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없는 삶
1화

은퇴 후 ‘나’ 지키기

미디어에서 나오는 청춘 같은 노년만이 은퇴 후 바람직한 삶의 모습은 아니다. 현실에는 그보다 다양하고 일상적인 노년의 생활이 존재한다.

©Egor Myznik

 

1. 지도 없는 여행길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노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삶의 환경과 조우하는 일이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다가 퇴직한 후 갑자기 달라진 삶의 리듬과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평생 농사짓던 농촌 마을에서 오랜 이웃들과 함께 노년을 맞이하는 경우도 이제는 예전처럼 익숙하거나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젊은 세대와 그 자녀들은 대부분 농촌을 떠나고 주로 노년 세대만 남은 마을에서 60대가 청년회장을 맡는 풍경도, 내용을 알기 어려운 암호 같은 광고들이 휙휙 지나가는 텔레비전 속 풍경도 한 세대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조기 은퇴와 늘어난 평균 수명, 또 급변하는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특징지어지는 오늘의 세계에서 노년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 노년 세대는 본의 아니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지도도 없이 여행하면서 일상을 꾸려 나가야 하는 일종의 ‘문화적 전위’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1]

문화는 생애의 각 시기에 따라 우리가 어떠한 꿈을 추구하고 성취할 수 있는지에 관한 다양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가령 예순이 되니 귀에 거슬리는 말이 없고, 일흔이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는 공자의 얘기는 노년에 추구할 수 있는 삶의 지침에 관한 하나의 문화적 청사진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노년의 삶에 관한 문화의 지침이 급격히 사라진다. 문화가 노년의 삶에 관해 아무런 청사진도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년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은 매우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 평균 수명이 마흔을 겨우 넘기던 시대에 공자는 나이 일흔의 삶에 관한 청사진을 제시했는데, 기대 수명이 아흔을 향해 가며 퇴직 이후에도 몇십 년을 더 살아 내야 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고령화 시대에, 즉 노년에 추구할 수 있는 삶의 비전과 청사진의 제시가 어느 때보다 긴요해진 시대에 역설적으로 노년의 삶의 청사진은 소실되고 있다.

문화적 존재로서의 노년은 이러한 지도 없는 여행길과 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가령 퇴직 후 하루의 시간을 조직하던 토대가 사라진 현대 사회의 노년은 아무런 문화적 지침이 없는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루를 재조직하고 있을까? 또 은퇴와 함께 급격히 변화한 환경에 대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떠한 새로운 문화적 실천이나 문화가 등장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어떤 것일까? 그리고 노년 주체가 새로 구성하는 문화적 실천이 있다면 이를 곧 ‘노년 문화’로 간주하는 것은 적절한 일일까? 만일 현 노년 세대 내부의 다양성으로 인해 노년에 널리 공유하는 노년 문화라 할 만한 현상을 찾기 어렵다면, 현 한국 사회의 노년에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문화적 힘은 어떤 것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해 나가는 과정에서 학계와 미디어에서 공히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통용되는 ‘노년’과 ‘노년 문화’라는 개념적 범주의 문제점도 비판적으로 조망해 보려 한다.

 

2. 일상을 재구성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은퇴와 함께 출퇴근의 리듬을 토대로 구축했던 규칙적 시간 구조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일상생활 리듬의 상실과 이를 재구축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과제여서 실직의 경우에도 이는 커다란 심적 부담으로 다가오는데,[2] 은퇴 역시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연구한 미국의 한 은퇴촌 주민들은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간명하면서도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 준다. 주민들은 이전에는 저녁이나 주말의 여가 시간에 하던 활동 중 자원봉사나 클럽 활동, 다양한 모임 참가, 마당 가꾸기, 운동, 장보기 등 상대적으로 활동적이거나 사회적인 일을 예전에 일이 차지하던 시간인 평일 낮 시간으로 재배치한다. 그 결과 비는 평일 저녁이나 주말의 시간은 텔레비전 시청, 책이나 신문 보기, 서류 정리 등과 같은 상대적으로 정적이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로 채워진다. 이 마을 주민들은 이렇게 다양한 활동들을 활동적/정적 활동인지, 또 같이/혼자 하는 활동인지에 따라 구분하고 은퇴 이전의 시간 구조에 재배치하는 창의적 방식으로 익숙했던 생활 리듬을 복원한다.[3]

