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할 결심

1월 25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기업은 이제껏 자사 제품의 수리를 어렵게 만들어 왔다. 수리권 전쟁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 존 디어와 애플, 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이 소비자의 자가 수리권을 인정하고 있다.
  • 기업은 그간 계획적 노후화로 제품에 수명을 불어넣었던 역사가 있다.
  • 수리할 권리는 완벽한 내돈 내산에 대한 요구이자 순환 경제의 핵심이다.

KEYPLAYER 1_ 존 디어
John Deere Unveils a New Autonomous Workforce at CES 2023 ⓒInteresting Engineering
세계 1위 중장비 농기계 브랜드 존 디어(John Deere)를 보유한 ‘디어앤코’는 현지시간 1월 8일 소비자들이 자사 제품을 조건부로 자가 수리할 수 있게 하는 양해 각서(MOU)를 미국농민연맹(AFBF)과 체결했다. 외신이 이 뉴스를 특히 주목한 이유는 존 디어가 중장비 농기계 세계 점유율 32퍼센트인 1위 기업이어서도, CES 2023에서 완전 자율 주행 트랙터를 선보인 ‘농기계의 테슬라’여서도 아니다.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의 대약진을 의미하는 사건이기에 그렇다.
DEFINITION_ 수리할 권리

수리할 권리는 소비자가 자신이 구매한 제품에 대해 수리 주체와 방식을 정할 수 있는 권리다. 넓게는 제조사가 애초에 제품을 만들 때 소비자의 자가 수리가 용이하고 내구성이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포괄한다. 지난 2022년 12월 28일에는 미국 최초로 관련 법안도 제정됐다. 뉴욕 주지사 캐시 호클이 전자 기기에 대한 수리권을 보장하는 디지털 공정 수리법(Digital Fair Repair Act)[1]에 최종 서명하면서다. 오는 7월 1일부터 시행된다. 그런데 법안 이름에 왜 ‘디지털’이 붙었을까? 수리할 권리의 주요 대상이 전자 기기의 소프트웨어기 때문이다.
CONFLICT_ 트랙터 해방 전쟁

자가 수리를 둘러싼 존 디어와 농부들의 이른바 ‘트랙터 해방 전쟁(Liberate the Tracktors)’은 수리권 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존 디어는 오래전부터 자사 제품의 수리를 제한해 왔다. 트랙터 차량 소프트웨어 고도화와 함께 차대번호(VIN·vehicle identification number) 잠금 기술을 적용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공인 기술자만 특수 코드를 통해 차량 내부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리를 위해선 동네 수리 센터나 기술자가 아닌 공식 수리점이나 딜러를 찾아야만 했다. 당시 존 디어는 차내 프로그램에 대한 접근이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의 보호 대상이라는 논리를 폈다. 2016년 10월에는 라이선스 계약을 갱신하며 구매자들에게 기계에 대한 수리·개조를 금지하는 내용에 동의케 했다.
STRATEGY_ 탈옥

존 디어에 대한 농부들의 전략은 투 트랙으로 이뤄졌다. 수리권 운동과 해킹이다. 화이트 해커들의 농락은 덤이다.
  • 수리권 운동 ; 농부들은 DMCA 개정을 외쳤다. 이에 미국 저작권청은 2015년 예외 조항을 승인했다. 트랙터를 포함한 각종 차량의 소유자가 차량의 기능 진단, 수리, 합법적 개조가 필요할 때 차내 제어를 담당하는 소프트웨어 수정을 허용한다는 게 골자다. 예외 조항의 범위가 좁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 해킹 ; 농부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진단 프로그램, 페이로드 파일, 전자 데이터 링크 드라이버가 포함된 채 해킹된 불법 복제 소프트웨어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농업 강국인 우크라이나나 폴란드 등에서 주로 제작됐는데 2017년을 전후로 미국에 많이 팔려나갔다. 탈옥한 소프트웨어를 장착하면 수천 달러의 수리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 농락 ; 2022년 8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해킹·보안 콘퍼런스 ‘데프콘(DEF CON)’에서는 촌극도 벌어졌다. 화이트 해커 그룹 식코드(Sick Codes)가 존 디어 소프트웨어를 디코드하고 고전 게임 둠(DOOM)을 설치해 플레이하는 과정을 공개한 것이다.
DEF CON 30 - Sick Codes - Hacking the Farm ⓒDEFCONConference

