여정을 떠난 적도 있어요. 카스파 하우저의 링크를 타고 가다가 어느새 《성호사설》에 소개된 끔찍한 저주, 염매에 관한 정보를 읽게 되기도 했죠….

커뮤니티 사이트도 기묘한 관광의 시작점이 됩니다. ‘리미널 스페이스’의 사진을 모아 놓은 레딧의 한 게시판은 왜인지 모르게 불편한 사진들로 가득합니다. 리미널 스페이스는 직역하자면 ‘경계 공간’입니다. 복도, 대기실, 빈 방이 대표적입니다. 리미널 스페이스를 담은 사진들은 텅 비어있고, 멈춰있습니다. 불편한 감정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복도는 지나쳐야 하는 곳이지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고, 놀이동산은 사람으로 꽉 차있어야 하지, 비어있으면 안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죠. 레딧의 게시판을 보면, 살면서 모를 수 있었던 (혹은 몰라도 됐던) 공간들을 만나게 됩니다. 마이애미 비치 모텔의 복도를 언제 볼 수 있을까 싶은데, 리미널 스페이스 게시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웹 사이트 ‘영화 속 저글링(Juggling in Movies)’은 저글링 장면이 등장하는 444개의 영화를 리스트 업 해놓은 사이트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할까 싶지만, 또 이런 일들이 재미있기도 합니다. 영화 속 저글링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1907년에 발표된 영화 〈The Maniac Juggler〉를 추천합니다. 저글링을 멈출 수 없는 남자의 6분간의 여정을 그린 코미디 영화입니다. 저글러의 항해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저녁 ; 나를 위한 항해


5. 나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저녁에는 대항해시대, 선원들의 괴혈병을 막아줬던 상큼한 럼 칵테일을 마시며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럼을 구하기가 어렵다면, 소주에 모히토 향이 나는 주스를 섞어도 좋아요. 직접 만든 야매 칵테일은 맛이 있어도 맛있고, 맛이 없어도 맛있는 편이니까요. 술을 홀짝거리며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죠. 요즘은 알고리즘을 통해 나만을 위한 음악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세상이지만 또 가끔은 직접 음악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이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무작정 디스콕스를 켜고 둘러보기에서 마음에 드는 앨범 아트의 음악을 들어 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빠르게 넘기고, 마음에 든다면 나의 음악으로 저장해 보세요. 상황과 계절감을 생각하며 만드는 플레이리스트는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도, 내일을 시작하기에도 좋은 동력이 돼요. 제가 방금 발견한 앨범은 캘리포이니아의 사운드 디자이너, Xarxay의 하우스 음악이 모인 〈The Note of Admiration〉이었어요. 신이 나서 살짝 몸을 흔들어 보기도 했답니다.
ⓒXarxayTV
6. 나를 위한 움직임

자기 전에는 20분, 30분, 한 시간 중 나에게 허락된 시간을 선택해 보세요. 유튜브에 다양한 러닝타임의 요가 강습 영상이 있습니다. 시간만큼 난이도도 다양하니 오늘의 몸 상태에 맞춰 봐도 좋아요. 매트가 있다면 매트 위에서, 없다면 침대 위에서 하는 베드타임 요가를 추천해요. 요가에는 잘 하거나, 못하는 게 없다고 해요. 그저 나의 호흡을 느끼고 몸에 힘을 뺐을 때 내 몸이 반응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대요. 자기 전에 요가를 하면 다음 날 아침에도 자연스레 눈이 떠진답니다. 좋은 길과 명확한 방향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의 숨을 돌보고 살펴보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북저널리즘의 전자책 〈우리에겐 새로운 진화론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듯 논의되는 원칙에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며 시작합니다. 지금의 진화론은 최초의 눈, 최초의 날개, 최초의 태반을 설명하지 못하죠. 여덟 명의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현재 가진 도구들로 무언가를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이 질문은 새로운 항해의 시작이 될 수 있겠죠.

연휴는 목적을 위해 달려가는 정신없는 일상 속에 공백이라는 비일상이 침투한 시간입니다. 목적이 없는 건 새로운 시도의 길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내가 달려온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불안함을 주기도 해요. 지금의 지도에 크고 작은 대륙을 추가하거나, 새로운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항해한 모든 항해사가 그랬을 겁니다. 그래도 그 공백 안에서 정처 없이 헤매다가 발견하고, 만들고, 보듬는 하루는 귀중할 거예요. 잠시의 방황은 때로는 더 선명한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하니까요.
“달려라 달팽이!”…세상에서 가장 느린 경주대회 ⓒ연합뉴스TV

글 김혜림 에디터
해당 전자책은 전체 무료로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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