이 새로운 일상의 재구조화 방식은 특정 행위들의 의미에 변화를 불러온다. 다양한 종류의 취미 활동이나 사회적 모임 등 예전에는 여가 활동의 일부로 덜 규칙적으로 참가하던 활동들을 낮 시간에 재배치한 이후에는 참여도 더 잦아지고 규칙적인 활동이 되면서 ‘일’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그 참여가 매우 규칙적이어서 다양한 취미 클럽의 경우 회원들은 누가 어느 요일 몇 시쯤 클럽에 오는지, 또 지금 자리를 비운 어떤 회원이 언제쯤 다시 돌아올 것인지 등 서로의 일상적 루틴에 관해 대부분 잘 알고 있다.

이 마을의 사례는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이 이러한 새로운 일상의 구조를 충실히 따른다는 점에서는 특수하지만, 일상의 재구조화 방식 자체는 한국 사회를 비롯해 은퇴가 일반화된 사회들에서 널리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꽤 보편적이다. 한국 사회의 경우 식사나 음주를 곁들인 사회적 모임을 저녁 시간에 갖는 남성들의 문화적 관성이 은퇴 후에도 얼마간 이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등 자세히 보면 문화에 따라 이런저런 차이가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은퇴 이전 여가 활동 중의 일부가 ‘일거리’의 성격을 띠며 낮 시간대에 재배치되는 경향성 자체는 매우 널리 확산한 현상으로 보인다.

이렇게 시간과 활동 구조를 재배치해 ‘일거리’를 다시 확보한다는 것은 노년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생애의 각 국면마다 상대적으로 큰 비중으로 떠오르는 사안들이 있는데 노년의 경우는 자아 정체감 유지가 그중 하나다.[4] 자신이 예전과 동일한 존재라는 느낌이 지속되려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자신의 자아상을 현재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의 계기들, 즉 다양한 형태의 이른바 ‘자아의 거울들’이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정체성 위기란 자아의 거울들이 현저히 감소하는 단절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노년에 들며 자아감 유지가 쉽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즉, 산업화·정보화가 진행된 사회의 노년에는 은퇴로 인한 직업으로부터의 단절, 증대된 사회적 이동성에서 비롯되는 오래된 친구나 친지 혹은 고향으로부터의 단절, 젊은 세대와의 문화적 단절 등등 수많은 불연속의 계기들이 존재한다. 그 결과 전통 사회의 안정된 역할 구조 속에서는 비교적 자연스러웠던 노년의 자아 정체감 유지가 현대 사회에서는 쉽게 주어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일종의 과업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5]

이러한 맥락에서 예전의 일과 같은 의미를 띠게 된 활동들은 노년학에서 종종 거론되는 노년의 역할 상실이 정체성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을 완화시킨다. 즉, 낮 시간대에 재배치되어 일의 성격을 띠게 된 활동들은 시간의 완력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 사회적이고 활동적인 존재로서의 노년의 자아 정체감 유지에 이바지하는 독특한 자아의 거울이다. 시간을 관통해 기억 속에 있는 은퇴 이전의 사회적이고 활동적인 나를 현재에 불러내 다시 구현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이런 활동들은 나이 듦을 곧 쇠퇴, 상실과 동일시하는 현대 사회의 지배적 노년 담론에 맞서 ‘여전한 나’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활동에서 드러나는 높은 참여도나 규칙성은 새로운 일상의 재배치 구조가 자아의 거울로서 지니는 가치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3. 노년의 세계


또 이렇듯 익숙한 생활 리듬을 재구축하는 것 이외에 오늘날 노년의 삶에서 이제까지는 없던 문화적 실천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을까? 그 특성은 무엇일까? 근래에 두드러지는 경향 중 하나는 한때 소외되고 어려운 처지의 노년 모습에 집중하던 미디어가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 ‘젊은 노년’의 모습이다. ‘노인 모델’이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몸을 관리하는 노년들,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는 70대의 ‘철인 할머니’와 ‘철인 할아버지’들, 미인 경연 대회, 춤 경연 대회에 참여하는 노년 여성들을 포함해 열정적 노년의 모습들이 우리 시대 노년의 새로운 청사진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처럼 젊음을 끝없이 연장하는 ‘청춘 같은 노년’의 문화적 각본을 ‘노년 문화’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이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노년들이 같이 구축해 나가는 노년의 문화라기보다는 특출한 건강, 재력, 시간적 여유 등을 두루 갖춘 극히 소수의 노년들이 개별적으로 추구하고 미디어가 제시하고 있는 ‘특권적’ 성격의 문화적 각본이다.