RECIPE_ 계획적 노후화

자사 제품의 수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기업의 고질적 전략이다. 이른바 ‘계획적 노후화(planned obsolescence)’[2]다. 이는 제품의 품질 등을 일부러 떨어지게 만드는 ‘고안된 내구성(Contrived durability)’과 구매자의 자가 수리를 막는 ‘수리 방지(Prevention of repairs)’의 방식으로 이뤄진다. 소비자가 새 제품을 사게 하는 게 핵심이다. 이는 기업의 경영 전략[3]으로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음모론 용어로도 쓰인다. 사회 비평가이자 저술가 밴스 패커드(Vance Packard)는 1960년의 저서 《The Waste Makers(쓰레기 생산자들)》에서 상품의 양을 삶의 질로, 성장을 진보로 착각한 소비주의적 유토피아[4]를 비판하며 세 가지 유형의 노후화를 소개한다.
  • 기능(function)의 노후화 ; 새 제품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향상해 이전 세대 제품을 열등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스마트폰이나 차량 등을 떠올리면 쉽다.
  • 품질(quality)의 노후화 ; 일정 기간 사용하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해 새 제품을 구입하게 하는 방식이다. 수리 방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 매력(desirability)의 노후화 ; 새 유행을 계속 만들어 내고 주도해 이전 제품의 매력도를 떨어뜨리는 방식이다.

BACKGROUND_ 전구의 음모
The Light Bulb Conspiracy [Extended Version] ⓒRecondite
영화 〈전구 음모 이론(The Light Bulb Conspiracy)〉은 1920년대부터 이어진 계획적 노후화의 음모를 파헤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현대 과학이 어떻게 제품 내부에 수명을 심었는지를 차례로 추적해 각광받았다. 1924년 국제 전구 제조 업체 그룹인 피버스 카르텔(Phoebus Cartel)[5]은 전구의 수명을 이전 표준보다 상당히 짧은 약 1000시간으로 제한하자는 데 합의한다. 음모의 시작이다. 또 하나의 상징적 사례는 제너럴 모터스(GM)다. 1927년 GM의 CEO였던 알프레드 슬론(Alfred Sloan)은 자동차 시장이 포화해 판매가 둔화하자 업계 최초로 디자인 스튜디오를 공개한다. 자사 차에 대한 기대를 높이며 경쟁사 포드(Ford)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매력의 노후화 방식이다. 그는 이를 “역동적 노후화(dymamic obsolescence)”[6]불렀다. 시장 경제를 촉진한다는 뜻에서다. 이는 부동산 사업에도 이식됐다. 부동산 중개인 버나드 런던(Bernard London)은 1932년에 대공황 극복을 위해 부동산 소비를 촉진하는 노후화 전략을 학회지에 기고하기도 했다.[7] #계획적노후화의역사
REFERENCE_ 블랙박스