노년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좀 더 주목하게 되는 현상은 노년들 사이에 은퇴 이전의 사회적 위상이 지닌 중요성이 줄어들며 평등주의적 문화와 에토스가 자리를 잡는 경향성이다. 가령 앞서 소개한 미국의 은퇴촌을 포함해 수많은 서구의 노년 공동체에서는 과거의 직업에 관해 물어보거나 또는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사를 대화의 소재로 삼는 것과 같이 평등주의 문화의 에토스를 위협할 수 있는 이야기는 대부분 암묵적인 금기다. 그래도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얘기가 하고 싶으면 따돌림을 각오해야 한다. 반면 과거 이야기라도 사람들 간에 사회적 위상 차이가 존재하기 이전인 어린 시절의 이야기나, 혹은 사회적 위상의 차이가 잠정적으로 유보되는 군대 시절 이야기는 평등주의적 에토스를 위협하지 않으므로 흔쾌한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가 된다.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노년의 평등주의 문화가 대두하고 있으나, 노년층에서 평등주의적 에토스의 확산은 아직 계층 혹은 일종의 ‘현대적 신분주의’의 벽에 가로막혀 제한적이다. 가령 은퇴 이전의 화려한 경력과 재력을 지닌 노년, 특히 노년 남성들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의 동년배와 흔쾌히 섞이려 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자리를 같이하고, 말을 섞고, 쉽게 어울리는 노년들은 거의 중·하위 계층이다. 그런 만큼 하위 계층의 노년 남성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평등주의 문화가 상당히 확산했다. 예를 들어 서울 구도심에 있는 종묘 공원을 자주 찾는 노년 남성들의 경우 잘 모르는 상대방의 학력에 관한 질문은 삼가는 것을 불문율로 지킨다. 또 노인 복지관처럼 노년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에서도 자신의 과거 이력을 과시하려는 행동은 백안시나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하지만 종묘 공원이나 노인 복지관 같은 노년들의 공간에서도 우리 사회의 노년 평등주의는 아직 개개인의 한국적인 ‘신분적 배경’으로부터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다. 가령 노인 복지관의 경우 각 개인의 과거 사회적 위상 차이가 현재 사람들 간의 위상 차이를 정당화하는 자원으로 쓰이는 경우도 흔히 보인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대두되는 노년의 평등주의적 문화 실천은 미디어가 주목하는 다분히 공상적인 ‘젊은 노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노년의 의미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문화적 토양이다. 나이가 들어 가며 죽음이 가까워지면 외부적 성취보다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료의 존재가 더 중요해지는 등 종종 자신의 삶, 주변, 세상을 바라보는 조망점이 변화하거나 새로운 조망점을 얻기도 한다. 결국 노년에는 성공, 중년 늘이기, 물질적 성취 등 지배 문화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그 의미도 점차 작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등주의적 노년 문화는 중년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하던 신분을 향한 속물적 인정 투쟁과 문화적 강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문화적 토양이며 인문학적 사유가 자랄 수 있는 여백이기도 하다.
[1]
정진웅,  《노년의 문화인류학》, 한울, 2012.
[2]
Marie Jahoda, 《Employment and Unemploym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3]
물론 이러한 새로운 일상의 구조는 엄격히 준수해야 하는 규칙이 아닌 만큼 예외의 경우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렇게 재구조화된 시간 구조에 맞추어 생활하는 것이 일상화돼 있다. 보통 낮 시간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한 마을 광장이 오후 5시를 지나며 급격히 한산해져 대략 30분 이내로 광장 주변에는 차도 사람도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는 것이 이러한 시간 재구조화가 얼마나 널리 일반화돼 있는지를 보여 준다.
[4]
Barbara Myerhoff, 《Number Our Days》, Touchstone, 1978, p. 108.
Gelya Frank, 〈Life Histories in Gerontology: The Subjective Side to Aging〉, 《New Methods for Old Age Research: Anthropological Alternatives》, Center for the Study of Urban Policy, Loyola University, 1980, pp. 162-163.
[5]
Anthony P. Cohen, 《Self onsciousness: An Alternative Anthropology of Identity》, Routledge, 1994, p.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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