계획적 노후화 문제는 기술 발전과 함께 심화했다. 과거엔 심리전이었다면 지금은 공학 대전이다. 지금의 스마트폰 기판은 전구의 필라멘트도, 라디오의 회로 기판도, 차 보닛 안의 엔진룸도 아니다. 전자 기기는 어느덧 구매자가 작동 체계를 이해할 수 없는 블랙박스가 됐다. 기기 안의 소프트웨어를 의미하는 펌웨어가 보편화하며 업데이트나 오류 개선도 원격으로 이뤄진다. 기업의 수리 시장 독점이 쉬워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논쟁이 발생한다.
  • 보안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점령지에 위치한 존 디어의 한 대리점은 62억 원 상당의 트랙터를 도난당했다. 해당 대리점은 도난 트랙터를 원격 조종해 모두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러시아 군인이 체첸으로 빼돌린 27대의 트랙터 역시 존 디어가 ‘킬 스위치(Kill switch)’로 작동을 멈췄다. 이는 제품의 기술 유지 및 관리의 주체가 기업일 때 제품 보안에 유리하다는 뜻도, 반대로 기업이 해킹을 당하면 엄청난 후폭풍이 있다는 뜻도 된다. 아이폰으로 치환하면 쉽다. 앱스토어를 통해 별도 apk를 설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보안이냐 독점이냐의 문제와 같다.
  • 소유권 ; 내돈내산이다. 구매자의 소유권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이냐의 문제도 있다. 부품이나 펌웨어에 접근하는 것이 기업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것인지 아닌지의 논쟁이다. 존 디어가 트랙터의 펌웨어 접근을 제한하며 내세운 논리가 타당하냐는 것이다.

KEYPLAYER 2_ iFixit
2023 CES Worst in Show Awards! ⓒiFixit
수리권 운동은 이같은 포괄적 논의와 함께 커졌다. 이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단체는 미국의 수리 협회(The Repair Association)와 아이픽스잇(iFixit)이다. 수리 협회는 1500만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다. 아이픽스잇은 각종 기기의 수리 매뉴얼을 공개하고 있다. 두 단체와 미국 소비자 공익연구 단체인 US PIRG, 미국 소비자 전문지인 컨슈머리포트 등은 매년 CES에서 최악의 제품을 선정하는 ‘워스트 인 쇼 어워드(Worst in show awards)’를 벌이기도 한다. 소비자 선택권에 악영향을 주거나 환경을 해칠 수 있는 제품, 품질이 나쁜 제품, 목적을 알 수 없는 제품 등을 선정한다.
EFFECT 1_ 수리, 법

세계는 수리권 법제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1년 7월 미국 공정거래위원회(FTC)의 권고로 기업이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를 제한하지 못하게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뉴욕처럼 다른 주들도 수리권 관련 주법 입법을 논의 중이다. 콜로라도도 작년 수리권 법을 통과시켰지만 전동 휠체어 수리에만 적용되는 한계가 있다. 뉴욕의 법안 역시 오는 7월 1일 이후 생산된 제품에만 법이 적용되는 한계가 있다. 가장 진보적인 건 유럽연합(EU)이다. 2022년 3월 EU 집행위원회는 2009년 발표된 ‘에코디자인 지침’을 개정하는 새 규정을 발표해 제품 설계 단계부터 수리 가능성, 내구성, 재활용성 등을 고려하게 했다. 프랑스는 2021년 1월부터 ‘수리 가능성 지수’ 표기를 의무화했다. 이 지표는 분해 용이성, 부품 공급, 매뉴얼 제공 등의 다섯 가지 지표로 이뤄진다. 이에 더해 5년 이내 전자 제품 수리율을 60퍼센트 달성하고 2024년까지 제품 수명 측정을 위한 내구성 지수를 통합적으로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한국에서는 지난 대선에서 당시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선 공약으로 등장했다.
EFFECT 2_ 순환 경제

수리할 권리는 완벽한 ‘내돈 내산’에 대한 요구이자 순환 경제의 핵심이다. 미국 공익 연구단체 US PIRG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매년 스마트폰 100억 개가 생산되고, 5억 9000만 톤의 전자 제품이 버려진다. UN이 발간한 〈2020 세계 전자 폐기물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에만 전 세계적으로 5360만 톤의 폐기물이 발생했지만 제대로 수집되고 재활용된 폐기물은 17.4퍼센트에 불과하다. 2019년 기준으로 5년 새 21퍼센트 급증한 수치다. 아이폰 12의 탄소 배출량의 83퍼센트가 공정 단계에서 발생하는데 유럽환경국(European Environmental Bureau)에 따르면 유럽 내 모든 스마트폰의 수명을 1년 연장하면 2030년까지 매년 210만 톤의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
INSIGHT_ 센테니얼 라이트

전구를 향한 피버스 카르텔의 음모는 전구에서 시작했다. 이와 반대로 120년이 넘게 켜져 있는 전구가 있다. 캘리포니아주 리버모어의 센테니얼 라이트(Centennial Light)다. 1901년 불이 켜진 이후 2013년 전원 장치를 이유로 단 한 번 꺼진 것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켜진 채로 유지되고 있다. 숱하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기업들은 이제껏 성장 일변도 전략을 취해왔지만 기후 위기와 저성장은 소비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제 오래 살아남는 기업이 강한 시대다. 좋고, 오래 쓸 수 있으며, 고쳐 쓸 수 있는 제품이 사랑받는다.
  • 기업의 노력 ; 60년간 백열전구만 만들어 온 일광전구의 권순만 디자인 팀장은 인터뷰집 《일광전구: 빛을 만들다》에서 리브랜딩의 콘셉트가 ‘롱 라이프 브랜드’였다고 회고한다. 이들의 사명은 “We Make Light”다. 제품이 아닌 제품이 주는 가치에 집중할 때 소비자의 진정한 선택권이 보장된다.
  • 소비자의 노력 ; 한편 《리페어 컬쳐》의 저자 볼프강 헤클(Wolfgang Heckl)은 그의 저서에서 수리권 운동을 지지하면서도 이를 비단 기업의 책임으로만 그리지 않고 소비자가 직접 제품을 수리·수선하려는 의지를 강조한다. 순환 경제의 1차 책임은 제조 단계의 기업에 있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건 소비자의 두 손이다.

FORESIGHT_ 자율 규제

바이든의 행정 명령 이후 애플은 자가 수리 키트를 도입했고 자가 수리를 지원하는 공식 웹사이트를 오픈했다. 삼성전자도 자사 전자 제품에 대한 자가 수리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존 디어도 백기를 들었다. 이 전쟁은 끝난 걸까? 수리권 논쟁은 자율 규제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기업들의 이러한 반응은 법제화를 방지하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 존 디어와 AFBF와의 MOU에는 미국 전역의 농부와 사설 기술자가 소프트웨어·진단 도구·교육 등에 접근할 수 있게 지원하고 구매자가 자가·사설 수리를 진행한 이후에도 자사 소프트웨어 구매를 막지 않는 등 차별 행위를 금지하겠다는 내용이 주로 보도된다. 그러나 존 디어는 2018년 당시 캘리포니아 농장국과 유사한 MOU를 맺었을 때도 실행까지 4년을 끌어온 바 있다. 게다가 MOU에는 “AFBF가 연방·주의 수리권 법안을 도입, 홍보 또는 지원하지 않도록 동의한다”는 문구와 동시에 연방·주에서 자가수리권 법안이 발효되면 두 단체의 계약이 철회된단 문구도 담겼다. 제품의 수명은 아직 기업이 쥐고 있다. 눈치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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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Y State Senate Bill S4104A.
[2]
구식화, 진부화라는 말로도 쓰인다.
[3]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1928년에 미국 광고 전문가인 저스터스 조지 프레드릭은 “사람들은 소비자 경제를 계속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도록 끊임없이 증가하는 다양한 물건을 구매한 다음 버리고 새로운 물건을 구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그는 이 소비주의적 유토피아를 ‘Cornucopia City(풍요의 뿔 도시)’라는 가상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동차가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4000마일 이상을 주행하면 녹기 시작하고, 공장 대부분이 소비자 반응에 따라 바로 즉각 폐기될 수 있다는 식으로 풍자한다.
[5]
오스람, 필립스, 제너럴 일렉트릭의 카르텔이다. 1924년 결성해 1939년까지 존재했다.
[6]
혹은 ‘점진적(progressive) 노후화’라 부르기도 한다.
[7]
Bernard London, 〈Ending the Depression through Planned Obsolescence〉, 《Revue du MAUSS》, 44(2), 2014, pp. 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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